[고전소설]
추녀에서 미녀로 변신한 여인의 복수극 '박씨부인전'
▲ (왼쪽부터)이귀, 이시백, 임경업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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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고전소설 속 영웅은 모두 비범한 능력을 가진 남성뿐이다. 여성은 심청이나 춘향처럼 열녀, 효녀, 현모양처로 그려진다.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여성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큰 인기를 끈 소설은 '박씨부인전'이 최초였다. 소설은 조선 숙종 때 창작된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확한 시기와 작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줄거리를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인조 때 재상 이귀는 금강산에 사는 비범한 능력의 박 처사 딸을 자기의 아들인 이시백과 혼인시킨다. 이시백은 그러나 아내를 처음 보고 까무러칠 뻔했다. 신부는 얼굴 전체가 마마 자국으로 덮였고 왕방울만 한 눈, 나발같이 큰 입에 코는 이끼 낀 돌멩이 같았다. 8척 장신인 데다 팔은 늘어지고 한쪽 다리까지 절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용모였다. 이시백은 아버지의 불호령에 마지못해 신방에 거동하지만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밤을 꼬박 새운다. 그리고 새벽 닭이 우는 것과 동시에 황급히 방을 뛰쳐나왔다. 어느 날 박 처사가 찾아와 딸의 허물을 벗기니 박씨 부인은 놀랄 만큼 미녀가 됐다. 액운이 비켜가도록 딸을 추한 모습으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이제 처지가 뒤바뀌었다. 박씨가 서릿발처럼 매섭게 남편을 대하자 이시백은 예쁜 아내를 두고 상사병이 날 지경이었다. 남편이 울며 빌자 박씨부인은 그제서야 '수신제가하고 공부에 전념하소서'라고 당부하면서 마음을 푼다."
아내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남편의 초라한 모습을 상상하면서 억압과 차별을 받았던 여성들이 얼마나 통쾌해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소설의 후반은 병자호란이 배경이다.
"청나라는 여자 자객을 보내 장차 조선을 침략하는 데 걸림돌이 될 이시백과 조선 최고의 명장 임경업을 죽이려고 했지만 박씨 부인이 이를 알아채고 그녀를 붙잡아 '청이 조선에 쳐들어오면 화가 미칠 것'을 경고한다. 청나라 군사는 임경업이 방비하는 백마산성을 지나쳐 곧장 한양으로 내려왔다. 청나라 군사는 박씨 부인과 여인들이 피신해 있던 피화당을 습격하지만 그녀의 신통술에 걸려 무수한 병사만 잃은 채 왕자들만 데리고 서둘러 도망갔다. 조정은 박씨부인을 충렬 부인으로 봉했다."
1636년 병자년에 청나라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급습했으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가 46일 만에 항복하고 청 태종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했다.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을 비롯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그중 대부분은 여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속환된 여인들에게 조선의 남성들은 '환향녀'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무능한 남자들로 인해 고통받아야 했던 조선 여인들. 박씨부인전의 후반부는 오랑캐를 무릎 꿇린 박씨 부인의 통쾌한 활약을 통해 현실에서 이룰 수 없었던 그녀들의 염원을 담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주인공들이 실재 존재했던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박씨 부인의 시아버지인 이귀(1557~1633년)는 김류(1571~1648년)와 함께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최고 핵심 인물이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47세인 1603년(선조36)에야 비로소 문과에 합격했다. 서인 학통을 배경으로 서인 강경파의 입장에서 동인, 북인과 반목한다. 광해군 즉위 후 북인정권이 세워지면서 유배길에 오른다. 그는 아들인 시백과 시방, 양아들인 시담까지 모두 반정에 참여시켜 광해군 폐위에 모든 것을 건다. 그는 주도면밀했다. 모의 과정에서 역모가 탄로났지만 상궁을 매수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겼다. 훈련대장 이흥립을 반정 세력의 편으로 돌아서게 만들면서 확실한 승기를 잡는다. 반정세력이 이흥립을 설득하자 "이귀도 함께 하느냐" 하고 물었다고 연려실기술이 기록할 만큼 그는 치밀했다. 이귀는 호위대장,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우참찬, 대사헌, 좌찬성 등을 역임했다. 이귀가 죽자 "인조가 머리를 풀고 슬피 우는 소리가 외정에까지 들렸다"고 그의 비문에 새겨져 있다.
이귀의 장남 이시백은 과거를 치르지 않았다. 42세 때 아버지를 따라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정사 2등 공신에 책봉되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가 돼 반란군을 격파했다. 정묘호란 때 병마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해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수어사로서 인조를 맞이해 성을 수비했다. 두 번의 난에서 조선은 모두 패배했지만 그는 난국을 수습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1649년 인조가 불러 술을 대접하고 세자에게 "내가 이 사람을 팔다리처럼 하니 너도 그렇게 하라"고 일렀다. 그해 5월 효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좌참찬이 되고 1650년(효종 1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시백은 79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했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들 부자의 초상화가 '세트'로 남아 있다. 아버지 이귀는 김제군수 시절 부안의 명기 매창(1573~1610년)의 연인이었다고 허균의 문집에 기록돼 있지만 초상화 속 용모는 '쥐의 상'을 떠올리게 하는 추남형이다. 게다가 얼굴색도 거무튀튀하다.
반면 그의 아들 이시백은 마마 자국이 일부 보일 뿐 피부가 여자처럼 희고 이목구비가 수려해 요즘으로 치면 꽃미남에 가깝다. 추녀 중 추녀인 박씨 부인을 그렇게 끔찍하게 싫어할 만하다. 전체적으로 얼굴 윤곽도 이 둘이 과연 부자지간인가 싶을 정도로 달라 의아스럽다. 사실 박씨 부인 부분은 허구다. 이시백의 첫 번째 부인은 윤진의 딸 남원 윤씨이며, 두 번째 부인은 진사 황첨의 딸 창원 황씨다. 이 소설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임경업의 초상화도 전해온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인상은 체념한 듯하면서도 눈빛이 살아 있는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는 명청 교체의 국제적 격변 속에서 대명의리의 이념을 실천하다가 비참하게 옥사했다. 그의 생은 후대 '임경업전'이라는 소설로도 재구성돼 널리 전파되면서 깊은 애도와 공분을 불러왔다.
[배한철 문화부 기자],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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