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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고, 산 넘어
<프롤로그: 우물안의 기타맨>
나는 하반하 9기 학생들 중에서 가장 나이 및 학력이 높고 대장님를 제외한 유일한 군필자 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 재즈기타를 전공 했으며 전공을 하며 학교 공부나 생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성적은 늘 바닥이였다.
나는 입시를 앞두고 연습이 잘 되지않는 슬럼프와 주변의 수많은 방해들을 이기지 못하고 제일 좋아하던 기타를 그만두게 되었다.
고3 이라는 시기와 대학에 가야된다는 주변의 환경 속에서 나는 줏대없이 주변 환경에 휘둘려서 내가 그나마 관심이 있던 동물에 관련 과를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 가서 매일 술마시고 놀러 다니는 등 발전없는 생활만 반복하다가 2학년이 될 무렵 하나둘 씩 취업에 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취업을 해야된다고 결심을 하고 취업의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준비가 되있지도 않던 나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들과 전혀 알아주지 않는 사장님 때문에 결국 일을 그만두고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군대에서도 수많은 일들을 겪었고 점점 전역의 때가 다가오자 그때부터 미래를 다시 고민하게 되었고 그러다 아직 마치지 못한 대학기간이 아까워서 복학을 하겠다고 결심을 했다.
또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이라는 꿈만 가진 체 아무 발전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졸업을 하고 집에 돌아오게 되었고 이제 취업을 시작해야만 한다는 마음은 있지만 아무런 실천도 하지 않던 나에게 어머니께서 ‘하반하’에 대해서 소개시켜주셨다.
나는 처음엔 취업을 해야된다는 핑계로 수차례 거절을 했지만 지금까지 버려진 시간들을 보며 도전하지 않는 나에게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되어서 하반하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1. 방장: 앞서가는 리더.>
나는 지금 껏 살아오면서 ‘방장’ 이라는 호칭을 게임 속에서를 제외하곤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수많은 합숙 생활을 경험해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덧 하반하에서 방을 대표하고 책임지는 ‘방장’ 이라는 역할에 서게 되었다.
나는 과거에 ‘방장’ 이라는 호칭은 아니였지만 군대에서 ‘생활관 대표병’이라는 자리를 맡아본적이 있었기 때문에 방장이라는 역할 또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반하 에서의 방장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였다.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이 너무 꽉막힌 생활보단 자유롭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아무런 룰이나 제한을 걸어두지 않았고 그로 인해서 여러 문제들이 하나둘 피어났다.
한번은 잠을 제 때에 자지 않아서 일어난 일들이다.
하반하에는 11시 취침이라는 기본적인 룰이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취침시간을 조금 어긴다고 해도 스스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취침시간이 되어도 아이들에게 잠을 자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한두번 누적이 되다보니 아이들은 취침시간이 되기 전에는 실컷 놀며 떠들다가 취침시간이 되고 나서야 미뤄놓은 일들에 시간을 쓰기 시작했고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결국 취침시간을 어기면서까지 썼던 일기를 늦게 일어나서 Time missed 를 받기도 하였고, 취침시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방에 불이 켜져있다보니 그것을 발견한 선생님에게 단체로 기합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로 우리방은 선생님들께 취침시간 감시대상 순위에 올랐고 다른 방들 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지켜야만 했다.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나의 마음 때문에 자유는 점점 속박이 되어가고 있었다.
좋은 리더는 팀원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가 지켜야할 룰에 대해서는 철저하고 엄격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 계기였다.
함께 생활을 하는 방에서는 혼자서 지낼 때보다 더 깔끔하게 지내야 하며 쾌적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군대에서는 가뜩이나 더티한 남정내들이 한 방에서 지내기 때문에 정리하는 것에 있어서도 룰이 존재하고 하루에 2번 이상은 깨끗하게 방(생활관) 청소를 실시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호르몬이 왕성한 20대 초반의 남정내들의 냄새는 코를 찌르는 고약한 악취로 마치 화생방을 방불케 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1일 1샤워는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취침시간에 보고를 한 뒤에 샤워를 할수 있는 ‘샤워 연등’ 이라는 천상의 서비스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하반하에서는 샤워 및 청소,정리정돈을 권유하기는 하지만 군대와 다르게 강압적인 시스템은 아니기 때문에 지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았다.
마치 물건을 팔듯 자신의 모든 물건을 펼쳐놓은 아이부터, 일주일에 한번 씻는 아이, 한달에 한번 청소를 하면 엄청 깔끔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과 간혹 사람이 아닌 스컹크와 생활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대는 친구들 덕분에 우리의 방은 쾌적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방은 남들이 방문하기를 꺼려하는 방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정도 심각성을 느끼고 창문을 열어 환기도 하고 방 정리와 공동공간 청소도 해보았지만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넣어도 뒤돌아보면 다시 쓰레기가 생겨있는 놀라운 마법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화장실 변기엔 누군가가 초코잼을 발라두어서 나와 종종 눈을 마주치는 경우도 생겼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가 결국 우리방은 깨끗하게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체 페널티를 받게 되었다.
나는 방장으로써 충분히 아이들을 관리하고 규칙을 정해서 지키게 할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생들에게조차 확실하게 말할수 있는 자신감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내가 방장을 할 때면 항상 선생님 앞에선 깍듯했던 아이가 내 앞에서는 편하게 욕도하고 장난도 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터라 욕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학생 때 내 친구들은 욕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하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처음애는 무의식처럼 툭툭 내뱉는 욕설과 장난에 대해서 나는 아이들의 습관이라 무의식중애 실수로 나올수도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하고 지적하지 않았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내 앞에서도 서스럼 없이 욕을 하는 빈도가 늘어나면서 점점 일반학교에서나 보았던 심각한 언어 문제들이 보이기도 했다.
그저 실수라고 생각하고 지적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군대에서도 후임의 잘못에 지적하는 것을 잘하지못했다.
그래서 후임들에게는 가장 편한 선임 이라는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선임이나 동기들에겐 약간 답답한 사람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한번은 동기가 나에게 “야 너 후임 인사도 안하고 지나가더라” 라고 이야기 하면 나는 “니가 선임같이 안생겼나보지” 라며 책임을 회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선임 중에서 한명은 매일같이 후임의 잘못을 지적하지만 오히려 후임들에게 좋은 인상은 물론 존경까지 받는 선임도 있었다.
그 선임은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서 항상 완벽했기 때문에 지적할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활하는 것에 있어서 깔끔함은 물론이고 자신의 주분야가 아닌 것들도 왠만큼 해내는 자신감을 경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선임은 누구나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 이였다.
결국 나는 하반하에서 아이들을 옳은 길로 이끌어 주지 못한 이유는 나조차도 제대로 된 모습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만났던 그 선임처럼 내가 지금 이러한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선 내가 맡은 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해내는 책임감과 끈기가 필요하다고 배운 계기였다.
<2. 워커팀장: 험한 길을 택하는 사람.>
하반하 내에는 3개의 워커가 존재하며 이를 다스리는 워커 3대장이 있다.
먼저 최고의 재료를 공수해오는 시장워커 팀장과 그 최고의 재료를 이용하여 최상의 요리로 탈바꿈 시켜주는 요리워커 팀장, 마지막으로 그 최고의 요리를 모두 먹은 뒤 뒷자리를 천상의 상태로 만들어놓는 뒷정리워커 팀장까지 말이다.
내가 하반하에 와서 가장 처음 맡게 된 것은 시장워커 팀장이였다.
나는 시장워커 라는 것이 3가지 워커들 중에서 가장 쉽고 단순한 일 이라고 생각했다.
마트에 가기 전에 필요한 식재료를 생각한 후 마트에 가서 그 재료들을 사오는 아주 단순한 일 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마트애 가서 더 좋은, 더 싼 재료를 선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는 나라의 언어와 물가까지도 고려할줄 아는 눈이 필요했다.
나는 암기하는 것에 있어서는 소질이 별로 없어서 영어는 물론이고 수학 까지도 초등학교 5학년 시절에 구구단을 암기 해야하는 순간부터 포기했기 때문에 숫자와 언어가 가장 중요한 시장팀에서 적응하기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심지어 그나마 배웠던 영어를 사용할수 있는 미국마트에서 마저도 나는 소금을 찾기위해 돌아다녀 봤지만 내 발음이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salt’ 라는 아주 쉬운 단어를 이야기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직원 때문에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
결국 휴대전화에 타자를 쳐서 겨우겨우 소통을 하기도 했지만 원활하지 못한 소통 때문에 매번 시장을 가면 누군가가 말을 걸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품고 기죽은 듯이 지나 다녔다.
또, 시장팀에게 요구되는 것은 강인한 체력이다.
매번 시장에 가서 26인분의 식재료를 사올 때면 시장팀 한명이 들어야 되는 무게는 과장을 아주 조금 보태서 20kg에 웃도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였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에 있을 때에도 여러 방법을 통해서 열외를 했었다.
아프다고 하거나 남은 작업이 있다며 열외를 하거나 혹은 조깅을 뛸 때 맨 뒤에서 뛰다가 살며시 뒤로 빠지면서 걷는 등 말이다.
하지만 하반하에서는 그럴수가 없었다.
시장팀의 인원이 너무 적어서 내가 없어지면 단번에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내가 없어지면 누군가는 내 몫을 들고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시장워커를 하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고 어려워하는 것에 부딧혀야 했다.
한참을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들과 싸우다가 나는 요리워커의 자리로 보직교체 되었다.
나는 집에서 지낼 때 혼자서 요리를 먾이 해먹었었기에 시장팀보다는 훨씬 쉬울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요리워커는 어떤 음식을 만드는지 먼저 판단하고 만드는 음식에 따라서 다른 손질방법을 익혀야 한다.
또 확실한 역할분배는 물론이고 요리쁀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해내는 센스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음식이 완성되고 테이블애 놓여지는 그 순간까지도 요리워커의 일이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애겐 쉬운일일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요리와는 상상도 할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나 혼자서 먹거나 가족들이 먹을 정도의 양만 요리해봤던 내겐 26인분의 요리를 하는 것은 양 조절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재료를 모두 사용하며 남은 음식들 또한 활용을 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했기에 많이 깨졌었다.
한번은 냉장고에 남은 음식을 확인하지 않아서 나 때문에 아이들이 모두 김치를 못먹는 사태도 일어났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 행동을 하지 않았기 많은 아이가 피해를 봤고 그로 인해서 눈총을 받기도 하였다.
어쩌면 가장 쉬운 사소한 일 하나가 나 뿐만이 아닌 모두에게 피해를 줄수도 있다는 것이였다.
그러다가 나는 뒷정리 워커의 팀장이 되었다.
뒷정리워커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설거지와 밥 먹었던 자리, 사용한 식기들을 전부 제자리로 가져다 놓아야 되는 일이다.
나는 뒷정리 워커가 다른 워커에 비해서 가장 머리를 안써도 되는 아주 단순한 작업이라고 생각했기에 가장 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설거지와 마감을 하는 알바 경험이 있기에 더욱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남들과 다르게 나는 군대에서 400명이 넘는 식기들과 뒷정리를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26인분쯤 청소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뒷정리 워커의 팀장으로 일을 하니 경험의 효과인지 나에게 어려운 것은 정말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일을 잘 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나를 자극하거나 성장시키는 것은 다른 워커들에 비해서 훨씬 적었다.
내가 할줄 아는 것을 그대로 하는 것은 나를 많이 성장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잘 못하거나 삻어하는 것을 했을 때 나를 새롭게 성장시키는 것이였다.
살다보면 장애물을 만나가도 하고 그 장애물에 걸려서 넘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장애물이 무서워 피하다보면 앞으로 전혀 나아가지 못한다.
장애물때문에 나를 앞으로 그자리에 머무르게 하지말고 한 걸음씩 천천히 전진하며 장애물을 극복하는 내가 돠어보자. 처음엔 크고 높은 장애물일지 몰라도 하나둘 넘다보면 두 번째 세 번째 장애물은 더 쉽게 넘을수 있을 것이다.
하반하에서 겪은 이 경험이 나중에 만날 다른 장애물을 넘는 디딤돌로 사용되도록 열심히 앞으로 나가야겠다.
<3. 외출팀장: 쉬운 길에서 방심하지 않는 사람.>
하반하에는 오래 전부터 혹시모를 사고애 대비하여 외출시엔 항상 선생님이 동행을 해야한다는 규칙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이가 가장 많다는 이유로 선생님들만이 하고있는 외출 팀장에 서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실내활동을 주로 하던 내가 하반하에 와서 동생들을 이끌고 돌아다녀야 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을 것 이라고 생각했고 그 우려가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다.
한번은 아르헨티나에서 지내다가 이동을 하는 마지막 날에 일어났던 일이다.
우리는 아르헨티나에서 지내며 매일 저녁식사를 방 멤버들과 정하고 만들어서 평가를 받는 요리경연대회를 하고 마지막 날에 지금까지 고생했다며 대장님께서 충분한 돈을 주시며 오늘 이동이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오라고 하셨다.
하지만 주변의 식당들을 알아보고 양을 비교해봐도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원하는 음식을 풍족하게 먹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뜩 앞에 보이는 마트를 보고 순간적으로 우리가 과자파티를 한다면 원하는 만큼 먹을수도 있고 먹고싶은 것을 직접 선택할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마트에 들어갔고 역시 예상대로 과자를 먹는 것이 훨씬 저렴하며 많이먹을수 있어서 이득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밥 대신 과자파티를 하자고 제안하고 과자를 사서 빈 공터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은 돈도 많이 안쓰면서 남들보다 알차게 먹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하지만 곧 이동시간이 되고 나서 나는 그 때 대장님께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라고 하신 의도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밥이 아닌 과자와 음료수로만 배를 채우다보니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내내 속이 더부룩하고 비어있는듯한 느낌을 느꼈다.
누군가가 나에게 지시를 했을 때에는 그 안에 의도와 목적이 들어있다.
하지만 의도를 벗어나게 되면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또 한번은 택시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지역을 이동하는 일이 잦고 와이파이가 어딜가나 항상 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애 오프라인으로도 쓸수있는 지도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 지도를 사용하기 위해선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미리 지도를 다운받아놔야지 사용이 가능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나는 지도를 다운받아놓지 않아서 큰일이 날 뻔했다.
우리가 처음 파라과이에 도착을 했을 때 우리는 숙소애 가기 위해서 택시에 올랐다.
각 선생님과 내가 흩어져서 택시를 나눠잡고 출발을 하려는 찰나에 나는 지도를 미리 다운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급하게 차를 세워서 선생님이 가진 지도를 사진 찍어서 기사님께 사진을 보여주며 그곳으로 이동해 달라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지도가 아닌 사진을 찍은 것 이였기에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인지 돌아서 가는
것은 아닌지 이동하는 내내 걱정이 되었다.
나는 내가 맡은 일들을 잘 까먹는 것 같다.
군대에 있을 때 나는 통신병이였기 때문에 항상 비문일지를 작성하고 간부님께 싸인을 받아야 하는 일들을 맡아서 했었다.
하지만 매번 일지를 작성하고 싸인을 받는 것을 까먹어서 생각이 났을 때 한번에 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점검을 할 때는 걸리느냐 안걸리는 냐애 대해서는 운에 맡겨야 했기에 늘 긴장을 해야만 해다.
그러다 내 후임이 들어오고 나서 내 후임은 그런 것을 잘 기억하기 때문애 갑작스운 점검에 있어서도 늘 담담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제 때에 하지 않으면 늘 긴장을 해야만 하지만 확실하게 내가 맡은 일을 끝냈을 땐 어떠한 상황아 주어져도 당당할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사즌 찬구들이 왔을 때 많은 아이들이 정산을 성공하여 돈을 벌게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돈을 쓰기 위해서 많은 아이들이 나가기를 원했지만 그 많은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한명씩 붙어서 나가는 곳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기 때문에 믿을만한 팀장을 앞세워서 나에게 이야기를 한 후에 외출 허락을 받고 나가라고 써니쌤께서 이야기 하셨다.
나는 이번에 외출에 동행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팀을 꾸리고 외출을 허가해주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나는 모처럼 외출도 없고 그저 아이들이 와서 나가겠다고 이야기 하면 나가도 된다고 허락해주는 역할이였기 때문에 아주 편하게 임했다.
하지만 그러다가 예상밖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나에게 3명이 나간다고 이야기를 했던 친구들중 한명이 얼마 지나지않아서 돌아온 것이다.
나에게 보고는 하지 않았지만 복귀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는 다 돌아왔다고 판단하고 써니쌤께 아이들이 모두 복귀했다며 보고를 했다.
그랬더니 써니쌤께서 잠깐 회의를 하자며 아이들을 모으셨고, 곧 아이들은 회의를 위해서 다들 모였다.
하지만 인원수를 세보니 두명이 비어있었고 그 두명은 내가 왔다고 판단한 그 친구들이였다.
써니쌤께서는 멋대로 판단한 나와 혼자 돌아온 그 친구, 나중에 온 두명을 크게 꾸짖으셨다.
나는 세명이 돌아온 것도 제대로 확인하지않고 임의로 판단하였다는 이유였다.
뭐든지 편한 것에 있어서는 신중하기가 떨어지게 된다.
산을 오르는것보단 내려가는 것이 더 편하지만 편하다는 이유로 마구 뛰어내려오다보면 더 크게 다치기 쉽다.
편한 일이라고 해서 대충하고 넘어가는 내가 아닌 조금 더 신중할수 있는 내가 되어야겠다.
<4. 정산팀장: 멈추지 않는 사람>
만약 누군가가 일반 학교와 하반하의 차이를 묻는다면 하반하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산’이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일반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못하는 생활 습관부터 학생의 본분이 되는 공부까지도, 심지어는 공부가 아닌 다른 분야를 이용해서도 정산시스템을 이용하여 돈을 벌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반하에서는 공부만 잘한다고해서, 공부가 아닌 다른 것만 잘한다고해서 돈을 벌기는 쉽지가 않다.
하반하의 정산시스템에는 크게 ‘개인정산’ 이라는 것과 ‘팀정산’ 이라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하반하에 오고 처음에는 정산에 다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개인정산을 통하여 정산 하는 방법을 배웠다.
어느정도 정산에 익숙해지자 우리는 팀정산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써니쌤께서는 나에게 나이도 가장 많고 아이들도 나를 많이 따르니 정산을 할 때 팀장이 되어 아이들을 잘 도와주라는 말씀을 하시며 나를 정산팀장의 위치에 세우셨다.
나와 함께 첫 팀이 된 아이는 열심히는 하지만 잘 되지않아서 늘 어려워하는 아이였다.
나도 정산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았고 공부를 잘하는 편도 아니였기 때문에 정산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관리해야할 친구가 생겼다는 것 자체만으로 내가 그 아이를 잘 챙기고 나 역시도 잘해야겠다고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러다가 그 아이와 첫 정산을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내가 관리를 맡은 친구는 정산에서 돈을 벌게 되었고 나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 아이에게 잘했다고 칭찬하는것으로 끝이 났지만 점점 같은 일이 반복되다보니 자존심이 상하며 공부하기가 싫어졌다.
그러다가 어느순간부터는 예전처럼 공부를 아예 놓게 되었다.
나 스스로가 공부를 하면서 자존심을 깍이느니 차라리 안하고마는 것을 선택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남들이 공부하고 있을 때 잠을 자거나 기타를 치며 아주 여유로운 생활을 지냈다.
처음에는 그게 정말 편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만 소외되고있다는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남들은 꾸준히 앞으로 전진할 때 나는 힘들다며, 하기싫다며 멈춰서버리니 다른 아이들은 나를 버리고 먼저 떠나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모든사람들이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먼 미래에 그들을 따라잡기 더 힘들어지기 전에 조금씩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공부를 좋아하지 않아서 고등학교에 갈 때 부족한 내신 탓에 커트라인이 가장 낮았던 신설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곳은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설은 참 좋았지만 학교 시스템에 있어서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은 교복을 제대로 갖추어입지 않았고 그중에서 몇명은 아예 교복을 입지 않고 사복차림으로 등교를 하기도 했다.
또 등교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인지 많은 아이들이 2교시나 3교시때 등교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점심을 먹고 학교에 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주변에 있는 다른 학교 학생들은 오토바이를 탄 우리학교 친구들을 보며 ‘배달부 양성학교’ 라는 식으로 학교를 비하하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되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그중 한명이 내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나처럼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존심이 엄청 강해서 주변 사람들과의 다툼도 적지 않은 친구였다.
처음엔 나도 그 친구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였는데 그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하고싶은 꿈이 생겼다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성적도 좋지 못했던 아이였기에 주변에서는 그친구가 잘 못할 것 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주변의 시선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전교권에 오른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희망하던 ‘육군사관학교’에 당당하게 입학할수 있었다.
처음엔 그저 노는 것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고등학교에 들어와 2년동안 엄청난 성장을 보여주며 왠만큼 공부해서는 가기 힘들다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친구가 가진 진짜 자존심을 보게 되었다.
나는 하반하에 와서 자존심이 깍이기 싫다며 공부를 포기해버렸고 그로 인해서 나는 팀정산을 할 때 빚을 가져오는 폭탄같은 사람아 되어버렸다.
내 자존심을 살리는 것은 주변의 비판과 시선에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닌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것이 진짜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불리는 에베레스트 산 역시도 아찔한 높이와 추위, 들이닥치게 될 수많은 장애물들에 지레 겁을 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환경도 부딪쳐본 사람만이 정상에 오를수 있는 것이다.
<최종장: 형님으로 선다는 것>
나는 한국에 있을 때 형님이라는 위치에 서본적이 거의 없다.
집에서도 가장 막내이며 그 영향 때문인지 밖에서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주로 어울려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하반하에 와서 지금껏 경험해본적 없는 가장 큰 형님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처음엔 형님이라는 자리가 이렇게 어렵고 나를 힘들게 할지 알지 못했다.
큰 형님이라는 타이틀은 모든 동생들이 나를 대할 때 깍듯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큰 형님으로써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24년이라는 세월동안 공부라는 것을 제대로 해보기는 커녕 그에 비례할만큼의 무기도 쥐고있지 않았기에 잘해보려는 마음은 점점 무뎌져갔다.
군대에서는 가장 낮은 계급으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나며 점차 높은 계급으로 오르게 되고 또 내 아래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후임이 들어오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후임보다 더 나을수 있었다.
하지만 하반하는 나이가 다 다르지만 동시에 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처음부터 아이들보다 잘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하나씩 나는 타협을 하기 시작했고 속으로는 ‘하반하 생활도 어찌보면 경력이니까 2년 3년차 친구들이 나보다 잘하는 것은 당연하지’ 라는 마음으로 하반하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내가 해결하려고 앞서지 않고 늘 경력이 있는 동생이 해결하기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나는 하반하에서 가장 자기생각이 없는 아이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그저 나는 나보다 잘하는 아이에게 일을 맡겼다고 생각했는데 형님이라는 위치는 그러고 끝이 아니라 같이 해결을 하기위해 조금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된다는 것 이였다.
하반하에서 형님으로 지내다보면 나보다 공부를 잘하거나 능력이 좋은 아이들이 나에게 차갑게 대할 때가 가끔있다.
나는 24살이라는 적지않은 나이에 대학도 다녀오고 군대도 다녀왔지만 그런 동생들을 볼때면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하반하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반하 생활을 하다보면 군대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낀다.
내가 자대에 배치받은 것은 가장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는 1월 초였다.
그때는 눈도 많이와서 전 병력이 제설작업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지만 나는 자대에 막 배치를 받았기에 2주대기(적응기간)를 하고 있었다.
2주대기는 모든 작업에서 열외되어 군대라는 시스템을 알아가는 기간이다.
하지만 나는 2주대기로 쉬지 않고 제설작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선임들이 이제 들어가라는 만류에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서 일을 하고 들어갔다.
나는 그 때 무언가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였지만 그 행동 덕분에 나는 선임과 간부님께 좋은 평판을 쌓게 되었고 보상도 받게 되었다.
내가 하반하에 와서 큰 형님이라며 유세떨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이등병 2주대기때 나서서 일하지 않은 것과도 같다.
안한다고해서 뭐라하지는 않지만 좋은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알아서 해’ 라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그로 인해서 지금은 많이 깨지고 있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형님이라는 타이틀을 잠시 두고 열심히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반하에서 형님이라며 아무것도 안했던 것이 지금 내가 지내며 다 받고있는 중 인것 같다.
결국 내가 하반하에서 배운 것은 가장 어렵고 험난한 길이 때로는 가장 빠른길 이라는 것을 가장 늦은 나이에 알게 되었다.
여기서 실수하고 배웠던 모든 것들이 나중에 나에게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으며 여기서 저지른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게 할 것이다.
가장 어렵고 험난한 길, 그곳으로 뛰어들수있는 용기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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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형님의 자리는 참 무겁기도하고 힘든자리였겠어요 군대와는 다른 책임감을 배웠겠네요
힘든만큼 배우고 성장하는 것도 많았기에 새로운 제 자신을 알게되고 배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건주형님ㆍ
수고 많았어요ㆍ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좋은 형님이
되어 주어서
늘 감사했어요ㆍ
감사합니다!
저보다도 부족한 형님을 잘 챙겨주고 서포트해준 동생들이 있었기에 힘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형님이란 무게가 건주를 조금 더 힘들게 한거같아 미안해지네 고생많았어..그래도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니 다행이야..하반하에서의 배움이 건주의 앞으로 인생에 훌륭한 나침반이 되길 기대할께~
힘든 일도 분명히 있었지만 좋은 형님이 되기 위해선 좋은 동생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를 많이 챙겨준 동생들 덕분에 부족하지만 잘 해낼수 있었던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나이가 주는 무게감이 건주에게 많이 있었구나.
군대가면 남자들은 어른이 되어 온다던데... 하반하에서 그보다 더 빡세고 피하기 어려운 자신을 마주하는 귀한 1년을 보냈네.
앞으로 건주앞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이 시간을 잘 기억하고 건주가 바꾸길 원하는 모습으로 잘 생활하길 바랄께. 너의 미래도 계속 응원힌디. ^^
군대에서도 분명히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할수 있는 계기가 되지만 하반하 만큼은 아니였다고 생각합니다,
군대에서는 얼마 많지않은 자기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반하에서는 그 시간을 꼼꼼하게 사용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군대에 가기 전에 하반하를 경험해본다는 것이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재경이는 군대에 가기 전에 하반하를 경험했기 때문에 군대에 가서도 아주 잘하리라 믿습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형님으로 산다는 것은 건주에게 힘든 일이었을 것 같아. 그런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형님이 되고부터 책임감도 느끼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고, 수많은 깨달음을 얻지 않았나 싶네. 형님으로 동생들 챙기느라 고생 많았어. 화이팅!!!!
확실히 익숙하지 않은 힘든 일을 경험해봐야지 더 성장할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막내로만 살아왔기에 막내로만 대우를 받았던 제가 갑자기 맏형님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새로운 부담감과 책임감이 생기게 되고 너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마 제가 막내로만 지냈다면 알지 못했을 거예요.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가장 어렵고 험난한 길이 가장 빠른 길이 된다는 말이 참 인상 깊네요..
어린 동생들 보듬어주느라 넘 고생많았어요. 건주의 따뜻한 성품은 어딜 가더라도 빛날 것이고..
하반하에서의 귀한 경험으로 새롭게 펼쳐질 인생을 기대합니다~
힘든 일이 가장 많이 저를 성장시켰고 이젠 가장 큰 형님으로써 시간이 다른 동생들보다 많지 않기에 이제 슬슬 가장 빠른 길을 찾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마음에 쓰게된 말 이였습니다.
어린 동생들이 오히려 저를 보듬어줘서 동생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하반하의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만 생각하면 좋은데 큰형님이라는 자리에 있다보니 때론 어른의 대우를 받기도 하고 때론 더욱 책임감를 지우는 자리여서 참 어려웠을 것 같아 1년동안 동생들과 함께 해줘서 너무 고마웠고 조금만 지나면 다시 집에 가서 막내의 특권을 누릴 수 있으니 조금만 참아^^
오히려 어른으로써, 형님으로써 위치에 서다보니 자신을 더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지 더 쉽게, 효과적으로, 다함께 할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 생각들은 형님으로써 배운 것 이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가서 동생으로 있을때도 그냥 따르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제안하고 책임지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군대 고참이 되면 그다지 터치하는 상관이 없지만 하반하에는 썬니샘과 대장님이 늘 지켜보고 계시니, 건주군에게는 하반하의 생활이 군대 생활보다 더 힘들었을 것 같군. 게다가 모두 어린 동생들이라 분위기 파악하는데 군대 쫄다구하고는 차원이 달라 적응하는데 많은 아픔이 있었음이 느껴지는군. 아이들이 그래도 대한민국 군대를 다녀온 든든한 건주형님이 있어서 많이 든든해 하고 안심했을 거야~
확실히 군대와는 다른 환경이기 때문에 힘든 일도 있었고 어려웠던 적은 많지만 군대와 같다고 느낀 부분은 지나보니 별거 아니였다는 것과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생들도 분명히 힘들텐데 형님으로써 너무 약한 티만 내고 있었음에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많이 힘들고 많이 어려웠겠구나
*좋은것은 쉽게오지 않는다*는 말도 있듯이 우리건주가 하반하를 통해서 많이 단단해지고 자신의 일과 꿈을 찾아 우리집의 희망이 되리라 믿는다
분명히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힘든일은 분명히 또 생기고 존재할텐데 그것들 하나하나에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집에 간다면 얼른 일을 시작하고 깨져도 일어나는 하반하 정신을 보여주고 싶네요~!!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형님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애썼어. 어린 동생들 도닥여주고 보둠어 준 건주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너의 따뜻한 카리스마를 알아챈 동생들이 많아.
동생들이 없었다면 형님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생들 덕분에 제가 이렇게 많이 성장하고 느끼게 되었기에 동생들에게 제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군필을 하고, 하반하 세계여행을 한,
큰형님 건주군!
요즘은 가족도 24시간 함께하기 쉽지 않지요.
그만큼 큰형님의 자리는 무거웠을거예요.
'가장 어렵고, 험난한 길이,
때론 가장 빠른길' 이라는 깨달음은,
참 소중한 진리입니다.
하반하 9기 여행이 끝나더라도,
선생님,친구,동생들과 소통하며,
여전히 9기의 큰형님으로, 역할을
잘하리라 기대합니다.
재간둥이 아우들이, 큰형님 결혼하는 날이,
오면, 끼와 재능으로, 멋지게 축하해줄거예요.^^
벌써부터 결혼식이 기대가 되는군요~!!
하반하 동생들 덕분에 아주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아주 좋은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이 시간을이 한국에 가서도 이어지길 바랍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건주형님! 최고형님이기도 하지만, 하반하 생활은 처음이라 생소하고 힘들기는 동생들이나 마찬가지였을텐데... 형님이라는 무게와 더불어 마음이 보드라워서 아이들과 함께 함께 여행하는 동안 고생이 많았을 것 같아요. 그래도 동생들은 따뜻한 형님이 있어서 위로도 되고 편안함을 얻었겠지요.그동안 동생들 챙기느라 고생 많았고 고마워요. 하반하에서의 배움과 경험으로 더욱 알차질 새로운 출발도 많이 많이 응원해요~ ^^
시작은 같았지만 살아왔던 경험과 시간이 저를 더 많이, 더 빨리 잘 하게 만들어 줬었어야 했는데 동생들과 같은 모습이나 동생들이 더 나은 모습을 보면서 동생들보다도 경험이 부족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보다도 어린 나이에 하반하에 온 모든 동생들은 분명히 어딜가나 이 경험이 소중히 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건주형님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을 동생들 생각하니 푸근해지네~
처음하는 건 모두 낯설고 어려운것 같아 동안의 여러 경험들이 건주형님의 나침반이 되어 더욱 발전하는 리더가 될수 있을거라 확신해~
막내에서 큰형님이 되기까지 힘든여정 수고 많았고 또 잘 이끌어줘서 고마워~
그 나침반을 찾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동생들이 찾는 것을 도와줬습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사람은 제가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건주형님ᆢ수고많았어요ᆢ하반하에 나이를 접어두고 갔다는게 대단한것같아요ᆢ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더 발전된 형님으로 출발하시길 응원합니다~
동생들이 없었다면 저는 전과 같은 생활을 했을 것 같아요.
그민큼 동생들이 저를 많이 도와주었고 환경과 경험이 저를 성장시켰다고 생각함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
따듯하고 배려심 많은 그리고 인생선배님으로 아이들은 많이 의지하고 처음 경험하는 하반하에서 건주형님 덕분에 잘 이겨내고 견딜수 있었다고 고마워하는 동생들이 많더군요 나또한 그런얘기들을 들을때마다 너무도 고마웠답니다 남들에겐 좋은 형님이였지만 본인은 마음 고생이 많았군요 그러한 경험들이 인생의 좋은 밑거름이 되겠지요
꼭 빛이되는 형님 그리고 건주님으로 거듭나시길~~
감사합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잘 했는지 의심스러웠던 제게 위로가 되고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네요.
분명히 동생들이 이런 저를 잘 도와줬기에 제가 부족하지만 더 잘할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형님으로써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배웠지만 동생들을 통해서 제가 동생의 자리에 섰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배우게 된 계기였습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반하 9기 1번 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