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노성훈 선생님의 첫 진료
다음날은 주일이라 이층 성가대 석에 앉아서 성가를 부르며 미사를 드렸다. 그런데 늘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습관처럼 줄줄 그냥 지나갔던 기도의 한 구절 한 구절들이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면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의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성인 성녀,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저 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든지,
‘오늘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 .’
등이 특히 그랬다. 나는 사실 일용할 양식만 가진 게 아니었다. 나는 예수님한데 비하면 엄청난 부자였다. 그걸 다 팔아가지고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오라고 하였는데, 언감생심 아직 이도 안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자신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내를 쳐다보고 피식 웃었는데, 이 때까지 찡그린 내 얼굴만 보다가 그렇게라도 웃는 나를 보니 아내는 좋은 모양이었다. 우리 부부는 우리가 아끼는 몇 몇 성가대 식구들을 데리고 가서 점심을 먹었다. 어쩌면 마지막 점심 나누기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11월 12일 월요일)은 학교에 출근하여 오전 근무만 하고, 집에 와서 좀 이른 점심을 먹은 후 신촌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오래간 만에 연대 병원에 와보니 새로운 건물을 날아갈듯이 지어서 환자를 받고 있었고 입구에는 세계 제일의 병원이라는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과 서로 무슨 협약을 맺었다고 자랑하는 현수막과 세계에서 인정받은 국내 유일의 병원이라는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3층 로비로 올라가니 병원이 어리어리하였다. 안내 데스크에서 가서 S○○ 교수님 방을 물어 보니 앉아있던 두 명 중 한 명이 일어서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면서 나를 안내하였는데, 우리가 찾는 S○○ 교수님은 옆 건물에 따로 있었다. 방 문패에는 교수님 이름은 없고 대신 원무과 ○○ 실장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교수님은 안보이고 대신 비서같은 여직원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내가 내 이름과 주민번호를 이야기하자 그 직원은
“아, 그렇잖아도 실장님이 말씀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 가지고 지금 바로 4층 내과의 노성훈선생님 방에 가면 담당 간호사가 안내해 주실겁니다.”
하면서 하이얀 봉투 하나를 주었다.
나는 노성훈선생님 방의 간호사의 안내로 별로 기다리지도 않고 진료를 받았다.
“아, 안그래도 S○○ 교수님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쪽으로 머리를 두시고 다리를 세우 시고 누워보세요. 그리고 저쪽 병원에서 가지고 오신 영상 자료는 이리 주시고요.”
하시고는 목덜미에서부터 아랫배까지 자세하게 손 끝으로 만져보고, 등도 구석 구석 만져보고 이야기 하였다.
“그것이 있는 위치가 위의 입구 부분이어서 수술을 하게 되면 아마 위를 모두 제거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간호사가 일러주는 대로 여러 가지 검사를 해야 하니까 오늘 검 사 스케줄을 잡고 가세요. 수술하면 나을겁니다. 걱정마세요.
그럼 검사 마치고 수술 스케줄이 잡히면 뵙겠습니다.”
나는 큰 병이 걸렸는데 3분 정도 진료를 한 의사는 너무도 간단히 말을 하였다.
간호사는 미주알 고주알 여러 가지 검사를 예약하는 곳과 방법을 일러 준 다음, 모두 다 예약을 하고 집에 가 있으면 전화로 다음에 병원에 올 날을 통지해준다고 하였다. 검사는 참 많기도 하였다. 가슴 사진, 피검사, 소변검사는 기본이고 위내시경, CT, 심전도 검사, 폐기능검사 등 많은 검사들의 스케줄을 잡는데 만도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군에서 중위 시절에 급성 간염으로 조치원에 있는 국군통합병원에 3개월 간 입원한 이후로 입원하여 병을 치료하기는 처음 같았다. 그런데, 아내가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피곤하여 잠간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항병원에서의 내시경 결과대로 내 배속의 위암 덩어리가 정말 그렇게 크다면 이미 늦 어도 한참 늦은 말기에서도 끄트머리일 터인데, 그렇다면 어차피 수술을 해도 가망도 전 혀 없는 것을 요란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폐암을 치료하실 때에도 내과 의사들과 외과 의사들의 의견이 달라 나를 당황하게 한 경우가 있었다. 당시 아버지 연세가 76세이셨는데, 내과 의사분들은 그냥 항암치료를 하고 그렇게 하면 2, 3년은 그런대로 버티실 수 있다는 의견이었는데 반하여, 외과 의사들은 수술을 하면 금방이라도 폐암이 완치될 것처럼 장담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을 지고 수술을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해야 하였는데 보통 고민이 아니었다. 수술을 하면 수술하는 날부터 병원에서 오랜 기간 요양을 해야 하고 만에 하나 다시 재발하는 날에는 지금만큼도 지낼 수 없이 상당히 짧은 기간 안에 돌아가실 위험이 있었고, 또 수술을 안했다거 갑자기 병이 악화라도 되면 나중에라도 아버지 당신이나 고모님들이
‘그 봐, 수술을 했더라면 낳는다고 했는데 자식이 되어가지고 돈 아끼느라고 그냥 뒀다.’는 말을 들을까봐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참 고마운 분이 계셨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를 같이 치료해주시던 내과 여자의사선생님이었는데, 나보고 시간 있으면 병원이 아닌 의과대학 자기 연구실로 한 번 들리라고 하였다.
내가 전화로 시간 약속을 하고 그 선생님 연구실로 갔더니 따뜻한 차를 끓여 나와 같이 마시면서 말해주었다.
“요즈음 아버지 수술 때문에 고민이 많으시죠?
저도 같이 참여하는 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제가 수술을 하라 마라 할 수는 없어요.
그 대신 제가 연구하고 있는 자료 몇 개를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말하고는 자기 컴퓨터에서 이리 저리 검색을 하더니 나를 가까이 오라고 하여 보라고 하였다. 그 자료에는 아바지와 같은 연세의 페암 환자들을 치료한 기록과 통계 자료가 있었는데, 수술을 한 경우에는 2년 이상 생존할 확률이 얼마이고 또 항암 등 방사선이나 약물로 치료하는 경우에는 생존할 확률이 얼마이며,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경우와 저 경우에 대하여 돌아가실 때까지의 삶의 질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정리한 자료였다.
나는 그 자료를 좀 인쇄하여 줄 수 없냐고 하였더니 교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그건 안된다고 하셨고, 이렇게 보여드리는 것도 송선생님이 처음이라고 하면서 아무한데도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그 자료를 보고 나는 ‘수술을 하지 않기’로 자신 있게 결정을 내렸다.
그것이 아버지의 남은 삶에 대한 질이 훨씬 좋기 때문이며, 이러나 저러나 어차피 아주 길어야 3년 정도 사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 후 많은 고통이 따랐지만 2년 7개월 정도 사시고 돌아가셨다.
나는 집에 와서 다시 생각하였다.
내 병은 수술을 할 경우에 살 확률이 정말로 얼마나 될까?
암 덩어리가 그렇게 크다는데 하면서 나는 내 주먹을 쥐어가지고 자를 가져다 대어보았는데, 나는 엄마를 닮아 손이 워낙 볼품 없이 작아서 주먹 길이가 10센치가 모자랐다.
나는 내 주먹을 내려다보면서
‘이것보다 더 큰 암 덩어리가 지금 내 배 속에 있단 말이지,
그래도 그걸 수술하면 내가 살 수 있다는 건데, 설마.’
나는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괜히 수술이네 입원이네 분답만 떨고 2, 3개월 후에 죽을 양이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차라리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보험에 대한 나쁜 기억만 있는 아내한데 욕을 먹어가며 들어둔 암보험 만기가 2년 전에 끝이 난 상태여서, 암에 관한 한 진료비, 수술비, 치료비 등이 모두 보전되게 되어 있어서 자식들한데 돈 걱정은 안시켜도 되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검사도 전부 받지 말고 그냥 이대로 좀 살다가 가는 것은 어떨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아내는 피곤하였든지 벌써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1-5 애들아, 수능 시험 잘 보아라
2007학년도에는 수능일이 11월 15일이었으므로 수능 이틀 전 오후에 학생들이 시험을 치를 수험표가 학교에 도착하고, 수능 하루 전 날 14일 오전에 학생들은 수험표를 받고 오후에는 자기들이 실제로 시험을 칠 수험장에서 실시하는 예비소집에 응하여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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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림여자고등학고 > |
14일 학교에 출근을 하니 고3 담임교사들은 자기 반 학생들의 수험표를 수험장별로 정리하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자 옆 반 담임 R교사가 우리반 수험표를 건네 주면서
“선생님 반 학생들은 모두 S중학교에요. 가까워서 좋곘어요.하였다.
나는 수험표를 들고 학생들이 기다리는 교실로 올라갔다. 가면서 나는 이것이 내가 36년 동안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과 나누는 마지막 종례라고 생각하였다. 학생들이 내일 수능 시험을 치면 나는 병원에 예약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으러 다녀야 하고, 그리고 마음 속으로는 이미 학교에 사표를 내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3 담임이므로 학생들이 대학 입학 시험 지원 상담도 해야 하지만, 거기까지는 내 몸의 상태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교실에 올라가니 우리 반 학생들은 역시 여학생들이라 참새떼 모양 여기 저기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내가 교실에 들어 온 것을 본 반장이 자리를 정돈시키고 구령을 붙였다. “차레, 선생님께 경례.”
나는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받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귀한 따님들은 내 인생을 보람되고 가치 있게 했던 보석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제, 꿈에 수능 만점 맞은 사람 손들어 봐.”
갑작스런 생뚱맞은 내 말에 서로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아, 그럼 꿈 꾼 사람이 나밖에 없단 말이야?
아 글쎄, 어제밤 꿈에 요술 연필을 여러분에게 한자루씩 주었는데, 문제가 막힐 때마다 도로록 굴리기만 하면 정답의 번호를 척척 가르쳐 주는게 아니겠니? 그래서 우리 반 전 체가 모두 1등급을 받았거든.”
그제서야 서서히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요술 연필 오늘 주시면 되잖아요.”
평소에도 수학 시간만 되면 가장 눈이 반짝 반짝 빛나는 눈빛나가 대답하였다.
“그래요. 좀 있다가 수험표 나눠 줄 때 요술 연필도 같이 줄테니까 내일 시험 잘 쳐요.
우리반은 모두 시험장이 S중학교인데 잘 안다고 가깝다고 어디로 새지 말고 예비소집에 가서 자기가 시험 칠 교실이 어디인지, 집에서 버스로 얼마나 걸리는지 꼭 점검하세요. 그리고 되도록 시내버스를 타고 가요. 매년 보니까 자가용 타고 가는 애들보다 버스 타 고 가는 학생들이 시험 더 잘 치더라.
또 수학 시간에 막히면 테레파시가 있잖아요. 여러분이 날리면 내가 받아서 풀어서 날릴 께요. 테레파시 접속 번호는 60189예요.”
텔레파시 번호로 내 군번을 이야기 한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나는 언어, 수리, 외국어, 선택 시간별로 시험치는 요령이며 오늘 저녁에 만일 잠이 안 올 경우에 잠드는 방법이며 내일 점심 도시락에 대한 이야기 등 주의 사항을 일러준 뒤, 한 사람 한 사람 앞으로 나오게 하여 수험표를 나누어 주었다. 수험표를 나누어 주면서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진한 악수를 하였다. 나는 악수를 하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수학 실력이 우리 학생들한데 찌리릭 옮겨가서 이과 학생들한데는 너무도 결정적인 수학 시험을 잘 보았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그렇게 했다. 우리 학생들도 한 사람도 웃는 사람이 없이 너무도 진지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학생들이 수험표를 받고 모두 다 돌아간 텅 빈 교실에 나는 잠시 혼자 남아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36년 동안이나 나의 모든 정열을 바쳐온 교사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용히 교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학생들이 아침 7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매일 한결같이 앉아 있던 책걸상, 내가 앉아서 밤이 늦도록 연구하고, 자료를 만들고, 그래픽을 그리고, 원고를 쓰고 수능 모의고사 문제를 출제하던 컴퓨터와 교사용 책상, 학습을 돕기 위한 비디오 모니터, 칠판은 물론 뒷 병에 걸린 가스난로와 때가 노랗게 낀 커턴까지 그 모든 것이 나의 가슴을 찡하게 하였다.
‘그래, 잘있거라. 정든 교실아.
난 어쩌면 학교만 그만 두는 것이 아니고 이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정리해야 하는가 보 다.’
그리고 조용히 유리창을 통해서 잘 정돈된 학교 정원을 내려다보며 기도하였다.
‘하느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상주 촌놈 중에서도 촌놈을 이렇게 사랑하시어 학교 교사로 평생을 지내게 해 주신 은혜 를 감사합니다. 제가 일하는 대상이 돈도 아니고 서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사람인 것을 감사드리며, 사람 중에서도 비온 뒤 힘차게 솟구치는 하이얀 죽순처럼, 겨울의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싱싱한 난초처럼 순수한 맑은 영혼을 가진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게 해 주신 특별한 은총을 감사합니다.
공군에서 4년, 충북 영동여고에서 4년, 서울 미림에서 28년 도합 36년의 교사 생활을 오늘 이 자리에서 접을려고 합니다.
그동안 그래도 제법 부끄럽지 않게 교사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심을 감사드리며, 만 에 하나 제 삶이 조금이라도 기적과 같이 연장된다면,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애써보겠습니다.
아 멘.’
기도를 하고나니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기분이 한 결 좋아졌다.
나는 교장실로 들어가 앞으로는 내가 출근을 못하는 경우에는 병가로 처리해 줄 것과, 우리 반 학생들을 졸업식때까지 대신 맡아 줄 교사를 정할 것을 말씀드렸다.
올 해 다시 부임하신 교장선생님은
“내가 학년 초에 우리 송선생님한데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었나봐요.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선생님이 얼마나 학생들을 사랑하시고 얼마나 열심히 가르치셨 는지 제가 직접 보고 놀랐습니다.
요즈음 위암은 수술만 잘 하면 대부분 치료된다니까 학교 걱정은 조금도 마시고 치료에 전념하세요. 남은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내일 수능을 치고 나면 수능 성적 발표 날까지 고3은 수업이 없고, 성적이 나오면 진학 상담을 해야 하는데 옛날 하고는 달리 인터넷이 발달하고 또 각 대학에서 너무도 친절하게 입시상담을 해주는 터에 고3 담임이 하던 진학 지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해 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원서 접수도 학생들이 각자 집에서 컴퓨터로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곤 겨울 방학이고, 2월에 개학 하면 졸업식이었다.
나는 교장실을 나와 교무실로 와서 교무부장과 내 주변 선생님들에게 내가 위암에 걸린 사실과 내일부터는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처음 공개적으로 하였다.
내 말을 들은 동료 교사들은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고, 자기들도 빨리 가서 위나 장 내시경을 해보야야 하겠다고 하였다.
실은 그 이후 많은 동료 교사들이 내시경을 하였고 그 결과 몇 명은 초기암이 발견되어 치료를 받았다고 전해 들었다. 정말 큰 다행이었다.
<계 속>
첫댓글 2011년에는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현업때 모시던 분은 완치되어 건강한 삶을 살고 계신다.
그리고 긍정적사고와 웃음은 4배 항암능력을 갖어온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는데
TV를 봐도 유머 개그 코미디 프로위주로 보세요.
따뜻한 친구 성규, 사랑의 충고 고마워요. 나도 노력할께요/
재복아, 내 기억으로는 깨끗한 도덕 교과서 같은 이미지의 재복아, 반갑고 고맙다
친구야 대전 이재복일쎄 좌절하지말고 용기를 잃지말고 끈기있게 싸우면 이길수있으리라 확신하네 건강되찿길빌께
긍정의 힘, 명상, 웃음치료, 3일 디톡스, 자신의 몸을 리셋하는 효과적인 전략은 300가지가 넘는 다고 합니다. 섭씨온도1도를 올리면 면역성이 5배올라간다..여러가지 학습...모든 것은 자신이 결단하는 것에 달렷다고 봅니다. 아름답게 긍정적으로 투명생활하시는 자세에 박수갈채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