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그런데 최근 학계와 사회 일각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계급적 이해관계를 위해 역사의 기억들을 왜곡하고 전용하는 현상들이 나타나 우려스럽다. 2019년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자 배상 판결 문제를 구실로 경제보복 조치를 취했다. 이때 국내의 보수적인 정치인과 지식인, 나아가 경제 단체들이 원인 제공자인 일본이 아닌 자국 정부를 향해 마구 손가락질하며 법석을 떨었다. 일본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으면 한국 경제가 당장 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들은 한일 과거사 문제의 해결 방안에서도 같은 태도이다.
(37)
그런데 9*18 사변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일 정책은, 즉각적인 대일 항전을 바랐던 임시정부는 물론 상하이 민중과 대학생들을 점차 실망시켰다.
9*18 사변 직후 “중국 정보는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국제연명에 호소하는 것과 함께 국내적 분열의 중심이 되고 있는 공산당 세력의 토벌에 집중”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에 따라 동북지방의 방위를 맡은 장쉐량에게 일본군과 교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중국 정부는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 ‘무저항주의’를 선택하고 국제연맹을 통한 외교적 해결에 집중했다.
(142-143)
김구는 천퉁셩 부부의 극진한 환대 속에서 한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는 천퉁셩 부부의 안내를 받으며 자싱의 산천을 감상하고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상하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산과 호수, 넓게 펼쳐진 비옥한 토지를 감상했고, 임진왜란 당시 마을 부녀자들을 살리려다가 왜놈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승려의 슬픈 사연이 담긴 서문 밖 혈인사의 돌기둥, 그리고 소낙비에 보리가 떠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오직 글 읽기에만 골몰한 서생 주바이신의 무덤에 얽힌 사연을 들으며 오랜만에 눈과 귀가 호사를 누렸다.
(277)
위혜림의 행적과 관련하여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해방 이후 그의 행적이다. 정병준은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이후 행적을 연구한 논문에서,
‘1959년 안두희가 서울 수도방위사단 사령부 고급부관(대령 계급)으로 오사카에 나타나 경무대 기관원이던 위혜림, 나카지마 등과 북송손 폭파 공작을 벌였으나, 정보 누설로 공작에 실패한 후 귀국하였다.’
고 했다. 그리고 위혜림은 해방 직전에 “상하이에서 아마기스 기관의 하부 조직인 무라이 기관의 기관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맥아더 사령부 정보참모부 휘하 특수 공작 기관이던 캐논 기관에서 일해”고 이 기관이 해산된 뒤에는 ‘이승만의 도쿄 주재 사설 기관인 경무대 기관에서 일했다”고 한다.
위혜림과 김구의 질긴 악연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해방 전 김구 암살 공작에 밀정 노릇을 했던 위혜림이 해방 후에는 이승만 사설 기관의 부하가 되어,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와 함께 재일교포의 북송선 폭파 공작을 함께한 이 사실이.
(299)
임시정부가 재건됨으로써 이제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정국은 김구가 주도하는 임시정부와 김원봉이 주도하는 민족혁명당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양상이 되었다. 민족혁명당은 창당 당시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했다. 반면 임시정부는 이를 반대하고 재건한 입장이기 때문에 양측 사이의 갈등은 당분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