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헌 정태수의 서예이야기 10
왕희지의 천하제일 행서 난정서
중국에서는 어느 분야의 최고봉을 흔히 성인이라고 부른다. 서예의 경우 왕희지(王羲之, 303~361년,혹은 321~379년)는 서예역사에서 영원히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최고봉이다. 그의 생졸연대는 『진서(晉書)』「왕희지전(王羲之傳)」에 “나이 59세를 살고 죽었다”고 기록 되어있어 왕희지가 59세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생졸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많아 현재까지도 정설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다만, 고문을 참고하면 태평2년(303)~태원4년(379)에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세설신어』「경저」편 5에 “왕우군(희지)은 어렸을 때 일찍이 간질병을 앓았는데 1,2년에 한번 씩 갑자기 발병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자신의 신념을 직언하여 상대방의 잘못을 통철하게 간하는 기백 넘치는 골경(骨骾)기질을 지닌 인물로 칭찬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진석규의「보진방진표」 및 「연대고」를 보면, 함강 6년(340) 영원장군 ․ 강주자사를 역임하였고 양주자사였던 은호의 천거로 호군장군에 임명되었고, 후에 선성군의 태수라는 직책을 원하였으나 우군장군 ․ 회계내사로 임명되었다. 노일동의 「우군연보」에 의하면, 우군장군 취임시 영화7년(351) 이었다. 회계내사로 임명된 영화7년(351)부터 동 11년(356)까지 4년간이 그의 마지막 관직 생활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회계내사, 혹은 왕우군으로 부르고 있다.
왕희지의 대표작이며 천하제일행서로 불리는 작품이 <난정서(蘭亭序)>이다. 행서의 용(龍)이라 불리는 난정시서(蘭亭詩敍)는 왕희지가 50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으로, 고금의 서적 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353)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 하에 절강 소흥의 일류문사 42 명이 모였다. 이 날 26명의 문인들이 술잔을 띄우고 본인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짓는‘곡수유상(曲水流觴)’의 시회를 열었는데 얻은 시가 37수 였다. 이를 모아 난정집을 묶었다. 여기에 왕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이다. 즉석에서 324자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니고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장되어 7대째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를 존중히 여겨 "천하제일의 행서"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왕희지는 한, 동진 시대까지 질박을 추구하던 서예미감을 해서, 행서, 초서 모두 유려한 서풍으로 새로운 표준을 만들면서 당시 가장 아름다운 서예의 경지를 이루었기에 서성으로 추앙된다. 그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 집안의 서풍을 이어 받다가 위부인에게 서예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국 각처에 흩어져 있는 비석들을 보고 위부인의 필법과 비석필법의 장점을 융합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서예세계를 창출 하였다.
난정서는 여러 본이 전하지만 당나라 풍승소(馮承素)의 임서본을 최고로 여긴다. 풍승소 본은 오른쪽 상단에 신룡(神龍)이란 인장의 왼쪽 편만 보이기에 신룡반인본이라고 한다. 따라서 난정서를 임서할 때 이 신룡반인본을 구하여 임서하면 좋을듯하다.
*이 글은 서라별신문 2024. 2.7일 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