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대표인지 청와대 당무수석인지 이정현의원이 국회의장 사퇴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한 지 일주일 만에 돌연 단식을 중단했다고 한다. 세상에 국회의장 사퇴를 요구하는 국회의원이 있다는 것도 희한하거니와 정치적 요구를 하면서 자기 부모까지 동원해서 단식을 하는 정치인이 있었는지 황당하기 짝이 없다. 황당함은 정말 목숨까지 걸어놓는다는 결연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단 엿새 굶고 중단을 선언해 버린 데서 정점에 이른다. 너무 진지하게(바보처럼?) 투쟁을 하다 보니 물도 제대로 먹지 않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단다. 이정현은 왜 단식농성을 통해 자신의 공언을 지키지 못하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단식을 접어야 했을까.
나도 단식농성이라면 유경험자다. 1978년 4월이었을 게다. 5월이었던가. 나는 광주 북동성당에서 함평고구마 사건 당사자들과 가톨릭농민회원, 그리고 몇몇 학생들과 함께 9일 동안 단식 농성 끝에 고구마 전량 수매와 구속자석방, 참가자 불처벌의 성과를 얻어내는 데 일조했다. 내 두 번째 단식은 광주교도소에 투옥되어 있을 때다. 그 때 리영희선생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그곳에 수감되어 형기를 거의 채워갈 무렵이다. 보름간 리영희선생 전향 강요 반대 단식투쟁을 했는데 식구통으로 밥을 배달해주면 특사 수감자들이 일제히 교도소장과 보안대상사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밥그릇을 복도로 내던지고 변기통 뚜껑으로 철문을 두드리는 것이 투쟁 방법이었다. 1.2평 감방에 날계란을 잔뜩 쌓아 놓고 말이다.
단식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굶어 죽어가면서 요구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것이 단식투쟁이다. 근데 사람 목숨은 질겨서 쉽게 죽지 않는다. 상당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느릿느릿 돌아가는 시계바늘이 사람 목숨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인식을 보는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러니 단식은 그야말로 죽기 직전까지 해야 비로소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건데 문제는 그 시간까지 버틸 수 있느냐다.
죽기 직전까지 밥을 굶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요령과 전략이 있어야 한다. 나는 함평고구마 단식이 하나의 모범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 때 단식투쟁지도부는 단식을 전략적으로 관리했다.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들어오지 않더라도 몸이 스스로 그것을 견딜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지도부는 시간을 정해 식염수를 적절하게 섭취하게 하고 스트레칭하는 시간표를 짰다. 40명이 넘는 단식참여자들이 한 명의 이탈자 없이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었던 데는 이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이정현은 단식에도 요령과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막무가내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실패의 요인 중 하나다.
그런데 더 중한 것이 있다. 인간의 몸은 신체-생리적 측면과 정신-심리적 측면이 통일되어있는 유기적 통일체다. 그래서 밥을 먹지 않고 오래 견디기 위해서는 신체-생리적 기능 유지를 위한 관리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정신-심리적 측면의 고양이 중요하다는 거다. 단식은 절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했을 때 더 오래 버틸 수 있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게다. 아니 어쩌면 절실한 처지에 놓인 사람만 단식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통해서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 할 것이다.
이번 이정현대표의 단식을 보면 이러한 절실함이 보이지 않는다. 의회주의의 회복을 위해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한다는 게 단식농성의 명분이라는데, 그것이 그에게 그렇게도 절박한 사정이었을까? 모르겠다. 그에게는 박근혜대통령의 심기를 경호하는 게 절실한 문제였는지도. 대통령이 싫어하는 일을 처리한 국회의장을 대통령을 대신해 혼내 놓겠다는 그의 결의가 주관적으로 절박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으니 말이다.
절박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절박함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정의이고 진리라는 확신에서 나온다. 나는 밥을 굶어 죽어 나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정의를 실현시키고 말겠다는 결의. 절실함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과연 객관적 정의라는 표식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 객관적 정의라는 게 과연 있기는 있는가. 정의라는 게 보는 관점과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정의일 터이니 객관적 정의라는 건 애초에 없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있는 건 오직 주관적 정의뿐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정의 문제에서 우리는 상대주의, 결국에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나인 주관만이 아니라 너인 주관도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주관적인 것만은 아닌 정의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정의의 상호주관성이다. 말하자면 내가 어떤 것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내 욕망이나 필요를 충족하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내가 확신하는 것이다. 그 경우 그러한 확신은 주관적 확신이 아니라 상호주관적 확신이 될 것이고 그러한 상호주관성은 내게 강력한 절실함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말이다.
유명한 김영삼 단식이나 김대중 단식은 당시 야당 정치지도자가 자신들이 요구하는 걸 국민 모두가 요구하고 있다고 강력히 믿고 있었던 데서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당시 모든 국민들이 정말 대통령직선제 등을 바라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중요한 것은 김영삼이 그럴 거라고 강력하게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영삼은 직선제 요구가 단순히 자신의 정치적 야망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국민이 원하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이고 온 국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무려 23일 동안 곡기를 끊고 버틸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한 상호주관적 믿음, 즉 정신-심리적 상태가 김영삼의 신체-생리적 파멸을 마지막까지 막아낼 수 있었던 게다.
이정현의 경우는 어떤가. 언론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농성현장에 헌법과 국회법에 관한 책자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게 결정적으로 그의 단식의지를 꺾어놓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는 의회주의 복원을 위해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실제 정치적 요구나 필요가 무엇인가와 상관없이 이러한 요구는 자신의 주관적 정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근데 헌법과 국회법을 읽어 보니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 내 주관적 정의는 상호주관적인 것이 아니구나. 그가 바보가 아닌 한 헌법과 국회법을 읽고도 그걸 몰랐다고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가. 그러니 이렇게 추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게다. 이대표가 자신의 정의가 상호주관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자신이 단식을 지속해야 할 명분을 스스로 상실해 버린 것이고 절실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한 마디로 맥이 팔려 그의 신체-생리적 상태는 위험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만일 그가 단식 중 헌법과 국회법을 읽지 않고 단식안내서를 읽고 실천했거나 단식전문가를 초청해 단식지도를 받으면서 농성을 했다면 어땠을까. 박근혜대통령의 심기를 지키는 것을 나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면, 아니면 그가 생각하는 의회주의적 정의를 단순히 새누리당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온 국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확신했다면 결과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는 정치인 이정현을 매우 수준 낮게 평가하는데, 이번 단식에도 그것을 재확인할 수 있어 많이 아쉬웠다. 지도자의 지도력은 다른 사람도 자신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하는 데서 나온다고 한다. 우리가 사용한 말로 하자면 지도자는 자신의 지도력이 상호주관성을 갖는다고 확신했을 때 훌륭한 지도자가 된다는 말이다. 이정현이 깜냥이나 되냐는 비아냥은 달리 나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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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생각에는 이정현대표가 헌법과 국회법 책자를 보고 의지를 꺾었다기 보단 이제 그만 하면 됐다는 박통의 오더가 내려오지 않았나 추정해봅니다
아 그리고 저희 딸이 신문에 실린 이정현 대표가 단식농성으로 인해 쓰러진 사진을 보고 하는 말이 아프면 병원부터 먼저 가야지 왜 사진부터 찍냐며 내게 물어봐서 한참 웃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