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조면 출신 변희룡 부경대 전교수가 소개하는 가조면 장기리, 사병리, 가북면 율리(배수골) 대보름 풍습
대보름 찬가 –2편
내 고향은, 앞서 ‘대보름 찬가 1편’이 적힌 지역에서 불과 14km 떨어진 산골 지역, 약간 다른 풍습과 기억이 있어 보태어 봅니다.
보름날 오후부터 아이들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이 밤의 행사를 일년내내 기다려 온 아이들이 많습니다. 텅 빈 들판 가운데 세워져 있는 커다란 달집은 밤이 되기도 전에 불이 붙습니다. 동리마다 연기가 솟아오르는데, 어느 마을 연기가 더 높이 솟아오르는지 경쟁하기도 했습니다.
청솔가지를 많이 올려놓으면 연기가 많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장정들은 낮에 다투어 청솔을 얹어 놓았습니다. 가조 분지를 빙 돌면서 산재한 마을들마다 연기가 솟아오르는데, “어, 배숫골에서도 연기가 솟는구나.”“고치배기에서도.” 등등 이웃 마을들을 점검하곤 했습니다.
달이 떠오르면 “달 떴다.”라는 합창이 터져 나오면서, 아이들은 달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들판의 논에는 보리를 심어 놓았지만 밟지 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많이 밟아 주라고 합니다. 달려가는 이유는 남녀가 달랐습니다.
여자애들은 남보다 앞서 더 달에 가깝게 가서 절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절을 하면서 비는 소원은 성취된다고 알려져 왔기 때문입니다. 남자애들은 절하는 여자애들 앞에 가서 ‘절 받기’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자아이가 절하고 나서 얼굴을 들면, 남자아이가 에헴! 하고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아나 버립니다. 그 뒤통수를 향하여 여자아이는 흙을 한 줌 던지기도 했습니다. 절하는 누나 앞에서 에헴 하고 앉아 있던 막내아우는 꿀밤을 맞았습니다.
간혹,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 절 받기를 하기 위해 초저녁부터 눈여겨 겨냥하는 남자애도 있었으니 일종의 사랑 고백 행사로도 사용된 것입니다. 사랑 표현의 방법도, 기회도, 기교도 부족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한바탕 들판을 달리던 아이들이 돌아오면, 달집은 연기가 없고 벌건 숯들이 이글거립니다. 그 숯을 깡통에 넣고 깡통을 긴 철사로 이어서 빙빙 돌리면 불빛이 원을 그리게 됩니다. 그러니 들판 곳곳에 원형 불빛이 난무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아이를 위해 그 깡통을 준비해 주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동네 형이 준비해 주었습니다. 쥐불놀이란 말은 나중에야 서울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사실을 알았고, 당시 우리는 그냥 ‘불놀이’라고 했습니다.동네 아낙들은 이글거리는 숯덩이를 직접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고 머슴에게 시켜서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그 숯을 다리미에 담아서, 한복 다림질을 했고, 그 숯으로 콩을 볶아 놓았다가 아이들이 돌아오면 먹이기도 했습니다.
불이 꺼진 숲을, 초가지붕 위에 던져 놓으면 그해 화마가 집을 침범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어른들은 지붕에 숯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그 집 아낙이 부지런한지 게으른지를 분간했다고 합니다. 그날 하루 지천으로 깔린 숯불인데 이용할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는 것이지요.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달집 놀이는 전면 금지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산의 나무로 취사도 하고 난방도 한 시대였으니, 온 산이 벌거숭이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달집 태운다며 훼손되는 나무가 적지 않으니 정부가 금지해 버린 것입니다. 수십 년이 더 지난 지금, 제가 사는 바닷가 마을에서, 다시 달집 태우는 행사가 열리는 것을 봅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제 어릴 적의 달집과는 달리 들판 가운데가 아니고 바닷가 호젓한 공터입니다.
구청에서는 혹여나 불이 번질까 대단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달집을 세우기는 하되 진짜로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전기 조명만으로 달집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수년 전에는 이기대 어울마당에서 또는 백운포 광장에서 열리던 달집 행사가 올해는 용호 별빛 공원 공터에서 준비되고 있습니다. 광안대교가 바로 보이는 부둣가, 바로 곁에는 부경대학교 실습선 전용의 항구가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열심히 달집 조명탑을 세우고 있는데 아마도 부산 남구청의 행사인 모양입니다. 구청마다 더 아름다운 달집을 조성하는 경쟁이라도 붙은 모양입니다.
“아이구, 저기 들어가는 예산이 수월치 않겠다. 저거 다 안 해도 되는 것인데,” “언제부터인가 정부는 돈 쓸데가 없어 환장한 놈들 같다. 나리 빚은 자꾸 늘어 간다는데.”등등의 여론이 생깁니다. 아직 정착되지 않은 문화여서 그런 듯합니다.
정작 달집 문화를 추억으로 간직해야 할 아이들은 행사장에 거의 나타나지 않고 학원으로 혹은 공부방으로만 내몰리고 있으니 부정적 시각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우리 전통, 이제 다시 살릴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복조리 행사는 보름날 오전에 진행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조릿대로 만든 소위 복조리를 들고, ‘조리밥 주소.’라면서 집마다 돌았습니다. 조리에는 손바닥만큼 밥을 담을 수 있습니다. 집마다 찰밥을 많이 해 놓고 오는 아이들 전부 조리에 조금씩 담아 주어야 했습니다.
복조리를 채워 주지 않으면 인심 사납다고 흉을 보니, 밥이 떨어지면 다시 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욕심이 많은 아이는 그날 오후까지 백여 가구나 되는 동네에서 집마다 다 다녀서 밥을 많이 얻어 와서는 가족들에게 자랑도 했습니다. 이날 한 번이라도 찰밥을 실컷 먹어 봤다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어머니께서 복조리를 들지 못하게 하셔서. 한 번도 조리밥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조리밥 받으러 몰려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만 봤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해, 동네 어른 들이 협의하여 복조리 행사를 전부 없애 버렸습니다. 관의 지시가 있었는지, 아니면 동네에서 자발적으로 취소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웃 동네와의 투석전에 관해서는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고, 직접 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보름날이 지나고 나면, 아이들이 모여서, 이웃 동네를 보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샘내 전가 놈들 빈대 코 다 끼웠나?”, “병산 창마 변가 놈들 빈대 코 다 끼웠나?”로 말을 주고받다가 투석전으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멀리서, 서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돌을 던졌답니다.
간혹 돌에 머리를 맞아 터진 아이들도 있었답니다. 날래고 용감한 아이들이 자기 용역을 자랑하는 마당이 되기도 했다는데 제 선고께서는 남달리 용역이 뛰어나셨으니 아마도 그런 행사마다 신나게 즐긴 분이었을 듯합니다. 그 행사가 3일 이상 지속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시기에는 이웃 동네에 갔다가는 봉변당합니다. 동네마다 청년들이 이웃 동네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도둑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동네 사람들이 단합하게 하려고 벌인 행사인 듯합니다.
한해 농사일을 해내려면 많은 사람이 뭉쳐야 할 경우가 많은데, 냇물에 보를 설치한다거나, 물 들어올 때 보내기를 해야 한다거나 등의 일이었습니다. 보를 설치하는 일에는 저도 참여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뭉치게 하기 위해서는 적대시하는 대상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보름날 마을 대항 투석전 놀이가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들도 어른들도 이웃 동네와 잘 지내게 되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