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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계명
20: 7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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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십계명의 제3계명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발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에 여호와인지, 야훼인지 히브리어의 정확한 발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여호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천주교에서는 야훼라는 단어를 갖고서 하나님을 호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3계명을 오해해서 하나님의 성호를 발음하지 않은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부르고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불경건한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매우 경건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신약성경도 기록하기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망령되이 불러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즉 오늘 본문에 기록된 제3계명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기는 부르되 결코 망령되이 부르지 말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말씀인 제3계명은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신앙의 자세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정신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12절을 통해서 이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을 가리켜서 신학적인 용어로 일명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내용의 핵심은 바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대접을 잘 받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대접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자만이 위에 계신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단 한번도 대접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대접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대접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앞으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의 봉사와 섬김으로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최고로 좋은 은사와 상급으로 대접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대신관계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남으로부터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잘 대접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갖고서 그들을 섬기고 인정할 때에 남들도 우리들을 인정해주고 따뜻한 손길을 펼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 모두 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노력하시고 또한 교회와 직장과 이웃에 살고 있는 성도와 동료와 친구들을 위해서 최선의 봉사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대접과 옆으로는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오는 따뜻한 동료애와 친절과 도움의 손길을 받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보시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이나 그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 믿음의 성도는 십계명을 귀중하게 여기고 날마다 묵상하는 가운데에 실제적인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십계명에 비추어서 여러분 자신의 삶의 모습을 항상 점검하시고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것들이 있다고 한다면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반성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의 복 주심을 늘 누리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제3계명의 적극적인 측면
먼저 제3계명의 적극적인 측면에 대해서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어 보실까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너’라고 하는 한 개인에게 명령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단체나 집단을 의미하는 ‘우리’에게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 ‘너’라고 하는 한 개인에게 제3계명을 주셨습니다. 즉 제3계명의 적극적인 측면은 바로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주기도문에도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제3계명의 적극적인 차원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릴 수가 있을까요?
첫째, 우리의 마음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고귀하고 존경스러운 이름으로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통칭하는 이름입니다. 그렇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가장 고귀하고 존경스럽고 아름다운 이름이 됩니다.
따라서 믿음의 성도들은 항상 마음속에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 가정의 가정이 되는 사람의 이름이 홍길동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의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홍길동이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한다면 그 가정은 필경 불행한 가정입니다. 또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아, 홍길동이라는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좋은 분이야!’라고 인정한다면 그 가정은 분명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최고로 고귀하고 존경스러운 이름으로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믿음의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믿어야만 합니다. 역시 이번에도 한 가정의 가장을 홍길동으로 치겠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를 기억할 때마다 “홍길동이라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야! 나의 아버지는 홍길동이 아니야! 홍길동이라는 사람은 내가 믿을 수
있는 아버지가 아니야!”라고 한다면 이것은 아버지를 매우 무시하는 불손한 태도입니다.
우리 피조물인 인간들도 이와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경건한 마음을 갖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모두 다 거짓말이야. 그리고 나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믿을 수 없어!”. 이러한 모든 것들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행동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베풀어주신 기적과 이적과 은혜를 믿는 자들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고 영광을 돌리는 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5장 23절을 보시면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요즈음 어떤 이단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여호와의 증인이 되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공경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항상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거룩하고 존 귀히 여기는 귀한 믿음의 삶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71편 8절을 보시면 다윗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를 찬송하고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시편의 기자는 입을 벌려서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에 대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담대히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어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구원받은 우리 믿음의 성도님들도 입을 벌릴 때마다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입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만드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입을 벌릴 때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불평하고, 어느 성도에 대하여 원망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곁에 있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동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남을 향하여 불평하며 원망하는 사람을 믿지 못할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입을 벌릴 때마다 구원을 베풀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음성을 통한 간절한 기도와 뜨거운 찬양이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높여 드릴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악기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인생의 여러 가지 시험과 환란으로 말미암아 어둡고도 깊은 눈물의 골짜기를 방황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해야만 합니다.
욥은 그토록 큰 시험 속에서도 욥기 1장 21절에서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고난 속에서도 찬양하고 높여드릴 때에 그것이야말로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갑절로 받는 신앙의 비결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입술로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뜨겁게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우리의 착한 행실로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마태복음 5장 16절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착한 행실을 통하여 이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출 때에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이 아침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서 우리의 삶이 보다 더 선해지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항상 선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비록 지금의 사회가 선하고 착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놀린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성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선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상의 조롱과 멸시를 피하기 위해서 덜 착하고 덜 선한 삶을 살아간다고 한다면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믿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실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에 보다 더 선하고 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만 될 줄로 믿
습니다.
다섯째, 우리는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을 보시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과실은 바로 전도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세상의 영혼들을 많이 전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릴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과거에도 전도할 생각이 없었고, 현재에도 전도할 마음이 없고, 미래에도 전도할 꿈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영광을 돌려 드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며 감격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전도를 안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증거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있는 모든 성도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증거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복음증거를 통하여 많은 전도의 열매를 거두어야만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전도부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부인들이 그 동안 전도한 사람의 숫자가 어느덧 120명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전도부인 1기 12분, 그리고 전도부인 2기 12분을 합하여 24명의 전도의 용사들이 그렇게 많은 전도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바라고 믿고 원하기는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 다 전도부인들처럼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구원의 열매를 추수하는 참으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섯째, 우리가 한마음으로 사랑의 교제를 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로마서 15장 6절은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가 세상적인 욕심으로 말미암아 분열이 일어나고 급기야 나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최근에 안타깝게도 몇몇 언론들이 목사들의 비리를 추적하여 방송에 내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도로 말미암아 한국의 기독교가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비리를 저지른 나쁜 목사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만 언론을 통하여 과장되게 보도하는 방송국과 신문사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교회에는 5만 명이 넘는 목사들이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정말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몇 타락한 목사들로 인하여 한국의 전 기독교가 오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인 삼성에서도 물건을 생산하면 필연적으로 몇 개의 불량품은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서로 비판하고 질책하기 보다는 모든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할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한마음으로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틀림없이 임하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2. 제3계명의 소극적인 측면
제3계명의 소극적인 측면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 3장 8절을 보시면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어가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혀를 잘못 사용하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과학적으로도 입증이 되었습니다만 사람이 혀를 가지고 식물을 자꾸 욕하고 나쁜 말을 사용하면 그 식물이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혀를 갖고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을 가로막는 신앙의 장애물이 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제3계명의 소극적인 측면을 잘 지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여기고 불경하게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아주 가볍게 생각하여 불경건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도 부모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그 함자를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의 성함이 홍길동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꼭 ‘홍’자, ‘길’자, ‘자’자라고 소개를 합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지존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어찌 가볍게 여기고 불경스럽게 부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제가 자세히 언급을 하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영어와 한국어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넣어서 ‘재수없다’는 표현을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대단히 불경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여기는 말들은 재미있는 농담일지라도 단 한마디도 쓰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무책임한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디도서 1장 16절은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입술을 갖고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믿는다고 고백하여도 실제적인 삶 속의 행위가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역사상 전 세계에서 가장 미움을 받고 있는 민족이 있습니다. 그 민족은 바로 유대인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상술이 뛰어나고 재물을 모으는 재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유대인등은 어디서나 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무책임한 삶을 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불경건한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2장 23-24절을 보시면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과도 같이 유대인들은 입술로는 율법을 가진 백성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어댔지만 실제적인 삶의 모습 속에서는 율법을 어기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다른 이방 민족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성도님들은 항상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입술을 통하여 자랑스럽게 고백을 하시되 거기에 합당한 실천적인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큰 영광을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악에 빠진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아는 척 하는 것도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불경건한 행동입니다. 사실 전도하기 제일 어려운 사람이 위와 같은 부류의 사람입니다. 거듭나지 않았으면서도 머리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정말 전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감동있게 본 「마르틴 루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잠깐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마르틴 루터가 어느 날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워있는 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어찌하여 이렇게 술에 취해 길에 누워있는가?”. 이때에 술에 취한 사나이가 품속에서 면죄부를 당당하게 꺼내 들고서 마르틴 루터를 향하여 대답을 합니다. “신부여, 나는 정당한 돈을 주고서 면죄부를 샀으니 나의 영혼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면죄부가 있는 한 나의 영혼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면죄부를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아는 척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스러운 태도로 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3-4절을 보시면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라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무시하고 기롱하고 조롱하였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잠언 19장 29절을 보시면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거만한 자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거나 농담처럼 조롱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죄를 합리화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불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께서 주일을 잘 성수하지 않는 성도를 향해서 “성도님, 왜 자꾸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으십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성도가 목사님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고 합니다.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 주일날에 돈을 버느라고 교회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갖고서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는 매우 불손한 태도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님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경외심을 갖고서 떨어야만 합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혹시라도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그 즉시 회개하고 고쳐야만 합니다.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권고하시고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넷째,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솔하게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34절을 보시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가급적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부득불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맹세할 때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바로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맹세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한 가정에 남편과 아내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서 바람을 피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눈치 챈 아내가 증거를 잡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남편의 잘못을 입증할 만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때에 아내는 최후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남편에게 사실을 이야기하라고 따질 수가 있습니다. 이때에 남편은 무조건 진실만을 이야기 해야만 하고 아내는 남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맹세할 수가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2절을 보시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2절에서 아주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사도 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유대인 40명이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 맹세는 바로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자신들은 그 어떠한 음식이라도 먹거나 마시지도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40명의 유대인들은 굶어 죽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자신들이 한 맹세를 스스로 어기고 배가 고프니까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물과 음식을 먹고 마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헛된 맹세입니다.
사사기 11장 31절에서는 입다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전쟁을 목전에 두고서 다음과 같은 무모한 맹세를 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결국 입다는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거두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집에 들어갈 때에 과연 누가 제일 그를 반갑게 맞이했는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버지인 입다를 환영하였습니다. 이때에 입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자신의 무모한 맹세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딸을 입다는 하나님께 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사람을 제물로 요구하신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제물로 흠향하시는 무자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입다라고 하는 한 사람의 무모한 맹세가 이처럼 엄청난 비극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위기와 시험이 다가왔을 때에는 하나님께 많은 맹세를 합니다. 이번 시험만 잘 통과하여 사업이 번창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물질을 올바르게 사용하겠습니다라고 맹세를 합니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사업이 성공하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한 맹세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믿음의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솔하게 맹세하지 마시고,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부득불한 경우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할 때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민수기 14장 27절을 보시면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고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을 먹이시기 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 생수가 터지는 기적으로 광야의 여정을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심히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감히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서 참으로 선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모두도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거나 원망하기 보다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난 세월 동안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항상 감사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오늘 본문 출애굽기 20장 7절의 후반부를 다시 한번 보실까요?
“-----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간사한 권모술수로 이 세상의 심판을 피한다고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공명정대한 심판의 법정은 그 누구도 감히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에 속한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신앙생활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고귀하고 존귀한 이름으로 마음속에 영원토록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의 입술을 벌릴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며, 무엇보다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으로 사랑의 교제를 풍성하게 나누어야만 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 다 일평생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 영광을 돌리는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