哀桂娘(애계랑) 妙句堪擒錦-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淸歌解駐雲-청아한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偸桃來下界-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竊藥去人群-불사약을 훔쳐서 인간세상을 떠나네 燈暗芙蓉帳-부용꽃 휘장에 등불은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비취색 치마에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桃發-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薜濤墳-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허균(許筠)
계랑(桂娘)의 죽음 애도하며 허균(許筠)이 지은 절절한 시(詩) !
위의 시는 허균(許筠)이 부안 기생 이매창(李梅窓)이 1610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창기생을 애도하며 쓴 시다 桂娘(계랑)은 기생 이매창의 호(號)다.
이매창(李梅窓)은 개성기생 황진이(黃眞伊)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기생 시인이다. 우리는 학창시절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시(詩)를 외우던 생각이 난다 다시 절창(絶唱)의 시(詩)를 아래에 적는다
梨花雨零時-이화우 흣뿌릴 제 執手泣別人-울며 잡고 이별한 임 秋風落葉-추풍낙엽에 死猶憶我-져도 날 생각는가 千里孤夢-천리에 외로운 꿈은 往來還-오락가락 하노매 이매창(李梅窓)
필자는 위의 이매창(李梅窓) 시를 읽을 때마다 수양대군에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로 쫒겨 갈 때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새운 숭인동 청룡사 우화루(雨花樓)가 생각나 깊은숨을 쉬게 한다.
이매창(李梅窓)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여 보면 1573년 ~ 1610년 사이의 인물이다. 조선 선조 때의 부안 출신 기생이다. 본명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梅窓) 또는 계생(桂生.癸生), 계랑(桂娘.癸娘)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매창(李梅窓)의 문집(文集)인 “매창집(梅窓集)”에 쓰인 발문(跋文)에는 아버지는 부안현(오늘날 부안군)의 아전(衙前) 이탕종(李湯從)이라 기록되어 있다. ※발문(跋文)-책의 끝에 본문 내용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
전북 부안에서는 지금도 매창(梅窓)을 기려 매창공원(梅窓公園)이 조성되어 있다. 해마다 매창문화제도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개성기생 황진이 부안기생 이매창 진주기생 논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허균(許筠)은 어떻게 이매창을 알게 되었기에 그녀를 애도(哀悼)하는 시를 썼을까? 허균은 1601년 조운판관(漕運判官)이 되어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 부안에서 처음 매창을 만난다. 고을 수령(守令)은 조운판관(漕運判官)이 오니 기생을 수청(守廳)들게 하는 것은 관례(慣例)다.
이때 수청(守廳)든 기생이 매창(梅窓)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몇 마디 말이 오가는 동안 이내 시(詩)로서 의기 소통하여, 밤새도록 잠잘 생각을 안 하고 술잔을 나누며 시(詩)를 주고받았다. 허균(許筠)이 누구인가 ! 우리역사 최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동생이며 홍길동(洪吉童)의 작가가 아닌가
아마 짐작컨대 허균(許筠)은 같은 시인(詩人)인 자신의 죽은 누나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생각나서 더욱 매창과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옛말에 未解情仇 化作此處傾瀉라! “못푼정 한이 되어 이곳에 쏟는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시(詩)로서 맺어진 두 사람은 그 흔한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명기(名技)황진이와 서화담(徐花潭)같은 이야기다
그 대신 매창(梅窓)은 그녀의 조카를 허균의 잠자리에 들여보냈다고 한다. 아마 시(詩)로서 맺어졌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매창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 있었다. (다음 기회에 유희경과 이매창의 절절(切切)한 러브스토리를 옳기겠다)
이후 둘은 시(詩)로서 계속 인연을 맺어간다. 1609년에는 허균(許筠)은 아래와 같은 편지를 매창(梅窓)에게 보내기도 한다. 편지라기 보다는 필자 눈에는 한편의 절절한 시로 보인다
蓬萊山秋正當成熟時-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참 무르익었으려니 欲歸興致洶湧澎湃-돌아가려는 흥취가 도도하오 汝定知吾將返鄉-그대는 반드시 내가 시골로 돌아가겠다는 縱使失約亦笑容滿面-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것이지만 若當時有錯念-만약 그 시절에 한 생각이 잘못되었더라면 吾與汝交誼何以延十年-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떻게 십 년 동안이나 豈能如此情深?그토록 다정할 수가 있었겠소? 何時相見訴盡心語-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 할는지 對紙感心悲-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 ※필자 생각이지만 위의 글 내용은 남녀간의 흔한 육체적 관계였다면 이렇게 오랜 친구가 될수 있었겠는가 시(詩)를 통한 사랑이 이렇게 묶어 놓았다. 허균은 이 편지를 보내고 난 후 매창과 다시 만날 기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매창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난 것이다. 너무나 애통하여 이런 시같은 편지를 쓴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哀桂娘(애계랑) 시(詩)에서 허균(許筠)은 매창(梅窓)을 선도복숭아(天桃)를 딴 죄로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선녀로 표현하고 있다.
또 위 시 마지막에서는 매창을 중국 당(戇)나라 여류 기생시인 설도(薜濤)에 비유하고 있다. 허균(許筠)은 매창(梅窓)을 이렇게 깊게 사랑했기에 허균이 조선의 명시(名詩)를 모아 펴낸 “국조시산(國朝詩刪)”이란 시선집(詩選集)에도 매창의 시(詩)를 올려놓았다.
아! 매창(梅窓)! 왜 그리 빨리 가셨소!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