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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13. 성령강림의 은혜 2026. 5. 31.
1. 본문의 배경과 의미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지난 주일이 오순절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의 주제는 다윗이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이 된 이후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이 되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거룩해집니다.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벧 전15절ㅡ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러면 성경적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보는 시각입니다. 창33:10절. 내가(야곱) 형님의(에서) 얼굴을 뵌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십니다. 왕 하6:17절.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게하시)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게하시)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행전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어떤 경우와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이 보여 져야 하고, 볼 수 있어야 하고,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요?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이 되면, 오순절 불같은 성령의 임재가 있으면 보여 지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사다리를 보여 지고 볼 수가 있습니다.
거룩함은 열려지고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창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왕상19:12.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세미한 음성과 부르시는 음성과 그 음성에 대하여 내가 여기 있음과 듣고 순종하겠다는 고백이 됩니다. 들을 수 있고 들려 져야 하고 들어야 하는 귀가 거룩해집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이 되고, 바람 같은 성령을 듣고 세미한 음성을 들으면 됩니다. 들어야 순종이 됩니다.
거룩함은 새로워진 입술로 확인이 됩니다. 삼상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왕상3:25.(솔로몬)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마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이 되면, 불같은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입술이 달라집니다. 대언을 하고 예언을 말하고 이상을 말합니다. 말한 것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열매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요엘은 욜2;28-32절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이라는 헬라어는 50이라는 뜻입니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에 유월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축제기간 중 첫 이삭을 드린 다음날부터 계산하여 칠 주(49일) 후 50일째 되는 날인데, 칠칠절이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장막절, 혹은 초막절은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이고 오순절은 가나안 땅에서 처음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은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 하지만, 오순절은 신약시대의 교회의 시작이며 새로운 의미인데, 시기는 구약 절기의 오순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시작을 합니다. 왜요? 추수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추수의 절기에 성령이 강림하셨을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하신 날로부터 오십일 째 되는 날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고전15;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은 부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열매이었는데50일째 되는 날 오순절 성령 강림이 영적인 큰 추수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그 부활이 나의 부활로 적용되기 때문에 성령의 강림을 기념합니다. 그러면 성령 강림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1-1.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1절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다 한 곳에 모였는데, 모인 이유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부탁입니다. 더불어 주님께서 약속하시기를 1;5,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모인 사람들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령강림을 기다렸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다 같이 라는 말은 꼭 같이, 한 마음으로, 같은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은 1;14,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곳입니다. 여기서 교회 론이 나옵니다. 다 함께 모이는 것은 교회의 원리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다 주님의 지체입니다.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지체는 더불어 있을 때에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됩니다. 여러 부분의 지체가 있습니다. 눈, 코, 귀, 입과 손과 발 역시 제 위치에서 제 위치를 지키며 할 일들을 제대로 할 때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체의 위치와 기능은 서로 의존하며, 보완하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체들의 위치의 이탈과 움직임이 없을 때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한 지체의 아픔을 온 몸이 느끼게 됩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한 지체들의 모임이며 지체의 연합입니다. 그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지체가 없습니다. 각기 고유한 역할분담이 있습니다. 교회와 모이는 지체는 미움과 원망과 불평이 아니고 한마음이어야 합니다. 서로간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목적하는 바의 가치관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래서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명령의 내용은 일치하는 공감대와 가치관입니다. 다 같이 같은 마음으로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비전교회는 어떻습니까? 시끄럽지요? 생각이 다르지요? 공감대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지요? 하지만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각 나라와 각 급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공감대와 가치관이 같았습니다. 바로 이때에 약속대로 이 사람들 위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1-2.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는데 여기에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2-4,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 강림의 세 가지 징표인 바람과 불과 방언이 나타났습니다.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나팔소리와 공기의 흐름과 같이 강하게 요동을 쳤습니다. 마가의 다락 방, 온 집에 가득했으며, 같은 공감대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들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결 같이 소리로 듣고 느꼈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불의 혀는 불꽃인데 실제로 타는 모습입니다. 불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죄악을 소멸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이는 선지자 요엘의 예언(욜2:28-32)과 예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에게만 한정되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무리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여기서 각 사람 위에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다는 것은 그들이 다 같이, 한 마음과 한 목적을 가지고 모였을 때에 각 사람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여러분,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따라서 각각 분량을 다르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이후에 종들과 회계할 때, 숫자를 가지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성실함과 충성됨을 가치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성령의 은사도 이와 같습니다. 일률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것은 주님의 약속과 명령에 대하여 얼마나 간절함이 있고, 얼마나 성실하고, 얼마나 충성되는가에 따라 주어지는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은 한 결 같이 여기에 하나이었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 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1-3.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4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다, 모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주를 믿는 120명의 무리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은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미 거하시는 성령(롬8:9; 고전12:3)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신앙의 삶입니다. 빈항아리에 공간적으로 채워지고, 들어오는 것을 뛰어넘어 모인 사람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의 지시대로 행동을 합니다. 4절,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들은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배우지 않았던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을 했고, 그들 앞에 모여든 각 족속들의 방언으로 구사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이상한 언어를 제자들의 입에 넣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고,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을 주님께서 원하셨던 방법으로 역사 하셨습니다. 새로운 입술이 되었고 선포하는 것마다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고 얼마나 사모하던 은혜입니까? 요엘이 예언했던 사모함입니다. 생각지도 못했고, 경험되지 않았던 은혜입니다. 그래서 7-8, 다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여러 지방에서 모여 온 사람들은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였고, 다 놀라 기이히 여겼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놀랍고 기대하게 합니다. 감동하게 합니다. 사람이 달라지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달라지고 말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생각 밖의 일들이 일어나니까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에게 성령의 임재는 모든 순간의 용기와 능력의 원천입니다. 1;8절의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셨을 때 권능을 받았습니다, 행4;31, 산헤드린에서의 베드로의 용기와 설교의 말씀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행13;8-12, 구브로에서 무당 엘루마를 소경이 되게 한 바울의 승리는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사태에 대처하는 신앙인의 용기와 능력과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투지와 이해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담대함과 주위 환경과는 관계없이 신앙인이 갖는 기쁨과 소망은 모두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역사가 광야를 지나 약속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까지 인도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오순절에 그의 백성 가운데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그들의 하나님과 구주가 되심을 선언하셨으며, 그들에게 믿고 행할 바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영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이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님께서 강림하셨는데,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인도하시고 조명하시고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그러면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19-20. 기사와 징조, 그리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요엘서의 이적을 기사와 징조로 재해석하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로 재해석했습니다. 기사와 징조는 하나님께서 임박한 심판을 알려주기 위해서 베풀어주시는 현상의 변화입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마24장에 말세의 징후들이 있는데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성령 강림이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것이 지금입니다. 성령은 모든 육체에 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편만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또한 고난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 재림이 있기 전에 환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계시록의 천년과도 같습니다. 말세의 기간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기간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을 결정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하지만 이 기간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말세의 기간에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요14:26절과 29절을 기억하시지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지금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설명하는데 무엇이라고 합니까? 과연 그렇다고, 예언되어진 말씀의 성취라고 합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베드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잘났거나 무슨 공로나 함께 모여서 기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말씀의 성취입니다.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소낙비처럼 부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 그 말씀이 임했으니 너희들에게도 성령이 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언의 성취이고, 성령의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충만하게 나타납니다. 언제요? 지금 살고 있는 말세의 기간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무엇에 기초합니까? 말씀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담대함의 원천이며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성령의 시대입니다. 모든 육체가 성령을 소낙비로 충만하게 받습니다. 하지만 환난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강림은 삶의 평안함과 바뀐 환경의 시온의 대로만이 아니고 고난도 있는데 그런 고난 가운데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내주 하시는 성령께서 말씀과 예수님이 생각나도록 도우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생각의 변화와 삶의 변화와 말씀에 대한 시각의 변화가 있고 깨닫지 못하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데 이것이 성령 강림의 참된 의미입니다.
3.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믿음에 대한 태도입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태도는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긍정gain 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낙관 joy 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종말 end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입니다. 성령의 강림은 구원의 역사에서 최대의 전환점이며,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령강림으로 성령의 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居住란 말은 장소를 떠나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잠시나 잠깐이 아닌 영원히 함께 거주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강림이후에 충만을 왜 말씀할까요? 3가지 믿음의 태도 때문입니다. 태도가 무엇입니까?
3-1. 성령 충만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태도는 주님 안에서의 긍정입니다, gain oriented person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언제나 gain을 생각했습니다. 궁핍, 핍박, 어떤 환경에서도 얻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얻을 참 믿음을 생각했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 얻은 참 소망을 생각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더 큰고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합니다. 허상이 아닌 진실을 얻고, 명예는 떠나도 겸손을 얻습니다. 성령에 충만하지 않으면 항상 피해 의식이 있습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과 사람에게서 피해를 찾습니다. 태어난 것도 피해, 죽는 것도 피해, 가난과 실패와 질병과 헤어지는, 모든 사건과 일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부당한 대우와 대접을 받으면 마음에 담아 다음번에 두고 보자고 합니다. 여러분, 화가 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불평가운데 있으면 더 나을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자세입니다. 성령의 충만이 긍정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악의 모습을 보고도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을?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비난하면서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비난은 교만이고, 배움은 겸손입니다. 이런 영적인 혜안이 어디서 나올까요? 성령의 충만 입니다. 충만해야 영적인 혜안이 있습니다. 보게 하고 보여 지고, 생각하고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3-2. 두 번째는 주님 안에서 낙관입니다. joy oriented person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소망을 둡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 안에서도 항상 기뻐했습니다.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에도 10번 넘게 기뻐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절대 기쁨입니다. 절대 기쁨이 어디서 나오나요? 바닥 체험에서부터 나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핍박자이며 폭행자이었던 바울을 부활의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지금 바울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닥체험에서 받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억울함과 분노와 원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베드로도 모든 것이 감사와 기쁨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자신을 더 낮게 여깁니다. 죄인 중의 괴수이며 만삭되지 못하여 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인식이 있는 사람에게 비난과 공격은 의미가 없습니다. 죄인보고 죄인이라는 표현에 기분이 상하지 않고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죄인이라는 고백은 바닥까지 떨어진 존재인데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이 있다는 고백은 절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뿌리가 됩니다. 어떻게 되면요?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3-3. 종말의 승리입니다. end oriented person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사람은 최종 승리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에서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선을 행합니다. 순리와 역경과 핍박과 환난도 다 하나님이 콘트롤하신다고 생각하고, 콘트롤 하시기 때문에 결국 끝은 해피엔딩입니다. 하나님께 맡긴 인생은 end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맡긴 인생의 반댓 말이 무엇입니까? 맡긴 인생의 반대말은 자기 수고에 연연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나에게 있는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가끔씩 절망을 합니다. 뜻대로 안되면 억울해 하고 몰라준다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이루지만 자기 수고에 연연하는 사람은 오래 못갑니다. up and down이 심하기 때문에 꾸준하지 않습니다. 성실성이 없고 신실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래 가고 싶고 성실하시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수고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의 원천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막막한 상황에서 나오는 용기의 원천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용서해주시고 용납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앞이 안 보이는 적막함 속에서도 한발을 내 디딜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성령입니다. 환상과 음성과 말씀으로 조명해 주시고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충성하고 맡겨진 삶의 걸음을 계속 걸으면 최종 승리합니다. 주를 온전히 쫓으면 승리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믿음이며 인생인데 모든 분들이 이렇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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