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5월 14일 주일 [(백) 부활 제5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성 마티아 사도 축일 기념 없음 ▦ 오늘은 부활 제5주일입니다. 우리 스승이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나 하느님께는 선택되시어 살아 있는 주춧돌로서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도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서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갑시다. 열두 사도는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일곱을 뽑아 식탁 봉사를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기로 한다(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선택된 값진 돌이시고,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입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2,4-9 사랑하는 여러분, 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5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6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하는 그 돌이며, 8 또한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신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영원한 가치로 삼지 않은 초기 신자들의 마음에는, 세상의 행복의 가치를 다른 눈으로 보게 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인간적인 약점은 언제나 드러납니 분배가 공정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이내 불평을 터뜨렸는데, 믿는 이들도 팔이 안으로 굽는 인간적인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려고 일곱 부제를 뽑고 그들에게 식탁 봉사의 직무를 맡겼습니다. 영적 교회와 제도 교회의 양면성이 엿보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공동체 질서를 유지할 사회적 제도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제도가 영적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데, 역사 속에서 제도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쓸모없는 돌멩이 같은 우리 존재를 하느님께서는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는 살아 있는 돌로 만드신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인간적인 나약함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들지만, 불신은 사람들을 편견과 오해의 걸림돌이 되게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하려면, 내 인간적인 약점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겸손의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요즘 우리 불쌍한 젊은이들! 이 지상에서 두 다리 쭉 뻗고 마음 편히 거처할 작은 둥지 하나 마련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집값, 전세 값으로 인해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은 참으로 귀가 솔깃하게 만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복음 14장 2절) 언젠가 이 지상생활이 마무리되면 우리 모두 아버지의 집으로 집결할 텐데, 그 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니, 참 다행입니다. 거기에서는 우리 청년들이 이 지상에서 겪고 있는 전월세나 원룸 유랑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니...참으로 다행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함께 머물게 될 아버지 집이 어떤 곳인지 벌써 기대가 큽니다. 그곳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래도 풍요로움이요, 넉넉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이리 저리 쫓겨 다니지 않는 곳, 더 이상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왕따 당하지 않는 곳, 더 이상 그 누구도 홀로 돌아서서 피눈물 흘리지 않는 곳일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차별대우 당하지 않는 곳, 더 이상 그 누구도 고공단식하지 않는 곳, 더 이상 그 누구도 천막농성하지 않는 곳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곳, 모두가 그분께서 차리신 풍성한 식탁에 앉아 마음껏 음식을 함께 나누는 곳일 것입니다. 언젠가 도래하게 될, 그리고 우리 모두 거기서 모이게 될 하느님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면서도 또 다른 한 가지 꿈을 가져봅니다. 사실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지닌 특징 중에 하나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지만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그래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현재진행형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하나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순간,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장소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이나 직장 공동체, 본당과 수도공동체, 더 나아가서 국가 공동체에 하느님 나라 방식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난 주말 저희 살레시오회는 춘천교구와 함께 아담한 청소년상담복지센터 하나를 개소했습니다. 잘 꾸며진 센터를 둘러보며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부디 이곳이 갈 곳 없는 청소년들, 마음의 독감이 걸린 청소년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따뜻한 둥지가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그리고 또 한 가지 지향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상처입고 방황하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극진히 환대하고 섬기는 따뜻한 둥지들이 앞으로도 더 많이 생겨나기를... 새 정부가 그리고 있는 큰 밑그림 중에 대대적인 공공임대주택과 청년주택 공급 계획을 보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물론 재원 마련이나 사업 추진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노력들이 고통 받고 있는 우리 서민들과 청년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요 희망인지 모릅니다. 이런 구체적인 노력들이야말로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건설하는 일입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고마운 사업 계획에 큰 성원과 박수를 보내며, 주님 은총과 섭리의 손길 아래 부디 잘 진행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하루하루 넘기기가 너무 힘겨운 분들, 매일 펼쳐지는 하늘이 짙은 회색빛인 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만나게 될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습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지상에서 겪었던 모든 고통과 시련, 눈물과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자비하신 아버지와 함께 끝없는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인간관계의 친밀함을 위해
예수 마음기도 길잡이를 하시는 권민자 수녀님의 강의 중 당신이 35세 때 어떤 사건을 계기로 큰 심적 변화를 겪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녀님은 오로지 ‘성녀가 되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성인들의 책을 섭렵하고 기도에 전념하며 이웃사랑 실천을 위해 고아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료 수녀님이 소년원에서 출소한 한 아이를 돌보고 있다가 외국으로 가야 할 일이 있어서 그 아이를 수녀님이 돌보게 되었습니다. 혼자 자립할 형편이 안 되는지라 한 달에 한 번씩 용돈을 주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한 번은 보름에 한 번씩 오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돈을 주며 그냥 한 달에 한 번씩 와 달라고 자상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수녀님은 그것이 자신의 탓인 양 일곱 분의 신부님께 상담을 하였지만 모두가 수녀님 탓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살로 세상을 떠났고 이 아이도 세 번씩이나 자살 미수에 그쳤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은 견딜 수 없는 죄책감으로 끊임없이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수녀님께서 “수녀님이 괴로워하는 것은 그 아이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수녀님 자신을 위해서입니까?”라고 물었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성녀가 되어야겠다는 이상에서 오점을 남기게 되었기에 자기 자신을 위해 괴로워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특별해지려는 이상을 지니고 있다면 - 그 특별해지려는 욕망이 비록 성인, 성녀가 되는 것일지라도 - 그 이상을 위해 주위 사람들은 이용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세상 누구도 그 사람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특별하다는 마음 자체가 자신 안으로 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바리케이드를 치기 때문입니다.
전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을 지닌 무서운 존재가 자신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척박한 사막이 아닌 곳에서 평범한 동물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짐을 싸서 습지로 내려왔습니다. 습지에 사는 동물들은 전갈이 자신들을 공격하러 온 줄 알고 겁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전갈은 “나는 너희들과 함께 살고 싶어. 난 다른 전갈들과는 달리 공격적이지 않아.”라고 하며 그들을 설득했고 개구리들이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이 ‘개구리인양’ 그들과 잘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개구리들이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소풍을 가던 중 개울을 건너야 할 때가 왔습니다. 다른 개구리들은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전갈과 그의 절친 친구 개구리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전갈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등에 태우고 좀 이 개울을 건네줘.”
그러자 친구 개구리는 그가 개구리처럼 살기는 하지만 자신들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독침으로 나를 찔러서 죽일 거잖아.”
전갈은 말했습니다.
“바보야. 네가 죽으면 나도 물속에 빠져서 죽잖아.”
그렇게 하여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전갈은 개구리 등 뒤에서 깨달았습니다.
‘결국 나는 개구리가 될 수 없구나!’
그는 자신의 본질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여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전갈은 본질적으로 개구리와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개구리가 되지 않으면 말입니다. ‘개구리인양’ 살아봐야 언젠가는 자신의 다름을 인식하게 되고 그러면 또 개구리를 밀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친밀한 인간관계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은 내가 타인과 달리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특별하다는 의식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바로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 자신이 특별하게 귀한 존재라고 느낄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 자신은 사랑이 없었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타인과 섞일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두고 아버지께 가서 제자들과 함께 머물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더 가까이 가는 이유는 그분의 사랑을 더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를 하면 주님 안으로 더 들어가고 그러면 그 사랑의 뜨거움을 더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개구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다가 전갈이 모인 곳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그 개구리는 특별해봐야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인간도 그저 한없이 한 인간으로 작아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함께 모일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해 아버지께 가신다는 말씀은 이렇게 당신 자신이 비록 하느님이시기는 하지만 인간이 되셨기에 당신이 품에 안고 있는 제자들과 더 친밀해지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관계의 친밀함은 인간이 주님께로 끊임없이 향하고 있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화 ‘산티아고로 가는 길(the way)’이란 영화에서 안과 의사인 한 아버지가 나옵니다. 그는 타인의 눈이 잘 보이게 해 주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아내를 여의고 아들 하나 있는데 그와는 관계가 좋지만은 않습니다. 아들이 명문대를 포기하고 스페인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의 길을 걷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골프를 치고 있을 때 아들이 산티아고 길에서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아들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산티아고 출발지점으로 간 그는 아들이 그렇게 걷고 싶어 했던 그 길을 아들의 화장한 유해를 들고 다니며 조금씩 뿌려주기로 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수많은 문제가 많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과 동료가 됩니다. 처음엔 그들이 절제도 못하는 아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보였으나 나중엔 그 사람들보다 자신이 나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들 속에 한 사람이 됩니다. 몇 달을 걸으며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도 겸손하게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여 미사를 드리며 아들의 마음을 알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은 그가 시장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하나가 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처음에 의사로서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는 모습, 골프 치는 상류 모습에서 이제는 제대로 씻지도 못한 배낭 하나 맨 보통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시는 이유는 우리와 달라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께로 우리와 함께 가시며 당신 자신과 우리가 더욱 하나로 닮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아버지 안에서 우리와 섞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친밀함의 비밀입니다. 물론 그분 안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야 할 수 없겠지만, 그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은 그 사람을 안고 함께 아버지께로 향하며 서로 하나로 섞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람들 속에 섞일 줄 몰랐던 사람들이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포도밭에 심겨진 한 무화과나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해 주인이 잘라버리려고 합니다. 내가 혹시 그 무화과나무는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실제로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는 있을 수 없습니다. 혼자 그렇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특별하다고 믿어 타인과 섞일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그럴 것입니다. 관계의 친밀함, 그것은 내가 품고 있는 이웃과 함께 주님 안에서 특별할 것 없이 하나로 섞일 수 있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기도에서 얻는 겸손의 힘으로 타인과 구별 짓는 나의 담을 헐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
5월14일(일) 음 4/19 유다의 자리를 메운 사도 聖 마티아 님
|
사도 성 마티아(Matthias)
|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십자가형 또는 참수형을 받았다는
* 자료집에서 발췌 |
배반자 유다 갈리옷을 대신하여 사도로 선출된
|
5월14일(일) 음 4/19 살레시오 수녀회의 기초 聖女 도미니카 님
|
자녀 10명 가운데 맏이로서 어려서부터 본당의 여러 활동에 열심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육에 전념하셨던 님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