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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風景)ㆍ17
<인사동 풍경>
날씨가 영하로 내려가고, 겨울바람이 분다. 몇 낱 붙어있던 황갈색 잎새도 거리에 이리저리 흩날린다. 마음도 황량하다. 올 해는 따스한 가을이 길어 압록강, 지리산, 청송 주왕산 등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 간의 피로가 겹쳐, 지난주 태안반도의 해변가 송림숲을 일주하는 여행도 포기했다.
대신, 오후 몸을 추서려 모처럼 인사동에 들렸다. 최근 많은 변모가 있었다. 우선 인사동 대로(大路)가 배나 넓어졌다. 한 일년전만 해도 좁은 도로에 차가 다녀 불편하였는데, 이젠 차량 통행금지구역으로 되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구경할 수 있어 한결 여유가 생겼다.
종전의 좁은 도로를 확장하면서, 도로변의 단층 구식 가옥과 상가가 헐리고 대신 2~3층의 아담한 고풍스런 집들이 들어섰다. 몇년전만 해도 괜찮은 고서적(古書籍)책방과 화랑(畵廊)들이 즐비했으나, 싸구려 악세사리등 상가가 성행하면서 하나 둘 경복궁 부근의 북촌 한옥마을쪽으로 밀려나서 한편으로 씁쓸했다.
그러나 최근 새로 단장을 한이후, 수준굽 화랑들이 모습을 드러내서 흐뭇했다. 그러나 고서적은 하나둘 상가에 자리를 내어 주고 이젠 인사동 끝자락에 <통문관(通文官)>만이 버티고 있다.
서울 인사동 거리에 터잡은 고(古)서적 전문 서점 통문관(通文館). 국내 최고령 서점인 이 곳은 올 해로 일흔 다섯살이다. ‘TV쇼 진품명품’에나 등장할 법한 고서
2만 5000여권이 열두평 남짓한 공간을 가득 메웠다. 가장 안쪽의 벽에서는 운보 김기창화백의 매화도(梅花圖)가 고색창연(古色蒼然) 하게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현재 통문관은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창업주의 손자 이종운씨가 운영 중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은 3대(代) 주인장이다. 해방 이후 국학자료의 보급기지 역할을 했던 인사동의 고서점 통문관의 창업자이자 고서적 수집가 산기(山氣) 이겸로옹은 2006년 10월 98세로 타계하셨다. 10여 년 주말오후 그 책방에 들리면, 간혹 머리가 하얗게 쉰 노인이 안경을 쓰시고 책을 보고 계셔는데, 그 어른이 바로 이겸로옹이었다.
<월인석보> <월인천강지곡> <독립신문> 등 국보·보물급 고서와 고문서를 발굴했으며 <청구영언> 등 국문헌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래서 통문관은 국어학자 이희승선생, 미술사학자 김원룡선생,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최순우선생 등 국학의 원로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던 곳이었다고 한다.
2000년 8·15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에는 월북 국어학자 류렬 박사가 남한을 방문했을 때 통문관에서 출간한 류 교수의 <농가월령가> 책 두 권의 밀린 원고료라며 50만원을 건네기 위해 상봉장을 찾은 일화를 남겼고, 저서로는 <통문관 책방비화(冊房秘話)> <문방사우(文房四友)>가 있다.
통문관 바로 옆에는 <영창서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곳의 단골이었다. 주로 중국과 일본서적이 많았다. 60대중반의 책방 주인은 재담(才談)이 풍부하여, 한번 들리면 보통 한두시간 책비화(秘話)가 이어졌다. 언제가, 경북 칠곡에서 조상대대로 전해오는 한적(漢籍)을 팔려고 하는데, 좀 내려올 수있느냐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책방주인은 어디에 책이 있다면, 혹시 다른 작자가 먼저 가로채갈까 싶어 자기손에 넣기전까지는 잠도 못자고 끙끙거리게 된다고 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내려 가겠다고 연락을 하고 친척과 친구를 동원하여 돈을 최대한 마련했단다. 오랜 경험상 현장에 내려 가서, 실탄이 없으면 말짱 <꽝>이 되기 때문이란다. 돈을 구해 밤차를 차고 현지에 가니, 대궐같은 먹기와집이 나타났단다.
책주인이 차(茶)를 내왔지만, 안달이 나서 차를 먹은둥 마는둥하고 곧바로 책이 있다는 별채로 갔다고 한다. 과연 별채에는 입이 딱벌어질 정도의 한적(漢籍)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단다. 그 때부터 주인장과 지루한 흥정을 한 결과, 한적(漢籍) 7천 여권을 당시로는 엄청난 거금인 1억원을 주고 사왔다고 한다.
지금 그 책은 책방주인장 혼자만 아는 비밀 장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나도 그 책이 과연 어떤 내용인지 호기심이 발동하여, 슬쩍 그 비밀장소에 한번 가보고 떠보았지만 주인장은 딴청을 부렸다.
지금 집에는 영창서적에서 구입한 1천 페이지가 넘는 일서(日書)로 된 <이백평전(李白評傳)> <중국문학사> <중국ㆍ일본 불교사> 등 많은 책들이 나의 애장서(愛藏書)로 남아있다.
Ⅱ
<사촌누이>
인사동 거리를 거닐다가 보니, 종전에 없었던 자그마한 화랑안에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보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평 남짓한 화랑안엔 한 점의 조각과 대여섯 점의 수준급 작품이 걸려 있었다.
그 중에 감나무밑에 색동 저고리를 입고 무언가 차분하게 생각에 잠겨있는 소녀의 모습이 탄성을 지르게 했다. 화랑아가씨에게 누구 작품인가 물었드니, 박항률선생님의 작품이라고 했다. 가격을 물으니 2천 5백만원(50호) 정도란다. 한 번쯤 욕심이 생기는 작품이었지만, 입맛만 다시고 나왔다.
교보서점에 들려, 화가에 대해 알아 보니 놀랍게도 내 고향인 김천출신이었다. 195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서, 197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82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세종대 회화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시집으로
<비공간의 삶> <그리울때 너를 그린다>가 있다.
화가의 글을 보니, 색동저고리 곱게 차려입은 소녀 그림은 죽은 사촌누이가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 틈만 나면 만화를 베끼고 공부를 안하니까 아버지가 경상도 시골 친척집에 1년간 귀양을 보냈어요. 그 곳에서 문학소녀였던 사촌누이와 친하게 지냈죠. 몇 년 후 병약했던 누이가 세상을 떠났지만 저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라고.
「그때 그 시절/ 죽음을 초연(超然)한 사촌 누이의/ 티 없이 맑은 눈동자는/곱사등 너머로 영민한 광채를 띄우고 척박하기만 했던/ 나의 마음 밭에 단비를/ 내려주곤 했다//어쩌면 내 그림 속에/빈번히 등장하는/까까머리 소년의 모습은/아직도 내 마음속을/차가운 정적으로/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눈망울에 비친/내 자신의 모습일는지 모른다.」(박항률의 시 ‘사촌누이’)
아버지의 ‘극약처방’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미대를 진학한 화가는 졸업후 추상화를 그리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인물에 몰두했다. 고운 여성의 모습, 배경의 새와 꽃, 나무, 물고기 등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그의 작품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집무실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대사관 등에 걸려 있을 정도로 인기란다.
그리고 박화가의 그림을 유독 아낀 이들 중엔 고(故) 법정 스님도 있다. 2000년이후 화가의 개인전을 한 번도 빠짐없이 찾았으며, 화가에게 ‘진공(眞空)’이라는 법명(法名)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고마운 마음에 스님께 까까머리 소년을 그려 드리니, 스님의 반응이 의외였다. “또 까까머리야? 우리가 만날 머리 깎고 다니는데. 난 소녀가 더 좋아.” 그렇게 선물한 소녀 그림엔 ‘봉순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법정 스님 오두막에 걸렸다고 한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인물들은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이다.그리고 무언가 알고 있으나 입을 열고 있지 않는 듯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이 인물들에게는 체념, 무관심, 마음 깊은 곳에 세상에 대한 열정은 있으면서도,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화가의 고뇌와 같은 회한(悔恨)이 나타나 있다.
구도자(求道者)를 연상시키는 얼굴들과, 슬픔과 분노를 외면한 듯한 침묵의 표정은 화면의 구도와 완벽하게 어우러져 신비감마저 감돌고 있으며, 화면 전체에서 느껴오는 인물의 투명한 모습은 물질 문명에 찌들은 영혼의 갈증(渴症)을 풀어준다.
Ⅲ
인사동에서 화랑이라면, 단연 선(選)화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화랑 김창실 대표. 미술 1번지 인사동을 33년째 지키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의 산증인이다.
1977년도 개관 후 김흥수 김형근 권옥연 유희영 하종현등 국내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선화랑을 통해 화단에 들어섰다. 이 화랑에서 전시를 하면 스타작가가 되어 화제가 되었다. 1935년 황해 황주에서 태어난 김여사는 1962∼1968년 부산에서 성안약국을 운영하다가, 1977년 선화랑을 개관하며 미술계에 투신했다.
일본에서 유학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서양미술을 접했던 그녀는 약국을 운영하면서 번 돈으로 그림을 모으기 시작해 화랑주로 변신했다. 인사동에 화랑이 몇 개 없던 시절 개관한 선화랑은 1970∼1980년대 진화랑, 미화랑과 함께 ‘진·선·미’화랑으로 불리며 미술계를 풍미했다.
그 동안 선화랑을 거쳐간 작가만 해도 300여명, 국내외 400여회 기획전을 열고 작가지원과 발굴에 앞장섰다. 화랑가보다는 ‘전통의 거리’로 변한 인사동에서 꿋꿋히 한국 현대 미술기획전을 펼치며 품격을 지키고 있는 선화랑은 중견·원로작가들에겐 고향같은 버팀목 역할을 해오고 있다.
1960년대 약국을 운영하다 도상봉의 유명한 유화 ‘라일락꽃’ 한점을 구입하면서 빠진 ‘그림 사랑’은 김여사를 열정적인 갤러리스트로 이끌었다고 한다. 90년대, 후반 ‘200인 작가 1호전, 200조각가 소형 작품전’ 등 연이은 전시기획으로 문턱 높은 전시장의 이미지를 깼다.
<도상봉의 '누드화'>
그동안 화랑을 운영하면서 한국화랑협회 회장을 두번이나 지냈고, 미술잡지 선미술도 13년간 발행했다. 선미술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편집장을 지냈고 한동안 미술계의 여론을 이끌던 전문지였다. 김여사는 미술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10월 화랑주로는 처음으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김창실여사는 향년 76세로, 2011년 6월 18일 별세했다.
다음으로 가 볼만한 화랑은 경인(耕仁)미술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시작품은 선화랑에 비해 떨어지지만, 서울한복판에서 100여평의 넓은 대지에 두채의 기와집을 개조하여 미술관과 전통찻집을 겸하고 있다.
미술관을 들어서면, 볼륨이 풍성(豊盛)한 여자 나체(裸體)조각이 앉아있고, 마당에는 대나무숲ㆍ감나무 한 그루 그리고 둥치가 굵은 무화과나무가 서 있다. 요즘 가면 헐벗은 감나무에는 빨간 감이 주렁 주렁 달려 있고, 무화과나무는 노란 무화과 열매를 달고 한 폭의 정물화처럼 서 있다.
인사동을 구경하고 몸이 나른할 때, 경인미술관에 들려 사랑하는 사람과 차(茶)를 들며 정담(情談)이라도 나누는 그 순간만은 그래도 삶이 쓸쓸하지만은 아니하리라. 경인미술관에 들리면, 언제나 산골 고향에 온 듯 또는 가을걷이를 끝내고 친정나들이 온 듯 가슴이 따뜻했다. 경인미술관은 거대한 서울이란 도심속의 청정(淸淨)한 숲이었다.
또한 인사동은 천상병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운영하는 ‘귀천(歸天)’이 있고,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사가(私家)였던 운현궁(雲峴宮) 등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의 문화의 섬(島)이며, 생명의 공간이라 여겨진다.
< 귀천(歸天) >
- 천 상 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천상병(1930년-1993) 시인은 일본에서 태어나 1945년 귀국, 마산에 정착.
1949년 김춘수 시인이 주선,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
서울대 상대를 수료하고 1964년 김현옥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재직. 동백
림사건에 연루되어 1967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음. 1972년 목순옥여사와 결혼하여, 1993년 ‘귀천’ 했음.
서울에 인사동과 청계천(淸溪川)이 없어다면, 거대한 빌딩의 숲만 존재하는 서울은 숨이 막힐 정도로 삭막하고 황량했으리라. 아마도 한국에 관광 온 외국인들도 인사동을 둘러보고, 그래도 한국은 돈(錢)만 추구하는 천박(淺薄)한 나라가 아니라 아직까지 인간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란 것 알고 가리라.
밤이 깊어 간다. 겨울바람이 가로수의 잎새를 흔든다. 따스한 국물이 그리운 시절이다. 옛 추억이 생각나서, 집사람과 함께 길건너 청진동(피마골)에 있는 ‘원조 청진옥’에 들렸다. 현재 그 일대가 재개발중이었지만, 그 맛집은 그대로 있었다.
반찬이래야 김치와 무깍뚜기 한 접시지만, 곱창과 선지가 가득한 해장국에 막걸리를 한잔하고 나니 세상에 부러울게 없었다. 밤이 차다. 가을의 끝자락도 이제 저만치 달려 가고, 마음도 움추려드는 삭풍(朔風) 몰아치는 긴긴 동면(冬眠)의 겨울이 오리라.
붉은 산도화(山桃花) 피는
봄은 언제쯤 오려나
동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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