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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람에 띄운 그리움 원문보기 글쓴이: 모도리
♣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이야기 ♣
평창 동계 올림픽은 앞서 개최한 88올림픽과 2002 월드컵에 비해 우여 곡절이 많은 대회 유치 였어요 우선 국내에서 치열한 쟁탈전이 있었지요 올림픽 개최지를 두고 평창(平昌)과 무주(茂朱)가 팽팽히 맞섰어요 결국 대한체육회의 중재로 무주군이 양보를 하였지요 이에 힘입은 평창군은 민관이 합동이되어 올림픽 유치에 총력을 경주 하였지요 2003년 7월 체코 프라하에서 2010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한 제115차 IOC 총회가 열렸어요 후보지로 떠오른 세 도시는 한국의 평창과 캐나다 밴쿠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였지요 1차 투표에서 평창은 51표로 1위를 기록했고 밴쿠버 40표, 잘츠부르크 16표로 뒤를 이었어요 하지만 평창은 개최지 선정을 위한 과반수 득표에 실패하였지요 결국 1차 투표에서 꼴찌를 한 잘츠부르크를 제외하고 평창과 밴쿠버 간에 2차 결선투표가 진행됐어요 결과는 밴쿠버 56표,평창 53표 1차 투표때와 달리 3표 차의 아까운 역전패를 당한 것이지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바쁜 일정을 이유로 프라하 IOC 총회에 불참하였고 고건 총리를 대신 보냈어요 관료 출신으로 유치위원장을 맡은 공로명 외교통상부 장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지요 3표차의 낙선에 마지막 뒷심이 아쉬웠던 대회 였어요 그로부터 4년 뒤인 2007년 7월 .... 남미 과테말라의 수도 과테말라시티에서 열린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한 제119차 IOC 총회... 재수에 도전한 평창은 4년전 만난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러시아의 소치와 맞붙었지요 4년전 IOC 총회에 불참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과테말라도 직접 날아 왔어요 하지만 과테말라에서 IOC 위원 자격으로 표밭을 닦고 있던 이건희 회장은 좌불안석 이었지요 이건희 회장은 당시 “내평생 사업을 하면서 대개 예측이 가능했는데 이번 만큼은 정말 어렵다”는 말을 남겼지요 그 만큼 소련의 오일머니가 무서울 정도로 IOC위원들의 마음을 휩쓸었어요 1차 투표 결과 평창은 36표로 1위, 소치 34표, 잘츠부르크가 25표로 뒤를 이었지요 4년전과 묘하게도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유치위원장도 지난번 처럼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관료 출신 한승수 전 장관이었지요 결국 2차 투표에서 평창은 47표를 받는데 그쳐 51표를 얻은 소치에 역전패 당하였지요 무엇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과테말라까지 직접 날아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득표전을 지휘한 것이 주효 했어요 아쉬운 두번의 고배를 마신 유치단과 평창주민들은 정말 허탈했지요 이런 와중에 정권은 바뀌었고 2008년도에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어요 솔직히 동계스포츠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돈이 많이 드는 고급 운동으로 유럽 혹은 북미 국가들 에서만 널리 사랑받아왔고 아시아를 비롯한 한국은 여러 여건들로 인해 인프라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지요 한마디로 말해 아시아는 동계 스포츠에 있어서 변방국에 지나지 않았어요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제1회 동계올림픽이 열린 이래 총 21회 대회중 유럽 국가에서 14번, 북미국가가 5번을 개최 하였지요 아시아에서는 오직 일본만이 홀로 2차례 개최한 것이 전부였어요 이런 모든 여건을 감안할때 강원도가 세번째로 평창 올림픽 유치에 나서는것에 대해 모두가 회의적 이었지요 그러나 전임 정부때 이미 1조원 이상의 시설투자가 이뤄져 있고 포기할 경우 알펜시아 등 많은 시설들이 쓸모 없게 된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부각 되었어요 또 무엇보다도 강원도 평창 주민들의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었고 이것은 대한민국의 위상까지 거론될 상황이었지요 이러한 여러가지 사정을 살펴볼때 도저히 그냥 묵과할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3수 도전이 결정 되었고 이에따라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지요 우선 먼저 동계스포츠에서 소외되어 있던 아시아의 평창이 동계올림픽의 적지임을 부각하며 이것이 바로 세계가 하나되는 동계 올림픽 정신이라고 슬로건을 내 걸었어요 삼수에 도전한 평창은 독일의 뮌헨, 프랑스의 안시와 맞붙었지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공동유치위원장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대한체육회(KOC) 회장인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밴쿠버 동계올림픽 여자 피겨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 선수 IOC 선수위원인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문대성 선수 등이 총출동해 총력전을 펼쳤어요 그런데 독일의 뮌헨이 만만치가 않았지요 뮌헨은 토마스 바흐 현 IOC 위원장이 당시 부위원장 자격으로 표밭을 누비고 있었어요 당시 유치위원회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김진선 강원 도지사가 공동위원장을 맡았지요 IOC 위원이던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회장은 비자금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본인의 요청으로 자격이 정지된 상태였어요 위기감을 느낀 우리 유치단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지요 한표가 아쉬운 터라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12월 이건희 회장을 사면 조치하여 유치 활동에 뛰어들수 있도록 하였어요 그러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꼭 승리해 줄것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부탁 했지요 이에 따라 이건희 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1년반 동안 열한차례나 해외를 누볐어요 2010년 3월,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해 1년반 동안 11차례 해외출장에 나섰는데 거리로는 21만㎞, 지구 5바퀴를 도는 거리였어요 2011년 당시 69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려 170일을 해외에 머물며 IOC 위원들과 맨투맨 식으로 접촉을 이어갔지요 110명의 IOC 위원들을 거의 다 만났어요 반대표를 던질것 같은 위원은 다섯번이나 만나 설득하기도 했지요 이렇듯 혼신의 노력을 기우리다 보니 체력에 무리가 왔어요 그래도 "내생전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하다 죽는다면 이보다 영광스러운일이 어디에 있겠냐"며 주치의를 대동하고 다녔지요 당시 삼성은 올림픽 최고등급 스폰서인 ‘월드와이드 파트너’ 13개 글로벌 기업 가운데 유일한 한국 기업이었어요 이 중에는 일본 기업 3곳(도요타·파나소닉·브리지스톤) 중국기업 1곳(알리바바)이 속해 있었지요 이 스폰서 파워 또한 IOC 위원들은 무시못할 대단한 힘이었어요 당시 대통령을 수행하였던 한 참모는 역시 삼성이라는 위대한 힘을 몸소 느꼈다고 했어요 이건희 회장이 만나자고 하면 거절하는 IOC 위원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지요 코카콜라가 전세계 222개국에 콜라를 팔고 있지만 삼성은 세계234개국에 무역상사가 있는 세계적인 기업이었지요 이건희 회장은 전세계에 산재해 있는 삼성맨에게 총동원령을 내렸어요 그러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 하였지요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 왔어요 2011년 7월초 이건희 회장은 이대통령과 함께 IOC 총회가 열리는 남아공의 더반으로 갔어요 일정은 5박6일로 잡았지요 이건희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개최국 설명을 반드시 영어로 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어요 이명박 대통령은 더반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영어강연 연습을 했지요 목이 쉴 정도였어요 이 대통령은 개인의 성향과 관심사, 이력을 파악하여 정성을 다하였지요 위원들에게 모두 친서를 보냈는데 우편이 아니라 현지 주재 대사관을 통해 인편으로 보냈어요 전화를 걸때도 IOC 위원이 살고 있는 현지 시간에 맞추어 했지요 세네갈 IOC 위원은 뮌헨을 지지할수 없는 사정을 말한 뒤 귀중한 충고를 해 주었어요 "반드시 1차 투표에서 이겨야 한다, 아시아 국가들 표를 많이 모아야 한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협조가 중요하다." 등등 더반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하루 10여명씩 IOC 위원들을 만났어요 위원들의 약력과 인맥을 꼼꼼히 외워 관심사부터 이야기를 꺼내 지지를 모았지요 밥먹을 시간도 없이 샌드위치로 끼니를 대신하며 그렇게 3일을 보냈어요 그 결과 삼성맨들의 정보망에는 파란불이 켜졌지요 서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비정한 동계올림픽 스포츠 외교 무대에서 평창의 승리는 사실상 판가름 난거나 다름 없었지요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긴장을 풀지 않고 마지막 피치를 올렸지요 총회 당일 점심과 저녁을 거르며 IOC 위원들과 접촉을 하며 마지막 표점검을 했어요 목표는 1차 투표에서 결말을 내자는 것이었지요 결과는 전체 95표 중 평창이 63표를 얻어 뮌헨 25표, 안시 7표를 압도적인 표 차로 압승했어요 자크 로케 IOC위원장은 영어로 ‘평창 2018’이라고 적힌 카드를 들고 ‘평창’이라고 소리높게 호명하였지요 정말 통쾌한 일이 아닐수 없었어요 두번의 아쉬운 고배를 마신 뒤라서 그런지 승리의 기쁨은 더할나위 없었지요 평창이라는 구호와 함께 우리의 승리가 확인되자 이건희 회장은 울먹이면서 말하였지요 "오늘의 승리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의 승리 입니다 평창 유치팀들도 고생들 많았습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열심히 하였습니다. 저는 조그만 부분을 담당하였을 뿐입니다" 훗날 이 건희 회장은 평창이 승리하던 날이 내생에 가장 기쁜날이었었다고 회고 했지요 물론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정재계 인사들 특히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김연아 선수 등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노력과 함께 열심히 뛰었지요 우리는 그들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되지요 그리고 또 한사람 이건희 회장과 삼성의 힘은 대단 했어요 평창이 결정된 더반 IOC 총회 직전 이명박 대통령과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의 회동을 주선한 사람도 이건희 IOC 위원이었지요 좀처럼 만나주지 않던 '자크 로게' IOC 위원장도 이건희 회장의 부탁은 거절하지 못하였지요 그뒤에도 삼성가의 활약은 대단 했지요 이건희 회장의 사위인 김재열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도 2011년 3월부터 2016년까지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역임했어요 김재열 사장은 2016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빙상경기연맹 회장을 김상항 전 삼성생명 사장에게 넘겨줬지요 2011년 남아공 더반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할때 이건희 회장을 바로 옆에서 보좌했던 김재열 ISU 집행위원은 현재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 국제부위원장을 맡고 있어요 김재열 ISU 집행위원과 김상항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은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최문순 강원도지사를 필두로한 8명의 부위원장 중 한명이지요 거기에 제일기획 마스터 출신으로 조직위 기획홍보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주호 KPR 콜라보K 대표까지 합하면 삼성 출신이 현재도 3명이나 포진하고 있는 셈이지요 삼성이 없으면 사실상 올림픽 개최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어요 이건희 회장은 지난해 8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IOC 위원직을 사임했지요 이건희 회장은 1996년 7월 미국 애틀랜타 하계올림픽 기간 중 열린 제105차 IOC 총회에서 개인 자격으로 IOC 위원으로 선출된후 21여년간 IOC 위원 자격을 보유해왔어요 이로써 2018년 현재 99명의 IOC 위원 가운데 한국인은 2016년 8월 리우올림픽 기간 중 IOC 선수위원으로 선출된 탁구 금메달리스트 유승민 위원 한명만 남아 있지요 최전성기인 2000년대 초반 한국의 IOC위원은 한때 3명(김운용·이건희·박용성)에 달했지요 지금은 국제 스포츠 외교 무대에서 위상이 그만큼 추락한 것이지요 중국과 일본의 IOC 위원은 각각 3명(위자이칭·리링웨이·양양)과 1명(다케다 쓰네카즈)이지요 중국의 경우 중국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중화타이베이(대만)’의 우징궈(吳經國)까지 합하면 모두 4명에 달하고 있어요 그나마 IOC는 지난해 9월 이건희 회장의 그간 공로를 인정해 만장일치로 ‘IOC 명예위원’으로 추대했어요 42명의 IOC 명예위원 가운데 유일한 한국인이지요 이건희 회장은 지금도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6명의 고문중 한명으로 등재돼 있어요 이건희 회장은 지난 1월 9일, 삼성서울병원 20층 VIP병실에서 76회 생일을 맞았지요 병석에서 맞는 4번째 생일이었지요 마침 이날은 삼성전자가 지난해 매출 239조6000억원, 영업이익 53조6000억원의 잠정실적을 발표한 날이기도 하지요 영업이익 50조원 돌파는 사상 최초로 미국 애플(65조5600억원)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의 영업이익이지요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의 한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은 의식은 있으나 아직 거동은 못 하는 상태”라며 “가족들을 알아보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고 말했어요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유치하여 2월9일 개막식을 가졌던 평창동계올림픽은 17일간의 열전을 끝내고 내일이면 폐막식을 갖는데 IOC 명예위원 이건희 회장은 병석에서 무슨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적폐청산에 몰려 수사를 받고있는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 마음일까요? 많이 궁굼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조동렬(일송) ▲ 2011년 더반 IOC 총회 직전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의 회동을 주선한 이건희 IOC 위원...▲ 2011년 7월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평창이 결정되자 눈물을 흘리는 이건희 IOC 위원(현 명예위원)...
▲ 기뻐하는 대한항공 승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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