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1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복 있는 사람 》
시 1:1~2
〈 복덩이가 장가를 갔는데, 〉
어린시절 어머님은 저를 ‘복덩이’라고 곧잘 부르곤 하셨습니다.
제가 태어날 당시 아버님이 경찰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제가 태어나고 승진을 하셨답니다.
어머님은 그런 연유로 저를 ‘복덩이’라고 자주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1녀 6남 7남매 중 한가운데 넷째인 제가 복덩이로 태어나, 장성하여 장가를 갔습니다.
딸 아들, 남매를 낳았는데, 두 녀석이 다 청각장애인입니다.
이때부터 저는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내가 과연 복덩이인가?’
저의 신앙에서 ‘복’은 뼈아픈 질문이 되어 송곳처럼 저를 찔러댔습니다.
예수 믿는 신앙 자체가 곧 ‘복 없는 자’에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모이는 성도는 ‘복 있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아무래도 저는 그곳에 끼어들 처지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 속에 앉아있는 제 모습은 영락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결국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두 아이를 양육해야 했기에 직장에 충실했습니다.
월급으로 받은 돈은 한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아내에게 다 갖다주었습니다.
나의 용돈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줄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습니다.
직장 동료들에게 저는 밥 한 끼, 술 한 잔 안 사는 짠돌이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고 사춘기가 왔습니다.
청각장애인의 사춘기, 제가 감당하기에 버거웠습니다.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은 제가 교회를 멀리한 때부터 예견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부모로서 장애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 했어야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해답을 찾아나섰습니다.
세는나이 쉰에 늦깎이 신학도가 되었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몫의 고난은 더 있었습니다. 둘째인 아들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했던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 실수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붙잡는 수 말고는 길이 없었습니다.
☞ 그럼에도 저는 아직도 ‘복 있는 사람’하면, 오금이 저립니다.
☞ 시편을 설교하고자 하는데, 첫 단어가 ‘복’입니다. 저의 설교를 들어보시겠습니까?
〈 세상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 〉
이 설교를 하기 위하여 저의 과거를 간략히 말씀드렸습니다.
이 설교를 하는 제가, 여러분 보시기에 ‘복 있는 사람’입니까?
나아가서, 설교를 들으시는 여러분은 스스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최소한 두 가지 대답은 들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둘째, 예수 믿고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일까요?
☞ 이 대답을 듣기 전에 우리 한국인이 말하는 복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오복(五福)이 있습니다.
_ ① 수(壽) ; 장수를 뜻합니다.
_ ② 부(富) ; 재물이 많아야 복이 있다 합니다.
_ ③ 강녕(康寧) ; 장수하고 재물이 많은 가운데 건강해야 합니다.
_ ④ 유호덕(攸好德) ; 남에게 베풀 수 있을만큼 넉넉해야 합니다.
_ ⑤ 고종명(考終命) ; 죽음 복입니다. 객지에서 안 죽고, 자기 집에서 편히 죽는 것입니다.
☞ 현대인들은 새로운 오복을 다음 같이 꼽기도 합니다.
_ 첫째 건강, 둘째 배우자, 셋째 재산, 넷째 직업, 다섯째 친구!
2021년 미국 여론조사 기관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조사가 있었습니다.
17개 선진국에서 약 19,000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에 한국인은 ‘물질적 풍요가 삶을 의미 있게 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가족을 첫 번째로 꼽았는데, 한국인은 물질적 풍요, 돈을 꼽았습니다.
한국인에게 복 중에서 최고의 복은 ‘돈’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돈, 가족, 건강, 직업, 친구를 오복으로 치는 풍조는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기준으로 치면, 저는 분명 복 있는 자의 반열에 들지 못합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들은 세상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 거기에 속합니까?
☞ 사실 저와 여러분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말하는 복 있는 자는 흔치 않습니다.
☞ 금수저에 속하는 상위 1% 정도나 될 듯 합니다.
☞ 세상 참 어리석습니다. 평생 도달하지도 못할 기준을 세워놓고 쫓아가고 있습니다.
〈 못 오를 나무 ‘복 있는 사람’ 〉
사람들이 아무리 아등바등 살아도 ‘복 있는 사람’은 상위 1%밖에 되지 않습니다.
도달하지 못할 수준에서 ‘복 있는 사람’을 정해놓고 그 안에 들고자 합니다.
그 속에 들 수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 그러한 사람 중에 기독교인이 포함되어 있을까요, 아닐까요?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는 “예수 믿으면 이렇게 ‘복 있는 사람’이 된다더라~”
이렇게 기대하는 분들, 없다고 부인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지요?
☞ 처음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교인이 되었는데,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습니다.
_ 내가 예수 믿었는데 왜 이래?
_ 이럴 거면 내가 굳이 예수 믿을 이유가 없잖아?
_ 이런 분들 의외로 많습니다.
_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부류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 ‘예수 믿음’과 ‘복 있는 사람’ 이 함수관계(函數關係)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_ 이 문제, 잘 풀어야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_ 잘 못 풀면, 무늬만 크리스천입니다.
_ 오늘 한번 제대로 풀어봅시다! 할렐루야~
〈 선포된 말씀 속에 진정한 뜻이 있습니다 〉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1절의 뜻이 무엇입니다.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상위 1%에 속했기에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복을 갖췄기에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병장수, 수복강녕, 배우자와 자손의 번영, 가문의 영광으로 ‘복 있는 자’가 아닙니다.
성공하고 출세했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 시편 1편 1절은 선포합니다.
_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_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므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_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므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3가지를 아니하므로, 아니할 때, 아니하는 그 순간,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아닙니다. 어떠한 조건이 아닙니다.
조건의 성취가 아니라, 무엇을 하거나, 아니하므로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한때,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억하지요?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사랑은 동사다.”
☞ ‘복 있는 사람’ 딱, 이와 같습니다.
물질적 풍요를 이루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건강하여 무병장수하는 사람이 ‘복 있는 자’가 아닙니다.
‘복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_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_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므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_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므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장애인 자녀가 있어도, 한 녀석을 먼저 보냈어도, ‘복 있는 자’일 수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할 때, 그때 그 순간, 그 사람이 복 있는 자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할 때, 그때 그 순간, 그 사람이 복 있는 자입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할 때, 그때 그 순간 그 사람이 ‘복 있는 자’입니다.
시편 1편 1절에서는 3가지 ‘아니할 때’ 복 있는 자라고 선포합니다.
시편 1편 2절에서는 2가지 ‘할 때’가 나옵니다.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할 때,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할 때, 그때 ‘복 있는 사람’입니다.
3가지 ‘아니할 때’ 2가지 ‘할 때’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 복은 조건의 성취가 아닙니다. 복은 행동입니다. “복은 조건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 무엇을 아니하거나, 무엇을 할 때,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 나를 복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
장애인 남매를 키우고, 또 한 녀석을 먼저 떠나보낼 때, 기가 막혔습니다.
나에게 복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아주 멀리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했습니다. 살기는 사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문제였습니다.
제가 매달릴 곳이 어디겠습니까?
이곳저곳 수없이 방황했습니다. 여기도 가 보고, 저기도 가 봤습니다.
이 사람도 찾아가서 붙잡아 보고, 저 사람도 찾아가서 붙잡아봤습니다.
끝내 붙잡아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품, 하나님의 사랑! 거기에 매달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복 있는 사람’으로 점점 수렴해 왔음을 고백합니다.
신학대학원을 갈 때, 목회의 길로 들어설 때, 참으로 회의가 깊었습니다.
‘나같이 박복한 사람도 신학을 할 수 있을까,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암튼 나섰습니다. 좌고우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보니, 제가 복 있는 사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한 달 내내, 일 년 내내, 성경 말씀을 붙잡고 매달립니다.
예배를 준비하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2절에 나오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렇게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함께 예배하는 여러분도 인도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 복은 조건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
복 있는 사람,
세상의 기준으로 저 자신이 박복한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움츠러들었습니다.
오늘 시편 1편 말씀을 설교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는 ‘복 있는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자수성가하여 재물로 대박을 터뜨린 사람이 아닙니다.
성공하고 출세하여, 세상이 우러러보는 사람도 아닙니다.
‘복’은 3가지를 아니할 때, 2가지를 할 때, 그때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①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할 때, 그때 그 사람이 복 있는 자입니다.
②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할 때, 그때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③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할 때, 그때 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 악, 죄, 교만을 물리칠 때 그때 그 사람이 복 있는 자입니다.
☞ 악, 죄, 교만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결정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봐야 합니다.
3가지를 아니하고, 2가지를 해야합니다. 2가지는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②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 3가지를 ‘아니할 때’ 2가지를 ‘할 때’ 그때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 〉
율법을 묵상할 때 어떤 생각을 합니까?
율법은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감히 지켜낼 수 없는 매우 엄격한 법입니다.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율법을 묵상하여야 악이 무엇인지, 죄와 교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알아야 면장을 하지” 한국 속담입니다. 모르면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알아야 ① 악 ② 죄 ③ 교만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① 악 ② 죄 ③ 교만을 분별하는 잣대가 율법입니다.
지금 우리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우리가 복 있는 자들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므로 복 있는 자입니다.
세상풍조를 따라가지 않고,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최고로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주일마다 예배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주일마다 예배할 때마다, 우리가 “최고로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 기억하십시오~ 3가지를 아니하므로, 2가지를 하므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