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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 교회
나폴레옹 무덤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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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년 루이 14세는 당시 그레넬 평야라고 부르던 곳 부근에 앵발리드를 설립했다. 4,000명 가까운 노병들의 생활 근거지가 될 앵발리드는 당시 현역에 복무 중인 병사들의 급료 5년치를 징수한 기금으로 이루어졌다. 리베랄 브뤼앙(Liberal Bruant)의 설계로, 이 복합건물의 공사는 1671년 시작되어 1676년 완공되었다. 에스플라나드는 로베르 드코트(Robert De Cotte)가 레이아웃한 것이었다. 쥘 아르두앵 망사르(Jules Hardouin Mansart)가 설계한 돔 공사는 1706년 시작되었는데, 1708년 그가 죽었기 때문에 드코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를 습격할 때 군중들이 사용한 무기의 대다수는 그날 아침 앵발리드로부터 탈취한 것이었다. 경비병의 저항이 있었지만, 군중들은 다수의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지하에 있던 무기고로 들어가 약 2만 8000정의 무기를 탈취했다.
그러나 앵발리드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40년 나폴레옹의 유해가 돌아와 그곳에 안장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는 영국 정부와 7년간에 걸친 협상 끝에 세인트헬레나로부터 황제의 유해를 이장하는 허가를 받았다. 황제의 사후 19년이 지난 1840년 10월 8일, 관이 발굴되어 2분간 개봉된 뒤 프리깃함 라벨풀호에 선적되었다. 당시 임석했던 사람들은 유해가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르아브르에 도착한 뒤 유해는 센강을 거쳐 파리의 쿠르베부아에 상륙했다.
1840년 12월 15일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겨울의 폭설에도 불구하고 영구차는 개선문을 통해 샹젤리제, 콩코르드광장, 에스플라나드를 거쳐, 생제롬 교회에 도착하여 비스콘티가 설계한 묘당이 완공될 때까지 임시 안치되었다.
1861년 4월 2일 나폴레옹 1세는 그 교회의 돔 아래에 있는 지하 묘지에 최종적으로 안치되었다.
(글 출처- 네이버 백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어: Napoléon Bonaparte, 코르시카어: Nabulione di Bu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며, 프랑스 대혁명 시기 말기 무렵의 정치 지도자이자 1804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의 황제였다. 나폴레옹 법전은 세계의 민법 관할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지만,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역할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 전체에 헤게모니를 형성했고,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을 퍼트렸으며, 이전 정권의 양상을 복원하는 제국 군주제를 통합했다. 그가 전쟁마다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가장 위대했던 장군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에서 프랑스 본부에서 포병 장교로 훈련받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제1 공화정에서 눈에 띄게 지위가 올랐고 제1과 2 대프랑스 동맹과 전쟁을 하고 승리했다. 나폴레옹은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제1 영사에 취임하였다. 5년 뒤에 프랑스 원로원이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에 많은 충돌-나폴레옹 전쟁-에 모든 유럽의 주요 힘들을 포함하며 종사했다. 많은 승리 뒤에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적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광범위한 제휴와 친구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케 하여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시켜나갔다. 나폴레옹에 전쟁들은 많은 군대에서 연마되고 있다. 스페인의 무장시민들과의 싸움과 1812년의 러시아 원정은 나폴레옹의 삶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의 대육군은 전쟁에서 큰 손상을 입었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의해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그 동맹이 프랑스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을 정권에서 내려오게 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했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았을 때 그는 엘바 섬에서 도망쳐 나오고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1815년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배하였다.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영국 왕실에 의해 구속된 채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보냈다. 한 검사는 그가 위암으로 사망했다고 판단했지만, 이 주장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일부 학계 측에서는 비소 중독설도 제기되었다
위키백과발췌
돔 성당 발다키노,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을 모델로 하였다.
지하 나폴레옹 1세 묘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지중해 서쪽의 작은 섬인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토스카나 출신의 이탈리아 소지주(보나파르트) 집안에서 8명의 자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이며 귀족회의 의원인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프랑스식 이름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였으며, 어머니는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였다. 출생시 이름은 나브리오네 디 부오나파르테(Nabulione di Buonaparte)였다. 이름을 나브리오네로 지은 것은 요절한 장남인 나브리오네에서 따온 것이다. 부오나파르테 가는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에 항의하며 파스콸레 파올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프랑스 측으로 전향하여, 가문의 명칭을 프랑스식인 보나파르트로 개명하고 귀족 자격을 얻었다.
유년기에 나폴레옹은 점잖은 성격을 가졌으며,하루 종일 독서에 심취하였는데, 특히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 처음엔 집안 살림이 어려워 형 조제프와 함께 학비를 내지 않고도 다닐 수 있는 수도원 부속학교인 도툉 중학교에 들어갔지만,곧바로 그만두고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브리엔느 유년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784년에는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만은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졸업 시험 성적은 58명 중 42위였지만, 통상 재적 시간이 4년인 곳을 불과 11개월 만에 필요한 과정을 모두 수료하였다.
아르콜의 다리에 선 나폴레옹
1785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같은 해 11월 30일 16세의 어린 나이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발랑스에 주둔한 라 페르 연대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1] 1789년 바스티유 감옥 함락 소식을 듣고 나폴레옹 자신도 프랑스 혁명에 참가하여 공화주의자인 자코뱅 파를 지지하는 소책자를 썼다가 체포되고 만다. 1792년에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아작시오의 국민위병대 중령이 되지만, 영국을 지지하는 파울리와 불화가 일어나 일가족과 함께 마르세유로 도피행에 가까운 이주를 하였다.
마르세유에서는 유복한 상인 집안인 클라리 가와 친해진다. 형 조제프는 클라리 가의 마리 줄리와 결혼하였고, 나폴레옹은 마리 줄리의 여동생 데지레 클라리와 연인 사이가 되어 약혼식을 올렸다. 1793년 말, 프랑스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에, 툴롱 공성전 에서 왕당파 반란군을 진압하는 최초의 무훈을 세워 젊은 나이에 사단장이 되었다.
1794년 공안위원장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실각하여 처형되자 로베스피에르의 남동생 오귀스탕과 친분이 있었던 나폴레옹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석방 후에 총재 정부의 총재 파울 바라스에게 등용되어 1795년 10월 5일 파리에서 왕당파의 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수도 시가지에서 대포를 쏘는 대담한 전법으로 시원스럽게 진압함으로써 사단장이 되었다.
1796년, 데지레와 파혼하고, 귀족의 미망인으로 바라스의 애인이기도 한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결혼한다. 같은 해, 바라스에 의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이 이탈리아 원정을 20년 동안 펼쳐진 나폴레옹 전쟁의 서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때 나폴레옹의 나이는 27세였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혁명파와 반혁명파간의 이념 대립 등의 혼란 상태가 지속되어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이에 1796년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은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는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과 싸우기 위해 눈보라가 몰아치는 알프스 산맥을 넘으려 하였다. 몇 달에 걸쳐 산맥을 돌아서 넘은 그는 곧바로 이탈리아를 제압한 후,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굴복하고 캄포포르지오 조약을 체결하여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북부 지방인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업적으로 나폴레옹의 인기는 프랑스 내에서 높아져 갔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제 성냥을 쓰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스핑크스 앞에 선 나폴레옹
그러나 혁명 정부(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 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로제타석은 세 면으로 나뉘었고, 윗면은 고대 그리스어, 둘째 면은 이집트의 평민어였던 데모닉 그리고 마지막은 이집트의 고대어 하이에로글리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돌은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의 실패 후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에 의해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은 이 비문을 해석하길 적극 권장했으나 살아서 이 돌의 해석을 보지 못하고, 후에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완벽히 해석된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가있는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내세워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의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하고 거기에다, 7월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하여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혼자서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당시 오백인회와 원로원은 이 문제로 인해 거의 매일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정국을 지켜본 그는 동생인 오백인회 의장 루시앵과 시에예스, 탈레랑의 도움으로 1799년 11월 9일 의사당에서 자신의 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백인회는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중간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미 그에게 장악된 군대와 30여명의 테르미도르파 의원들의 지지로 그는 오백인회를 해산시켜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들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통령 정부가 3명의 통령으로 이루어졌으나, 제2통령과 제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모아졌다. 제2통령은 법무, 제3통령은 재정을 책임지는 반면, 제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등을 책임졌으므로 그 권한은 다른 통령에 비하여 더욱 막강하였다. 나폴레옹은 연합국에 강화를 제의하지만, 거절당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려 하였다. 과거 한니발 이후 대규모의 군사가 처음으로 알프스를 넘는 일을 당시 그의 부관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나폴레옹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외쳤다. 그리하여 험준한 알프스를 넘고 1800년 6월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고, 다음해 2월에 오스트리아는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라인 강의 절반을 프랑스측에 할양하였으며, 북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했다. 이 강화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어, 영국만이 전쟁을 지속하다가 중심축인 소 피트가 사망하자 1802년 3월 양국간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10년 만에 안정을 맞았다.
나폴레옹은 내정 면에서도 일대 개혁을 실시했다. 전국적으로 세금 제도와 행정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혁명기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공업 생산력의 회복을 실시하여 산업 전반의 부흥에 힘을 쏟았다.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 1802년에는 유명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창설했다. 또, 교육 개혁에도 힘써 공공 교육법을 제정하였다. 또 국내 법 정비에도 임하여 1804년에는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다. 이것은 각 지역의 여러 가지 관습법과 봉건법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민법전으로 ‘만민의 법 앞에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 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밖에도 교육 및 교통망 정비에도 진력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 정부의 탄압을 받던 로마 가톨릭교회[2]와의 화해도 모색한 나폴레옹은 1801년에 교황 비오 7세와 정치 및 종교 조약을 맺어, 국내의 종교 간 대립을 완화했다. 또, 왕당파와 자코뱅 파[3] 등의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국내 정치를 융화로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현 체제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그리고 1802년 8월 2일에 그는 종신통령(종신 집정)이 되어, 자신의 독재권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나폴레옹의 강력한 내정 개혁 실시로 그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측근 인사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이에 나폴레옹은 그것을 국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1804년 7월의 국민투표에서 찬성표 3,572,329와 반대표 2,569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제정을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에 마침내 즉위식을 거행하여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프랑스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야심만만했던 나폴레옹은 역대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을 단호히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하였다. 자신은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군주가 아닌, 위대한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후손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나폴레옹은 기독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의미에서 자신이 직접 황제관을 썼으므로 교황 비오 7세는 축복기도를 하고 그를 포옹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한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은 다방면으로 여러 가지 충격을 주었다. 그를 공화제와 인민들의 영웅이라고 생각해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으로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예정이었던 교향곡 제3번을 작곡하고 있던 베토벤은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한탄하며, 나폴레옹에게 곡을 헌정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목도 《영웅》으로 변경했다. 또한 남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시몬 볼리바르는 나폴레옹의 황제등극을 보면서 절대권력에 혐오감을 갖게 되어, 후에 왕정국가 건설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던 산 마르틴과 결별하였다. 나폴레옹의 황제로 등극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스페인령 리오 데 라플라타는 독립하게 되는데 그 독립국이 훗날 아르헨티나였다.
일단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고 나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세계 제일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도시에 대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가구의 새로운 계산법(짝수법, 홀수법)을 마련하고, 분수를 설치하고 묘지를 정리하였으며, 광장과 회관, 시장, 강변 구역과 제방 및 공공 시설과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정비하였다. 또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위인들의 동상이 거리 곳곳에 세워지고, 교량이 건설되었다.
얼마 후 《아미앵 조약》은 영국 측이 파기하여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다시 전쟁 상태로 들어갔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위해 도버 해협을 접한 브로뉴에 대군을 집결시켰다. 이에 대항하여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프로이센은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영국과 오스트리아와의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중립국으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서 영국에게서 빼앗은 하노버를 프로이센에 양도한다는 약속을 했다.
황제 시절의 나폴레옹. 근위기병 대령 복장을 하고 있다
프랑스 육군은 10월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빈을 점령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구원하러 온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즉위 1주년인 12월 2일에 프랑스군과 격돌하여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치렀다. 나폴레옹의 교묘한 작전 덕분에 프랑스군은 완승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트 조약을 체결하여 항복을 선언했다. 이 전투는 3명의 황제가 한 전장에 모였기 때문에 ‘3황제 회전’이라고도 불린다. 나폴레옹은 이 날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두 나라를 상대로 혼자서 능히 제압한 프랑스 육군의 위광은 곧 전 유럽에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은 1805년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게 완패를 당하여 영국 상륙 작전은 실패로 끝나 제해권을 갖지 못하였다.
유럽 대륙의 중앙부를 제압한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는 나폴리 국왕으로, 동생 루이는 네덜란드 국왕에 각각 앉히고 자신은 라인 동맹을 발족시켜 이를 보호국화함으로써 독일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샤를마뉴 대에서부터 거의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프로이센은 결국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어, 1806년 영국·러시아·스웨덴과 더불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조직하였다. 나폴레옹은 10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동프로이센으로 도피하였다.
1807년, 나폴레옹은 폴란드로 진격하였다. 같은 해,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을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키고 폴란드 지역들을 하나로 묶어 바르샤바 대공국을 형성시켰으며, 남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를 베스트팔렌의 왕으로 임명하여 두 나라를 프랑스 제국의 위성 국가로 지정하였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국왕 페르디난드 7세를 내쫓고 자신이 스페인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10년 5월 25일 나폴레옹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남미 남부지역의 사람들은 스페인의, 더 정확하게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기를 거부한 나머지 스페인령 리오 데 라플라타는 아르헨티나라는 이름으로 독립하게 된다.
스웨덴에 대해서도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를 왕위 계승자로 파견하여, 베르나도트는 1818년에 즉위하여 스웨덴 국왕 카를 14세가 되었다. 이 왕가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지만, 정작 베르나도트 자신은 나폴레옹에 대해서 큰 호의를 갖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스웨덴은 프랑스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강고한 동맹관계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또 덴마크는 영국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맺었지만, 결국 그로 인해 파국을 맞게 된다.
얼마 안 되어, 그의 가정사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1810년 1월 10일 나폴레옹은 14년 동안 함께 살아온 황후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혼인하였다. 마리 루이즈는 이듬해인 1811년에 로마왕 나폴레옹을 낳게 된다. 하지만 프란츠 1세는 사위인 나폴레옹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나폴레옹 역시 장인을 망국의 군주로 비루하게 여겼기 때문에, 훗날 프란츠 1세는 대프랑스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전한다.
처음에는 그동안 기득권층인 귀족에게 억눌림을 받던 유럽의 부르주아지와 민중은 자기 나라를 침공하는 프랑스군을 혁명군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프랑스군은 점령국에서 갖은 횡포를 부려 원성이 잦아지게 되었다. 1808년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국민들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스페인의 호세 1세로 왕위에 앉히고, 프랑스의 점령에 반대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게릴라전으로 저항하자,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탄압했는데, 이러한 학정은 스페인 사람들이 프랑스 군인들에게 학살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 담겨 있다. 그러자 점령국 사람들의 환호는 저항으로 바뀌었다.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난 스페인 사람들의 프랑스에 대한 게릴라 투쟁은 프랑스를 계속 괴롭혀대서, 나폴레옹 자신도 스페인의 게릴라들을 위궤양에 빗댈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골칫거리는 역시 영국이었다. 영국은 섬나라라는 지형상 장점과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철저하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만다. 이것은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퇴각하면서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깊숙이 달아났다. 식량은 얻지 못하였으나 러시아군과 싸우지 않은 프랑스군은 예상대로 쉽사리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그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프랑스의 대패를 목격한 유럽 각국은 일제히 반(反)나폴레옹의 기치를 내걸었다.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 프로이센이었으며, 주변 나라들에게 호소하여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에는 베르나도트의 스웨덴도 참가하였다. 러시아 원정으로 수십만의 군사를 잃은 나폴레옹은 강제적으로 청년들을 징집하였다. 1813년 봄, 변변찮은 군대로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휴전을 하였다. 메테르니히와의 평화교섭이 불발된 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동맹군에게 포위공격 당하여 대패한 후, 프랑스로 도망갔다.
1814년에 정세는 한층 더 악화되어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와 블뤼허의 연합군 25만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16만이, 남쪽에서는 웰즈 리 장군의 10만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강요당했다. 3월 31일에는 제국의 수도 파리가 함락된다. 나폴레옹은 종전을 목적으로 퇴위를 하겠다고 했지만, 배신한 마르몽 원수 등에 의해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하여, 결국 1814년 4월 16일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한 뒤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의 영주로 추방되었다. 이 일련의 전쟁을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곳곳에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왕정이 다시 복구되었다. 이들은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로마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하고 싶었지만, 동맹국 측으로부터 인정되지 못하였다. 또 베르나도트 역시 프랑스의 새 왕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주위의 반발을 사 포기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가가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빈 회의가 열려 전후 유럽을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를 각국 정상들이 의논을 하였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좀처럼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해 민중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 복위하는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연합국에게도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여 결국 또다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승세를 거두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 공격으로 완패하여 백일천하는 끝났다. (실제로는 95일)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되어 미국으로의 망명도 시도했지만 항구 봉쇄로 단념하였고, 최종적으로 영국 군함에 투항하였다. 영국 정부는 아서 웰링턴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폴레옹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에 유폐시켰다.
나폴레옹은 극히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롱우드의 저택에서 생활하였다. 그 저택 주위에는 많은 보초병들이 지키고 서서 나폴레옹의 행동을 실시간 감시하였다. 또 집밖으로의 외출도 제한되어 실질적으로 감금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수행원에게 구술 필기시킨 방대한 회상록을 남겼다(에마뉴엘 라스 카즈의 세인트 헬레나의 회상 등). 이것들은 그의 인생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관과 역사관, 인생관을 총망라한 것이어서 나폴레옹 전설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나폴레옹은 특히 섬의 총독인 허드슨 로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그는 무례하게도 자부심 강한 나폴레옹에게 보나파르트 장군이라고 부르며 썩은 포도주를 따라주는 등 나폴레옹을 철저하게 조롱했다. 또, 나폴레옹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를 본국으로 귀국시켰다. 그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 매일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세상을 떠났다. 암살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정식 사인은 위암이라고 발표되었다. 그 유해는 1840년 5월에 영국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에 반환되었으며, 현재 파리의 시파리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한편 나폴레옹의 사인은 독살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으며[4]나폴레옹의 모발 등 신체에서 비소 중독자의 질환, 증상이 나타났다고 한다.[4]
나폴레옹의 키가 155cm 가량의 왜소한 체격이 상식처럼 되었으나, 실제로 나폴레옹의 사망 당시 키는 약 168cm로 당시 프랑스 군인의 평균 신장인 약 164cm보다 컸고 전혀 왜소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나폴레옹의 근위대들 키가 약 190cm 정도였으므로 상대적으로 나폴레옹이 작게 보였고, 기록 문헌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도량형의 차이 때문에[5] 나폴레옹은 왜소한 체격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 키는 약 170cm 정도로 당시 유럽에서는 전혀 작은 체구가 아니었고 도리어 체격이 좋은 편에 속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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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기까지 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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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코드 광장에서 바라본 개선문
백화점 입구에서 검문통과(테러후 시행되는 것 같구요 ~~)
프렝땅 백화점 150주년 기념으로 화려한 인형들이 외벽을 장식하고 있다
프렝땅 백화점 옥상에서 바라본 파리시내
에펠탑을 머리에 이고~~
돔은 식당이어요
언니 날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