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과 전술을 논한 10세기 비잔티움의 군사 교범에 나오는, 이상적인 원정 캠프의 개략도.
비잔티움에 군사적인 중요성이 현격히 더 컸던 것은, 3~8세기에 높은 군사적인 면의 명성을 누린 아르메니아인들이었다. 이 지역은 기독교로 개종했던 시기 즈음은 363년도에, 로마와의 조약 후 사산조 페르시아가 재점유하였다.
그 이래로 죽, 지방 행정-Local Authority-당국은 불온하고 소란스런 전사 귀족층의 손에서 크게 이뤄졌다-어느 쪽이든 외국 제국이 상황을 통제했지만. 대영주인 이쉬카한-Ishkhan-들과 소영주인 나카라르-Nakharar-들이, 토지에 기초한 초기 봉건적인 형태를 보이면서 자기네들 소유의 성에서 살았다.
특히 나카라르들은, 지불을 잘 해주고 자기네들을 그냥 내버려두거나, 다른 더욱 부유한 영역들을 제공해준다면 누구를 위해서든 기꺼이 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6세기 후반의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이 나카라르들을 양성하면서, 그들 다수가 서부 아나톨리아의 페르가몬 주변에 정착하도록 장려했다.
비잔티움군에서의 아르메니아인 부대의 중요성은, 이천 명이 아바르족에게 맞서는 도나우 변경 지역에서 엘리트 중기병을 형성하고 나머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면서 7세기 동안 증가했다.
하지만 이슬람 아랍에 대한 성공적이지 못했던 비잔티움의 시리아 방어에서 아르메니아인 부대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긴 했어도,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서 분할되어오고 있었던 다른 아르메니아 나카라르들은 이슬람 아랍의 아르메니아 정복을 도왔다.
긴 비잔티움-이슬람 아랍 변경 지역 중 8~9세기에 전쟁으로 인구가 줄어들지 않은 부분은, 아르메니아 뿐이기도 하다. 그보다 남쪽의, 다수가 아르메니아인이었던 파울리키아파의 구획은 같은 시기의 전쟁 중 비잔티움이 짓뭉개놓았다.
일부는 반칼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해서 훗날 보고밀파 이단(MAA 195, Hungary & Fall of Eastern Europe 1,000~1,568)이 흥기하는 데 공헌했던 반면, 나머지는 보다 관용적인 분위기의 이슬람 아랍 지역으로 도주했다. 후자는 기병으로 종사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태양으로 여겼다고 믿어진다.
한편 그들이 버린 그 고향땅에는 이슬람교도 및 정교도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식민되었고, 이로 인하여 결국 그들을 지중해로 가게 한, 아르메니아인들의 남방 확산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르메니아에는 대강 두 봉건 공국이 나타났으며, 각기 아랍 칼리프령에 조공을 바치던 반 호수 주변의 수많은 혼재된 아랍-아르메니아 아미르령들과 함께 한 북쪽의 바그라티드와 남쪽의 아르쯔루니가 그들이었다.
아르메니아는 원래의 협정 아래에선, 필요할 때 기병 1,500명을 보내게 되어 있었다.
반 호수의 아랍-아르메니아 아미르령들은 10세기에 비잔티움인들, 쿠르드인들 그리고 알레포의 함단 왕조의 통치자들 사이에서 뭉개지기 전엔, 비잔티움의 옆구리에 박힌 가시였다.
당시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휘 체계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오고 있었긴 했으나, 10세기의 비잔티움 군사 교범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주의 깊지 않은 파수들이라는 어두운 면을 경고한다.
아르메니아의 지역 통치자들은 이론적으로는 25,000이나 40,000까지도 일으킬 수 있었지만, 그런 전반적인 징집은 7세기 후로는 드물어졌다. 아르메니아인 부대들이 그들의 시대에서는 여전히 컸음에는 부정의 여지가 없으나, 그 지역은 매우 강하게 요새화되어 있기도 했다.
반 호수 동쪽의 바스푸라칸 속주에는 일흔 개의 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을, 교회 그리고 수도원도 요새화되어 있었고, 4세기의 아르메니아에는 적에게 바위를 굴리도록 훈련된 특별한 산악 병단들이 있었다.
한편 아르메니아인들은 공성전에서는 성벽을 오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쇠갈고리를, 그리고 위에서 떨어지는 돌에 대비해서 등을 보호하게 큰 가죽 방패를 장비했다. 군역은 토지 소유와 연결된 특권으로 간주되었고 각 귀족은 독자적인 기 아래 자유민들의 부대를 이끌었다.
아르메니아는 철이 풍부했으며, 보통은 전원 말을 탔고 특히 무장 상태가 좋았다. 사실 아르메니아의 갑주는 보통이 아닌 중무장으로 여겨졌던 반면, 철제 마갑은 다른 지역보다 더욱 흔했다. 마수디 같은 현실적인 역사가들은 아르메니아인 기병이 10세기 즈음에 전투 도끼를 썼음을 언급하지만, 아르메니아인 연대기 작가 스테파노스 오르벨리아노스는 9세기 초반에 이를 보다 시적인 용어로 묘사했다.
‘그는 진주로 장식한 빛나는 호화로운 흉갑을 빼입은 뛰어난 신체를 뽐내며 병기를 집어 들었다. 호랑이 머리가 꼭대기에 있는 투구를 썼고 허리에는 검을 찼으며, 왼쪽 어깨 에는 황금 방패를 걸어 맸고 오른손에는 강한 창이 있다. 그는 자신의 검은 군마에 뛰어 올라타곤 적에게로 돌진했다.’
쿠르드인들
이들의 기원은 전설로 사라져 있다. 기원이 아랍이었으나 가산조(아래 설명 참조)와의 불화 후 독립했다고 주장하는 설화가 있으며, 이슬람교가 도래하기 직전 시기에서 독자적인 명칭으로 나타난다.
아르메니아적 기원과 셈족적 기원이 혼재된 한편 이란어를 말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7~10세기 동안은 보잘것없는 자기네들의 세력가들 아래에서 점진적으로 조금씩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의 거의 모든 정치군사적 활동은 이슬람 권역에서 이뤄졌으며, 비잔티움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건 비잔티움 제국이 10~11세기에 동부 아나톨리아를 정복한 후에야 이뤄진다.
첫댓글 항상잘 읽고있습니다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