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승조(僧肇) 화상의 <물불천론(物不遷論)>을 반박했다.
"승조 법사는 '사물은 각기 제 위치에 주하여 있다[物各住位]'는 것으로 불천(不遷)을 말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사물은 각각 고유한 제 성품이 없다[物各無性]'는 것으로 불천(不遷)을 말해야 한다."
이러한 뜻을 옳게 여기지 않는 자가 그의 반박에 또다시 논박하여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어떤 이가 의심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여 이런 내용을 내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승조 법사의 뜻에 반박하는 자는 전혀 근거 없이 무턱대고 논한 것이 아니요, 그 반박에 논박하는 자도 일부러 새로운 해석을 억누르며 터무니없이 옛 것만을 고집하려는 것이 아니다. 각각 그럴 만한 소견이 있기 때문이니, 내가 이제 평등한 마음으로 이를 절충하려 한다. 그대는 <불진공론(不眞空論)>,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의 세 가지 논과, 서두의 <종본의(宗本義)>를 읽지 못했는가? 만약 이것들이 없었다면 이 반박에 대해, 나의 생각에는 승조 스님도 우선 입을 벽 위에 걸어 놓고 아무 대꾸할 말이나 펼칠 이론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 세 가지 논에서는 성공(性空)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음이 없고, 종본(宗本)에서는 연회(緣會)와 성공(性空)이 하나임을 분명히 말했다. 어찌 이른바 '성공(性空)'을 밝히지 않았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예전 사물이 오늘까지 존재하지 않으니 그렇게 보면 예전은 영원히 없어진 것이다' 하며, '사물은 변한다[物遷]' 하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 따라서 이를 반박했던 것이니, 그가 말하는 '변한다[遷]'는 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변하지 않는다[不遷]'는 뜻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각자의 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도적으로 도적을 공격하는 것이며, 위치를 바꾸지 않고 남쪽을 바꾸어 북쪽을 이루는 것이요, 바탕을 고치지 않고 놋쇠를 변화시켜 금을 만드는 것이라 할 것이니, 교묘한 솜씨요 막힘없는 변재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은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物不遷]'는 것을 바로 바로 논한 것이 아니라, 예전 물건이니 지금 물건이니 하는 두 구절로 인하여 저술하게 된 것이다. 만약 아무 원인도 없이 스스로 저술했다면 반드시 전편(全篇)에 성공(性空)으로 논지를 세운 것이 세 논과 같았을 것이다. 자경(玆徑)이 성공(性空)을 밝히지 않았다 하여 승조 스님을 비방하였으나, 승조 스님이 어찌 이를 마음속으로 인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원래 물건을 예전에 찾아보면 예전에는 없었던 적이 없더니, 원래 물건을 지금 찾아보면 지금은 있는 적이 없으니, 이 몇 마디 말이 성공(性空)의 뜻에 어긋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전은 인연이 합함으로 해서 없지 않고, 지금은 인연이 흩어지므로 해서 있지 않아서, 연회(緣會)와 성공(性空)이 이미 둘이 아니니, 어찌 번거롭게 말을 허비하여 승조 스님의 허물을 따지랴."
또 물었다.
"무슨 까닭에 저 논의 전편에서 이런 뜻을 밝히지 않았습니까?"
"연회(緣會)가 성공(性空)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종본(宗本)' 중에 있으니, 이를 본 자는 은연중에 스스로 뜻을 알아채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다시 논 말미에 한두 마디 말을 덧붙여 이런 뜻을 결론으로 밝혔을 것이다. 그렇게 했더라면 이런 반박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아! 승조 스님은 반드시 나의 뜻에 수긍할 것이나, 알 수 없구나, 논박한 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첫댓글 고 송찬우 거사가 번역한 승조 법사의 <조론>을 읽고 그 난해함에 고생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연회(緣會)와 성공(性空)이 둘이 아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나무아미타불 _()_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해가 안되면 읽고 또 읽으면 이해가 되겠지요...ㅎ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