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아의 발견과 믿음
마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두 돌도 안된 어린 손자는 벌써부터 자기주장을 합니다.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가 응이라는 한 단어에 다 들어 있습니다. 벌써부터 자아가 생성되고 있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격언처럼 어릴 적에 형성된 자아는 일생을 좌우합니다. 자아가 어떤 환경에서 특히 주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형성되느냐에 따라서 성격이 달라집니다.
아기가 자라가면서 사랑도 미움도 배웁니다. 만약 자아가 없다면 자기주장도 없고 자기 삶도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철이 든다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을 알고 양심에 따라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자아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아 중심적이던 자아가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입는 순간입니다. 세상의 거짓과 위선으로 오염됩니다.
상처는 자아를 비뚤어지게 만듭니다.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이미 죄악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로 인해 비뚤어진 자아는 점점 더 죄에 사로잡힙니다. 예수님 당시 말씀에 충실하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이 교만에 떨어지게 된 원인이 바로 세상의 죄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의를 앞세우던 바리새인들의 자아는 교만과 위선에 떨어져 갔습니다.
불교에서 자아는 고통의 원천이므로 고통의 해결을 무아에서 찾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해탈이다. 고통을 끝내는 것이다.”(<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서) 자아가 무엇이기에 고통의 원천이 됩니까? 실패의 쓰라림, 성공의 자부심, 세상의 재물과 권력을 향한 집착은 모두 거짓 자아에서 비롯됩니다. 자아가 사라지면 이 모든 것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이러한 거짓 자아 대신에 참 자아를 백업해두셨습니다. 어린아이 시절의 순수함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참 자아입니다. 거짓 자아는 하나님조차 자아의 소원을 위한 방편으로 삼습니다. 마침내 참 자아를 발견한 사람은 비록 현실세계에서는 무기력하지만 자신과의 관계에서 만큼은 행복합니다.
마10:16“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요일5:18“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우리는 혼자 힘으로 이 세상의 악한 자를 이기지 못합니다.
요일5:5“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이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이 오긴 전에는 사람은 불안으로 말미암아 죄로 떨어져갑니다. 불안은 죄를 낳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후에는 불안은 우리 가운데 내려놓지 못한 것을 검색하는 도구가 되어 숨은 집착과 욕망을 드러나게 해줍니다.(키엘케골 <불안의 개념>) 불안은 우리가 내려놓지 못한 것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게 해줍니다.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길은 거짓 자아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참 자아로서는 가능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참 자아를 찾아내는 사명을 우리는 눈앞의 현실적인 욕구에 매달려 사느라 소홀히 합니다. 삶의 종착점에 이르러서 거짓 자아로 살아온 삶이 헛되고 헛된 삶이었음을 실감하는 날이 도래합니다. 왜냐하면 거짓 자아는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찾아낸 참 자아는 현실세계에서 무기력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또 다른 거짓 자아로 떨어지든지 아니면 믿음을 받아 들이든지 해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 나설 때 참 자아에게는 주님 생명의 기쁨과 능력이 주어집니다. 이제 참 자아는 이 세상을 이기면서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참 자아와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웁니다. 24. 10. 2 장기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