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원은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가산조 아랍인 그리고 베르베르인을 다룬다. 러시아 스텝 지형 및 그 이전 중동 민족들은 Elite 30 Attila and the Nomad Hordes와 MAA 243인 Rome's Enemies(5): Desert Frontier에서 다뤄졌다.
초기 중세 유럽의 게르만족들은 앞으로 나올 MMA 시리즈를 참조하라.
동맹 세력들은 후기 로마-비잔티움의 군사 적 고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믿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지되었다. 마우리키우스의 스트라테기콘은 지휘관에게, 동맹자들이 적에게 탈영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모를 어두운 면을 유념하도록 경고한다.
에스니카-Ethnika-로 불린 다양한 족속들도 그들의 기술, 규율에 대한 복종성, 일반적인 문명화 수준으로 구별되었고, 그런 특색들은 군사적 교범과 보고서에서 부각되었다.
세르비아인
비잔티움의 발칸 속주들을 침공했던 족속들 중 가장 수효가 많았던 건 슬라브족이었으며 이들 중 세르비아인들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경쟁 관계에 있는 족장들인 주판 휘하의 가장 큰 세르비아 보병 일족들이라도, 불가르족이나 아바르족 같은 유목 정복자들이 이끌 때만 주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들은 앙상한 나무가 거의 엄폐를 제공해주지 못하고 그 자취가 눈 때문에 쉽게 보이는, 겨울 동안에는 취약해졌다.
세르비아인들은 무기가 빈약했지만 수가 많고 강인했으며, 대부분은 작은 투창과 큰 직사각형 방패를 썼다. 숲과 산에서 적을 매복하길 즐겼지만, 개활지에서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는 단 한 번의 거친 보병 돌격을 했을 것이다. 궁술은 그 독화살에도 불구하고, 투창, 창, 칼 그리고 8세기 후반부터는 전투 도끼를 썼던 남부 슬라브족 전사들에겐 중요성이 부차적이었다. 검은 그들이 소유했던 작은 갑옷과 마찬가지로, 지배 엘리트의 몫이었다.
불가리아인
(불가르족의 초기 역사는 Elite 30 Attila and the Nomad Hordes 참조)
불가르족은 본디, 중앙 아시아 스텝 지대의 군사적 전통이 있는 투르크족이었다. 남부 러시아에 있었던 그들의 처음으로 기록된 국가는 7세기 중반에 붕괴했고, 일부는 발칸 지역으로 도망쳐서 여전히 불가리아로 알려지는 나라를 건설했다.
하지만 이 새 왕국의 투르크족 지배 엘리트들은 그 큰 슬라브 신민들에게 곧 흡수되어 이름 외엔 거의 남긴 게 없게 되었다. 사실 불가르인들은 679년에 도나우 강을 건너기 전부터 엄밀한 의미에서의 유목민은 아니었으며, 곧 비잔티움의 많은 군사적 기술들을 받아들였다.
불가리아는 부유했고, 불가리아인들에겐 고도로 세련된 훈족적인 군사적 전통이 있었다. 단, 비잔티움적 관념들-Ideas-이 864년도의 기독교 개종 후에는 지배적이 되었겠지만.
보야르들로 이뤄진 귀족정은 지도부력 및 칸에 대한 조언 제공을 계속했지만, 타르칸이 통치자의 수석 장교 역할을 하였다. 불가르 투르크족이 기병 엘리트를 형성했지만, 군대의 대부분은 슬라브족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칸은 비잔티움에서는 경호원으로 간주된 개인 수행원을 보유했고, 아마 이는 투르크-몽골 전통의 개인 친구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초기 불가리아의 군대는 개활지 전투보다는 습격이나 매복에 더욱 효율적이었고, 여전히 급여 대신 전리품으로 보상받았다-하지만 9세기 초반의 크룸 칸의 시대 즈음에서는 보다 정규화되었고, 공성전에서도 어느 정도 평판을 얻었다.
불가리아의 기독교 개종은 투르크적인 말꼬리 기가 기독교적인 깃발로 대체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벌어질 때의, 새로운 기독교적 군사적 행위의 윤리가 규정되었으나, 위대한 칸 시메온이 그의 모든 비잔티움 포로들의 코를 베는 걸 저지하진 못했다.
9세기 불가리아 군대는 레오 6세의 말에 따르면 ‘다른 모든 스키타이 나라들’과는 달리 조직화된 대열로 공격했고, 공병들로 이뤄진 소규모 병단도 나타났다. 무기, 갑옷 등의 군수품은 정기적으로 검열 받았으며, 적지만 특별히 잘 무장된 엘리트 군인들은 늘 즉시 작전 투입이 가능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불가르족은 아바르족의 침공에 대한 방파제로서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 의해 트라키아와 동부 마케도니아에 포이데라티로 일찍부터 정착해오고 있었고, 불가르족 전쟁 포로들은 계속 8~9세기 비잔티움의 병적에 올랐다.
어떤 이들은 로마-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부유한 속주 중 하나였던 발칸 지역에 있는, 불가르족의 요새들이 오직 서양의 건축 기술만 반영한다고 예상하겠지만, 불가리아인들의 최초 발칸 수도인 플리스카에 건립된 구조물들은 먼 중앙아시아의 영향도 드러낸다. 이것이 불가르족 역사의 흥망성쇠 전체에 걸쳐 도나우강 유역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그루지야인들
중세 그루지야는 흑해 연안의 라지카와 그 동쪽 내륙의 이베리아로 구성되었고, 카코서스 산맥이 흑해로 내려오는 곳에 있는 북부 지역의 아브카지아도 그 세 번째로 추가될 수 있겠다. 이베리아는 중세 그루지야의 핵심부였고, 이교도가 이백 년 동안 존속하긴 했어도 공식적으로는 330년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한편 이베리아의 통치 왕조는 기원이 이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초기 비잔티움을 모델로 삼았지만, 6세기에 페르시아에게 망해서 직접 통치를 받았다. 비잔티움은 라지카를 여전히 수중에 두었고, 그 지역은 전체가, 비잔티움의 단명한 627년도의 승리의 개선 전까진, 사산조와 비잔티움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라지카 북부와 이베리아 모두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비록 아브카지아는 그렇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이슬람의 지배에 항복하여 칼리프령에 흑해에 대한 약간의 알려진 출구를 제공했다.
그루지야의 수도인 티블리시는 여전히 이슬람 세력가들 아래에서 당시 문화적 중심지로 번영했고, 그곳은 그러는 동안 이슬람교로의 개종이 널리 확산되었다.
하지만 한 기독교 전사 귀족체는 여전히 존속했으며 특히 산악 지역에서 그랬고, 북쪽의 독립 아브카지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비잔티움 군대에 용병을 제공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루지야의 군사적 작용은,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친비잔티움-반이슬람 아랍적인 하자르에 대항하는 쪽으로 감독되었다.
첫댓글 잘봤습니다.
마활님 쪽지좀 봐주시면 안될까요 혹시 여유 있으시면 이것도 부탁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브하지야로 고쳤습니다. 압하지야보다는 이게 더 원음에 가까운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