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막 밖에서는 병사들이 하나둘 눈물을 닦으며 수중의 무기를 내려놓고는 몰래 진영을 탈출했다. 심지어 수년간 항우를 따르던 장수들과 숙부마저 작별인사도 없이 도망갔다. 밤사이 항우 주위에는 불과 1천여 명만 남았다. 항우는 군막 안에 앉아 술을 마시면서 시름을 달래다 감정이 격해져 영웅의 최후를 한탄하는 슬픈 노래를 불렀다.
산을 뽑을 듯한 힘이여 세상을 뒤덮는 기개여
때가 이롭지 못함이여 오추마마저 가지 않네
오추마가 가지 않음은 그래도 어찌해 본다 해도
우희여 우희여 너를 어찌할 것인가”
옆에서 듣던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떨어뜨렸고 눈물을 흘리며 차마 보지 못했다. 이때 우희(虞姬; 항우의 비)가 시위의 손에서 한 자루 보검을 들어 검춤을 추면서 항우의 근심을 풀어주었다. 그녀는 춤을 추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한나라 병사들 이미 우리 땅을 차지해
사방에 온통 초나라 노랫소리뿐이네
대왕의 뜻과 기개마저 다했으니
천한 이 몸 어찌 살기를 바라리!
노래를 끝낸 후 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항우의 발 앞에 쓰러졌다. 이날 밤 별도 달도 빛을 잃고 사나운 바람이 몰아쳤다.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리는 가운데 항우는 슬픔 속에 우희를 매장했다. 일찍이 일세를 풍미했던 초패왕(楚霸王)이건만 이 순간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텅 빈 군영을 바라보던 그는 대세가 이미 끝났고 되돌릴 힘이 없음을 알았다. 이에 오추마(烏騅馬; 항우의 애마)에 올라타고 야음을 틈타 남쪽으로 도망쳤다. 이때 그의 뒤를 따른 것은 겨우 8백기에 불과했다.
몰락한 귀공자 출신으로 자신의 무용과 카리스마로 순식간에 천하를 석권하고, 정점에 올랐으나 자신의 과오로 몰락한 항우(項羽; BC 232~202)는 귀족적인 인자한 모습과 광포한 학살자의 면모가 공존하는 인격 등, 정치인이나 군인으로서의 시시비비나 도덕적 선악을 따지기 이전에, 그는 후대에 초한지(서한연의), 패왕별희 등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생산하고 무수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24세에 병사를 일으켜 3년 후 패자가 되었고 31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중국의 역사학자 이중톈(易中天; 1947~ )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항우 주변에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며 지조 있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유방의 주위에는 이익만 밝히는 염치없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유방에게 기대어 작위(벼슬)를 구걸하고 식읍(재산)을 얻고자 했다. 이런 염치없는 인간들의 욕망을 잘 알고 있는 유방은 이들에게 적당히 벼슬과 재산을 주면서 잘 구슬려 이용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유방의 한나라가 시작된 후 중국에서 항우처럼 바보 같고 순진하고 제멋대로인 영웅은 점점 줄어들고, 그 대신 음험하고 이익만 밝히는 비열한 음모가와 어리석고 진부한 서생들만 늘어났다. 항우가 자신의 실패를 통탄하며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구나"라고 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항우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것으로, 이 때부터 중국에서 호연지기를 가진 호랑이와 표범의 시대가 끝나고 주인 말을 잘 듣는 개와 양의 시대가 문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며 지조 있고 예의 바르게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항우처럼 인생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중국 사람은 그렇게 살고는 싶지만 그렇게 살 수가 없기에, 그렇게 살았던 항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