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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태 그로인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과 변화
글,편집:묵은지
1월 21일, 47년전인 1968년 바로 오늘은 북한에서 31명의 무장 게릴라(민족보위
성 정찰국 124부대 공작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
해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던 날입니다.
바깥에 보이는 평화롭고 밝은 모습으로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보면 상상조차 못
할 일이지만 막상 그 일을 되짚어 보면 지금 생각해봐도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전
쟁의 중심에서 살고 있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40여년전의 일이라지만 대한민국의 정예군 60만 병력이 철통(?)같은 경계
를 서고있는 이 땅에 그것도 수도 서울에서 30여명의 북한군 무장 게릴라들과 총
격전을 벌이고 많은 사상자를 냈었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습니다.
지금은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사람들 기억속에 서서히 잊혀져 생각조차 할 수는
없겠지만 새삼 그때 그 날의 충격적인 상황을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고 기가 찰 일
입니다.
1968년 1월 16일 밤 10시에 황해북도 연산군에 있는 북한군 제6기지에서 차량으
로 출발한 31명의 124부대원들은 18일에 꽁꽁언 임진강 위를 걸어서 휴전선을 넘
었답니다. 나중에 투항한 김신조에 의하면 미2사단 경계지역과 한국군 경계지역
사이의 빈틈을 이용했다고 말했는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30여명의 많은 병력이 쉽
사리 철책선을 건너 이동해 왔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고양시 삼봉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20일에는 앵무봉을 지나 비봉~승가
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21일 밤에 세검정에 이르게됩니다. 북한땅 연산에
있는 부대에서 출발하여 불과 5일도 채 되지않아 험준한 산악길을 오르내리며 수
도 서울에 단 한사람의 낙오자 없이 당도한 이들의 능력도 놀랍지만 적으로부터
맥없이 뚫려버린 대한민국의 심장부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하는지요.ㅠㅠ
사실 중간에 이들이 발각되었던 적이 몇번있었습니다. 그럴때마다 군 간부 행세를
하여 위기를 넘기기도 했고 또 그 유명한 '초리골 우씨 삼형제'의 이야기는 이들의
결정적인 실수로 보입니다.
파주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나무를 채취하던 나뭇꾼 우씨 삼형제는 이들 무장
공비들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우씨 형제를 살려주게 됩
니다. 이유는 죽여서 얼어붙은 땅에 묻기가 힘들다며 살려준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목숨을 건진 우씨 삼형제는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를 하였습니다.
군부대에 무장공비 출현을 알리고 비상도 발령했습니다. 검문 검색을 실시하며 곳
곳에 군인들이 경계를 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우리 군경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버젓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인 세검정까지 당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총격장소인 자하문 초소에서 검문을 받
게됩니다.
부대원들은 자신들을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중인 특수 부대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력이동의 보고를 받지 못했던 종로경찰서장인 최규식 총경은 그들과 대치
중인 경찰초소로 달려가 그들을 막아섰습니다.
시내버스의 폭파로 공부하고 귀가중이던 청운중학교 남학생을 비롯해 2명이 사망하였다.
그들의 초소 통과를 막으며 실랑이를 하고 있을때 때마침 이곳 노선을 지나는 시
내버스가 다가오게 됩니다. 시내버스를 군 병력을 실은 출동 차량으로 오인한 게
릴라들은 경찰과 버스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총격을 가했고 수명의 민간인과 경찰
이 사망하거나 다쳤고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역시 현장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종로경찰서장 고 최규식 총경은 경무관으로 추대, 사망 장소에 동상으로 세워졌다.
그 후 흩어져 도망가는 게릴라들을 뒤쫒아 29명 사살, 1명 투항과 미확인 1명 등
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측의 피해도 컸는데, 최규식 서장과 이익수 15연대장을 비롯한 아군 25명과
민간인 7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투항한 무장공비 김신조가 사살된 동료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있다.
이로인해 이들이 거쳐온 길을 이른바 '김신조 루트'로 불리게 되었는데 양주에서 우
이동까지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약7㎞)고갯길이 민간인 통제구역이 되었다가
지난 2010년 2월에 개방되기도 했습니다.
'우이령'을 넘으려면 이곳에서 미리 신청자 확인을 거친 후에 넘게된다.
아직까지 완전한 개방은 아니고 1일 등산인 수를 양방향 각500명씩의 신청자에 한
하여 인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북악산은 트레킹 코스로 개발하여 신분증
소지자에 한한 일반에 개방되고 있습니다.
이 1.21사태로 인해서 망신살과 충격을 받은 대한민국은 국가의 법률과 제도가
바뀌는 등 내부적으로도 상당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군 복무 기간이 6개월이나 늘어나고 군에서는 부대
단위로 언제든지 출동 할 수 있는 5분 대기조를 운용하며 각종 군사훈련도 강화하
였습니다.
향토예비군 창설1968.4.1
각 부대 5분 대기조 운용
전투경찰대 창설
학도호국단
주민등록증 발급
경찰도 전투경찰대가 창설되고 군 복무 기간과 똑같이 의무복무로 하였습니다.
학교는 고교부터 대학까지'학도호국단'이라 하여 교육과정 가운데 군사훈련을 추
가하였습니다.
실미도 부대의 공군 기간병들, 공식 부대명칭은 공군 제7069부대 실미도684부대
부대를 이탈한 부대원들이 시외버스를 탈취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청와대로 달리다 대방동 도로에서 모두 자폭한다.
나중에 일이지만 결국 우리도 영화 '실미도'에서 나온 것처럼 북파 특수부대를 만
들어 운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특수부대는 부대원들의 불만으로 인한 불상사
가 일어 사회적으로도 크게 문제가 되며 부대를 해체하였습니다.
1.21 사태 당시 무장 게릴라들이 소지했던 무기류
PPSH-43 기관단총(7.62㎜)
토카레프TT-33 권총
그 밖에 F-1세열수류탄, RPG-43 대전차 수류탄, 절단기, 단검 등, 이런 무기류들 모두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귀환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박재경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송이버섯을 선물하고 있다.
일설에는 이 박재경이 1.21사태 당시 생존해 도주한 공비라는 설이 있다.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37번 국도에 묻혀있는 1.21사태 무장공비 31명 가운데 28명의 무덤. 북한군/중국군 묘지의 1묘역에 있다.
투항한 김신조가 기자회견을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