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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석가모니불 이전의 과거 불인 ⑲위빠시 부처님부터 ㉔깟싸빠 부처님까지 여섯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깨닫고 무상정등각을 성취하였다는 이야기는 「대인연경」 (D15)에 나옵니다.
연기(=조건 발생)와 연(緣=조건=paccaya)의 철학적·교리적 중요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성제의 틀을 이해하는 것과 같아서 해탈·열반으로 향하게 하는 통찰지의 토양입니다.
부처님께서 법(dhamma)이 일어나는 조건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조건들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지금·여기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각각의 적합한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법일 뿐이며 거기에는 생사윤회를 그치게 하는 자아는 없고, 또 재생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자아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는 진리를 셀라 비구니는 통찰하였기에 아라한을 성취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셀라 경」 (S5:9)에 나타난 게송을 읊조리면서 조건의 가르침을 반조해 봅니다.
“이 꼭두각시(자기 존재, atta-bhāva)는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요, 이 불쌍한 것은 남이 만든 것도 아니로다.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으며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마치 씨앗이 들판에 뿌려져서 잘 자라기 위해서는 땅의 영양분과 수분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도다. 그와 같이 무더기들[蘊]과 요소들[界]과 여섯 감각장소들[處]은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지만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무명과 갈애에 뿌리를 둔 과보의 마음[業]이 재생 연결의 과정에서 새로운 생명체의 마음에 전해져서 상속되기는 하지만 이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면 알과 새가 다른 것과 같이 거기에는 원인과 조건만이 있을 뿐이고 나라고 할 수 있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셀라 비구니는 깨달은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는 연기적 구조이고, 원인과 결과가 없는 마음은 무인無因 작용 심으로 아라한의 마음이자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연기의 길을 가는 자는 범부이고, 연기의 길을 벗어난 자는 깨달은 자, 성자라고 말합니다.
지혜가 없는 이들은, 원인의 조건에 의해 조건 지워진 마음에 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무례하게 하거나 모욕할 때 ‘듣는 의식’[耳識]은 불선의 과보 마음이 되고, 반면에 칭찬의 말을 들을 때 그 마음은 아름다운 과보의 마음이 됩니다. 오랜 세월 축적된 업의 경향성으로 듣기 때문에 괴롭거나 즐겁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눈으로 대상을 볼 때 TV화면이나 현상계에서 나타난 사물(대상), 그것도 현재의 것만을 보면서 남자나 여자, 개나 고양이, 꽃과 나무, 채소류 등으로 뭉뚱그려 봅니다. 이처럼 개념으로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면 해로운 마음 또는 유익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궁극적 진리[眞諦]의 차원에서는 대상을 봄에 있어서 사람도 동물도 다 없고 다만 조건 지워진 정신과 물질만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고 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배우자 또는 가족이 죽었을 때 슬퍼하고 비통해 하는 것은 생전의 그들에 대한 기억 또는 환영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는 작용’과 ‘보이는 대상’은 단지 조건에 의해 형성된 실재일 뿐이라는 것을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지 못하고 그 대상에서 생긴 감각적 인상에 쉽게 빠져서 그러한 괴로운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전에 나타나는 감각 대상은 ‘대상의 조건’, ‘지배하는 조건’,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으로 해로운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복합적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소리의식[耳識]은 단지 소리만 듣는 것일 뿐이고, 그 목소리는 마치 막대기로 북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듯이 조건 지워진 물질일 뿐이고 나의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님을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해야 합니다.
봄, 들음, 냄새 맡음, 맛봄, 감촉 등의 감각 의식[前 五識]은 업의 결과인 과보의 마음입니다. 이 과보의 마음은 업에 의해 생성된 감각의 토대, 즉 육근六根에서 생깁니다. 이 6근과 6처는 감각 의식 전에 일어나서 감각 의식에게 ‘먼저 생긴 의지하는 조건’이 됩니다.
24가지 상호 조건을 다 이해하고 꿰뚫어 알 수 있다면 최상입니다. 이런 최상의 지혜 영역은 부처님이나 아라한에 특유한 것입니다.
하지만 학인의 입장에서 조건법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삶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조정하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일어났습니다.
자아가 없다는 말은 연기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법(=연기법, 사성제)을 보고[聞], 체득하고 간파하여[思], 의심을 건넜다면[修] 법의 눈[法眼]이 열려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안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디가 니까야』 「대전기경」 (D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