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꽃과 소나무와 바다>
황학주 지음 | 배병우 사진
"우리가 아직 자연과 함께일 수만 있다면, 이 세계는 그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살만하지 않은가" -황학주
이 책에서 말하는 고향은 단순히 개별적인 인간의 몸이 비롯된 곳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고향은 자연과의 만남을 통한 얻어지는 인간됨의 본질이며, 모든 상처 입은 생명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보살행이라는, 마음과 몸의 지향, 실천을 아우르는 말이다.
황학주는 <피스프렌드> 및 <캐나다인랜드미션>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아프리카 케냐의 마사이 마을과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모학 마을에서 5년 동안 지냈으며 인도, 도미니카공화국, 피지, 아이티, 중국 신장, 내몽고 등지에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의 경험은 단순히 여행자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실제 그 땅의 원주민들과 함께 살았던 생활인으로서의 그것이었다. 국가와 인종은 달라도 자연은 모두 같았다. 짧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 함께 호흡하고 관계하며 그의 눈에 들어온 '고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자연과의 만남을 통하여 인간됨의 근원적 고향을 회복하고, 나아가 그것이 이 땅의 상처 입은 많은 상념들, 특히 가난과 질병과 무지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아이들에게 사랑을 전해주고자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이국에서의 경험과 우리나라의 고흥, 강진, 제주 등지에서의 경험을 겹쳐놓는다. 속이 환한 호박꽃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밀물과 썰물을 보고 들숨과 날숨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생명력을 깨닫는다. 우리 산천에 펼쳐진 각양각색의 바위에서 만물의 형상을 발견하고, 소나무를 품에 안고 냄새 맡으며 자연과의 소통을 위한 다양한 경로를 찾아간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가을에 다시 저무는 숲의 동어반복을 보며 인간 세상의 비창의적이고 지루한 동어반복을 탄식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동안 거주했던 제주도의 오름에서 어머니와 만난다. 모성으로서의 어머니는 모든 자연 속에 내포되어 있지만, 달처럼 둥근 오름 안에는 '여럿'을 포용하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숲, 소나무, 꽃, 오름, 물, 바위가 있는 곳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이 필요한 차(茶) 만드는 일을 하며 사랑하는 이와 늙어가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배병우는 구본창과 더불어 한국 사진의 세계화를 이룩한 사진작가이다. 그의 소나무 사진은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한국 작가의 사진 작품 중 역대 최고 판매액인 6만 4,800달러(약 6,123만원)에 낙찰되었으며 영국의 팝스타 엘튼 존이 1만 3,200달러에 구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나무 사진'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배병우는 이 책에서 그간의 소나무 사진 외에도 꽃, 바다, 바위, 숲, 오름 사진을 공개한다.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진들은 현재의 배병우 사진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에서 깊은 고요와 부드러움 그리고 어머니의 강인함을 발견한 그의 사진은 마치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을 읽은 것과 같은 향수와 아련함을 자아낸다.
"소나무는 아버지고, 바다는 어머니이다" -배병우
화려하고 강렬한 꽃 사진으로부터 시작하여,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먹의 농담으로 표현된 오름으로 끝을 맺는 배병우의 사진은 작가가 스스로의 모든 작업물에서 선정한 40종의 작품으로, 그의 자연친화적 세계관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의 자연 친화는 인간 생명력의 근원으로서의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상물 자체의 생명력의 깊이와 에너지를 사유한다는 점에서 자못 니체적이기도 하다. 사진 예술의 장식성을 거부하는 그의 사진은 대상 자체의 깊이에서 스스로 발화되는 무채색과 유채색의 강렬한 에너지를 드러냄으로써 사진 예술의 평면성에 본질적 힘을 횡단시킨다. 그의 사진은 낯설음과 이물감을 빌어 찰나적인 시각 효과를 기대하는 인위와 꾸밈의 예술이 아니라, 대상 스스로가 울려내는 내부의 에너지를 깊이 있게 포착하고 있다. 그 강렬하고 충일한 원심적 에너지를 담은 사진의 질감과 농담의 깊이를 살리기 위해 세 차례에 걸친 인쇄 작업이 필요했다. 이러한 세심한 작업을 통해 <고향>에 실린 작품들은 인쇄물로 표현된 배병우 사진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만큼의 깊은 질감, 부드러움과 강렬함이 조화된 이미지로 형상화될 수 있었다.
언젠가 소나무와 오름, 바다, 산을 찍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배병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다는 내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고, 제주도는 80년대부터 다녔다. 제주도는 산과 수평선과 계곡이다. 나는 원래 바다에서 시작했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에 천착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자연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성품이 반영된 것이다. 도시보다는 시골을 좋아하고 양주보다는 소주를 좋아하며, 산과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그에게 강건하고 질긴 소나무가 순천이 고향이었던 아버지를 상징한다면, 깊은 바다는 여수가 고향이었던 어머니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여수에서 만난 향일암, 제주의 오름과 꽃 그리고 경주, 타히티, 뉴욕의 숲이 차례차례 펼쳐진다. 흑백사진에서는 깊은 여운과 여백의 미를, 컬러사진에서는 자연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색감이 느껴진다. 배병우가 『故鄕』에 담은 것은 무의식 속에 감추어진 태초의 이미지이자 우리 인간의 원형적인 고향의 모습이다.
저자 소개
<황학주>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루시』『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갈 수 없는 쓸쓸함』『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너무나 얇은 生의 담요』 등의 시집과 시화집 『귀가』『두 사람의 집짓는 희망』, 장편소설 『세 가지 사랑』, 산문집 『아카시아』『땅의 연인들』『인디언 마을로 가는 달』을 썼다.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이며, 국제민간구호단체인 <피스프렌드>의 대표, <국제사랑의봉사단>의 이사이다. 아프리카 케냐의 마사이 부족과 캐나다의 모학 부족 인디언보호구역에서 활동했다.
<배병우> 1950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였다. 국내에서는 <풍경을 넘어서> <사진-오늘의 위상> <사진-새로운 시각>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가했으며, 해외에서는 96년 일본, 97년 토론토, 98년 시카고, 98년 파리, 2006년에 스페인에서 전시를 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