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이야기라는 한국단편소설과 영화 하얼빈을 봤다.
논이야기의 주인공은 일제강점기 농민 한생원이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조금씩 돈을 모아 어렵게 마련했던 논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지만 땅 중 대부분을 탐관오리에게 억울하게 빼앗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생원이 늙었을 때 형편이 악화되자 남은 땅 마저 일본인 요시카와에게 팔아버렸다. 농민이 돼서 노름을 하느라 땅을 팔고 면목이 없게 되자 “일인들이 다 쫓겨가면 그 땅 도로 내 것 되지 갈 데 있던가”라고 매번 큰소리를 쳤다.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으며 조롱했다. 결국 한생원 말대로 해방이 되어 일본인들은 땅과 재산을 두고 쫓기듯 나가버렸다. 하지만 한생원이 요시카와에게 팔았던 땅을 찾으러 갔을 땐 이미 돈 있는 사람에게 인계돼 있었다. 한생원은 관리에게 땅을 뺏겼던 때처럼 그렇게 또다시 비관에 빠졌다. “독립됐다구 했을 제, 내 만세 안부르기 잘했지.”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와 그 측근의 독립운동가들이 하얼빈 의거를 전개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다.
한생원은 일제의 침탈도 항복도 관심 밖이었고 해방됐을 때도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마치 내 나라 긴 해도 내 일이 아니었다. 부패하고 힘없는 나라에게 핍박받고 방치된 가난한 농민은 당연하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가난했다.
반면에 동시대를 살던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은 무려 한 나라의 주인이었다. 영화에서 이토히로부미는 이런 말을 한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지만 저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야.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그들이 살던 조선은 짐이 곧 나라였지만 그들의 주인의식은 어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들보다 투철했고 나라는 백성을 책임지지 않았지만 백성은 나라를 책임졌다.
비슷한 시기에 본 두 작품이 같은 시대현실을 배경으로 다른 인물의 인식과 대응을 가져서 각각의 것을 더 두드러지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논이야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비판하는 소설이고 하얼빈은 위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두 작품의 주인공들을 애국심과 옳고 그름으로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대신에 두 양상의 삶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지가 나에게 더 중요했다.
한생원은 현실을 보며 살았고 안중근은, 그리고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이상(理想)을 보며 살았다. 초등학생끼리 당사자도 아니면서 부동산, 정치, 물가, 입시제도에 대해 암담하다고 웃기는 아는척을 하던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땐 현실적인 가정을 하고 현실적인 범위 내에서 움직이는 것이 어른스러워 보여서 그걸 잘 모르겠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흉내 냈던 것 같다. 이젠 가만히 있어도 현실이 가정과 실행을 한정시킨다. 그리고 단호한 현실은 굳이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볼 수 있다. 크고 보니 그건 정말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걸 어른스럽다 느꼈던 건 단지 어른과 아이의 현실이 달랐기 때문이다. 현실 그 이상(以上)을 꿈꾸고 도전하는 것은 어렵다. 대단한 거 말고 작은 일상에서 “돼”, “가능”이라고 말하는 것. 사회는 이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다르다고 가르치려 들지만 지배적인 힘으로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어두운 현실에 종속되지 않고 달콤한 불평과 포기에 현혹되지 않는 저력을 가진 강한 사람들이다. 이제와서는 볼 수 있다. 독립운동으로 독립을 이루진 못했지만 정말 무모했는지. 무의미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 아니라 독립운동이 없는 우리나라라는 걸 지금은 알 수 있듯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염세주의자는 이미 졌고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의미’는 이상주의자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