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과 탈옥
사도행전 12장 1-17절
베스트셀러 책으로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란 책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성공한 한 사람이 하와이로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합니다. 꿈꾸는 만큼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은 꿈꾸는 데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을 읽고 긍정의 힘을 얻을 수 있었지만, 상상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야고보와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하심을 볼 때, 사람의 계획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끌어 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헤롯 아그립바 왕은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까지 공개 처형할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통해 극적으로 베드로를 탈출시킵니다. 이 일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던 성도들마저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야고보의 순교함(1-2)
지금까지 우리는 예배당 안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부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부흥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반대로 많은 성도들이 흩어져서, 곳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만 예배드리는 것을 부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흩어져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증거하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1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1-2)
초대교회는 엄청난 부흥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 위에 엄청난 핍박을 주십니다. 교회는 어려움 가운데 처하고 성도들은 핍박 때문에 세계로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흩어진 곳에서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곳에서 목숨만 부지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도 복음을 더 힘차게 증거 했습니다.
본문에는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1)라고 초대교회에 검은 구름이 몰려옵니다. 그 시기는 ‘그때에’라고, 바나바와 사울이 후원금을 자기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시점을 의미합니다(행 11:30). 이 시점은 유대 절기로 말하면, 유월절 전후 기간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유월절 직전에 순교를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헤롯은 베드로를 죽이려고 체포했을 때는 이미 유월절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초대교회를 박해하는 데는 ‘헤롯’이란 인물이 계속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도 헤롯 왕이고, 본문에도 헤롯 왕이 나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헤롯 가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탄생 시에는 ‘헤롯 대왕’이며, 본문에 나타난 헤롯 왕은 그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하지만, 헤롯 아그립바 1세라고 소개하지 않고, ‘헤롯’으로만 소개하는 것은 헤롯 가문이 여전히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있음을 전달하려는 의도입니다.
헤롯 가문의 출신지는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인의 종교를 지키는 척했고, 유대인들이 미워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핍박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입니다.
헤롯 또한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회를 핍박했던 것입니다(1). 그 결과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2)라고, 야고보 사도의 순교에 대한 소식을 전합니다. 열두 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가 나온 것입니다. 헤룻의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초대교회 중요한 지도자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요, 중요한 순간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챙기셨던 바로 그 사도입니다. 이 사건은 헤롯 아그립바 왕이 죽은 해로 알려진 주후 44년에 일어난 일입니다(12:23). 그는 야고보를 살해한 것도 이와 같은 정치적인 계산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야고보를 살해한 후,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받은 헤롯 아그립바는 이제 더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까지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베드로의 투옥와 탈옥(3-17)
세상은 자신의 능력 아래 멍에와 모든 것을 결박시키고 구속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꽁꽁 결박하고 구속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 한마디로 그 수많은 멍에와 결박을 썩은 새끼줄처럼 결박을 푸십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힌 베드로는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자유의 몸이 됩니다.
3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3-17)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들이 옥에 갇혔다가 주의 사자가 밤에 기적적으로 옥문을 열어 풀려났던 일을 소개할 때와는 달리 누가는 이번 베드로의 구출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베드로를 구출해내셨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 베드로의 투옥(3-5)
헤롯에 의해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자 유대인들은 기뻐했습니다(3).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헤롯은 매우 격양됩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유대인들의 반응 때문입니다. 헤롯도 야고보의 죽음을 기뻐한 것을 보고, 유대인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하여 이제 베드로로 잡으려고 합니다(3).
헤롯은 더 나가서 베드로를 잡아 투옥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즉시 처형했지만, 베드로는 바로 처형하지 못한 것은 무교절 절기 때문입니다. 투옥된 때 7일 동안 진행되는 무교절이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사실 7일간의 무교절은 유월절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보통 이 두 절기를 거의 하나의 명절로 간주하곤 했습니다. 무교절 기간에는 죄수를 사형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 이 상황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붙잡으려 했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월절 이전에 해치우려 했고 베드로는 무교절이 끝난 후에 공개 처형하려 했습니다.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죄수의 탈옥을 경계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철통 경비를 세운 것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매우 높은 진술이다(4). 이는 야간 경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는 당시 로마 군대가 야간 보초 시간을 사등분해서 돌아가며 보초를 서게 했음을 말해줍니다.
베드로는 유월절 기간에는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기간, 즉 명절에 돌아가심으로 인해 기독교가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유월절에 잘못 죽이게 되면, 그 전처를 밟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를 즉시 죽이지 않고 잠시 살려준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갇혀 있는 시간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5).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성도들의 간절함을 표합니다(눅 22:44).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강청하는 기도(눅 11장)와 포기하지 않는 기도(눅 18장)처럼 간청했던 것입니다.
(2)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탈옥함(6-11)
베드로가 임시로 갇힌 곳은 성전의 북서쪽 구석에 위치한 안토니아 요새로 추정됩니다. 이곳에 예루살렘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가 머물러 있던 곳입니다. 이 요새 지하에는 많은 감옥이 있었습니다. 아마 베드로도 이 감옥 중 한 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6절에 보면, 두 명의 군인이 베드로의 양 옆에서 지키고 다른 두 명의 군인이 옥문을 지킨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철통 경비에 대한 누가의 자세한 묘사는 베드로의 출옥이 얼마나 기적적인 사건이었는지를 극대화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수일간 투옥 되어 있는 동안 예루살렘 교회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놀랍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야고보처럼 순교의 제물이 될 텐데, 베드로는 어쩌면 그렇게 태평하게 자고 있습니다(6).
바로 이 순간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저자는 베드로의 구출 작전을 주목을 끌기 위해 ‘보라’(7)라는 구절을 사용합니다. ‘보라’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모두 34회 등장하는데, 독자들의 주목과 관심을 끌기 위한 표현입니다. 독자들에게 이제 곧 일어날 일을 주목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자 캄캄한 지하 감옥에 빛이 비쳤습니다(7). 이때 베드로를 감시하던 군사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침묵합니다. 그를 감시하던 군사들이 베드로의 행방이 대해 큰 소동이 있었다는 18절의 기록을 보아 이들은 갑작스럽게 잠에 빠져 있다가 날이 샌 후에야 비로소 깬 것으로 보입니다.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에게 ‘옆구리를 쳐 깨워’라는 표현합니다. 미루어 보건대, 베드로는 이튿날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걱정하기는커녕 천하태평하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천사의 지시를 따르면서도 지금 일어나는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주의 천사를 통해 옥에서 구출 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행 5:18-20). 하지만 너무나 놀라운 시간에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기에 자신도 쉽게 믿기 어려웠습니다. 천사가 자신을 구출하는 것을 환상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9). 그가 시내로 통하는 철문 앞에 도착하자 놀랍게도 문은 자동문처럼 저절로 열렸습니다(10). 베드로가 옥에서 완전히 벗어나 시내의 거리 하나를 지나자 천사가 즉시 떠나갔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실제 상황임을 깨닫고, 베드로는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11)라고 고백합니다.
(3) 베드로가 탈옥 사실을 알림(12-17)
기적적으로 옥에서 탈출한 베드로는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마리아의 집으로 갑니다(12). 누가는 이 집 주인의 이름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로 소개합니다(12). 학자들은 이 사건을 비롯해 초대교회의 여러 이야기들의 출처가 바로 이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다락방도 이 마가의 어머니 집의 다락방일 것이라 추론합니다. 마가는 곧이어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전달하고 안디옥으로 향할 때 그를 데리고 오는 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25). 이 집은 아주 큰 대문과 작은 정원과 같은 앞뜰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마리아의 집에 도착하니, 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탈출하여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문지기 역할을 했던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려 나갔다가 그의 음성을 알아차렸습니다(13). 로데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문도 열주지 않고 집안 성도들에게 달려가서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고 외쳤습니다(13). 이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네가 미쳤다’고 성도들은 베드로의 탈옥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마 베드로의 구출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데는 정말 베드로가 대문 밖에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15). 오히려 그들은 베드로가 맞다고 주장하는 로데의 말을 부정하면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마다 각자의 수호천사가 하늘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민속 신앙을 반영합니다(참조. 마 18:10). 당시 유대인은 수호천사들이 각기 보호하는 사람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즉시 그 사람의 수호천사가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베드로의 수호천사가 그의 곁에 있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집안에서 이렇게 실랑이가 일어날 때 베드로는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16). 로데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는데, 그녀의 말이 사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집안에 들어온 베드로는 손짓하여 놀란 사람들을 조용하게 한 후,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옥에서 건져 내셨는지 상세하게 설명했고, 베드로는 이 사실을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알려 주라고 하면서 다른 장소로 급히 피신했습니다(17). 여기서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말합니다. 그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3대 기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갈 2:1-10). 예수의 부활에 관한 목격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고전 15:7). 그는 이른 시기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베드로를 대신해 수장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경건한 삶으로 인해 심지어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의장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행 15장). 그는 사도행전 12장 이후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지도자로 등장합니다.
베드로의 구출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관한 마지막 기록을 장식합니다. 모여서 기도하던 성도들은 베드로의 구출 사건을 야고보와 형제, 즉 장로들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도 전함으로 과연 주님께서 주권적인 섭리에 따라 그의 교회와 종들을 보호하셨음을 확인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순교를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할 일이 많은 베드로를 살려 주심으로 교회에 큰 위로와 안위를 허락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유일하게 남았던 베드로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언급은 사도행전 후반부의 기록이 더 이상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합니다. 이제 13장부터 저자는 안디옥 교회와 바울을 중심으로 초대교회 선교 사역 이야기를 전개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위기와 어려움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복음의 길 위에 서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길을 여시고 새 길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닌 믿음의 좌표가 분명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교만한 인생을 심판하신 하나님
사도행전 12장 18-25절
강한 자를 무너뜨리는 건 더 강한 자가 아닌, 강한 자 속에 숨어있는 약한 본성일 때가 많습니다. 자신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덫은 자기 안에 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하하던 혜롯에게서 왕복을 벗긴 건 교만이 있습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면 언제든 최약자로 전략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탈옥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군인들은 헤롯 아그립바왕에 의해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실망한 아그립바는 가이사라로 내려가 연회를 베풉니다. 그의 연설을 듣던 백성은 그에게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아부를 합니다. 헤롯은 그 말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가로챈 헤롯에게 즉각적으로 심판의 손을 드십니다.
파수꾼을 사형시킨 아그립바(18-19)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성장시켜려 하지만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을 제거하려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항상 자신을 성찰하고 변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으로 변화되어갈 것입니다.
18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18-19)
새로운 아침이 밝았습니다. 간밤에 마가라는 요한의 집이 베드로의 출현으로 소동이 일어났지만, 감옥에서는 베드로의 탈출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것을 헤롯의 간부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날이 밝자 그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들 사이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를 지켰던 경비병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인 후, 그의 탈출이 어떤 음모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그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죄수의 탈출을 허용한 경비병은 탈옥수가 받아야 했던 동일한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아그립바 왕이 이 로마법을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그들에게 사형 명령을 내린 후, 이제 절기가 다 끝나면서 행정 수도 가이사랴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큰 절기인 유월절과 무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보냈습니다. 로마의 총독과 함께 예루살렘의 치안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올라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려가는 길은 베드로를 놓친 아쉬운 마음을 안고 갔을 것입니다. 그는 야고보를 죽일 수 있었고 베드로를 투옥시킬 수 있었겠지만, 동시에 베드로를 감옥 안에 계속 둘 수 없었습니다. 죽일 수도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 힘없는 자기 부하들이나 죽여서 화풀이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뜻 밖에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며,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헤롯이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유대’는 좁은 의미에서 유대인의 땅을 의미합니다. 반면 가이사랴는 정치적으로는 유대 지방에 속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유대인의 땅이 아닙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도시를 설립한 때로부터 시작해 대체적으로 이방인들이 거주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아그립바 왕이 유대에서 가이사랴로 내려갔다고 언급한 것은 다음 이어지는 장면이 그곳에서 일어난 일임을 말하기 위한 서술적 장치입니다.
교만한 아그립바를 심판하심(20-23)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책임져 주십니다. 반대로 자기 주제도 모르고 교만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면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20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20-23)
헤롯 아그립바 왕이 가이사랴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러나 누가는 왜 그런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먼저 설명합니다.
⑴ 주변 나라를 통한 왕권의 위세(20-21)
헤롯 왕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주변 나라들을 제사하면서 성경은 말해줍니다. 본문에서는 대표적으로 두로와 시돈을 나타납니다. 두로와 시돈은 해변에 위치했기 때문에 식량의 많은 부분을 갈릴리와의 무역을 통해 조달해왔습니다. 그래서 헤롯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필요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때로부터 대략 천 년 전 히람과 솔로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열왕기상 5:9-12).
무슨 영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 헤롯 아그립바 왕이 분노하고, 그 지역들과 외교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이러한 이상 기류를 감지하고 그들은 화친 정책을 펼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에 이 두 도시의 외교관들은 헤롯 아그립바 왕의 침소를 맡은 고관인 블라스도를 매수해서 왕의 마음을 살려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왕의 침소를 맡은 신하’는 일반적으로 왕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⑵ 사람들의 경배를 통한 위세(22)
두로와 시돈은 헤롯 왕의 마음을 달려고 시도하다가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가이사랴 지역에 축제가 있었습니다. 이 축제가 가이사랴 설립 기념일에 열렸는지 황제의 생일인 44년 8월 1일에 열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베드로의 탈옥 사건은 거의 1년 전 유월절 때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날 헤롯 왕은 어의(御衣)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들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헤롯 왕의 연설을 들은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아부합니다. 이것은 헤롯 왕이 기대하던 이상의 반응이었습니다. 헤롯은 항상 정통성이 없는 왕이라는 핸드캡(handicap) 때문에 좌불안석이었습니다. 언제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릴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을 길들이기 위해서 때로는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도 또 때로는 모질게 대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왕권을 잘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백성들이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하니 흥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도 받아서는 안 되는 찬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침상을 맡은 신하 블라스도가 꾸민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외교적인 사안을 상소하기 위해서는 헤롯의 기분이 좋을 때에 내놓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서 그처럼 환소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도 거짓 증인들을 고용하여 재판정에서 ‘바나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게 만들었었습니다.
⑶ 교만한 자에게 내린 심판(23)
이러한 꼼수는 사단의 패배와 교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헤롯 왕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기 몫으로 돌렸습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자들에게 임하는 결과가 똑같이 임했습니다.
본문에는 ‘주의 천사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라는 표현합니다. 헤롯 왕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신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벌레에게 먹히고 맙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 누가는 혜롯의 죽음이 벌레가 아니라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사자가 심판을 집행합니다. 천사가 실제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바는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는 신성모독적인 행동을 할 경우,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그를 엄벌하신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헤롯의 손에서 베드로를 구원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분이 헤롯을 심판하셨습니다.
이 기록된 내용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도 기록된 사건입니다. 요세푸스는 동일하게 아그립바 왕이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신과 같다는 칭송을 받았지만, 그 신성모독적인 아부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점을 지적합니다. 당시 정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와 관련된 요세푸스의 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헤롯은 가이사의 안녕을 위한 축제라고 생각하며 그를 기념해 연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많은 지역 관리들과 다른 고위 인사들도 참석했다. 연회 둘째 날 아그립바는 완전히 은으로 만든 예복을 입고 동이 틀 무렵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때 그의 은색 옷은 태양의 첫 빛줄기에 비쳐 아름답게 빛났고 그 빛의 찬란함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두려움과 떨림을 안겨주었다. 이에 거기 모인 사람들은 그에게 아부하며 그를 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외쳤다. ‘지금까지 우리는 당신을 인간으로서 존경했지만, 이제부터 당신은 인간 이상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들을 질책하지 않았고, 그들의 불경한 아부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눈을 들어 자기 머리 위에 있는 밧줄에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는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는 즉시 이것이 악의 메신저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갑자기 강한 슬픔이 그의 마음을 찔렀다. 이와 동시에 심한 통증이 그의 내장을 사로잡았고, 그 통증의 강도는 빠르게 올라갔다 … 그는 황급히 왕궁으로 옮겨졌으며…배의 통증이 5일간 지속된 후 그는 그의 생애 쉰네 번째 되는 해, 왕위에 오른 지 7년째 되는 해에 사망하고 말았다.”(요세푸스,「유대고대사』19:343-350)
누가의 기록과 요세푸스의 기록은 서로 독립된 기록이지만, 그 핵심 내용은 일치합니다. 단지 새로운 내용이 있다면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의 외교 관계에 관한 내용일 것입니다.
학자들은 아그립바 왕의 사인(死因)에 관해 여러 가지로 추측합니다. ‘벌레에게 먹혀’라는 표현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복막염이나 장폐색, 혹은 비소 중독 등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누가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와 같은 표현은 고대에 여러 저자들이 악독한 독재자들을 포함해 불행한 최후를 맞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자들의 죽음을 가리킬 때 종종 했던 표현입니다(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17:168-170에 기록된 헤롯 대왕의 죽음 묘사를 참조하라). 헤롯 아그립바 왕이 죽은 후 유대는 다시 로마 총독부의 관할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에는 아그립바 왕의 세 자녀인 헤롯 아그립바 2세와 그의 누이동생 버니게(행 25:13), 막내 딸 드루실라(행 24:24)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견주다가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인정하여 영광스러운 인생이 될 것인지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함(24-25)
사단은 사람들을 미혹시켜 하나님께 도전하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역사적으로 조상 아담과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지만 그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발악해서 하나님을 도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만을 증거 하는 역할만합니다. 그리고 누가 역사의 진정한 주인인지 증명해주고 맙니다.
24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24-25)
사도행전 12장은 헤롯 왕이 야고보를 죽이고 수제자 베드로를 시작했지만, 마지막은 말씀이 더 해졌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본문은 궁극적으로 승리자라는 것을 아래 같이 표현합니다.
⑴ 여전히 부흥하는 초대교회(24)
본문에서는 헤롯의 핍박을 받은 후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라’(24)라고 소개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헤롯 왕의 죽음과 함께 힘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쇠하지 않고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가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고 어려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즉 사도 야고보가 아그립바 왕에 순교를 당하고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굳건하게 세워져 나갔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환난의 상황 속에서 더욱 흥왕하여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 이야기의 큰 단락이 마무리될 때마다 초대교회의 부흥을 간략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고 요약해왔습니다(사도행전 6:7; 12:24; 19:20).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흥왕했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초대교회가 단순히 수적인 부흥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고난과 박해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양적이고 비본질적인 성장 그 자체만으로 교회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시도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⑵ 계속 되는 하나님의 사역(25)
사도 야고보의 순교는 하나님의 무능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입증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 모든 일을 예루살렘에서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흉년으로 고통 겪고 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박해까지 만났지만,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말씀이 더 흥왕해졌습니다. 사도행전 11:30에서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바나바와 사울은 헌금 전달을 마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에서 돌아올 때 그들은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온다. 이 표현은 12절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마가는 골로새서 4장 10절에서 바나바의 사촌으로 언급되는 마가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친척 관계는 왜 바나바와 사울을 따라 안디옥에 오게 되었으며, 나중에 그들과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당신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신뢰하십니까? 벌레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 때문에 벌레에 죽은 헤롯처럼 인물이 되지 않도록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
행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Acts12:5 So Peter was kept in prison, but the church was earnestly praying to God for him.
행12:1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Acts12:15 "You're out of your mind," they told her. When she kept insisting that it was so, they said, "It must be his angel."
행12: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행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행12장 가장 강력한 무기 합심기도
세상은 우리 힘으로 대적하기에는 매우 강합니다. 권력이나 돈이나 폭력을 통하여 공격해오는 사탄의 세력은 때로 너무 강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면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기도입니다. 특히 성도들의 합심기도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센 세상의 공격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예수님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파되는 곳마다 사탄의 진은 깨지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사탄은 교회를 핍박하고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종교인들을 부추겨 스데반을 죽게 한 사탄은 이제 정치인 헤롯을 부추겨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입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이 야고보를 죽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이제 베드로도 죽이려고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제 무교절만 끝나면 죽이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생명은 태풍앞에 호롱불과 같았습니다. 며칠만 지나면 야고보에 이어 베드로도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만 바라보면 우리는 기가죽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강하게 우리를 몰아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강하게 몰아부쳐도 세상은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을 알야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위에 계신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합심기도
초대교회는 큰 위기 앞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임했던 마가 다락방에 모여 모든 힘을 다해 베드로를 살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감옥으로 보내셨습니다. 군사들이 베드로의 양쪽 옆에서 단단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천사를 통하여 철통같이 지키는 파수꾼들을 가볍게 따돌리고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기도하는 곳으로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아무리 견고한 진이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절망이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기도가 그 열쇠입니다.
헤롯의 죽음
베드로를 죽이려 했던 헤롯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헤롯에게서 양식을 사야했던 그들은 무조건 아부하며 헤롯의 소리는 신의 소리라고 외쳤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헤롯은 기고만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천사가 그를 쳐서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벌레에게 먹혀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강하게 보이던 헤롯이 하나님이 손을 대시니 벌레에게 먹혀죽는 비참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은 센 것 같지만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줍니다. 반면 성도들은 약한 것 같지만 가장 강한 사람들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보다 더 강한 존재는 없습니다. 세상의 환경이 아무리 꽉막힌 것 같아도 기도 앞에는 모든 문이 열리고 마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의 기도도 능력이 있는데 많은 성도들의 합심기도는 얼마나 능력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