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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독일인의 사랑
막스 뮐러[독일]/차경아 譯
막스뮐러(1823 - 1900) 동양학, 비교언어학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프리드리히 막스뮐러는 슈베르트의 연가곡으로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겨울 나그네>로 유명한 낭만적 서정시인 빌헬름 뮐러를 아버지로 하여 독일에서 출생하였다. 베를린 대학에서 보프, 셀링, 파리에서 뷔르노프등에게 사사하여 1850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된 그는 인도-게르만어의 비교언어학, 비교종교학 및 비교신화학의 과학적 방법론을 확 립하였다. 막스 뮐러는 오직 한 편의 소설을 남겼을뿐인데, 그것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다. 이밖에도 그는 <신비주의학>,<고대 산스크리트 문학사>,<종교의 기원과 생성> 등의 저서를 후 세에 남겼다. 머 리 말 일찍이 자기 생애에서, 지금은 지하에 잠들어 있는 이가 바로 얼마 전까지 쓰던 책상 앞에 앉아 본 경험을 갖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또 지금은 묘지의 평안 속에서 안식을 찾아 누워 있는 한 인간의 가슴 속의 성스러운 비밀들이 여러 해 동안 감추어져 있던 서랍들을 열어 보는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안에는 그가 사랑하는 이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편지들이 놓여 있다. 또 사진들, 리본들, 그리고 페이지마다 표시가 된 수많은 책들. 이제 누가 그것들을 읽고 해명할 수 있을까? 빛 바래어 뿔뿔이 흩어진 이 장미 꽃일들을 누가 다시 뜯어 맞추어, 신선한 향기가 나도록 소생시킬 수 있을까? 옛 희랍인들이 고인의 시신들을 화장하려고 에워쌌던 불길들, 우리의 선인들이 한때 살아 생전 누구에겐가는 더없이 소중했던 것들을 모조리 집어던졌던 불길들, 이 불길들은 지금도 이같은 성스러운 유물들이 돌아갈 가장 확실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 살아 남은 친구는, 지금은 영원히 감겨진 그 눈 외에는 일찍이 아무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종이쪽들을 주저주저 꺼리는 마음으로 읽는다. 그리고 건성으로 시선을 던지며 그 종이쪽들과 편지들에서 세인들이 중요하다고 칭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다는 확신이 서면, 허겁지겁 달아오른 석탄 위에다 던져 버린다. 그렇게 그 종이쪽들은 다시 한 번 활활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가 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다음의 수적들은 그러한 불길 속에서 건져진 것들이다. 이 수적은 처음에는 고인의 친구들 사이에서만 읽혀졌지만, 그를 모르는 타인들 가운데서도 애독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싶어 이제 이 수적을 다시금 미지의 독자들 세계로 보낼까 한다. 이 책을 엮은이로서는 더 많은 내용을 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종이쪽들이 너무나 많이 찢겨지고 파손되어 다시 원상으로 정리하여 묶을 수 없었음이 유감이다. F막스뮐러. 첫째 회상 어린 시절은 그 나름의 비밀과 경이로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누가 그것들을 이야기로 엮을 수 있으며, 누가 그것을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이 고요한 경이의 숲을 방황하여 빠져나왔다. 우리는 모두 한때 모든 감각이 마비된 행복감에 젖어 눈을 떴으며, 삶의 아름다운 현실이 우리의 영혼 위로 넘쳐 흘렀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가 과연 누구였는지를 몰랐었다. 그때에는 온 세계가 우리 것이었으며, 우리 자신 온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영원한 삶이었다 - 시작도 끝도없는 - 정체와 고통도 없는. 우리의 마음속은 봄날 하늘처럼 맑았고 오랑캐꽃 향기처럼 신선했었다. 일요일 아침처럼 고요하고 성스러웠다. 그런데 무엇이 나타나 이처럼 신성한 어린이의 평온을 방해하는 것일까? 어찌하여 이같은 무의식과 지순의 현존이 종식을 고할 수밖에 없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완전하고 편재하는 행복감에서 몰아내어, 우리로 하여금 느닷없이 어두운 생의 한가운데 외롭게 홀로 서게 하는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그것을 죄악이라고 말하지는 말라! 그렇다면 어린이가 이미 죄악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이냐? 차라리 우리는 그것을 모르며, 겸허히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라. 꽃봉오리를 꽃으로 피우고, 꽃을 열매로 맺게 하며, 열매를 먼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죄악일까? 애벌레를 고치로 만들고, 고치를 나방으로 깨게 하며, 나방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죄악일까? 그리고 어린애를 어른으로, 어른을 백발로 물들이며, 백발노인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죄악일까 - 또 먼지란 무엇일까? 차라리 우리는 그것을 모르며 겸허히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라. 하지만 인생의 봄날을 돌이켜 생각하고, 그 심부를 들여다보는 것 - 회상한다는 것은 실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다, 인생의 무더운 여름날에도, 흐린 가을날에도, 또 추운 겨울날에도 더러는 봄날이 있는 법이 아닌가. 마음은 오늘은 내 기분이 봄날 같다 고 말하지 않는가. 오늘은 바로 그런 날이다. 그리하여 나는 향기로운 숲 속 푹신한 이끼 위에 누워 무거운 팔다리를 한껏 뻗고, 초록빛 잎새 사이로 무한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는 과연 어떠했던가. 그러자 모든 것이 잊혀진 듯 싶다. 기억의 처음 몇 페이지는 집안의 낡은 성경 책과 다름없다. 처음 몇 장은 완전히 빛이 바랬고, 좀 찢겨져 나간 데도 있으며, 더럽혀져 있다. 계속 어러 장을 넘겨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되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온전하게 읽을 만한 깨끗한 페이지가 나온다. 단지 발행 장소와 연도가 적힌 표제지라도 붙어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만, 그것은 영 없어져 버렸고, 그대신 우리는 말쑥한 사본 한 장을 발견할 뿐이다 - 그것은 우리의 세례 증서이다 - 여기에는 우리가 태어난 날짜와 우리의 양친과 대 부모의 이름이 적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를<발행 장소와 연도가 없는>책자로 간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시작이라는 것 - 애초에 시작이라는 것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왜냐하면 그 시작에 접하려 들면 당장 일체의 생각과 기억이 정지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린 시절을, 또 거기서 거슬러 다시 끝없는 시작을 향해 되돌아가는 꿈을 꾸다 보면, 마치 그 심술궂은 시작은 끊임없이 앞장서 도망쳐 버려 우리의 사고가 아무리 뒤 아 달려도 결코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고 만다. 그것은 마치 어린이가 푸른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을 향해 끊임없이 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아이는 아무리 달려도, 하늘은 줄곧 아이를 앞장서 달아나 버린다. 그래서 여전히 땅 위에 머물러 있는 하늘을 앞에 두고 - 아이는 지치고 끝내 지평선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한 번쯤 일단 그곳에 도달했다 해도 - 애초에 그 일이 우리에게 어떻게 시작되었던가하는 그 원점에 이르렀다 해도 - 대체 거기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렇다. 그 기억은 엄청난 파도에서 빠져나온, 그래서 그 파도 물이 눈에 들어가 눈을 뜨지 못하는 한 마리 복슬개처럼 온몸을 떨고 있을 뿐이다. - 그 복슬개의 모습이란 실로 괴이해 보이는 것이다. 그렇긴 해도 나는 맨 처음 별들을 보았을 때의 일은 아직 기억할 수 있을 듯싶다. 어쩌면 별들은 그 이전에도 자주 나를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밤인가, 어머니의 품에 누워 있는데도 날씨가 써늘한 듯 느껴져 왔었다. 몸니 떨렸고 오싹 오한이 느껴졌다. 아니면 두려웠던 것일까. 아무튼 잠시 동안, 조그마한 나의 자아로 하여금 보통 때와는 달리 나 자신에게 더욱 주의를 환기시키는 무엇인가가 내 마음속에서 일어났었다. 그때 어머니가 빛나는 별들을 가리켰다. 나는 신비스럽게 여기면서도, 바로 어머니가 저렇게 아름다운 별들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자 다시금 따스함이 느껴졌고 아마 곧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언젠가 풀밭에 누워 있던 일을 기억한다. 내 주변의 만물이 흔들리며 고갯짓을 하고 윙윙대며 빙빙 돌고 있었다. 그때 발이 여럿 달리고 날개가 달린 한떼의 작은 벌레들이 몰려와 나의 이마와 눈 위에 앉으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곧 눈이 몹시 아파 와서 나는 소리쳐 어머니를 불렀었다. 어머니는 아이, 가엾은 녀석, 모기 떼들에 쏘였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어 푸른 하늘을 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마침 어머니가 들고 계시던 신선한 오랑캐꽃 다발로부터, 그 짙푸른 빛의 신선한 향내가 내 눈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었다. 지금까지도 처음 핀 오랑캐꽃을 볼 때마다 나는 그때 일을 떠올리며 꼭 눈을 감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래야만 그 옛날의 짙푸른 하늘이 다시금 내 영혼 위로 솟아오를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 그 다음으로 나는 다시금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내게 열려 왔던 일을 기억한다. 그 세계는 별들의 세계나 오랑캐꽃 향기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것은 어는 부활제 아침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일찌감치 나를 깨우셨다. 창 앞에는 오래된 우리의 교회가 보였다. 그 교회는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높은 지붕에 뾰족탑, 그리고 탑 꼭대기에 금빛 십자가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역시 교회는 다른 건물들 보다는 훨씬 낡고 우중충해 보였다. 한 번은 그 안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쇠창살로 된 문틈으로 들여다본 적도 있었다. 그 안은 텅비어 있고 춥고 썰렁해 보였다. 온 건물 안에 한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그 문을 지나칠 때마다 오싹 전율을 느끼곤 했었다. 그런데 그 부활제 날에는 새벽녘에 비가 내리더니 아침이 되면서 곧 개어 태양이 찬란하게 떠올랐다. 그러자 그 낡은 교회도 회색 슬레이트 지붕과 높은 창문들, 금빛 십자가 달린 탑과 더불어 경이로운 햇빛속에 반짝였다. 그리고 높은 창문들로부너는 갑자기 햇빛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와 출렁이며 생동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눈을 똑바로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밝아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햇빛은 곧장 나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나의 내면에서 만물이 빛과 향길글 발하며 노래하고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내 안에서 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 것처럼, 실로 내가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부르는 부활절 송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내 영혼을 파고들었던 그 맑고 성스러운 노래가 과연 무슨 노래였는지를 지금껏 나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우리네 루터의 경직된 영혼까지도 종종 깨고 들어갔던 저 옛날 찬송가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 이후 나는 그 노래를 다시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베토벤의 아다지오나 마르첼로의 송가, 아니면 헨델의 합창곡을 들을 때면, 심지어는 스코틀랜드 고원에서든 티롤 지방에서든 그저 소박한 민요를 들을 때까지도, 내게는 마치 그때 교회의 높은 창문이 다시 빛을 발하고 오르간 소리가 내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그래서 새로운 세계가 - 별 하늘보다, 오랑캐꽃 향기보다 더 아름다운 세계가 -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들은 내가 맨 처음 어린 시절에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사이로 간간이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 또한 인자하면서도 엄격한 아버지의 시선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또 정원과 포도잎새, 폭신한 푸른 잔디와 낡고 소중한 그림책들 - 이것들이 빛 바랜 페이지들에서 아직도 그나마 읽어 낼 수 있는 전부이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부터는 갈수록 선명하고 맑아진다. 숱한 이름들과 모습들이 등장한다. 어머니, 아버지뿐 아니라 형제와 자매들, 친구와 스승들 - 그리고 수많은 <타인들>. 아, 그렇다, <낯선 타인들에 관하여> - 수많은 것이 이 회상에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회상 우리 집 가까이, 그 금빛 십자가가 달린 낡은 교회 맞은편에 커다란 저택이 한 채 서 있었다. 교회보다 더 높고, 수많은 탑들이 솟은 건물로, 그 탑들 역시 우중충한 회색의 낡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탑 꼭대기에는 금빛 십자가 대신 돌로 된 독수리 형상들이 않아 있고, 바로 높다란 대문 위로 솟은 제일 높은 탑에는 희고 푸른 큼직한 깃발이 하나 펄럭이고 있었다. 대문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도록 되어 있는데, 문 양옆으로 기마병이 둘 보초를 서고 있었다. 또 그 저택에는 창문이 수없이 많이 달려 있고, 창문 안쪽으론 금빛 술이 달린 비단 커튼이 보였다. 안마당에는 늙은 보리수나무가 빙 둘러서 있어서 여름이면 그 푸른 잎새로 회색 성벽에 그림자를 던져 주고, 향기로운 흰 꽃을 잔디에다 뿌렸다. 나는 그 집 안을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보리수 향기가 진동하고 창문에 등불이 켜지는 저녘녘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음악 소리가 위층으로부터 울려 나왔다. 마차들이 와 닿으면 수많은 남녀들이 내려 층계를 서둘러 올라가곤 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훌륭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남자들은 가슴에 별 모양의 훈장을 달고 있었고, 여자들은 머리에 신선한 꽃을 꽂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곧잘 너는 왜 저 안에 들어가지 못하니? 하고 생각하곤 했다.
어느날, 아버지가 나의 손을 붙잡고 말씀하셨다. 우리 저 성에 가도록 하자. 그렇지만 후작 부인과 얘기할 때는 예절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또 그분의 손에 키스를 해 드려야 하는 거야. 나는 그때 여섯 살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섯 살짜리가 느낄 수 있는 한 그 나이다운 기쁨에 어쩔 줄 몰랐었다. 이미 나는 수없이 마음속으로, 저녁이면 불 켜진 창문에 비치던 그림자의 주인들에 대해 상상했었고, 또 집안에서도 여러 차례 후작과 그 부인의 훌륭하신 인품에 대해 들어온 터였다. 그들이 얼마나 자비심이 많은 이들이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도움과 위안을 주었는지, 또 그들은 착한 이들을 지켜 주고 악인들을 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손수 택하신 인물이라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미 오래 전부터 성 안에서 일어날 법한 모든 일을 머릿속에 그려 왔으므로, 후작과 후작 부인은, 내가 가진 호두까기 인형이나 장난감 납 병정처럼 이미 내게는 너무나 친숙해진 존재였다. 아버지와 함께 높은 층계를 올라갈 때 내 가슴은 방망이질을 했다. 아버지가 내게 후작 부인께는 <비전하>라고 부르고, 후작께는 <전하>라고 불러야 된다고 설명을 하시는데, 어느 새 문이 활짝 열리고 내 앞에는 빛나는 눈을 가진 한 늘씬한 여인의 자태가 나타났다. 그 부인은 막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려는 듯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 오래 전부터 내게 친숙한 - 표정이 깃들어 있고 신비스런 미소가 뺨 위로 흘렀다. 그러자 나는 이미 가만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게도 아버니는 그냥 문께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간절한 마음에 못 이겨 곧장 그 아름다운 부인에게로 달려가 목에 매달려 어머니에게 하듯이 키스를 했던 것이다. 아름답고 키 큰 부인은 내 행동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아 끌고 가며 내가 아주 버릇 없이 굴었다고, 다시는 이곳에 나를 데려오지 않겠노라고 다그치시는 것이었다. 나는 머릿속이 혼란해지며 뺨이 상기됐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처사가 부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후작 부인이 나를 두둔해 주리라는 기대감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엄한 표정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이어서 방 안의 다른 신사 숙녀들 쪽을 바라보녀 그들은 그래도 내편을 들어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그 자리를 도망쳐 문밖으로 뛰쳐나와 층계를 내려왔고, 성 안마당 보리수나무를 지나 집으로 돌아와 마침내는 어머니 품에 쓰러지며 훌쩍훌쩍 흐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어머니가 물으셨다. 아, 어머니 하고 나는 외쳤다. 후작 부인을 만났는데, 아주 상냥하고 아름다운 분이셨어요, 꼭 어머니처럼요. 그래서 부인의 목을 얼싸안고 입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던 거예요. 저런, 그래서는 안 되는 짓을 했구나. 왜냐하면 그분들은 낯선 타일들이고, 지체 높은 분들이기 때문이란다. 대체 낯선 타인이라는 게 뭔데요? 그럼,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건가요? 그들을 좋아할 수는 있단다. 그렇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 놓으면 안 되는 거야. 그럼,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인가요? 왜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보이면 안 되는 거지요?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렇지만 너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대로 따라 해야 돼. 좀더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될 거다. 왜 다정한 눈길을 가진 모든 아름다운 여인을 얼싸안으면 안 되지. 그날은 참 우울한 날이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셔서도 내가 버릇없이 굴었다는 얘기를 고집하셨다. 밤이 되어 어머니가 나를 침대로 데려가셨고, 나는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좀체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내가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낯선 타인들이란 어떤 존재일까를 곧 생각했다.
너, 가엾은 인간의 마음이여! 그렇게 해서 이미 봄철에 너의 꽃잎들은 너무도 빨리 꺾이고, 네 날개에서는 깃들이 뜯겨 나가는구나! 인생의 새벽빛이 영혼 안에 감추어진 꽃받침을 열어 줄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온통 사랑의 향기가 풍기게 마련이다. 우리는 서서 걷는 것, 말하고 읽는 것을 배운다. 하지만 사랑만은 아무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의 생명과 더불어 이미 우리에게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사랑은 우리 현존의 가장 심오한 바탕이라고들 말한다. 천체들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서로에게 기울며 영원한 중력의 법칙에 따라 응집하고 있듯이, 타고난 영혼들 역시 서로에게 기울며 끌어당기고, 사랑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결속하고 있다. 태양 빛이 없으면 한 송이 꽃도 피지 못하듯,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다. 낯선 세계의 차가운 돌풍이 어린이의 작은 가슴에 처음으로 불어닥칠 때, 만약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에서 내비치는 - 마치 신의 빛, 신의 사랑의 반영처럼 내비치는 - 따스한 사랑의 햇빛이 없다면, 어찌 어린이의 가슴이 그 두려움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고 나서 어린이의 내부에서 눈뜨는 동경 - 이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심오한 사랑인 것이다. 그것은 온 세계를 포괄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인간의 열린 눈빛이 반사될 때 타오르며, 인간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환호한다. 그것은 태고적부터 있어 온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요, 어떤 추를 사용해도 측량해 낼 수 없는 깊은 샘물, 아무리 퍼내도 고갈되지 않는 분수이다. 사랑을 아는 이는, 사랑에는 척도가 없는 것,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비교가 있을 수 없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온 마음 온 영혼, 온힘과 온 정성을 다하여야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의 여정에 미처 절반도 가기 전에, 남아 있는 사랑의 부분이 어쩌면 이토록 보잘것없어지고 마는지! <낯선 타인>의 존재를 배우면서부터 어린이는 이미 어린이임을 고별한다. 사랑의 샘물에는 뚜껑이 덮이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완전히 흙모래에 묻힌다. 우리의 눈은 어느덧 정기를 잃고 있고, 우리 자신은 심각하고 지친 표정으로 시끌벅적한 거리들을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거의 인사도 않는다. 왜냐하면 인사에 응답이 없는 경우 얼마나 에이는 듯 가슴에 상처를 입는가를, 또 우리가 일단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했던 이들로부터 헤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영혼의 날개는 깃을 잃어 가고 꽃잎들은 거의 뜯겨 나가고 시들어 버린다. 그리고 고갈될 수 없는 사랑의 생에는 단지 몇 방울의 물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 단 몇 방울의 물에 매달려 우리는 혀를 축이고 갈증으로 타 죽는 것을 겨우 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에 충만한 어린이의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궁핍이 섞인 사랑 - 작열하는 불꽃이요, 타오르는 정열일 뿐이다. 달아오른 모래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스스로를 소모하는 사랑 - 갈망하는 사랑이지 헌신하는 사랑이 아니다. 나의 것이 되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랑이지 너의 것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랑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자기 본위의, 의혹이 뒤섞인 사랑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들이 노래하며 젊은 남녀들이 믿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의 실체이다. 그것은 타오르다 주저앉는 한가닥 불꽃, 온기를 주지도 않고 다만 연기와 잿더미만 남긴다. 우리는 이렇게 모두 한때는 이같은 불꽃놀이를 영원한 사랑의 햇빛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불꽃이 환하면 환할수록 뒤따르는 어둠의 농도는 더욱 짙은 법이다. 그러고 나서 사방의 만물이 어두워지고, 우리가 진정 외로움을 느끼게 될 때, 좌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며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 때, 잊었던 감정의 한 줄기가 어쩌다가 가슴속에서 솟구치곤 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것은 사랑도, 우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모르시겠습니까? -낯설고 냉담하게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을 향해 우리는 소리치고 싶어진다. 그때 우리는 인간과 인간의 사이가 형제지간이나 부자지간, 또 친구지간보다 더 가까와져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마치 성서의 낡은 잠언귀절처럼, <낯선 타인>이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는 말이 우리의 영혼속으로 파고들어 울린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말없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야 하는가 -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며, 겸허히 그것에 순종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번쯤 시도해 보라. 두 대의 기차가 서로 엇갈리며 철로 위를 질주하는데, 너를 향해 인사를 하려는 듯한 낯익은 눈을 발견 했을때, 손은 내밀어 너를 스쳐 가는 친구의 손을 잡아 보라 - 그러면 너는 아마도 알게 되리라. 왜 이 세상에서의 인간은 말없이 인간을 스쳐 지나가는지를. 한 예 현자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난파당한 한 조각배의 파편들이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파편 중에는 서로 부딪쳐 잠시 엉겨 붙어 있는 것들마저 극히 드물다. 곧 폭풍이 몰아쳐 그것들을 각기 반대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리하여 두 파편은 이 지상에서는 다시는 못 만날 것이다. 인간의 경우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난파를 본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지 않은가.
셋째 회상
어린 시절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오래 가지 않는다. 따뜻한 눈물 같은 비를 잠깐 흘리고 나면 곧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렇듯 나는 얼마 안 가 다시 그 성에 갔고, 후작 부인은 내게 키스를 하도록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나서 부인은 자신의 자식들, 어린 공자와 공녀들을 데려왔고, 우리는 오랫동안 사귄 친구들처럼 어울려 놀았다. 학교가 파하고 돌아와 - 그때 벌써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 그 성에 놀러 갈 수 있었던 그때는 참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거기에는 마음속으로 갈망하던 모든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상점 진열장을 가리키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한 주일 내내 먹고 살 돈을 내야 살 수 있다고 설명해 주셨던 값비싼 장난감들이 그 성에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후작 부인에게 청하면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와 어머니께 보일 수도 있었고, 때로는 내가 아주 가질 수도 있었다. 또 책방에서 아버지와 함께 본 예쁜 그림책들, 그렇지만 아주 착한 아이들만 가질 수 있다고 했던 그림책들도 나는 그 성에서 종종 뒤져 보며 몇 시간이고 들여다볼 수도 있었다. 어린 공자들에게 속한 것이면 무엇이든 나도 가질 수 있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장난감들을 다른 아이들에게 선사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나는 문자의 의미 그대로 한 사람의 어린 공산주의자였다. 다만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팔에 휘감으면 꼭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금빛 나는 뱀팔찌를 후작 부인이 우리에게 갖고 놀라고 주셨다. 집에 돌아올 때 나는 그것을 팔에다 감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해 드릴 속셈이었다. 그런데 길가에서 한 부인을 만났다. 부인은 내가 가진 금빛 나는 뱀을 보고는 구경 좀 하자고 청하더니, 그런 금으로 된 뱀을 가질 수 있다면 남편을 감옥에서 풀려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나는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고 황금 뱀팔찌를 그 여인에게 던져 주고 집으로 뛰쳐와 버렸다. 그 이튿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 불쌍한 여자가 성으로 끌려와 울고 있고, 사람들은 그 여자가 나한테서 팔찌를 훔쳤다고들 떠들었다. 그 소리를 듣자 나는 너무도 화가 나서 그 팔찌는 내가 그 여자에게 선사한 것이며, 나는 그것을 다시는 갖고 싶지 않다고 진지하게 열을 내어 설명했다. 다음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는 내가 집으로 가져오는 물건을 일일이 후작 부인에게 보였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서 <내 것>과 <남의 것>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개발되기까지는 그러고도 한참이 걸렸다. 나는 빨간 색과 파란 색을 구별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마찬가지로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별은 한동안 애매하게 혼동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일로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맨 마지막 사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내게 사과를 사오라고 돈을 주셨을 띠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1그로셴짜리 은화를 주셨다. 그런데 사과 값은 6페니히밖에 되지 않았다. 가게 주인 여자한테 1그로셴짜리 은화를 내주자, 여인은 내가 보기에 아주 우울한 표정으로 오늘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팔지 못했기 때문에 거스름돈이 한푼도 없노라 말했다. 그리고는 1그로셴어치를 모두 사가길 원하는 것이었다. 그때 6페니히짜리 동전이 내 주머니에 있다는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그것이면 지금의 곤란한 문제가 풀 거라는 생각에 기뻐하면서 그것을 부인에게 내주며 말했었다. 이제 이걸로 나한테 6페니히를 거슬러 줄 수 있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내 뜻을 영 알아채지 못하고는 1그로셴짜리 은화를 내게 되돌려 주고 6페니히짜리 동전을 받아 넣었던 것이다.
내가 거의 매일처럼 어린 공자들과 놀기 위해, 그리고 얼마 후에는 같이 프랑스 어를 배우기 위해 성으로 올라갔던 그 시절, 나의 기억 속에 파고든 또 하나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후작의 딸로서 백작의 지위를 가진 마리아라는 소녀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직후 세상을 떠나, 후작은 재혼을 했던 것이다. 내가 그녀를 언제 처음 보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숱한 기억의 어둠으로부터 아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처음에는 투명한 그림자처럼 아련한 모습이던 것이 점점 윤곽이 잡히며 나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는 폭풍우 치는 밤 홀연히 구름 베일을 벗고 얼굴을 드러내 달과 같이 마침내 내 영혼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당시 그녀는 늘 병에 시달렸으며 말이 없었다. 내가 볼 때마다 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침대에 누인 채 두 명의 장정이 우리들 방으로 옮겨 왔고, 그녀가 피곤해지면 다시 옮겨 가곤 했다. 그렇게 그녀는 온통 새하얀 차림으로 누워서 두 손은 대개 앞으로 모아 쥐고 있었다.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창백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온화하고 아름다왔고, 눈은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이 그윽했다. 그래서 나는 곧잘 생각에 잠겨 앞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여자도 낯선 타인에 속할까? 하고 자문해 보곤 했다. 그럴 때 그녀는 종종 내 머리에 손을 얹곤 했다. 그러면 마치 무엇인가 내 온몸을 통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나는 도망칠 수도 뭐라고 입을 땔 수도 없이 꼼짝없이 사로잡혀 그녀의 그윽하고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녀는 우리와 별로 얘기를 나누지도 않았지만 우리가 노는 모습을 열심히 주시했다. 그리고 우리가 날뛰며 소란을 피울 때에도, 한마디 불평없이, 다만 두 손을 그 새하얀 이마에 얹고 자는 듯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노라고 말하며 침대 위에 똑바로 앉아 있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의 얼굴에 새벽 노을 같은 홍조가 떠올랐고, 우리와 어울려 얘기도 하고, 진기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기도 했다. 그 당시 그녀가 몇 살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토록 무기력해서인지 어린애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진지하고 조용한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어린애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에 관해 말할 때면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소리를 죽여 말하곤 했다. 그들은 그녀를 천사라고 불렀다. 그녀와 연관시켜 착한 것이니 사랑스러운 것이니 하는 말 외에 딴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곧잘 나는 그렇게 기운 없이 말없이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저 여인은 평생 동안 걸을 수 없겠구나,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고 기쁨도 없겠구나, 언젠가 영원한 안식처로 아주 갈 때까지 침대에 실린 채 사람들의 손을 빌어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천사의 품에 포근히 안겨 있어도 좋을 그녀가 왜 굳이 이 세상에 보내졌까, 수많은 성화들에 그려져 있듯이 천사의 부드러운 날개에 실려 공중을 날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스스로에게 묻곤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녀의 고통의 일부를 떼어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홀로 고통을 겪지 않고, 우리 모두가 그녀와 고통을 나누기 위하여. 그렇지만 그런 말들을 그녀에게 할 수는 없었다. 하기는 나도 사실 그 모든 것을 잘 모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다만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그녀의 목을 얼싸안아야겠다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아픔만을 주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그녀를 위해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기도를 올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다. 그날도 그녀는 우리들 방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아주 창백한 모습이었지만 눈만은 어느 때보다도 그윽하고 반짝였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우리를 자기 곁으로 불렀다. 오늘이 내 생일이야 라고 그녀는 입을 떼었다. 새벽에 견신례에 다녀왔단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곧 당신 곁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을거야.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너희들 곁에 오래 머물고 싶지만, 언제이고 내가 너희를 떠나더라도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라. 그래서 너희들 모두에게 반지를 하나씩 가져왔어. 지금은 이것을 너희들 검지손가락에 끼워 두렴. 그리고 너희들이 자라면 그 반지를 차례로 옮겨 끼는 거야. 나중에는 새끼손가락에밖에는 맞지 않게 되겠지만 -. 그렇지만 평생 동안 이 반지를 끼는 거야, 응?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다섯 개의 반지를 차례로 뽑았다. 그러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처연하면서도 다정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울지 않으려고 두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는 첫 번째 반지를 맨 위에 남동생에게 주고는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나서 둘째와 셋째 반지를 두 공녀에게, 또 네 번째 반지는 막내동이 공자에게 주며, 반지를 줄 때마다 각각 키스를 했다. 나는 옆에 서서 꼼짝 않고 그녀의 새하얀 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그녀의 손가락엔 반지가 하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기진한 듯 몸을 기대었다. 그때 나의 눈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어린애의 눈은 입보다 훨씬 큰 웅변을 말하는 법, 그래서 그녀는 내 마음 속의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반지라면 나는 차라리 받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낱 타인이라는 것, 나는 그녀에게 속해 있지 않으며, 그녀가 자신의 형제나 자매보다는 나를 덜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자 가슴속 한 줄기 혈관이 터지는 듯한, 아니면 신경이 한 올 잘려 나가는 듯한 고통이 덮쳐 왔다. 이 괴로움을 감추기 위해 어디에다 시선을 두어야 할지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몸을 일으켜 앉더니 내 이마에 손을 얹고 내 눈 속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그녀는 내 머릿 속의 생각을 속속들이 읽는 것만 같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손가락에서 마지막 반지를 뽑아 내게 주며 말했다. 이건 너희를 떠날 때 내가 갖고 가려던 것이야. 그렇지만 이건 네가 끼는 것이 더 낫겠어. 그래서 내가 세상에 없을 때 나를 생각해 주는 편이. 그 반지에 새겨진 말을 읽어 보렴. <신의 뜻대로>라고 쓰여 있어. 너는 거친 마음과 동시에 온순한 마음을 갖고 있는 아이야. 살아가면서 그 마음을 온순하게 다스리도록 하렴. 냉혹하게 만들지는 말고. 그러면서 그녀는 남동생에게처럼 내게 키스를 하고 반지를 주었다. 그때 내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지금으로서는 실로 알수가 없다. 그 당시 나는 벌써 소년으로 자라 있었다. 따라서 괴로워 하는 천사의 포근한 아름다움은 이미 내 어린 가슴에 매력으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소년답게 그녀를 한껏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들은 청년기와 장년기에서는 이미 사라진 순수함과 진심,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법이다. 그러면서도 당시 나는 그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타인에 속한다고 믿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내게 했던 진지한 말들은 건성으로 듣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영혼이 가까워질 수 있는 한 가장 가까이, 그녀의 영혼이 내 영혼에 접근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온갖 쓰라린 고통이 내 가슴으로부터 씻은 듯 사라졌다. 이미 나는 혼자가 아니며, 타인이나 제외된 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 곁에, 그녀와 더불어, 그녀의 마음속에 있음을 느꼈다. 뒤이어 나는, 내게 반지를 준 것은 그녀에게 있어 일종의 희생이라는 것, 그녀는 그것을 무덤에까지 갖고 가고 싶어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는 하나의 감정이 솟구쳐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다. 나는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반지를 내게 선사하고 싶으면 그냥 네가 갖고 있어. 너의 것은 곧 내 것이니까. 그녀는 한동안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생각에 잠겨 나를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는 반지를 받아 자기의 손가락에 끼고는, 다시 한 번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모르고 있어. 이해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렴. 그럼 너는 행복해질 거야. 또 많은 다른 이들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거야.
넷째 회상
어떤 인생에든 어느 시기 동안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며, 먼지투성이의 단조로운 포플러 가로수 길을 맹목으로 걸어 나가는 것 같은 그런 때가 있는 법이다. 따라서 그 시기에 관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은 먼 길을 걸어왔으며, 늙어 버렸다는 서글픈 감정뿐이기 일쑤이다. 그렇게 인생이라는 강물이 고요히 흐르고 있는 한 강물은 항상 그대로 머물며, 바뀌는 것은 양편 강가의 경치뿐이다. 그러나 이어서 인생의 폭포가 닥쳐오게 마련이다. 이 폭포들은 기억속에 유착된다. 그래서 우리가 이 폭포를 넘어서서 멀리 영원히 고요한 대해로 접근해 가고 있을 때까지도, 우리의 귀에는 여전히 아득히 그 폭포의 우렁찬 흐름이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에게 그나마 남아 있어 우리를 앞으로 추진시키는 생명력이 바로 그 폭포에 원천을 두고 양분을 끌어오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고교 시절은 지나갔다. 대학 생활의 화려한 초창기도 지나갔다. 그와 더불어 아름다운 인생의 꿈들도 사라졌다. 하지만 한 가지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신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믿음. 인생이란 아무래도 우리가 그 작은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그런 것과는 달랐지만, 그 대신 모든 것이 한 단계 높아진 서품을 받았다. 따라서 바로 인생에 내재한 불가사의한 요소와 고통이 내게는 지상에 신이 편재하심의 증거가 되었다. 신의 뜻이 아니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네게 일어나지 않느니라. - 이것이 내가 채집했던 짤막한 삶의 지혜였다. 그렇게 해서 여름 방학 동안 나는 다시 나의 작은 고향 마을로 되돌아왔다. 다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지금껏 누구도 그것을 설명한 사람은 없지만, 재회며, 재발견, 회상 - 이런 것이야말로 거의 모든 기쁨과 모든 즐거움의 비밀스런 원천인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보고나 듣거나 맛본다는 것 - 그것도 아마 아름답고 위대하며 유쾌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생소하여 우리에게 기습적인 느낌을 주며, 안정된 마음으로 그일에 임할 수는 없다. 즐기고자 하는 안간힘이 흔히 즐기는 행위 자체보다 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 옛날의 곡조를 다시 한 번 듣는다는 것, 그래서 그 악보를 모조리 잊어다고 생각했는데도 옛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그 악보가 다시 떠오를 때, 아니면 여러 해가 지난 후 드레스덴의 산 시스토 성모상 앞에 다시금 섰을 때, 지난날 성화 속 아기 예수의 무한한 시선이 우리 마음에 일깨웠던 바로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느낌, 아니면 하다 못해 학창 시절 이후 한 번도 염두에 둔 적 없는 꽃향기를 다시 맡거나 그 시절 음식을 다시 맛보는 것 - 이런 경험들은 과연 우리가 현재 눈앞의 인생을 기뻐하는지 흘러간 추억에 대해 기뻐하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지경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내밀의 기쁨을 안겨다 주는 것이다. 자, 이제 긴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발을 들여놓아보라. 그렇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숱한 추억의 바다 속을 헤엄치게 마련이다. 춤추는 추억의 파도들이 요람처럼 우리의 영혼을 싣고 몽롱하게 아득한 과거의 강변들을 스쳐 흔들리며 지나가는 것이다. 탑시계가 치면 우리는 학교에 지각이라도 할세라 마음 조이게 된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스라쳐 놀라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그런 불안은 과거지사라는 사실에 안도를 느낀다. 개가 한 마리 거리를 건너 달려간다. 그 옛날 무서워 멀리 피해 도망 다녔던 바로 그놈이다. 여기엔 그 옛날 노점의 여인이 그대로 앉아 있다. 지난날 그 여인이 팔던 사과는 꽤나 우리를 유혹했었지. 그래서인지 지금도 먼지가 뽀얗게 앉은 저 사과들이 세상의 어떤 사과보다 맛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든다. 저편에는 집이 한 채 헐리고 새 집이 들어서 있다 - 헐린 집은 우리의 늙은 음악 선생님이 살던 집이었지. 선생님은 이미 돌아가셨다. 하지만 여름날 저녁 이곳 창 밑에 서서, 하루 일과를 마친 그 성실한 선생님이 혼자 즐기며 연주하던 즉흥곡에 귀 기울이던 일은 얼마나 좋았던가. 그 연주는 마치 증기 기관처럼 하루 종일 모인 쓸데없는 증기를 광란하듯 뿜어 내는 것과 같았었다. 또 이곳 작은 나무 그늘 길 - 이것은 그 옛날에는 훨씬 커 보였었다 - 어느 날 저녁인가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웃집 예쁜딸을 만났던 곳이 바로 여기였었지. 그렇다, 그때 나는 그애를 쳐다 본다든가 말을 건넨다는 것을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우리 남학생들은 그애를 곧잘 화제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애를 예쁜 소녀라고 불렀었다. 또한 나는 길에서 그애가 멀리 나타나는것만 보아도 너무나 해옥하여 가까이 다가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그렇다, 공동묘지로 통하는 바로 이 작은 가로수 그늘 길에서 어느날 저녁 나는 그 소녀를 만났었다. 그전에는 한 번도 말을 나눠 본 적이 없는 사이인데도 그애는 내 팔을 붙들고 함께 집으로 가자고 말했었다. 나란히 걷는 동안 나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그 소녀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얼머나 행복했던가.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다시 한 번 그렇게 <예쁜 소녀>와 더불어 말없이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으면 싶다. 이렇듯 추억은 머리를 온통 뒤덮는다. 그럼 우리는 가슴에서 긴 한숨을 내뿜으며 지금껏 골똘한 생각에 잠겨있노라 숨쉬는 것마저 잊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러고 나면 그 모든 몽상의 세계가 졸지에 사라져 버린다. 마치 밤새 나타났던 유령들이 새벽닭 울음 소리에 사라지는 것처럼.
이제 나는 그 낡은 성채와 보리수 곁을 지나며 말 탄 보초와 높은 계단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내 마음속에는 어떤 추억들이 솟구쳐 올랐을까! 이곳에서의 모든 것은 얼마나 변하고 말았는가! 벌써 여러 해째 나는 그 성에 간 적이 없었다. 후작 부인은 돌아가셨고, 후작은 통치하는 일에서 물러나 이탈리아로 은퇴했으며, 지금은 나와 함께 성장한 맏공자가 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공자의 측근은 젊은 귀족과 장교들로 에워싸여져 있고, 공자는 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따라서 그같은 사교사회가 그 옛날 소꿉친구를 공자한테서 소원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도 우리의 어린 시절 우정을 방해하는 다른 사정이 있었다. 독일의 국민 생활의 궁핍과 독일 통치 체제의 죄상을 맨 처음으로 인식한 청년들이 흔히 그렇듯, 나 역시 쉽사리 진보화의 몇 가지 상투어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말투는, 엄격한 목사 가정에서 상스런 어투를 쓰는 것만큼이나, 궁정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언동이었다. 요컨데, 그런 저런 사정으로 나는 여러 해 동안 그 계단을 올라간 적이 없었다. 그렇긴 해도 그 성 안에는 내가 거의 매일처럼 그 이름을 불러 보며, 줄곧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내겐 벌써 오래 전부터 생전에는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깊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내게 현실 안에는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 할 수도 없는 그런 형체로 부상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의 수호 천사 - 나의 또 다른 자아로 화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와 얘기하는 대신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어떻게 그녀가 내게 그런 존재로 화했는지를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럴 것이, 실은 나도 그녀를 거의 알지 못했으니까. 그것은 마치 사람의 시각이 하늘에 뜬 구름을 여러 형상으로 변화시켜 보듯이, 나의 상상력이 어린 시절 하늘에서 마술처럼 불러 낸 몽롱한 환영이요, 소리 없이 암시된 현실의 윤곽을 소재로 하여 그려 낸 하나의 완성된 환상이었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나의 모든 사고는 부지중에 그녀와의 대화로 화해갔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 내가 지향하는 모든 것, 내가 믿는 모든 것, 나의 모든 보다 나은 자아는 그녀에게 속해 있었고, 내가 그녀에게 부여한 것인 동시에 나의 수호 천사인 그녀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고향 집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내게 한 통의 펀지가 왔다. 백작 영양 마리아에게서 온 영어로 된 편지였다.
친애하는 친구여, 당신이 얼마 동안 이곳에 와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참 오랫동안 못 만났군요. 괜찮으시다면, 옛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어요. 오늘 오후 스위스 오두막에 혼자 있을겁니다.
당신의 친구, 마리아. 나는 당장에 오후에 찾아뵙겠다는 내용의 답장을 역시 영문으로 써보냈다. 스위스 오두막은 그 성의 측면체를 이루는 집으로, 정원을 향해 길게 뻗어 있어 성 앞마당을 통과하지 않고서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내가 정원을 지나 그 집에 닿았을 때는 다섯 시였다. 나는 모든 감정을 억제하고 예의 바른 담소를 하리라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래서 우선 내 마음 속의 수호 천사를 달래어 진정시키고, 지금 만날 여인은 천사와는 무관한 존재임을 입증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마음은 결코 편안치가 않았고, 나의 수호 천사 역시 내게 조금도 위안을 주려 들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마음을 다잡고는 인생의 가면 무도회 운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반쯤 열린 방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웬 낯선 부인이 나와 역시 영어로 말을 걸며 백작 영양께서는 곧 오실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그녀는 갔고, 나는 혼자 남아 한동안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방 안의 사방 벽은 떡갈나무 목재로 되어 있었다. 또 엮어 짠 난간이 빙 둘러 돌아가 있고, 그 난간으로 기어오른 담쟁이덩굴이 그 무성한 잎새로 온 방 안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테이블이며 의자들도 모두 떡갈나무 목재로 조각된 것들이었고, 바닥은 무늬목 마루판이었다. 그방 안에서 그토록 많은 낯익은 물건들을 보는 것은, 실로 독특한 감회를 주었다. 대부분의 물건들은 성 안 옛날 우리의 놀이방에서 이미 낯익은 것들이었다. 그밖에 다른 것들, 말하자면 초상화들은 새로운 물건이었다. 그렇긴 해도 그것들은 대학의 내 방에 걸어 놓은 것과 똑같은 초상화들이었다. 이를테면 그랜드 피아노 위에 걸린 베토벤과 헨델, 멘델스존의 초상화 - 그것들은 바로 내가 골랐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내 생각에는 고대 입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밀로의 비너스가 서 있었다. 또 이곳 책상에 놓인 단테와 셰익스피어의 책자들, 타울러의 설교집,<독일신학>, 뤼케르트의 시집, 테니슨과 번즈의 시집, 그리고 칼라일의<과거와 현재>등 - 모조리 나의 서재에도 있는 것으로 바로 얼마 전까지도 손에 잡고 있던 책들이었다. 나는 곰곰 생각을 모으려고 하다가는 얼른 생각을 털어 버리고, 돌아가신 후작 부인의 초상화 앞으로 다가섰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고 어릴 적에 자주 보았던 두 장정이 백작 영양을 침대에 누인 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 그 모습! -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얼굴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두 장정들이 나가자, 이윽고 그녀는 내게 시선을 보냈다. - 옛날 그대로의 그윽하고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그 눈 - 그녀의 얼굴은 순간마다 생기를 띄우더니 마침내 온 얼굴에 미소를 함빡 머금고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예요. 우리는 변한 게 없는 것 같군요. 나는 지이 (예의 바르게 쓰는 존칭)라고는 부르지 못하겠어요. 또 두우 (친한 사이에, 특히 남녀간에는 애인 사이에 쓰는말)라고 부를 수도 없으니 영어로 말해야겠는 걸요. Do you understand me?" 이같은 환대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어쨋든 그곳에서 내 눈앞에 보이는 장면은 가면 무도회는 아니었다. 거기에는 한 영혼을 갈구하는 영혼이 있었다. 또 변장을 하고 검정 가면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두 친구가 단지 눈맞춤만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것 같은 그런 인사가 있었다. 나는 내게로 내민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천사 테 이야기할 때는 <지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형식의 힘과 생활의 관습은 얼마나 질긴 것인지! 아무리 친한 영혼끼리라도 자연의 언어로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대화가 끊기고, 우리들은 한순간 어색함을 느꼈다. 그때 나는 침묵을 깨고 때마침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냈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새장 안에서 사는 데 길이 들어 있지요. 그래서 자유로운 대기 속으로 풀려 나도 감히 날개를 필 엄두를 못 내고, 날아오르기만 하면 사방에 부딪칠세라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 말이 맞아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대로 역시 좋은 일이고, 달리 어쩔 수도 없지요. 사람들은 숲 속을 나는 새들처럼 나뭇가지 위에서 만나 굳이 서로를 소개할 필요도 없이 같이 노래를 부르는, 그런 삶을 누리기를 곧잘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친구여, 새들 가운데는 부엉이들이나 참새 같은 무리도 섞여 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을 모른 척하고 지나칠 줄도 알아야 좋은 거예요. 그래요, 어쩌면 삶이란 시와 같은 것인지 모르겠군요. 참 된 시인이 가장 아름답고 진실된 것을 운율이라는 구속된 형식에 담아 표현할 줄 알 듯이, 인간이라면 사회의 속박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감정의 자유를 지킬 줄 알아야겠지요. 나는 이때 플라텐의 싯귀를 머리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느 곳에서든 영원한 것으로 현현되는 것은, 구속된 운문에 담긴 구속할 수 없는 정신이니,
맞아요 하고 그녀는 다정하면서도 사뭇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어쨋든 내게는 하나의 특권이 있답니다. 그것은 나의 병고와 외로움이지요. 내게는 청춘 남녀들이 퍽 애석하게 여겨질 때가 많아요. 그들은 스스로가 또는 그들의 가까운 친구들이 자기네를 향해서 - 사랑이나 사랑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한, 어떤 우정이나 신뢰감도 갖지를 못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많은 것을 잃는답니다. 처녀들은 자신의 영혼 안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또 숭고한 남자 친구의 진지한 권고의 말 한마디가 그 잠을 깨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요. 그런가 하면 젊은 남자들의 경우도, 만약 자신의 내면의 투쟁을 멀리서 지켜봐 주는 애인을 대상으로 가질 수 있다면, 아마 그 옛날 기사도적 덕성을 되찾을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거기엔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라고 칭해지는 것이 늘 끼어드니까요 - 무섭게 고동치는 가슴이라든가, 파도처럼 밀려도는 희망, 예쁜 얼굴을 마주했을 때 환희 - 달콤한 감상 - 어쩌면 약삭빠른 타산까지 - 한마디로 순수한 인간애의 참모습이라고 할 저 고요한 대양을 교란시키는 온갖 것이 끼어든단 말입니다. 그녀는 갑자기 말을 중단했다. 괴로운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언뜻 떠올랐다. 오늘은 더 오래 얘기를 할 수가 없어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 주치의가 원치 않는 일이죠. 멘델스죤의 음악을 듣고 싶네요. 저 이중주 - 어린 시절의 친구인 당신은 이미 그 옛날에도 연주할 수 있었던 곡이 아닌가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막 말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두 손을 맞잡았을 때 그 반지가 - 지금은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옛날 그녀가 내게 주었고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반지였다. 너무나 많은 생각이 벅차게 몰려오는 바람에 나는 말을 잃었다. 그래서 묵묵히 피아노 앞에 앉아 그 곡을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고 나서 나는 그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듯 언어가 없이 음률로만 얘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수 있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알아들었답니다. 하지만 오늘은 더 오래 버틸 수가 없어요 -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고 있거든요. 자, 그럼 우리 서로를 길들여 친해지도록 해요. 병들어 은둔하고 있는 이 가엾은 여자가 관용을 기대하는 거랍니다. 우리 내일 같은 시간에 만나는 거예요. 괜찮겠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에 키스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손을 부여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 됐어요. 안녕!
다섯째 회상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 심경은 완전히 말로 옮겨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긴 기쁨과 슬픔의 극치의 순간에는 누구나가 홀로 연주하는<말없는 생각>이라는 곡조가 있게 마련이다. 그때 내 느낌은 슬픔도 기쁨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었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려 하지만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산화되고 마는 유성처럼 날고 있었다. 때로는 꿈을 꾸면서도, 지금 너는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 - 너는 살아 있다. 그리고 그녀는 엄연히 실재한다고. 그리고 분별과 냉정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면서, 그녀는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애인이야, 실로 비상한 정서를 지닌 여인이야,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또한 그녀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 휴가 기간 동안 그녀의 곁에서 지내게 될 즐거운 저녁 시간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러나, 아니, 그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녀야말로 내가 구하고 생각하며, 희망하고 믿었던 모든 것이 아닌가. 여기에 마침내 한 인간의 영혼이 - 투명하고 신선한 영혼이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본 첫 순가에 나는 그녀의 전부를, 그녀의 내부에 감취진 모든 것을 알아보았었다 - 우리는 인사를 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속의 수호 천사는? - 그 천사는 대답이 없었다. 떠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천사를 재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지상에 단 한 군데밖에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부터 어름다운 삶이 열렸다. 매일 저녁 나는 그녀를 방문하였고, 우리는 곧 서로가 진정한 옛 친구임을, 서로<두우>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사이임을 절감했다. 우리는 서로 지금껏 늘 함께 어울려 살아왔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쨋든 그녀가 켜는 감정의 현 치고 이미 나의 영혼 속에서 울리지 않은 음이 없었고, 내가 입 밖에 낸 생각치고 그녀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라고 응해 오지 않은 생각은 없었다. 그전에 언젠가 나는 우리 시대의 저명한 음악가 한 사람이 자기 누이랑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곡을 연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떻게 저 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그들의 악상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지, 그러면서 결코 한 음부도 화음을 깨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지, 실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스스로 늘 그렇게 생각했듯이, 나의 내면이 가난하고 공허한 것이 아님을 발견했던 것이다. 다만 그 모든 씨앗과 꽃봉오리를 발아시키고 개화시킨 햇빛이 못내 아쉬웠다. 실상 나와 그녀의 영혼을 꿰뚫고 간 그 봄은 얼마나 우수에 찬 계절이었던가! 흔히 5월에는 이제 곧 장미가 시들리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그 계절에는 매일 저녁 꽃잎이 하나씩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의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그 소리를 알아듣고 그 얘기를 입 밖에 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고통스러운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날이 거듭할수록 점점 진지하고 무게를 더해 갔다.
어느 날 저녁, 내가 막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견신례 날 이 반지를 당신한테 드렸을 때, 이미 곧 세상을 하직하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토록 여러 해를 살아오며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일을 누리다니요. 물론 괴로움도 많았지만. 하지만 그런 것은 잊게 돼요. 이제 진정으로 작별의 시간이 임박해 온 것은 느끼면서 한 시간, 일 분이 이렇듯 소중하게 생각될 수가 없어요. 안녕히 가세요. 내일 늦지 않도록 하세요.
어느 날인가는 그녀의 방에 들어섰을 때, 한 이탈리아 화가가 와 있고, 그녀는 그 사람과 이탈리아 말로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그 남자는 예술가라기보다는 한낱 기술자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를 향해 상냥하고 겸손한 태도로, 사뭇 존경의 염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보고 있노라니 타고난 그녀의 진정한 귀족 품격이, 고결한 영혼이 엿보였다. 화가가 가고 나자 그녀는 내게 말했다. 지금 그림을 한 점 보여 드릴께요. 당신도 좋아할 거예요. 원본은 파리 미술관에 있는 거랍니다. 이 그림에 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아까 이탈리아 화가한테 사본을 그려 받았어요. 그녀는 내게 그림을 보여 주고 나의 촌평을 기다렸다. 그것은 고전적 독일 의상을 입고 있는 중년 남자의 초상화였다. 그림의 주인공의 표정은 몽상적이고 겸허한데다가 너무나 사실적인 모습이어서, 의심할 여지없이 실제 생존했던 인물로 보였다. 그림의 전경의 색조는 대체로 어두운 갈색, 그러나 배경은 풍경으로 지평선에 막 솟아오르는 첫 아침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밖에 그 그림에는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대체로 안정감을 주는 인상이어서 몇 시간이고 싫증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도 이 그림을 능가할 수 없을 겁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라파엘이었다 해도 이런 작품을 만들어 내진 못했을 거예요. 정말 그래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럼 내가 왜 이 초상화를 갖고 싶어했는지, 연유를 들어 보세요. 이 그림의 화가가 누구인지, 초상화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미상이라는 내용을 읽었어요. 그렇지만 모델은 필시 중세기의 한 철인일 것이라는 추측이에요. 그런데 바로 이런 초상화가 나의 화실에 필요했거든요. 당신도 아다시피, 저<독일 신학>의 저자가 미상이잖아요? 또 그 사람 초상화도 전해져 오는게 없구요. 그래서 이 미지의 화가가 그린 미지의 인물의 초상화가 과연<독일 신학>의 저자로 어울리는지 한 번 맞추어 보고 싶었던 거예요. 당신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이 그림을 <알비 파>그림과 <보름스 국회>장면 사이에다 걸어 놓고<독일 신학의 저자>라는 제목을 붙일까 해요 좋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다만 이 인물은 프랑크푸르트 사람 치고는 좀 너무 정력적이고 남성적으로 보이는 군요.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어쨋든 나처럼 병들어 죽어 가고 있는 생명한테는 이 책이 많은 위안과 힘을 퍼내어 주었답니다. 이 책한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몰라요.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기독교 교리의 참된 비밀을 간명하게 알게 되었거든요. 이 책의 저자가 누구였든간에 그의 가르침을 믿고 안 믿고는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는 느낌이에요. 그의 교리는 내게 아무런 외형적 강요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도 그 교리는 엄청난 힘으로 나를 사로잡았어요. 그래서 계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알 것 같았어요. 많은 이들로 하여금 참된 기독교 정신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 요인은 다름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계시가 미처 다가오기도 전에 기독교 교리가 먼저 계시를 앞세우는 데 있는 것이랍니다. 그것은 나를 자주 불안하게 하는 일이었어요. 그렇다고 내가 우리 종교의 진실성과 신성을 의심했다는 뜻은 아니예요. 다만 남들이 공짜로 가져다 주는 믿음에 대해서는 내게 권리가 없다는, 또 이해도 못하면서 유아 적부터 배워 수용한 믿음은 진정으로 내 것이 아니라는 그런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대신하여 살아 주거나 죽어 줄 수 없는 것처럼,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서 믿어 줄 수는 없는 게 아니겠어요?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기독교 교리는 사도들이나 초기 기독교 교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서서히 거역할 수 없이 우리 마음에 스며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그것은 어떤 막강한 교파의 범접할 수 없는 율법이 되어 유아기 적부터 우리에게 다가와, 이른바 신앙이라는 맹종을 강요하고 있지요. 바로 여기에 수많은 치열한 갈등의 근거가 있는 겁니다. 모름지기 사고하는 능력과 진실에 대한 경외김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는 어김없이, 늦도 빠르든간에 의혹이 고개를 들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쟁취하려는 올바른 도정에 있는 동안에도, 늘 우리의 마음에는 의혹과 불신이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어 새로운 생명이 펼쳐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나는 어느 영어 책에서 이런 귀절을 읽었어요. 라고 그녀가 끼어들었다. 진리가 계시로 나타나는 것이지 계시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에요. 이 말은 내가 <독일 신학>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어김없이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어요. 그 신학서를 읽었을 때, 나는 그 책이 말하는 진리의 힘에 압도당하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 교리에 귀의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니,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계시받았던 것이지요. 또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구요. 진리는 내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나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미지의 저자의 가르침이 한 줄기 광채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어 내면의 눈을 뜨게 하고, 막연했던 예감을 명징하게 내 영혼 앞에 보여 주었던 겁니다. 그렇게 일단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를 느끼고 난 연후에, 나는 복음서를 읽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 역시 미지의 저자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간주하고 말이지요. 그것들은 신비한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 사도들에게 불어넣어진 영감이며, 종교 회의에서 인준을 받았고, 카톨릭 신앙의 최고 권위로 인정받은 것이라는 등의 선입견을 되도록 내 머리에서 몰아내었어요 -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며, 기독교 계시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신학자들이 아직껏 우리에게서 종교라는 것을 모조리 앗아 가지 않은 것이 차라리 이상스러울 지경이지요 라고 내가 말했다. 만약 진정한 신앙인들이 정색하고 다가서서<이 정도까지만, 더 이상은 안 돼요>라고 말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마 종교를 몽땅 앗아 갈 겁니다. 어느 교회에든 하나님의 종복이 있어야겠지요. 그렇지만 이 세상의 종교치고, 목사며 바라문, 샤먼, 불고승이나 라마승,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 같은 부류들에 의해 부패하고 파괴되지 않은 종교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교구의 십중팔구 신도들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서로 물고 뜯고 싸웁니다. 그리고 자신부터 복음의 영검을 받아, 그 영감으로 다른 이들을 교화시킬 생각은 않고, 복음서들은 영감을 받은 자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니 어디까지나 진리라는 장황한 증거나 수집하기 급급합니다. 하지만 그런 증거라는 것은 그들 자신의 미흡한 신앙을 미봉하는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지요. 스스로가 한층 경이로운 영감을 받아 보지 못한 마당에, 복음서 저자들이 놀라운 방식으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대체 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영감이라는 하늘의 은총을 초대 교회 장로들한테까지 연장시키고, 심지어는 종교 회의 결의에서 다수를 차지한 이들에게까지 그 자격을 부여합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금 문제가 제기됩니다. 쉰 명의 주교 가운데 스물 여섯 명은 영감을 받았고 스물 네 명은 영감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 필사적 조처를 취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축복의 안수를 통하여 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영감과 무류성을 이어받고 있으며, 무류성이나 다수의 원칙, 성령등은 일체의 내재적 확신이나 헌신, 신앙상의 직관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모든 연결 고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명백하게 맨 처음의 의문이 되돌아옵니다 - 즉, B가 A만큼, 또는 그 이상의 영감을 받지 않은 경우, 어떻게 B는 A가 영감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가? 왜냐하면 B자신이 영감을 받았음을 아는 것보다 A가 영감을 받았음을 아는 데는 더 큰 능력이 요구되니까요. 나 자신은 그렇게까지 명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사랑에 관한 한, 타인이 사랑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했어요. 왜냐하면 사랑에 있어서는 그것이 가짜라는 징표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생각했답니다 - 즉, 스스로 사랑을 아는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사랑을 알 수 없다구요. 또 그가 자신의 사랑을 맏는 한도 내에서만 타인의 사랑도 믿게 되는 것이라구요. 사랑의 은총이 이렇듯, 아마 성령의 은총도 같을 겁니다. 성령의 은총을 받을 때, 당사자는 하늘로부터 폭풍이 몰려오는 듯 엄청난 굉음을 들으며 불이 난 듯 혓바닥이 녹아 내림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당사자가 아닌 남들은 혼비백산하며 오해를 하거나, <당신 취했군요>라고 놀려 대개 일쑤입니다. 아무튼 이미 말했듯이 내가 나의 산앙을 굳히게 된 것은 <독일 신학>의 덕분이예요. 그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책의 결함이라고 지적한 요소가 오히려 내게는 확신을 주었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옛 스승은 자신의 교리를 결코 엄밀하게 논증하려고 애쓰지 않았거든요. 그는 씨뿌리는 농부처럼, 단 몇 알의 씨앗이라도 비옥한 땅에 떨어지면 천 갑절 결실을 맺으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그냥 자신의 교리를 뿌린 거랍니다. 그 신학의 스승이 그런 식으로 자기 교리를 굳이 입증하려 애쓰지 않은 이유는 그가 지닌 인식이 그만큼 충만했기 때문일 겁니다. 논증이라는 형식을 묵살할 만큼.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스피노자의<윤리학>에 나타난 놀라운 논증의 연쇄를 머리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피노자의 경우에서 보듯, 지나치게 소심한 논증의 전개는 오히려 그 예리한 사상가께서 진심으로는 자신의 학설을 믿을 수 없었던 게 아닌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굳이 그물의 코 하나하나를 그토록 용의주도하게 묶을 필요를 느꼈던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줍니다. 그렇기는 해도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솔직이 고백하자면, 나는 <독일 신학>에 대한 그같은 찬탄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나도 그 책에서 여러 가지 자극을 받긴 했지요.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책에는 인간적인 면, 시적인 요소,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따뜻한 감정과 경외감이 결여되어 있어요. 십 사 세기의 모든 신비주의는 준비 단계로선 유익한 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루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결국 신의 축복과 신이 부여한 용기를 갖고 현실 생활로 귀환하는 데서 비로소 그 해결점을 찾았지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존재의 무상함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자기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기의 존재, 출생, 영생은 불가사의한 초지상적 영역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깨달아야만해요. 이것이 곧 신에게 귀의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비록 지상에서는 끝내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신에게로의 향수를 남겨 주지요. 그렇지만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이 창조된 세계를 지양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비록 인간 자신이 무에서 만들어졌지만, 즉 오로지 신에 의해 신으로부터 나오긴 했지만, 그는 혼자 자기 힘으로 그 무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겁니다. 타울러가 말하는 자아소멸 이라는 것도, 불교도들의 경우에서의 열반, 또는 영혼의 입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타울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고의 존쟁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이 큰 나머지 공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자존 앞에서 기꺼이 아무리 깊은 나락으로라도 떨어질 의지를 갖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같은 피조물의 소멸은 창조자의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은 그것을 창조했으니까요. <신이 모습을 바꾸어 인간 안으로 들어 서는 것이지, 인간이 신으로 화할 수는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인간 영혼을 단련시키는 일종의 불은 되겠지만, 인간의 영혼을 가마솥의 끓는 물처럼 증발시키지는 못합니다. 자아의 허무를 인식한 자는 그 자아가 곧 진정한 신성의 반영이라는 것도 인식해야 합니다. <독일 신학>에는 이런 구절이 있지요.
흘러나온 것은 참된 존재가 아니요, 그것은 한낱 우연이며 광채이며 반사일 따름이로다. 존재란 완전자 안에만 있음이라. 따라서 우연, 광채, 반사처럼 흘러나온 것은 진정한 존재도 아니며 존재를 지니고 있지도 아니하다. 존재란 그 광채를 유출시키는 불꽃이나 태양, 빛 안에만 있음이라.
그렇지만 신성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그것이 비록 불꽃의 잔광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쨋든 신적인 실체를 자신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나는 광채 없는 불꽃이나 빛이 없는 태양, 또는 피조물 없는 창조주가 무슨 의미를 갖느냐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이런 문제들을 여실히 밝혀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인간, 어떤 피조물을 막론하고 신의 뜻과 심오한 충고를 알고 체득하고자 갈망하는 것은, 바로 아담의 행적과 악마의 행적을 갈망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신성의 반영으로 느끼고,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비춰 주는 신의 빛을 발밑에 놓거나 꺼 버려서는 안 되고, 그 빛이 주변 만물을 두루 비추어 주고 따뜻이 해 주도록 한껏 발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혈관 속에 살아 있는 불꽃을 느끼고 삶의 투쟁을 향한 한 단계 높은 영감을 느끼게 되지요. 아무리 하찮은 의무라도 우리에게 신을 상기시키며, 세속적인 것이 신적인 것으로, 무상한 것이 영원한 것으로, 우리의 온 생이 신 안에서의 생으로 화하는 겁니다. 신은 영원한 휴식이 아니라, 생명이랍니다. 안젤루스 실레지우스는 신에게는 의지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는 실상 이런 점을 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한다, <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그러나 보라, 신은 뜻을 갖고 있지 않음을, 신은 영원한 정적임을.
그녀는 차분히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떼었다. 당신의 신앙은 건강하고 힘을 지니고 있어요. 하지만 삶에 지쳐 안식과 수면을 갈망하는, 당장 신에게로 돌아가 영원히 잠든다 해도 세상에 대해 아무 애착도 아쉬움도 느끼지 않을 만큼, 너무나 큰 고독에 빠져 있는 영혼들도 있답니다. 지금이라도 아주 신의 품에 안길 수 있다면, 거룩한 안식이 찾아오리라는 예감을 그들은 갖고 있어요.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겐 세상과의 유대도 없고, 휴식에 대한 소망 말고는 그 어떤 소망에서도 위안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휴식은 지고의 선, 신이 휴식이 아닐진대, 나는 바로 신 앞에서 두 눈을 감으리.
아무튼 당신은 <독일 신학>의 저자를 부당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저자는 외형적 삶의 무상함을 고시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소멸되기를 원치는 않았어요. 제 이십 팔 장을 좀 낭독해 주세요. 내가 책을 들고 읽는 동안 그녀는 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진실로 합일이 이루어져 실재하게 되는 곳에서는, 그 합일 가운데서 내적 인간은 활동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외형적 인간으로 하여금 이리저리, 이승에서 저승으로 움직이게 하시니라. 이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고 진실로 그렇게 돼야 하노라. 따라서 외형적 인간은 진실로 이렇게 말하게 되리라.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는 것과 죽는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 행동하는 것과 그만두는 것, 이런 일체의 것들은 저의 뜻이 아니옵니다. 저는 오로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을 행하거나 감내하면서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고 순종할 따름이옵니다.> 이렇듯 외형적인 인간은 왜라고 따지며 묻거나 요구하지 않으며, 묵묵히 영원하신 분의 뜻에 만족해야 할지니라. 진실로 내적 인간은 움직이지 않으며, 외형적 인간이 필연적으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음은 주지된 바이로되, 내적 인간이 움직여 왜라고 따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 역시 영원하신 분의 뜻에 의해 정해진 필연일 따름이니라. 하나님 자신 인간이 될 수 있거나 인간이 된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이니라. 이 사실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알아불 수 있음이라. 하나님 빛으로부터 나와 그 빛 안에서 합일이 이루어지는 곳에선 정신적 교만이나 경솔한 방종, 분방한 기질을 볼 수 없으려, 그곳엔 오로지 끝없는 겸허함, 무한히 자신을 움츠린 우려의 마음, 단정함과 성실, 평등과 진실, 평화로움과 만족스러움 요컨대 덕성에 속한 일체의 것이 자리하게 되느니라. 그렇지 않은 경우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합일은 이미 아니로다. 다만, 실로 세상의 어느 것도 이같은 합일을 도와 주거나 그것에 종사치는 않느니라. 마찬가지로, 그 합일을 교란시키고 방해할 것도 아무것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그것에 큰 해를 끼치는 것은 오로지 인간 자신이 내세우는 인간의 뜻뿐이기 때문이로다. 이점을 유념할지라.
거기까지면 됐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이로써 이제 우리는 서로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이 미지의 저자는 책의 다른 대목에서도 더 분명히 말하고 있답니다. 즉 어떤 인간도 죽음을 앞두고 동요가 없을 수는 없다고요. 아무리 신화된 인간이라도 신의 뜻이 없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한낱 신의 손, 또는 신이 거하는 집과 같다구요. 신에 사로잡힌 인간은 자신의 상태를 잘 알면서도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마치 사랑의 비밀을 간직한 듯, 신 안에서의 자신의 삶을 지키지요. 내게는 곧잘 나 지신이 저 창밖으로 보이는 백양나무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저 나무는 저녁이 되면 잎새 하나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서 있지요. 그러다 아침 바람이 불면 잎새들이 마구 흔들리지요. 하지만, 나무 둥치와 가지는 조용히 의연히 서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을이 오면 한때 떨고 있던 모든 잎새가 시들어 떨어집니다. 그리도 둥치만은 새로운 봄을 기다린답니다. 그녀는 이같은 세계에 이토록 깊이 은둔하여 살고 있었으므로, 나는 굳이 그런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긴 나 자신도 그와 같은 사념의 요지경 속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상태였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토록 많은 고뇌와 노고가 주어졌는데, 도저히 떼어낼 수 없이 그녀 안에 자리잡고 있는 몫이 과연 올바로 선택된 것인지는 나도 알 수 가 없었다.
이렇게 매일 저녁 우리에게는 새로운 대화가 열렸고 그런 저녁이 거듭될수록 이 가늠할 수 없는 정서를 지닌 여인을 들여다보는 나의눈도 떠졌다. 그녀는 내 앞에 아무 비밀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언어는 순전히 전신의 사고와 느낌 자체였다. 그녀가 입 밖으로 내는 말은 모조리 수년 동안 그녀의 삶을 동반하며 성숙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마치 한아름 꺾어 모은 꽃을 서슴없이 잔디 위에 다시 던지는 어린애처럼, 자신이 수집한 생각을 남김없이 털어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처럼 기탄없이 내 마음을 열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 어쨌든 이 사회는 관습이니 예의니, 분별이니 현명함이니, 생의 지혜니 하는 이름을 붙여 우리에게 끊임없는 거짓 놀음을 요구하며 우리의 생 전체를 일종의 가장 무도회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가. 이런 거짓 놀음에 참여하고 있으면서, 아무리 뜻이 있다 해도, 자신의 본연의 진실을 온전히 되찾아 가진 사람들이 실로 몇이나 될까? 심지어 사랑까지도 고유의 언어를 말하지도, 고유의 침묵을 그대로 침묵하지도 못하며, 시인의 상투어를 배워 열광하거나 한숨 짓고 일시적 유희를 벌인다.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고, 서로를 바라보며 헌신할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녀에게 그런 점을 솔직히 털어놓고, 당신은 나를 모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게 간절한 나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진실 그대로 구현할 말이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떠나오기 전에, 바로 최근에 얻은 아놀드의 시집을 그녀한테 남겨 두고<파묻힌 생명>이라는 시를 읽어 보라고 청했다. 그것은 나의 고백이었다. 이어서 나는 그녀의 침대 곁에 꿇어앉아 안녕히 주무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녀도 안녕히 가세요 라고 말하며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내 온몸에서는 전류가 흐르듯 전율이 느껴지고, 어린 시절의 꿈들이 내 마음속에서 펄럭이며 날개짓을 했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날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깊고 바닥을 알 수 없는 눈을 응시하며, 그녀의 영혼의 평화가 그림자처럼 내 마음을 두루 덮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일어서서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사나운 바람 속에 서 있는 백양나무의 꿈을 꾸었다. 하지만 나뭇가지에서는 한 잎의 잎새도 흔들리지 않았다.
파묻힌 생명
우리 사이에는 익살스런 재담이 가벼이 날고 있다. 그러나 보라, 나의 눈이 눈물로 젖어 있음을! 이름 없는 슬픔이 나를 덮쳐 온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재담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미소를 건넬 수 있음을! 그러나 이 가슴속에는 남모르는 무엇이 감추어져 있으니, 그것은 너의 가벼운 이야기도 몰아낼 수 없는 것, 너의 즐거운 미소도 위안을 줄 수 없는 것, 너의 손을 이리 다오, 그리고 잠시만 침묵해 다오. 다만 너의 그 맑은 눈을 내게로 향해 다오. 너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을 읽을 수 있도록, 사랑하는 이여!
아, 사랑조차 이토록 약한 것일까? 마음을 열어 그것을 말하게 할 힘이 없는가? 사랑하는 이들조차 진정 느끼는 것을 서로 표현해 낼 힘을 갖지 못한 것일까? 나는 알고 있었지,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감추는 것을, 혹시나 자신의 생각이 드러나면, 남들에게 무심히 거부당할까, 아니면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또한 알고 있었지, 사람들은 거짓 탈을 쓰고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남들에게나 자신에게나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 - 그러나 모든 인간들의 가슴속에서는 똑같은 심장이 고동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이여! - 그같은 저주가 우리의 가슴과 우리의 목소리까지 마비시킨단 말인가? - 그렇게 우리도 벙어리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아! 단 한순간이라도 우리의 심장을 열어 젖힐 수 있다면, 우리의 입술을 묶고 있는 사슬을 풀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을 묶고 있는 것은 깊은 운명의 손길인 것을.
운명은,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아이가 될는지를 예지하고 -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일들에 몰두하며 온갖 싸움질에 빠져들며, 사뭇 본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이 변할 수 있음을 예지하고 - 인간이 경박스런 놀음 가운데서도 순수한 자아를 지키도록, 방종 가운데서도 존재의 법칙에 따르도록, 숨어 있는 인생의 강으로 하여금 우리 가슴 깊디깊은 곳을 관류하여 보이지 않는 흐름을 추진하도록 명하였다. 하여 우리의 눈은 그 묻혀진 흐름을 보지 못하며, 비록 그 섭리의 흐름을 타고 있으되, 우리의 모습은 불확실 속을 표류하는 장님 같은 것.
그러나, 붐비는 세상의 길목에서도 소란스런 투쟁 속에서도 우리의 묻혀진 생을 알고 싶은 무한한 욕구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 삶의 참된 본연의 길을 알고자 온 힘과 불꽃을 사르고 싶은 갈증이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이토록 세차게 고통치는 심장의 신비를 캐려는 - 우리의 삶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가슴을 파헤쳐 보았는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석연하게 그 광맥을 파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수천 갈래의 길에 서 보았고, 매길목마다에서 정신과 힘을 보았다. 그러나 단 한순간도, 우리 본연의 길에 서 보지도, 본연의 자아를 만난 적도 없다. 우리의 가슴을 통해 흐르는 그 숱한 이름 모를 감정 중에 단 한 가닥도 표현해 낼 능력이 없었다. 하여, 그 감정들은 표현을 찾지 못한 채 영원히 흐르고 있다. 긴 세월 헛되이 우리는 숨겨진 자아를 좇아 말하고 행동하고자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웅변이며 그럴싸 하지만 - 아, 그건 진실은 아닌 것이다!
하여 우리는 이같은 내면의 투쟁에 더 이상 시달리고자 하지 않는다. 속절없는 순간을 향해 요청한다, 수천 가지 무위한 행위를, 그것을 망각하고 마비시킬 힘을. 아, 그러면 그 순간 즉각 응해 와서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때로는, 몽롱하게 그림자처럼, 끝없이 아득한 어느 왕국에서 오듯 영혼의 깊은 현실로부터 미풍과 부유하는 메아리가 찾아와 우리의 날들에 우울을 더해 준다.
다만 - 아주 드물게 - 사랑하는 이의 손길이 우리의 손에 놓일 때, 무한한 시간이 광채를 띠고 몰려와 녹초가 되어 우리의 눈이 상대의 눈의 말을 읽어 낼 수 있을 때, 세상사에 귀 막은 우리의 귀에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애무하듯 울려 올 때 - 그때에는 우리 가슴속 어디멘가 빗장이 열리고, 오랫동안 잊었던 감정의 맥박이 고동을 치게 된다. 눈은 내면을 향하고, 가슴은 평온해지며, 이제 우리는 우리가 뜻하는 것을 말하게 되고 우리의 소망을 알게 되는 것이다. 굽이치는 생의 속삭임을 듣게 되며, 생의 강물이 흘러가는 초원을, 태양과 미풍을 느낀다. 날아 도망치는 그림자 같은 휴식을 잡으려고 영원한 추격을 벌이는 인간의 치열한 경주에, 마침내 휴식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제 서늘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미문의 고요가 그의 가슴을 덮는다. 그때 그는 생각하리라 - 자신의 생명을 잉태한 언덕과 그 생명이 흘러갈 태양을 이제 알고 있노라고.
여섯째 회상
다음날 아침 일찍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궁중 고문관인 늙은 의사가 들어섰다. 그는 작은 우리 도시 주민 모두의 친구이자, 정신 및 육체를 돌봐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2대에 걸쳐 주민들의 성장을 지켜봐 온 것이다. 출산을 봐 주었던 아이들이 어느 새 아버지 어머니가 되었고, 그는 그들 모두를 자기 자식처럼 여겼다. 아직 독신이었지만,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정하고 미남이라 부를 만한 풍모였다. 지금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은 그날 내 앞에 서 있던 모습 그대로이다. 숱이 많은 눈썹 밑에서 빛나던 밝고 푸른 눈, 머리칼은 백발이 성성했지만, 아직도 젊은 기운이 그대로 있어 구불구불 윤기가 흘렀다. 또한 은 장식이 달린 구두, 흰 양말, 언제 봐도 새것 같으면서도 항상 똑같은 것을 걸친 듯한 갈색 웃도리 등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또 지팡이는 어릴 적 나의 맥을 짚든가 처방전을 써 줄 때 내 침대 곁에 세워 두곤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잦은 병치레를 했다. 하지만 번번이 곧 회복된 것은 그 의사에 대한 나의 믿음 덕분이었다. 그 의사가 나를 낫게 해 주리라는 점을 나는 눈꼽만치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나보고 병을 고치러 의사한테 가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은, 내게는 마치 찢어진 바지를 수선시키러 재봉사한테 보내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이 들렸다. 약을 먹기만 해도 당장 낫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지내나, 여보게. 의사는 방 안에 들어서자 말했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군. 너무 지나치게 공부를 하면 안 돼. 아뭏든 오늘은 긴 수다를 떨 시간이 없네. 내가 온 용건은, 다시는 백작 영양 마리아를 찾아가지 말라는 부탁을 하러 온 걸세. 나는 어제 밤새도록 그 여자를 지키고 있었다네. 그건 자네 탓이야. 그러니 그녀의 목슴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다시는 그 여자를 방문하지 말게. 가능한 한 빨리 마리아를 시골로 가게 해야겠어. 자네도 얼마간 여행이라도 하는게 좋겠지. 자, 그럼 잘 있게. 그리고 내 말을 꼭 지켜 주게. 이 말을 하고 그는 내게 손을 내밀고, 내게서 약속을 받아 내려는 듯 다정하게 나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자기의 병든 자식들을 방문하러 떠나갔다. 타인이 내 마음속 비밀을 돌연히, 이토록 깊이 파고들었다는 사실, 실로 나 자신도 모르고 있던 것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얻어맞은 듯 놀랐다. 그래서 의사가 벌써 큰 길로 나섰을 때야 비로소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속은, 벌써 불 위에 올려놓았는데 잠잠하게 달아올랐다가 돌연 끓기 시작하는 물처럼, 갑자기 터지도록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를 다시 못 만난다니 - 나는 진정 그녀 곁에 있을 때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조용히 있을 테다.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고, 그녀가 잠들어 꿈을 꿀 때 가만히 창가에 서 있을 테다 - 그런데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고? 작별 인사조차 할 수 없단 말인가? 그녀는 알 리가 없다.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다. 아, 하긴 나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 거다 - 나는 그녀를 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다. 실로 그녀 곁에 있을 때처럼 내 심장이 평온히 뛰는 적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그녀가 곁에 있음을 느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녀의 영혼을 호흡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그녀에게 가야만 한다! 그녀도 나를 기다릴 것이다. 운명이 아무런 뜻도 없이 우리 둘을 만나게 한 것일까? 내가 그녀의 위안이 되고, 그녀가 나의 안식이 되어선 안 된단 말인가? 인생이란 유희가 아니지 않은가. 두 인간의 영혼이 만나는 것이, 소용돌이치는 열풍에 모았다가 흩어 버리는 저 사막의 모래알의 만남과 같을 수 는 없지 않은가. 행운이 마주치게 한 우리의 영혼들을 꼭 붙잡아야한다. 왜냐하면 그 영혼들은 우리를 위해 점지된 것이니까. 그것을 위해 살고 싸우며 죽어갈 용기만 갖고 있다면, 어떤 힘도 우리에게서 그 혼을 뺏아 가지 못하리라. 그 나무 그늘 밑에서 그토록 행복한 꿈을 꾸다가 첫 번째 뇌성에 놀라 나무를 떠나가듯, 이제 내가 이렇게 그녀의 사랑을 떠나 버린다면, 필시 그녀는 나를 경멸하리라. 그러자 갑자기 내 마음속이 평온해지며, 다만<그녀의 사랑>이라는 말만 귓가에 쟁쟁하게 남았다. 스스로 흠칫 놀랄 지경으로, 그 말은 내 마음 온 구석구석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녀의 사랑>-내게 어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가? 실상 그녀는 나를 거의 모르고 있다. 설혹 그녀가 나를 사랑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 자신 천사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그녀에게 내 입으로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푸른 창공으로 비상하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새장을 못 보는 새처럼, 내 마음에서는 온갖 상념과 희망이 후루룩 떠올랐다가 속절없이 가라앉곤 했다. 하지만 이 모든 행복이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 왜 그곳에 닿을 수는 없단 말이냐! 신은 기적을 행할 수는 없는 걸까? 신은 매일 아침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가? 내가 믿음에 찬 기도를 올리며 신을 향해 간절히 매달리면, 결국 신은 내 기도를 종종 들어 주시지 않았는가?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세속적 재화가 아니잖은가. 우리는 다만, 서로를 발견하고 알아볼 두 영혼이 손을 잡고 마주 바라보며, 이 짧은 지상의 여행을 같이 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뿐, 그래서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나는 그녀의 병고의 지팡이가 되고, 그녀는 내게 위안이나 사랑스런 배려자로 머물기를 기원할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생에 또 한 번의 봄이 약속된다면, 그녀의 고통이 덜어지게 된다면! - 오, 그때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던 축복받은 행복의 영상들이여! 돌아가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티롤에다 성채를 남기셨다 - 그곳 푸른 산 속, 신선한 공기를 쐬며, 건강하고 소박한 주민들 틈에서, 복잡하게 물려 돌아가는 세상사, 세 속의 근심과 싸움질에서 동떨어진 채, 질시와 비판의 눈초리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얼마나 복된 평안에 잠겨 생의 저녁을 맞을 수 있을까? <저녁 노을처럼 말없이 사라질 수>있을까? 그때 나는 어두운 호수와 살아 있는 듯 명멸하는 호수의 물결을 보았고, 그 안에 비친 저 먼 빙산의 투명한 그림자를 보았다. 내 귀에는 양 떼의 방울 소리, 목동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왔다. 또 총을 멘 포수들이 산을 넘어가는 모습, 저녁이면 마을에 모여드는 노인들과 젊은이들을 보았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마리아는 평화의 천사처럼 축복을 뿌리며 지나갔고, 나는 그녀의 친구요, 안내자였다. 별 수 없는 바보! 라고 나는 소리쳤다. 바보 같은 녀석! 어쩌면 네 마음은 여전히 그토록 미개하며 비겁하단 말이냐! 정신차리렴 - 네가 누구인지를 그녀와 얼마나 동떨어진 존재인지를 생각하라. 그녀는 상냥하고, 타인의 마음속에 자신을 비춰 보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애같이 붙임성 있고 스스럼없는 태도야말로 그녀 마음에 너에 대한 별나게 깊은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게 아니냐. 밝은 여름밤 홀로 너도밤나무 숲을 거닐 때, 달이 모든 나뭇가지와 잎새에 고루 은빛을 붓는 것을 너는 보지 않았느냐? 달은 어둡고 탁한 연못 물에도 빛을 비추고, 아무리 작은 물방울 속에서도 찬란하게 반영되지 않더냐? 이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눈빛도 이 어두운 생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 역시 그녀의 포근한 빛을 네 가슴에 투영시켜 담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따뜻한 눈빛을 기대하지는 말라! 그때 불현 듯 그녀의 무습이 생생하게 내 눈앞에 다가섰다. 기억 속의 상이 아니라 하나의 환영처럼 그녀는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나는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진실로 인식했다. 그것은 예쁜 소녀의 경우처럼 첫눈에는 우리를 눈부시게 하지만 얼마 안 가 봄날 꽃처럼 흩날려 가는, 그런 색채와 형태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 아름다움은 오히려 모든 본질이 조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진실이요, 전체가 정신화된 표현이며, 육체와 정신의 완전한 융합으로서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 행복감을 주는 아름다움이었다. 자연이 차별 없이 분배하는 아름다움은,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지 않으면, 말하자면 노력하여 쟁취하지 않으면 만족을 주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 아름다움은 마치 여배우가 여왕의 의상을 입고 무대로 나오는데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그 의상이 결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님을 드러내듯이, 오히려 불쾌감을 줄 뿐이다. 그러나 참된 아름다움이란 우아함이며, 우아함은 모든 압박과 육체적, 세속적인 것이 정신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은 추한 것까지 아름답게 하는 정신의 현존인 것이다. 그렇게 내 앞에 서 있는 환영을 관찰하면 할수록 나는 그 환영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풍기는 고귀한 아름다움을, 그 온 존재에 비치는 영적 깊이를 알아보았다. 오, 그토록 엄청난 축복이 내 곁에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둔 것은 내게 지상의 행복의 절정을 보여 주고 나서, 나를 인생의 넓은 사막으로 팽개치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 이 땅에 얼마나 엄청난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지를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한 번 사랑하고 나서 영원히 고독해져야 한단 말인가! 한 번 믿고 나서 영원히 의혹에 빠져야 한단 말인가! 한 번 빛을보고 나서 영원히 눈이 멀어야 한단 말인가! - 이것은 엄연한 고문이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여타의 고문실도 이 고문에 비하면 실로 아무것도 아니리라. 이렇듯 나의 생각은 미친 듯 추적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소용돌이치던 잡다한 상념들도 차츰 모아져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안정과 기진의 상태를 아마 반성이라고 부를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관찰과 같ㅇ든 것이다. 온갖 사념들이 뒤섞이도록 시간을 허용하면, 마침내 그것들은 저절로 영원한 법칙에 따라 결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같은 과정을 화학자처럼 관찰하노라면, 여러 요소들이 융합해 하나의 형태를 획득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들이, 또한 우리 자신도, 기대했던 것과는 딴판의 존재임을 보고 흔히 놀라는 것이다. 이같은 망연한 관찰의 상태에서 깨어나 내가 입 밖에 낸 첫마디는 "떠나야겠다 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책상 앞에 않아 의사에게 편지를 썼다. 두 주일 동안 여행을 하겠으니 모든 뒷일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부모님들께는 곧 적당한 핑계의 말을 찾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으로 나는 티롤로 가는 여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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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희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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