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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전도자중의 한 분이셨던 고 빌리그래함목사님은 아들과 자신의 산책가운데 경험했던 한 가지 일로 성탄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아들과 함께 오솔길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오솔길에는 지난 밤 큰 비가 내려 개미집이 무너져 개미들이 비 피할 곳을 찾다가 산책나온 사람들의 무심한 발걸음에 밟혀 죽은 개미 사체가 이곳저곳에 즐비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빌리그래함 목사님 아들은 개미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아버지, 개미들이 불쌍해요. 개미들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아들의 착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무슨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아, 사람이 개미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단다. 아무리 개미들에게 위험을 알려도 개미들은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사람이 개미가 되어 개미에게 위험을 알리는 방법이 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방법이란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개미가 되어 개미에게 위험을 알려주고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불가능한 일이 우리 인간 세상에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은 하늘보좌를 내놓으시고 이 낮고 낮은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성탄이 바로 그 사건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날,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진 날입니다. 신이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으로 오셨습니까? 인간들이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야말로 이 사건은 인류 역사 가운데서 가장 최대의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탄은 ‘온 인류에게 미치는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약 2천 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모든 사람들이 기뻐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보면 성탄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에 잘못된 반응을 보인 첫 번째 사람은 헤롯왕입니다.
마태복음 2장 13절입니다.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헤롯왕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의 거처를 알려주지 않고 떠난 것을 알고 당장 그 시간에 그 땅에 있는 갓난 아이들을 다 잡아서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헤롯은 유대 땅에 태어난 메시야, 구원자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 지 잘 모르기에 그냥 무작정 태어난 일시를 기준으로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헤롯왕은 자신의 권력,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아내도 죽이고, 처남도 죽이고, 장모도 죽였던 무지막지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자신의 왕위는 아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당연한데 그 왕위를 아들이 차지할까봐 자기 아들도 죽였습니다. 이런 권력집착형의 왕 헤롯은 이제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될 것 같은 존재인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 근방 두 살 아래 남자아이들을 남김없이 다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헤롯들이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들어오고 어느 정도 민주화가 찾아온 듯 했던 중국도 공산주의를 버리지 않고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예수님을 핍박합니다. 교회를 핍박합니다. 2018년 중국 정부는 중국 내에서 성탄절 관련 장식을 금지하고 성탄절 시즌에 축제를 벌이는 것을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2018년 12월 19일자 홍콩지역 신문에서 중국 대륙에서 지하교회 단속에 열을 올렸고 ‘크리스마스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들 매체에 따르면 중국 베이징 인근 도시인 랑팡시 도시관리국은 공문을 보내 도시 내 모든 상점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운다든지 장식이나 조명 등으로 크리스마스 판촉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사회 안정을 해친다는 이유로 야외 크리스마스 공연이나 종교활동을 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했으며 시민들은 주변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경우 즉시 신고하도록 공포했습니다. 이후 중국 최고 지도자인 시진핑은 그 이후 중국헌법을 바탕으로 크리스마스에 관련된 모든 행사를 금지했다고 합니다. 이후 지금까지 중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성탄절 분위기를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공산주의자들은 현대판 헤롯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북한은 대단히 폐쇄적 사회를 만들며 김씨 일가 주체사상을 심어주며 김일성과 그 후손을 우상화하여 신으로 삼은 종교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김일성 외에 어떤 신도 존재할 수 없는 사회로 만들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회를 없애고 성경을 불태우고 예수믿는 성도들을 처형하는 완전 현대판 헤롯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슬람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이념으로 기독교를 막고 있는 헤롯왕과 같은 사회가 여전히 이 땅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처참하게 박해했듯이 여전히 이렇게 기독교를 방해하며 예수 탄생을 부정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런 악한 사회, 이런 악한 인생이 사라지기를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에 잘못된 반응을 보인 두 번째 사람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마태복음 2장 5,6절입니다.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그들은 말로는 메시야 탄생을 기다리며 지식으로는 구원자가 이 땅에 태어날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을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헤롯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찾았고 헤롯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라는 메시아가 어디서 탄생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구약 성경 미가 5장 2절을 근거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성경 구절을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미가 5장 2절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고 메시야가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서 나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잘 알면서도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고 동방박사의 경배를 받았다고 알려졌고 수 많은 징조들로 예수님 탄생에 대해 알렸는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아무런 감동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대로, 그들이 깨달은 말씀대로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믿었더라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달려가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탄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마음에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까? 그저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성탄을 지키는 우리가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알고 있고 말씀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전혀 예수님에 대한 감동도 감흥도 없다면 그야 말로 우리의 성탄절 예배, 우리의 성탄지식에 대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에 잘못된 반응을 보인 세 번째 사람들은 예루살렘 시민들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장 3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3절을 보면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의미도 알지 못하고 시끄럽고 떠들면서 분주하게 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성탄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소동이 일어나고 시끄럽게 돌아다녔습니다. 오늘날에도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거리에서, 상점에서, 백화점에서, 술집에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기분이 들떠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성탄절을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면서 거룩하고 성스럽게 감격과 감동으로 은혜에 감사하며 보내는 날이 아니고 성적인 죄를 짓고 쾌락에 빠져 흥청망청 지내는 날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고 세상 사람이 주인이 되었고 세상 공중권세잡은 사탄마귀가 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헤롯왕처럼 아기 예수 탄생을 거부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인들처럼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아무런 감동도 없이 성탄을 지키는 사람도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시민들처럼 성탄 의미도 모른 채 마음만 들떠서 떠들썩한 성탄시즌을 보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탄의 의미를 찾고 의미에 합당한 기쁨으로 성탄을 맞이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그럼 우리는 어떻게 뜻 깊은 성탄시즌을 보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의 모습에서 성탄을 제대로 맞는 우리들의 자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성탄시즌을 제대로 보내기 위해 첫째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장 1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동방박사들은 먼 동방으로부터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의 움직임을 연구하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특별하신 분이 태어나실 것을 발견하고 예루살렘까지 찾아왔습니다. 산넘고 강건너 사막을 지나 이스라엘까지 찾아 왔습니다. ‘동방’이라고 표현된 그 땅은 아마 지금의 이란, 이라크지역 즉 중동지역 중에서도 동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지금도 이 정도 거리는 가깝지 않은 꽤 먼 거리입니다. 지금도 비행기를 타고서도 3시간 정도 걸리는 이 먼 땅을 별이 인도하는 대로 밤에만 움직여 이스라엘 땅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인류를 구원할 왕을 찾아 지금도 쉽지 않은 그 먼 거리를 고생하며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먼저 왕으로 태어나실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도시, 이스라엘의 왕이 사는 도시인 예루살렘을 먼저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만난 이스라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서 선지자 예언을 듣게 되었는데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유대땅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들레헴을 찾아 갑니다. 동방의 먼 나라에서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거쳐 베들레헴으로 다시 내려가는 험란한 여행길, 고생스러운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이런 수고와 희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불굴의 신앙, 끈질긴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150여 년 전 복음이 들어와서 일제 강점기 초반까지 한국 기독교 신앙 1세대, 2세대 믿음의 선배들은 10리, 20리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예배당에 출석했습니다. 그렇게도 먼 거리를 낮에도 예배드리고 밤에도 예배드리기 위해 오고가는 불편함을 감수했습니다. 간절하게 교회를 찾아와 말씀도 사모하며 찬양도 간절했고 기도도 절실했습니다. 예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불과 30년 저, 40년전까지만 해도 이런 신앙의 모습이 교회의 보편적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 우리들의 신앙모습은 어떻습니까? 예배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배드리기 위해 수고와 노력을 감수하며 절실히 예배드리려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기보다 그냥 집에서 쉽게 TV, 컴퓨터, 스마트폰 동영상등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데 왜 굳이 교회를 찾아가냐고 말하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예배 한 번 빠져도 별 대소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런가보다 넘기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려는 의지가 없어졌습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을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너무 간소화된 것이 사실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보여주었던 그 끈질긴 신앙이 우리들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불굴의 신앙!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아니하면 살 수 없다”는 신념과 끈질긴 일편단심의 신앙으로 살아가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을 꼭 만나야 우리가 복된 인생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찾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둘째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 경배했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이 마리아에게 엎드려 경배했습니까? 아닙니다.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마리아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아기 예수님을 낳아준 마리아에게 경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에는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고 모든 행사의 초점은 예수님께 맞춰져야 합니다. 사람이 높임을 받는다든지 사람들이 박수받고 칭찬받는 성탄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만 즐거우면 되는 성탄절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박사면 많이 배운 사람들이 아닙니까? 나이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은 그들의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는 결혼식 주례를 할 때도 박사가운을 입고 박사모까지 쓰면서 자신의 학위를 자랑하는 시대입니다. 자기의 명예와 지식,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동방박사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을 칭찬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11절에 “보배합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길을 떠날 때부터 정성스럽게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선물, 보배합을 미리 준비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옷 속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어 예수님께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 먼 거리를 오면서 미리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출발지에서 보배합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와서 아기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이 예물들은 영적 해석이 어떻든지 간에 가장 정성스럽게 준비한 예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성탄을 맞는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은 정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 마음과 물질로 정성드려 경배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보다 스무살, 서른 살 정도 더 나이가 많으신 부모님 세대, 그리고 지금은 거의 돌아가신 저의 할머니, 할아버지뻘 되는 어르신들이 신앙생활하실 때 헌금하시는 것을 살펴보면 헌금하기 위해 정성드려 미리 준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완전히 새 지폐가 들어오니 그 새 지폐를 사용하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다가 헌금으로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원짜리 지폐, 만원짜리 지폐, 오 만원짜리 지폐가 새 것과 헌 것이 돈 가치가 달라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선배들은 왜 그렇게 헌금했을까요? 마음에서 드려지는 그 정성이 그렇게 표현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돈이 조금 구겨진 것 같아서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시 펴서 드리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만큼은 정성스럽게 드려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돈 액수가 많고 적고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정성스럽게 헌금을 준비하여 드리는 것이 50년 전, 60년 전 저희 할머니 세대 신앙인들의 헌금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와 같은 정성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지갑 뒤져 헌금내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라도 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어떤 경우는 그냥 호주머니속에 꾸깃꾸깃 넣어진 동전 몇 개 헌금함에 넣을 때도 있는 것이 요즘 교회들 예배시간 헌금하는 모습이 아닙니까? 심지어 ‘그냥 편하게 폰뱅킹으로 보내면 되는데 뭘 굳이 미리 헌금봉투를 준비하냐?’라는 분들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어떤 유명인에게 선물을 드리려고 준비한다고 가정해 봅시도.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 내가 존경의 표시를 해야 하는 권력자, 내가 존경하는 어느 선생님께 선물을 드리려고 할 때 그냥 지갑에서 갑자기 돈 꺼내 만원짜리 한 장, 오 만원짜리 한 장 그냥 쑥 내밀 수 있을까요? 하물며 만왕의 왕이며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는데 어떻게 정성 없이 되는 대로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예배하며 경배할 때 동방박사들이 보여주었던 그 정성으로 드려질 수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마지막 셋째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고 예수님을 보호하며 고국에 돌아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것을 만 천하에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장 12절입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박사들은 헤롯왕이 예수를 찾거든 돌아가는 길에 자기에게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왕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다른 길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는 길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살다가 보면 우리 마음속에 헤롯의 음성이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아라. 다른 길로 돌아가라.” 뜻 깊은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과거의 구태의연한 모든 모습을 떨쳐 버리고,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시는 길로만 삶의 방향을 바꾸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목사님, 손양원목사의 삶을 보십시오. 세상 기준이 아닌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속에 참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으로 유명하신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치하 때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시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려 갔습니다. 일본 검사가 “일본 천황폐하의 명을 거역하다가 어떠한 벌을 받는지 너는 모르느냐?”라며 위협했습니다. 그 때 손양원 목사님은 “세상 나라의 왕의 명을 어겨서 내가 이런 벌을 받는데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을 어기고 내가 신사참배를 한다면 나중에 내가 얼마나 큰 벌을 받겠소?”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가 보면 우리 마음속에 헤롯의 음성이 들려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헤롯에게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그 길은 사망의 길이요, 멸망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지시해 주시는 길로만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시해 주시는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요, 축복의 길인 줄로 믿습니다. 그 옛날 동방 박사들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성탄절을 맞이했는 지를 보면서 우리가 성탄절을 어떻게 바르게 지킬 수 있는 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미리 정성껏 준비해 간 보배합을 열어서 최상의 선물을 예수님께 드리면서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조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동방박사들의 모습처럼 우리 신앙도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경배하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올해 성탄절을 맞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성탄절을 맞이하고 성탄의 의미를 기억하고 있는 지 우리가 성탄절 시즌에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가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무엇보다 성탄의 주인공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만나고 인격적으로 만나고 이 땅에 나를 살리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기뻐하며 예수님을 위한 성탄절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동방 박사들이 처음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한 것처럼 우리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도 기쁨으로 영접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를 다짐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 소동을 부리거나 당황해하는 예루살렘 시민들처럼 오늘 날 성탄절을 흥청망청 떠들썩한 성탄절로 만드는 어리석은 세상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성탄절의 의미를 망각한 채 이 시즌 술 취해 떠들썩하고 시끌벅적한 날, 쾌락에 물든 날로 변질시켰다고 할지라도 우리들까지 그들과 함께 흥청망청 마음이 들떠서 이 성탄절을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옛날 성탄절에 예수님을 싼 강보, 예수님을 누윈 구유가 예수님 때문에 가치있는 존재가 된 것처럼 우리의 삶에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가치있는 인간, 가치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님이 계시면 우리 삶은 살아나고 우리 생애는 기쁨이 넘치고 생명이 있는 인생, 가치있는 인생, 멋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모시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을 기뻐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