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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道旅情 / 태백선(太白線)과 정선선(旌善線)
황원갑 <소설가 / 역사연구가>
<다음은 필자가 한국일보 기자로 있던 1985년에 취재하여 스포츠레저지에 발표한 기사 일부이다.>
우리 국토의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은 함경남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이루는 황룡산(黃龍山, 1268m)에서 시작하여 남녘으로 내려 달리며 금강산(金剛山, 1638m), 국사봉(國士峰, 1385m), 향로봉(香爐峰, 1293m), 설악산(雪嶽山, 1708m), 오대산(五臺山, 1563m), 황병산(黃炳山, 1407m), 석병산(石屛山, 1054m), 두타산(頭陀山, 1353m), 가리왕산(加里旺山, 1561m), 함백산(咸白山, 1573m)과 태백산(太白山, 1549m) 같은 이름난 산들로 연봉을 이루면서 경상북도 쪽으로 내려뻗고 있다.
태백선(太白線)은 영서와 영동을 가르며 솟구쳐 있는 평균해발 800m의 이 백두대간 - 태백산맥을 잇는 산업전철이다.
제천에서 고한까지 83.1km가 1974년 6월 20일, 고한에서 백산까지 24.3km가 1975년 12월 15일에 개통됐다. 또 태백선의 분기선으로 증산역에서 구절리역까지 45.9km를 들어간 정선선(旌善線)도 구절양장으로 굽이돌고 휘감아돌아간 심산유곡의 철도 노선이다.
천주교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성지 제천을 뒤로 하고 태백선은 고산준령으로 머리를 튼다.
산마루며 물굽이마다 가련한 소년왕 단종(端宗)의 한이 서린 영월 땅을 지나고, 아리리 아라리요 구성진 가락이 애절한 여운을 길게 끄는 정선에도 잠시 발길을 멈춘다.
능선을 넘나드는 바람이 분다. 석탄가루가 날린다. 탄전(炭田)의 그 어둡고 깊은 지하갱도를 누비며 오늘도 서민들이 삶과 사랑과 이별과 죽음의 애환을 올올이 엮어가고 있다. 함백, 나전, 사북, 고한, 태백의 골짜기 골짜기마다에서.
얼룩진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 위에 침목을 깔고, 철로를 박아 달리는 것이 결코 어제를 위한 여정(旅程)은 아니다. 새 희망처럼 아름답고 자유처럼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저 동해의 찬란한 해돋이를
맞이하기 위함이다.
제천(堤川)
제천은 예부터 토질이 척박하고 산물이 적어 사람들의 기질이 강하다는 소리를 들어온 곳인데, ‘속곳바람으로 십리를 달려도 끄떡없다’는 투지가 원동력이 되었음인지 지금은 청주, 충주에 이어 충청북도 제3의 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청량리 기점 154.9km, 경주 기점 227.5km 지점에 위치한 제천역은 중앙선 전철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충북선 복선이 서쪽으로, 태백선이 동쪽으로 뻗어가는 철도교통의 요지이다. 제천역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9월 1일 원주-제천 개통 때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태백선 철로가 제천에서부터 뻗어가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 직전인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4월 8일 제천-영월 34.4km 건설공사가 착수되어 11월 5일 송학까지 9.8km가 완공됐으나 6.25가 터지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공사가 다시 이어진 것은 1952년 10월 15일. 함백까지 57km 건설공사가 재개되어 1953년 9월 1일 송학에서 쌍룡까지 7.9km가 개통되었다. 1956년 1월 17일에는 영월까지 34.4km가 개통되어 이듬해 4월 20일부터 영차가 운행되었다.
1971년 1월 4일 착공한 전철화공사는 1973년 7월 1일 청량리-제천 간 중앙선이, 1974년 6월 20일 제천-철암 간 태백선이, 1975년 12월 15일 철암-북평 간 영동선이 각각 완공됨으로써 3대 산업선 전철은 대역사를 마무리지었다.
제천은 의병의 고장이요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이다. 1895년 의병총대장 유인석(柳麟錫) 장군이 창의(倡義) 궐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의 깃발을 드높이 휘날린 곳이며, 그 뒤로도 정운경(鄭雲慶), 원용팔(元容八), 이강년(李康秊), 안승우(安承禹), 홍사구(洪思九) 등 수많은 의병장을 배출했다.
제천 봉양 구학리 배론 마을은 이름난 천주교 성지이다. 1849년 김대건(金大建) 신부에 이은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베른 장 주교가 두 명의 프랑스인 신부와 함께 정착하여 이 땅에 처음으로 신학교를 세웠다.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유명한 황사영이 은거하여 1만 3천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백서를 지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한국 천주교사에 빛나는 그들은 모진 박해를 받다가 형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지만 지금 그 자리에는 1972년 천주교원주교구에서 세운 순교기념비가 신학당 터에 남아 진정한 신앙심이 무엇인지 전해주고 있다.
영월(寧越)
열차가 제천을 떠나 송학-입석리-쌍룡-연당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강을 끼고 영월로 들어가자면 청령포신호장 못 미쳐서 터널 하나를 통과하게 된다. 바로 육봉산 밑을 뚫고 기찻길을 이은 것인데 이 육봉산은 비운의 소년왕 단종(端宗)이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과 한숨을 짓던 청령포(淸冷浦) 바로 뒷산이다.
청령포는 시퍼런 강물이 굽이져 흐르며 삼면을 감싸 돌아 반도의 형상을 이루고, 뒤는 깎아 세운 듯 험악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창살 없는 천연의 감옥이다.
두견새 구슬피 우는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강물은 오늘도 지난 세월과 마찬가지로 유유히 흘러오고 흘러간다. 저 강의 이름이 서강(西江)이다. 서강은 오대산 서쪽 산기슭의 물줄기가 평창 사천강이 되고, 다시 흘러 주천강과 합류하여 청령포 앞을 감돌아, 정선 조양강이 흘러내려온 동강(東江)과 합수머리에서 합쳐져 남한강 상류를 이루며 충북 단양으로, 충주호로 흘러내린다.
강 건너 선암동에서 방절리 쪽으로 강 따라 실날같이 가느다란 한 줄기 길이 아슴프레 먼 옛날처럼 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길이다. 1456년 6월 28일. 광나루를 건넌 지 7일 만인 이날 관리 3명과 군졸 50여 명의 호송을 받은 단종이 여주, 원주, 신림, 주천을 거쳐 저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 지난해 같은 날 왕위를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뺏긴 단종은 그해 사육신(死六臣)의 거사 실패로 인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감봉됨과 동시에 청령포로 유배되어 지는 해를 등지며 피로한 심신을 이끌고 저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영월군 북면 문곡삼거리 옥녀봉에서 강을 따라 500m쯤 내려오면 왼쪽에 천인단애로 치솟은 기암절벽이 병풍을 둘러친 듯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선돌, 또는 선암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절벽에 올라서면 그때 단종 일행이 청령포를 향해 걸어가던 바로 그 길이 마치 한 가닥 실오리를 늘어놓은 듯 까마득히 내려다보인다.
그렇게 하여 16세의 어린 단종은 청령포에 갇혀 한 맺힌 귀양살이를 시작했는데, 무섭도록 외로운 섬 안에서의 하루하루는 피눈물로 얼룩진 공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단종을 청령포로 귀양 보낸 것은 영월부사를 지낸 변절자 신숙주(申叔舟)의 건의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육봉산 터널, 청령포를 뒤로 빠져나가면 바로 철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영월읍 하송리를 지나 동강철교를 건너게 된다. 강 건너가 덕포리. 열차는 곧 영월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1955년 12월 31일에 한식으로 지어져 준공된 영월역은 이듬해 1월 17일부터 영월선 운행과 함께 영업을 시작했다.
청령포에 갇혀 있던 단종은 그해 늦여름 어느 날 갑자기 쏟아진 큰 비로 영월읍내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짧지만 한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된다. 이듬해인 1457년(세조 3년)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종복위운동에 노한 세조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10월 24일에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가지고 관풍헌에 당도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공명심에 눈이 뒤집힌 복득이란 종복이 뒤에서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졸라 참혹하게 숨을 끊어버렸다. 단종의 시신은 버려진 채 아무도 수습하지 않았다. 그러자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 고을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시신을 거두어 동을지산에 모시니 오늘의 장릉(莊陵)이다.
영월역에서 다리 건너 읍내로 들어가며 맞은편 영흥리 금장강 가 동쪽 언덕에 단종의 시녀 여섯 명이 투신자살한 낙화암이 있다. 그들은 살해당하거나 능욕당할 위험이 없었음에도 단종을 따라 순절했다.
단종의 묘인 장릉은 영월 읍내에서 서북쪽으로 3,km, 떨어진 동을지산에 있다. 사적 196호. 영월에서는 지난 1967년부터 비명에 간 단종의 혼령을 위로하는 단종제를 해마다 청명 날 전야제부터 사흘간 벌이고 있다.
청령포 맞은편 방절리 강 언덕에는 왕방연의 시조비가 서 있다.
-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에놋다. -
<1년 만에 영월을 다시 찾았다. 광전에 가서 기자발물관을 연 옛 직장동료 고명진 씨도 만나고 뱃말 터줏대감 우홍명 씨도 만났다. 그날 밤은 광전 디리밑에서 몇 시간 낚시를 하다가 등마루펜션에서 묵었다. 영월은 늘 가보고 머물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다.>
박영국(朴泳國) 옹
향토사를 찾아다니고 지키기에 40여 년이 흘러 나이는 예순아홉에 이르렀지만 그의 열성은 식을 줄 모른다. 그런 저력을 생활의 원동력으로 삼기 때문인지 작은 체구가 노쇠해보이지 않고 집념의 덩어리처럼 단단해 보이기만 한다.
박영국 옹은 영월의 터줏대감이요 살아 움직이는 향토사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단종의 유적과 전설이 서린 곳치고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단종에 관한 한 박사를 지나 도사라 할 만하다.
“서울도 가보고 산수경개 좋은 곳도 많이 다녀봤지만 영월만큼 여운 있고 애착 가는 곳이 없어요. 단순히 풍광이 빼어났기 때문은 아니에요. 단종이 귀양살이하다가 비참하게 죽어 묻힌 곳이 아닙니까? 곳곳에 단종의 피어리고 눈물겨운 자취가 남아 있는 고장이요 충신열사들의 비분강개하는 숨결이 아직도 들리는 정한(情恨)이 서려 있는 땅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지난 1983년 3월에 6.25 직후부터 영월 읍내는 물론 가깝고 먼 산촌들을 찾아다니며 수집한 사료를 정리하여 <영월을 찾아서>란 책을 엮어내기도 했다. 그의 집념과 노력으로 시간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거나 왜곡된 향토사가 되살아나고 바로잡힌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왕방연의 시조 문제가 좋은 예이다. 흔히 ‘고운 님 여의옵고’는 왕방연이 단종의 귀양길을 호송한 금부도사로서 지은 것처럼 알고 있었지만 박 옹의 집요하고 철저한 추적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즉 왕방연은 단종이 귀양 올 때 따라온 금부도사가 아니라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천만리 머나먼 길’은 서울과 영월 간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 사이라는 사실이다. ‘여의옵고’도 이별이 아닌 사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박 옹의 일생에서 가장 뜻 깊은 일은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서민의 시인, 방랑시인 김삿갓의 묘를 영월군 하동면 와석1리 노루목에서 찾아낸 일이다. 또 춘향이보다 정절이 매서웠던 의기(義妓) 경춘(瓊春)의 묘를 금강정에서 낙화암 가는 벼랑 뒤에서 찾아낸 일 등이다.
향토사가 있으므로 국사가 있는 법이니 사라져가는 고장의 역사와 전통을 보존 계승하려는 박 옹 같은 이야말로 정녕 귀중한 존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 국사교육의 줄기를 이룬 것은 왕조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참된 역사는 집권자나 어용 사하가자의 손으로 왜곡되어 퇴색한 역사가 아니라 압제 속에서도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온 서민대중의 역사인 것이다.
<박 옹은 이 기사를 쓴 지 10년 뒤인 1994년에 세상을 떠났다. 박 옹은 1974년부터 김삿갓의 발자취를 추적하기 시작하여 1982년 10월에 마침내 영월군 하동면 와석1리 노루목에서 김삿갓의 묘와 어둔리 선락골의 집터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세상을 뜰 때까지 사재까지 털어가며 김삿갓 유적지 보존운동을 벌이고, 곳곳에 묻혀 있는 김삿갓의 미공개 시와 일화를 발굴해내는 데에 심혈을 쏟았다.
필자의 선친과도 교분이 깊던 박 옹은 필자가 김삿갓의 일대기를 쓰려고 영월 등지를 답사 취재할 때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필자가 박 옹과 함께 처음으로 김삿갓 묘와 집터를 답사한 것은 한국일보사 기자였던 1984년 여름이었다. 그때 이미 오래 전에 폐가가 되어버린 김삿갓의 집터에서 그의 어머니와 부인과 며느리 등 여인 3대가 눈물과 한숨을 섞어 곡식을 빻았을 디딜방아를 발견하여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새롭다. 또 그날 영월군청에서 지프를 빌려 김삿갓 유적을 찾아가는데, 너무나 산길이 험악해 머리에 혹이 여러 개 생겼던 것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그때 길 같지도 않던 7km의 진입로가 매끈한 아스팔트 포장길로 변했고, 행정구역은 하동면에서 김삿갓면으로, 골짜기 이름도 와석리계곡에서 김삿갓계곡으로 바뀌었으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는 느낌이다.>
정선(旌善)
-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싸이지 / 잠시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정선을 찾아가려면 성마령, 벽파령 높은 재를 넘고 나룻배로 깊은 강 험한 여울을 건너야만 했다. 오죽 교통이 불편했으면 이런 정선아라리도 다 생겼을까.
- 아질아질 성마령아 야속하다 관음벼루 / 지옥같은 정선읍내 십년 간들 어이 가리. -
성마령, 관음벼루는 평창에서 정선으로 들어가는 재로 옛날 정선의 관문이다. 이런 구절양장 심심산중에도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들어 철도가 놓이고 가마대신 철마가 힘차게 달리니 벽해상전이 정녕 옛말만은 아니다.
증산에서 별어곡, 선평을 지나 정선까지 22.6km의 정선선이 놓인 것은 1967년 1월 20일. 1962년에 착공한 지 5년 만이었다. 이어서 1969년 10월 15일엔 나전까지 9.9km가, 1971년 5월 21일에는 여량까지 9.1km가, 1974년 12월 20일에는 구절리까지 8km가 개통되었으니 정선선은 완공까지 12년이 걸린 철도사상 최대의 난공사였다.
원래가 무연탄 수송을 위해 놓인 산업철도지만 지금은 정선의 이름난 곳들을 찾아오는 사람들 거의가 이용하는 관광열차 구실도 한다.
‘정선읍내 백오십 호야 다 잠들어라. 임 호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던 정선읍내는 이제 인구 3만 가구, 14만여 명을 거느린 군청소재지가 됐지만, ‘비봉(飛鳳)이 죽실(竹實)을 물고 조양(朝陽)에 운다’던 빼어난 산천경개는 예나 이제는 변함없어 뒤에 버티고 우뚝 선 비봉산이며 읍내를 초승달처럼 휘감고 돌아가는 조양강의 절경은 변함이 없다.
유영란(劉英蘭)
검은 머리 쌍갈래로 땋고 앳된 얼굴에 수줍음을 감추며 노래 부르던 17세 처녀가 1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이가 둘이나 되는 아줌마로 변했다. 당시는 흑백 텔레비전 뿐이었지만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스타로 등장한 것이 강원도 두메산골 정선 출신의 어리고 순하기만 한 촌색시에겐 꿈같은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2학년짜리 여고생.
정선의 이웃 고을인 평창군 평창읍 하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정선으로 이사해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정선아라리의 애틋한 가락에 심취되어 최봉출(崔鳳出, 66) 선생으로부터 노래를 배운 것도 이때였다. 두 달쯤 배웠을 때 정선군에서 주최한 민요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하고, 이어서 그해 1970년 10월 전남 광주에서 열린 제114회 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해 민요부문에서 입상했다.
그것을 계기로 소녀티를 채 벗지도 못한 이름 없던 시골처녀는 한때나마 언론매체의 각광을 받고 수많은 사람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고 레코드 취입도 했다.
그리고 강원도지방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라리 엮음아라리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정선군청과 정선농협에 3년쯤 다니다가 국민학교 선생님을 만나 혼인을 하고 주부가 되었다.
지금은 보편적으로 정선아리랑이라 부르지만 본래부터 전해오기는 정선아라리였다. 아라리란 ‘누가 내 심정, 내 뜻을 알아주리오?’ 라는 뜻이라고 한다. 강원도에는 7개 시군에 19종 272연의 아리랑이 전해오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유래가 분명한 것은 고려 말에 기원을 둔 정선아라리뿐이다.
-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든다 / 명사십리가 아니라면 해당화는 왜 피며 / 모춘삼월이 아니라면 두견새는 왜 우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
이 노래가 바로 정선아라리의 시원을 이루는데, 고려조가 망하자 전오륜(全五倫) 등 7명의 망국 유신이 정선으로 들어와 지금의 서운산 거칠현동에 숨어 살며 망국의 한을 아라리 가락에 실어 탄식하며 살았다고 한다.
정선아라리의 특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래의 가락에 맞춰 지어 부른 가사가 많다는 점이며, 다른 지방 아리랑에 비해 곡조가 더욱 구성지고 애틋하며 구슬프다. 또한 내용이 성애와 풍류, 이별과 상사, 인생무상, 자립과 애국심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정선아라리의 구성진 가락 밑바탕에는 시대의 아픔과 삶의 쓰라림을 뛰어넘어 잡초같이 이어가는 서민대중의 끈질긴 생명력이 흐른다. 감추어진 것은 벗겨보고 싶고, 억누르는 것은 튕겨보고 싶은, 정신의 해방을 갈망하는 민중의 원(怨)과 한(恨)과 바람(望)이 진하게 깔려 있는 것이다.
<정선아라리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정선에 답사여행을 다녀왔다. 지난 6월 9일 정선군청을 거쳐 여량에 가서 유영란 씨를 만났다. 30년 만이었다. 32세 만났을 때 네 살이던 그녀의 딸이 이젠 네 살짜리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유영란 씨는 62세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둘이 옛날을 한참이나 회고했다. 오작교 건너 아우라지 처녀상도 보고 여송정도 오르고 그 곁에 재현한 주막집에서 막걸리와 감자전도 나누어 먹었다. 30년 전 마흔 살이던 나는 칩십 고개에 올라섰다. 지나간 세월이 바람같고 물결같고 꿈결같다.>
구절리(九切里)
정선역에서 10km쯤 더 들어가면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대부분인 정선에서 보기 드물게 제법 널찍하게 펼쳐진 벌판이 나오는데 나전, 여량이다. ‘정선은 나전(羅田)에서 나는 쌀을 먹고도 남아서 여량(餘糧)에 비축했다’는 지명의 유래가 있다.
나전광업소 사무소 뒷길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한골이란 경치 좋은 계곡이 나오는데 여기에 묘하게 생긴 약수가 있다. 마치 사람이 송곳으로 구멍을 낸 듯 둥그렇게 뚫린 구멍으로 분수처럼 약수가 솟아나온다. 나전엔 또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그대로 조각해놓은 듯한 괴상하게 생긴 바위가 길가 밭 뒤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드러누워 있는데 더욱 웃기는 것은 그 바위 옆에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의 바위가 은근히 붙어 있는 것이다. 조가비바위와 거북바위하고 불리는 이 바위는 사람들이 망칙하다고 흙이나 돌멩이로 구멍을 메워버리면 마을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는 그럴싸한 전설이 서려 있다.
여량은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는 정선아라리의 바로 그 현장인 아우라지가 있는 곳이다. 아우라지란 두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순 우리말 지명이다.
정선선의 종착역이 구절리역이다.
오후 5시. 좁은 계곡을 끼고 길게 가로누운 플랫폼은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썰렁했다. 대합실엔 이 황량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하연 모자에 하얀 옷차림의 아가씨 하나가 외롭게 앉아 있었다. 이 막장(幕場)에서 돌아나가는 길은 밤 8시 30분 열차밖엔 없었다. 그녀는 여기 사람도 아니었다. 구절리에도 정선에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종착역이라서 그저 한 번 와보았다면서 그녀는 살짝 뺨을 붉히고 눈길을 내려 깔았다. 주말도 아닌데 이 외진 곳까지 찾아온 청초한 그녀의 철도 여정(旅情)은 무슨 까닭일까.
<정선선은 이제 여량역으로 끝나고 여량에서 구절리역까지는 관광용 레일바이크가 놓였다. 80년대에 들어 이곳 탄광들이 문을 닫아 더는 산업선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우라지를 관광지로 만들고 구절리까지 레일바이크를 만든 것이다. 국토의 상전벽해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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