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화두
2010년 거의 모든 언론은 ‘올해의 책’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꼽았다. 밀리언셀러에 육박하는 판매고로 인문학 책으로는 십수년 만에 전체 베스트셀러에 올랐음은 물론이고 한국 사회 전체에 ‘정의’라는 화두를 던졌기 때문이다. 이 열풍에 힘입어 저자의 내한 강연이 있었고, 샌델의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되거나 번역되고 있는 중이다. 또 새해부터는 교육방송에서 샌델의 강의 영상 전체를 방영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한편에서는 제도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가 완성된 이후 거의 처음으로 공적 담론의 위상에 오른 ‘정의’가 한국 사회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이라며 우호적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예전의 ‘정의사회구현’이나 최근의 ‘공정사회’라는 구호로 포섭되어 버린 정의는 권력자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로 오용되고 말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선을 던진다.
이런 사회적 반응과 함께 샌델의 논의 자체에 대한 궁금증도 크게 제기되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은 많은 독자들이 샌델이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호하다고 되묻는다(물론 이는 윤리적 딜레마를 통해 정의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도록 유도하는 샌델의 교수법 때문이다). 또 많은 독자들이 정확히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샌델의 책을 읽을 때 드는 미심쩍음에 대해 토로하기도 한다.
『무엇이 정의인가: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는 샌델과 정의 신드롬이 불러온 많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정의에 열광하는 한국사회의 현상, 샌델이 말하는 정의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와 비판, 그 자체로는 전적으로 긍정적인 단어인 정의가 드리우는 그림자들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샌델의 정의론에 대한 찬성과 반대, 열광과 냉소를 넘어 ‘정의’가 한국사회의 진정한 화두로서 기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획과 구성에 관하여
사회적 현상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응하려는 흔치 않은 기획인 이 책에는,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는 이택광, 박홍규, 책읽기와 서평의 달인 장정일, 이현우, 정의론을 전공한 철학자와 법학자인 이양수와 김도균, 정치철학자인 최원, 한국사회의 현상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서동진, 출판평론가 이권우, 그리고 샌델이 염두에 둔 첫 번째 독자인 20대를 대표하는 논객인 노정태, 박가분이 참여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공정사회에서 정의 읽기’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사회에서 소비되는 양상과 그 이면을 살핀다. 독자들은 1부에 묶인 글들을 통해 ‘정의’라는 리트머스 지를 통과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조감할 수 있다. 2부 ‘샌델의 정의론과 그 불만’은 정의론과 정치철학 전공자들이 샌델 정의론이 서 있는 문맥과 장점과 한계를 검토한다. 샌델을 읽고도 샌델이 말하는 정의와 공동체론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독자들의 의문을 해소해주기 위함이다. 3부 ‘이 정의로운 사회를 보라’는 정의에 열광하지만 정의 없는 사회인 한국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조망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택광은 정의 신드롬을 설명하는 여러 설명들—정의에 대한 관심 증대, 하버드 강연이라는 후광 등—을 비판적으로 점검한 뒤,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사회에서 탈맥락화된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꼬집는다. 미국에서는 지극히 정치적인 입장을 대변함에도 한국에서는 비정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맥락이나 내용에 상관없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정치 일반에 대한 혐오를 치유하기 위한 특효약으로 호출”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정일은 많은 독자들이 샌델이 정의를 명쾌히 규정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하지만, 이를 두고 샌델을 공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문제는 “규정이 불가능한 정의의 잠재성으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구하지 못하고, 정의를 ‘법’에 위탁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의가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데 동원되지 못하고 언제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법으로 후퇴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피터 싱어와 샌델을 비교하며 글을 써내려가는 이현우는 열풍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부를 꿈꾸며 베스트셀러였던 『시크릿』을 읽었던 대중의 무의식이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것과 관련이 있다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는 대중의 무의식은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의가 수십만 부나 팔렸는데 세상은 왜 이 모양이냐고 냉소하기보다는 여기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내기를 건다면, 나는 아직도 우리에겐 더 많은 도덕적 사고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쪽에 걸고 싶다. 70만의 독자로도 ‘깨어 있는 시민의 출현’이 미흡하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700만의 독자이고 시민이다.”
샌델의 정의론 깊이 읽기
정의론이 전공인 이양수(현재 샌델의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번역 중이다)는 샌델의 주장이 롤스로부터 시작하는 미국 정의론의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공공철학이란 기치를 내걸고 철학을 지식인들의 담론에서 시민의 대화로 끌고 내려오려고 하는 샌델을 높이 평가하며, 형식적 민주주의 이후의 정치적 이슈인 공화주의(작년 한국을 뜨겁게 달군)와 연결해 설명한다.
김도균은 지하철 쩍벌남, 양심적 병역거부, 성전환자의 호적정정과 강간 사례, 군대 내의 불온서적 금지조치 같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샌댈의 논의를 빌려 설명함으로써, 샌델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한편 한국사회가 처한 여러 가지 딜레마를 함께 소개한다. 실제 법원 판결 사례들을 통해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김도균은 정의의 이슈가 결코 사고실험을 위한 윤리적 딜레마에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최원은 샌델의 정의론 자체를 철학적으로 문제 삼으며, 그것이 동료 철학자인 매킨타이어의 공동체주의는 물론이거니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정의관보다도 후퇴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런 관점에서 최원은 샌델이 기대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꼼꼼히 추적한다. 샌델의 정의론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비판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을 날카롭게 분석한 글로도 손색이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말하지 않는 정의
박홍규는 샌델을 거론하기보다는 서양 정치 철학과 윤리학의 근간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으로 곧장 나아간다.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하는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관에 이미 도사리고 있었음을 어떠한 에두름도 없이 논박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곧 돈’이었다고 주장한다.
노정태는 샌델이 수많은 독자들과 청중을 한번에 사로잡는 윤리적 딜레마(비상철로 위의 인부, 기차를 멈출 수 있는 뚱뚱한 남자 등) 자체를 문제 삼는다. 샌델이 드는 딜레마가 결코 보편적인 윤리와 정의를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가치에 따를 때 정의롭다’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가치와 다른 공동체의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떻게 그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서동진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라는 주체를 윤리화시키는 지배적인 담론이 다름 아닌 “정의의 윤리”였음을 파헤친다. 정의의 윤리는 진보나 개혁적인 정치적 입장과 무관할 수도 있으며, 역으로 변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관리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사회의 새로운 지도적 프로그램으로 사용되었음을 추적한다. 정의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감사’(監査) 사회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박가분은 정의를 민주주의와 대립시키고 정의라는 말로 은폐되고 있는 민주주의적 갈등을 분석한다. 정의를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결코 형식적 민주주의 너머를 상상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것이 바로 정의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정의가 요구할 수 있는 급진적인 주장들을 차단하기 위한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의란 무엇인가> 폭발적으로 읽힌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권우의 글은 ‘정의’가 읽혔던 2010년 한국사회의 풍경을 되짚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 『무엇이 정의인가: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는 샌델과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든 의문과 미심쩍음을 스스로 되묻기 위해 기획되었다. 수입산 철학과 이론에 대한 즉각적인 환호나 반발을 넘어, 샌델이 한국사회에 던진 화두에 대해 진지하게 답하기 위해서다. 정의에 대한 소비는 있으나 담론은 부재하는 현실을 냉소하기보다는 논의의 장을 열고, 정의가 책에서 현실의 거리로 나오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좋은 기획이네요. 샌델과 맞짱뜨기! 화이팅!!
화이링!!!!!
흥미진진한데요~!
청출협이랑 작은도서관 함께놀자에 스크랩했습니다, 저부터 빨리 읽어야 할 터인데^^;;;
도서관 사서입장에서 말하자면 정의 찾는 사람은 많은데 제대로 읽은 사람은 몇이나 될지. EBS에서 정의 강연을 보여주지만 그것조차 상품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