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재난 「가난(家難)」, 다 하늘에 달린 것이니 그 무엇을 근심하랴> 해암(海巖)고영화(高永和)
이번 주제 「집안의 재난, 가난(家難)」은 조선 개국공신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한문 고전수필(說)로, 『삼봉집(三峯集)』 권4(卷之四)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은 1375년 그가 먼 변방 전라도 나주로 유배 갔을 때, 아내가 보낸 서신 글에다가 답글을 적어 놓은 간단한 수필이다. 그는 여러 차례의 유배와 유랑생활 속에서 철저한 시련과 고독을 맛보았다. 그래서 ‘가난(家難)’이라는 글에서 그의 경제적 곤궁과 정신적 고독을 잘 보여준다. 당시 정도전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또 터무니 없는 구설수에 올랐는지도 잘 알 수 있다. 서신을 보낸 그의 아내는 경주 최씨로, 정도전이 19살 때 결혼을 했으니, 이때까지 15년 정도 결혼 생활을 이어갔던 조강지처였다.
○ 한편 고려말 1375년에 친원 정권은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라고 지시했다. 신진사대부 친명파였던 정도전(鄭道傳)은 "가서 사신들 목을 베겠다."고 말하며 거부했다. 이때 줄을 잘못 선 죄로 34살의 정도전은 유배형을 받았다.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을 가서 황연(黃延)의 집에 세 들어 살았다. 그는 2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여러 곳을 떠돌다가 6년을 보냈는데 그동안 나라가 더욱더 어수선해졌다. 마침내 1383년 가을에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홀연히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함흥에서 동북도도지휘사(東北道都指揮使)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 만났다. 새로운 조선을 건국하기 위한 용과 봉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 조선 개국 이후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한양 천도와 함께 조선의 본궁인 경복궁 건설에 참여해 그 이름을 짓고 새 나라의 틀을 만드는 등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디자인한 전략가로, 설계자로 유교적 이상 국가를 꿈꾸었다. 그는 이성계를 앞세워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고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백성의 삶을 안정케 했다. 그런고로 그는 고려말, 정치적 · 경제적 모순을 바로잡고 사회적 혼돈을 수습하려고 나선 사대부 혁명가요, 또한 실질적인 통치이념을 정립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 이 글의 주인공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유배형에 처하게 되었을 때처럼, 사람이 살다가 갑자기 나락에 떨어지면, 제일 먼저 주위 친구나 지인들의 비방과 배신에 맞닥뜨리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태어난 그 순간부터 호시탐탐 배신할 기회를 노리는 동물이다. 상황이 바뀌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래서 말인즉, “어쩌면 인간은 배신하기 위해 태어났는지 모른다.”
특히 왕조시대 조강지처 아내들은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가문을 위해, 한목숨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도전의 아내는 남편 정도전에게 하소연한다. “처자식이 추위와 굶주림에 울부짖어도 돌아보지 않더니, 이젠 유배형에 처해져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니 이 어찌 현인 군자라 하겠습니까?”라며 따진다. 정도전이 답하길, “부부의 도(夫婦之道)는 종신토록 변하지 않으니 그대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한다. 각각 자기 직분을 다할 따름이다. 또한 모든 영욕과 득실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 고로 그 무엇을 근심하겠소.”라고 답했다.
○ 정도전은 당시의 세계질서에서 보면 그는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그러나 그는 백성을 구원의 대상, 계몽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가 유배지에서 접한 백성들에게 친구 같은 따뜻한 애정을 느낀 것은 그에게 분명 색다른 경험이었겠지만, 한편으론 백성들의 한계를 본듯하다. 그래서 ‘위민(爲民)’이 최우선이긴 했지만, 백성이 통치 대상인 공자의 백성관을 철저히 따랐다. “대개 백성들은 뛰어난 자를 믿고 복종할 줄만 알았지 도(道)의 사정(邪正, 옳고 그름)은 모른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니, 바람이 불면 풀이 반드시 눕는다”라는 공자의 통치 사상을 따랐던 유학자였다. 물론 아시다시피 요즘 현대사회에서는 시민이 나라의 주권자로 행동하고 책임을 지는 시민(市民, 인민) 사회이니만큼 그때 왕조시대와는 전혀 다르다.
◉ 신흥사대부 친명파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원나라 사신의 영접을 거부하여, 유배형을 받고, 1375년 34살 때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을 갔다. 가난과 외로움에 삶이 힘든 시기에, 그를 헐뜯는 시비와 비방이 벌떼처럼 들끓었다. 때마침 아내의 서신이 도착했다. 이에 집안을 근심하는 아내와 나라를 걱정하는 정도전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엮은 글에다 가난(家難)이란 제목을 붙였다.
덧붙여, 정도전에게는 세 아들, 진(津), 유(游), 영(泳)이 있었다. 이들 중 두 아들 유(游)와 영(泳)은 이방원의 제1차 왕자의 난 때 기습군에 참살되었다. 그러나 큰아들 진(津)은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이태조가 창건)로 가는 중이었으므로 목숨을 건졌으며 진(津)의 아들 래(來)가 경기도 평택에 은거하여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대를 이었다. 정도전이 죽은 지 18년이 흐른 후인, 1416년 태종 16년 6월 26일에 태종이,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鄭津)에게 직첩을 돌려주라”고 명하여 집안을 대대로 보전할 수 있었다.
◉ [한문학 문체(文體) 기(記)] 한문 고전수필에는 대표적으로 설(說)과 기(記)가 있다. 설(說)은 이야기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의견을 서술하면서 이치를 설명하는 교훈적인 ‘한문 수필’이라 정의할 수 있다. 반면 사실 그대로 적는 한문 문체를 기(記) 또는 기문(記文)이라고 부른다. 사물을 객관적인 관찰과 동시에 기록하여 영구히 잊지 않고 기념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둔 글이다. 다른 한문 양식과 비교하여 기의 문체적 특징을, ‘감상을 주로 적는 부와 비슷하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논과 비슷하면서도 단정 짓지 않는다. 사건의 자취와 관련하여 요지를 드러내는 서(序)와 비슷하면서도 처음이나 끝부분만 가볍게 다루지 않고, 사적을 기억하기 위해 새기는 비문과 비슷하면서도 칭송하지 않는다.’고 한다.
● 다음 잡저(雜著) 「집안의 재난, 가난(家難)」은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원문이다. 정도전은 유배와 유랑생활 속에서 궁핍한 삶과 철저한 고독을 맛보았다. 여기 ‘가난(家難)’이라는 글에서 그의 경제적 곤궁과 정신적 고독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정도전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또 터무니 없는 비방과 비웃음에 노출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의 아내는 경주 최씨로 정도전이 19살 때 결혼을 했으니 당시 15년 정도 결혼 생활을 함께 보낸 처지였다.
그가 전라도로 유배를 가자, 그의 부인이 말하길, “경이 독학(篤學)하며 가족을 돌보지 않더니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은 더럽혀졌으며, 행적이 깎이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 가서 풍토병이나 걸리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망하였다”고 남편을 원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유배지에서 화려한 벼슬길보다 더 큰 교훈을 얻었다. 그가 부인에게 말하길, “예전의 내 친구들은 정이 형제보다 깊었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구름처럼 흩어졌다.”고 답한 것처럼 그는 친구들을 잃었지만 대신에 진솔한 민중을 발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섬기듯 신하는 나라를 섬기는 것’이라며 각자의 소임을 다하자고 답한다.
*<집안의 재난, 「가난(家難)」 원문>* 정도전(鄭道傳 1342~1398)
내가 죄를 얻어 쫓겨서 먼 남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니(竄逐), 나를 헐뜯는 비방(毁謗)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구설(口舌, 시비와 비방)이 주장(譸張, 허위로 떠드는 것)하므로 앞으로 닥쳐올 화(禍)를 측량할 수 없었다.
마침 아내(室家)가 두려워서 사람을 보내어, 내게 말하기를, “경(卿)이 평일에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여(孜孜) 아침에 밥을 짓는지 저녁에 죽을 쑤는지 몰랐으며, 집이 곤궁하여 항아리에 한 섬 곡식도 없어 아이들이 기한(飢寒, 배고픔과 추위)에 울부짖을 때, 내가 안살림을 맡아(中饋) 끼니를 겨우 이어간 것은 경이 독학(篤學, 학문에 충실)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처자식들이 바라보고 힘을 입으며, 문호의 영광을 일으키게 하리라 하였더니, 마침내는 나라의 형법(憲綱)에 걸려 이름이 욕되고 자취가 깎여서 몸이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 독한 장기(瘴氣, 더운 땅의 독한 기운)를 들이마시고서 형제가 나가 쓰러지고(顚踣) 가문이 분산되어(蕩析),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렇게 극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현인 군자(賢人君子)도 정말 이렇게 되는 수가 있나요(固如是乎).” 하였다.
내가 답장하기를, “그대의 말이 진실로 그러하다. 내가 친구가 있어 정이 형제(弟昆)보다 나았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고는 뜬구름같이 헤어지니,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력으로써 친하였고 은혜로써 친한 것이 아닌 까닭인가보다. 부부의 도(夫婦之道)는 한번 초례(醮禮, 혼례)를 올리게 되면 종신토록 변하지 않으니,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함이며 나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이 이치는 허망하지 않고(無妄), 오직 하늘에서 얻은 것이다(同得乎天).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할 것이니 여기에 어찌 다른 일이 있겠는가. 각각 자기 직분을 다할 따름이다(而已矣). 그리고 대개 성패와 이둔(利鈍, 날카로움과 무딤)과 영욕과 득실 같은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무엇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自予得罪 竄逐南荒 毁謗𧒒起 口舌譸張 禍且不測 室家慞惶 使謂予曰 卿於平日 讀書孜孜 朝饔暮飱 卿不得知室如懸磬 甔石無資 幼稚盈堂 呼寒啼飢 予主中饋 取具隨時 謂卿篤學 立身揚名 爲妻子之仰賴 作門戶之光榮 竟觸憲綱 名辱迹削 身竄炎方 呼吸瘴毒 兄弟顚踣 家門蕩析 爲世戮笑 至於此極 賢人君子 固如是乎 予以書復 子言誠然 我有朋友 情逾弟昆 見我之敗 散如浮雲 彼不我憂 以勢非恩 夫婦之道 一醮終身 子之責我 愛非惡焉 且婦事夫 猶臣事君 此理無妄 同得乎天 子憂其家 我憂其國 豈有他哉 各盡其職而已矣 若夫成敗利鈍 榮辱得失 天也非人也 其何恤乎]
[주1] 현경(懸磬) : 그릇 속이 빔. 집안이 가난하여 아무것도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주2] 중궤(中饋) : 주궤(主饋). 집안의 안살림에서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 주장(主張)하는 여자 중궤(中饋).
[주3] 입신양명(立身揚名) : 출세(出世)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침.
[주4] 탕석(蕩析) : 망(亡)하여 뿔뿔이 흩어져 없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