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예인 ‘심자란’ 추모공연을 보고/안성환/240809
울산중구 문화의 전당에서 ‘심자란 추모공연’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울산문화아카데미 부설강좌 수업에 박민효(1672-1747)선생의 ‘상체헌집 심자란’에 대한 원서를 입문하는 중이므로 전체 스토리가 궁금한 때였다. 특히 이번 추모공연 등장 인물 중에 울산문화아카데미에서 함께 인문학공부를 하는 정세호선생과 김은철선생이 상두꾼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공연 40분 전이라 장 내는 조용했다. 필자가 조금 일찍 도착한 모양이었다. 공연 시작 10분 전쯤 공연장은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참석하였다. 깜짝 놀랐다. 울산 거주 반세기, 필자만 심자란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던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공연을 통해서 조금 가까이하고 싶었다. 이후 곳곳에 안내원들이 ‘휴대폰 무음’ ‘촬영금지’란 피켓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다. 주요 장면을 찍고 싶지만 체통 때문에 장면 마다마다를 가슴에 담는 길 밖에 없었다. 잠시 후 공연장은 어둠이 깔리더니 장막 앞으로 예술감독 도창 이선숙선생이 모습을 나타냈다. (※도창: 노래를 바르게 이끌어 나가도록 인도하는 사람) 이번 공연은 전체 4장으로 되어 있으며, 심자란의 일대기를 약 1시간에 걸쳐 춤과 소리로 표현하였다. 한 장르가 바뀔 때마다 관객들의 이해를 주기 위해 선생은 무대 앞에서 ‘상체헌 자란전’ 원문 내용을 쉽게 창으로 설명하였다. 마지막 2막 3장에 ‘찔레되어 돌아오리’로 막을 내리는데 심자란의 첫사랑에 대한 곧은 절개를 지키며 이화세계로 떠나가는 장면이다. 무대는 상여꾼과 만장이 꽉 채운다. 만장에는 ‘왕생극락발원’ ‘나무아미타불’ ‘수절기예 심자란’ 이란 글자가 쓰인 만장이 지나가면서 공연이 끝난다. 그때 뭔가 알 수 없는 찡한 감성을 느꼈다. 공연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뭐가 필자를 이렇게 놀라게 했을까? 공연장 밖으로 나가 바로 도창 이선숙 선생을 만났고 우리는 그의 예술무대에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심자란’이란 인물에 대하여 조금 알 필요가 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해마다 추모제와 추모공연을 하고 있을까? 더 궁금한 것은 아주 신분이 낮은 기생에게.... 너무나 궁금하였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단순히 기생이라 하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란 뜻이기도 하다. 아마 그 시대에 여성으로서의 저항하기 힘든 여성의 권위를 찾기 위해 권력에 저항한 여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잊지 못하는 것 보면..... 그는 조선 후기 영조시대에 아버지 심대연과 어머니 초경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신분은 관아의 아전이며, 어머니는 관청에 소속된 기생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어머니 신분에 따라야 하므로 어린시절 부터 기생의 길을 걸어야 했다고 한다. 그는 어린나이지만 얼굴이 예쁘고 자태가 단정하고 총명하였고 한다. 그가 10살이 되었을 때 당시 울산부사(시장)였던 권상일은 자란의 타고난 바탕과 재능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후일 부사 권상일은 아직 어린나이에 기녀로 살기에는 너무 아깝다 하며, 그를 음악공부를 할 수 있는 교방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자란은 권상일부사의 배려로 시와 서 그리고 그림도 배우고 노래와 악기도 배울 수 있는 교방으로 들어갔다. 자란은 재능이 너무 탁월하여 시, 서, 화는 물론이고 거문고를 잘 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15세 되는 해에 운명이 바뀌게 된다. 어느 날 경상좌도 병영우후[절도사(사령관)을 보필해 군기를 세우고 군령을 전달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관. 또는 절도사 업무를 대신하기도 함]의 벼슬을 하는 윤면일을 만나게 된다. 윤면일은 그의 타고난 재능과 거문고 소리에 한눈에 반하게 된다. 후일 윤면일은 울산부사직을 함께 겸하게 되었을 때 자란을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하지만 신분이 낮아 천대를 받아야 했던 자란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끝에 자기가 데리고 있는 여자 노비 2명을 팔아 기생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여 신분상승을 시켰다고 한다. 후일 윤면일은 승진하여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때 함께 따라갔지만 신혼생활 1년 만에 갑작스러운 병에 남편인 윤명일은 죽고 만다. 그때 울산에는 정광운이란 자가 울산 부사로 새로 부임하였다. 신임부사인 정광운은 관기의 기생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천에 기거하고 있는 자란을 울산으로 돌아오기를 명하였다. 자란은 거부하자 자란의 부모를 혹사 시키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울산으로 돌아왔다. 정광운 온갖 유혹과 협박으로 수청을 요구했지만 거절한다. 결국 자란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 시댁으로 보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때 나이 18살이었다. 그는 18년을 살면서 인생에 황혼기는 딱 1년이었다. 그 1년이 경상좌도 병영우후란 벼슬과 울산부사(시장격)의 벼슬을 겸직한 윤면일과 함께 있을 때이다.
공연을 보고 필자의 생각을 정리한다.
예인(藝人)과 열녀(烈女)를 가진 인물을 꼽으라면 ‘춘향’과 ‘논개(1574-1593)’ 그리고 ‘자란(1725-1742)’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전라도 남원에 춘향(성춘향)이가 있다면 경상도 진주에는 논개(주논개)가 있다. 그리고 울산에는 자란(심자란)이란 열녀가 있다. 성춘향이는 고전소설속의 인물이지만 여기서는 함께 다루어 본다. 공통점은 모두 10대에 꽃을 피운다. 논개는 진주성에서 19세에 순절하고, 춘향이는 16세에 목숨으로 절개를 지킨다. 울산의 자란은 18세에 목숨으로 수절한다. 세 사람은 예인으로 꽃을 피우고 열녀로 생을 마감한 인물들이다. 이번 추모제 공연을 보며 자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미인박명(美人薄命)’ 옛 사람들은 어떻게 풀었을까? 요즘 말로는 ‘예쁜 여자는 일찍 죽는다’는 뜻이다. 순간 네 단어가 뇌리를 스쳐간다. 어쩌면 조선시대에 양반들은 예쁜 여자들을 그냥 가만두지 않고 몹시 괴롭히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자결하겠는가. 양반세계에서는 스스로 다첩제란 애매한 논리를 펼쳐 놓고 자기들은 여러 명의 첩을 두면서 여자들은 정조를 지키라고 하는 상식 밖의 논리를 펼친 것 같다. 마치 천한 기생이라는 딱지 하나 부쳐 놓고 몸종이나 노예처럼 대하는 시대, 양방 외에는 사람 취급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이 참 좋은 세상이다. 이유는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전체 백성의 15% 내외이지만 지금은 5천만 동포가 모두 양반이니까.
심자란은 이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는 것은 분명하다.
2024년 심자란의 추모 공연을 보고 안성환쓴다.
첫댓글 처음 접하는 이야기 이네요. 아마도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더 많은 홍보가 있어야 될 듯 ..
머지 않아 심자란의 향기가 전국에 울려 퍼지기를 바래봅니다.
즐겁고 유쾌한 일요일 하루 되십시오.
늘 고향을 사랑하여 고향을 지키는 후배님 고맙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