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진정한 의미”
‘왜 내나라 내땅에서 이등국민 대접받는가?’
걸핏하면 ‘오해다’ 하고 오해타령 하는 사람 있더라. 그런데 실제로 역사상의 많은 위대한 장면들은 순전히 오해에 의해 일어나곤 했다.
오해의 힘! 위대하다.
미국 독립전쟁이 그 예다. 전쟁발발 이틀 전에 영국은 미국측의 요구에 응하여 문제의 법률을 파기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독립전쟁을 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 영국과 미국 사이에는 직통전화가 없었다.
2년 후 전쟁이 끝난 다음에야 문제의 법률이 파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런데 정작 종전후 파리조약에서는 문제의 법률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전쟁의 발발원인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도무지 왜 전쟁을 했을까?
본질은 따로 있다. 당시 식민지인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인권을 중시하는’ 영국의 간섭을 피하여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인디언의 땅을 빼앗는데 있었다. 미국인다운 사악한 탐욕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영국이 인디언 보호구역을 폭넓게 설정하여 개척민의 중서부 진출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진짜는 아니다.
미국인들은 ‘보스턴 차 사건’ 따위를 이유로 들고 있으나 그것은 표면의 구실에 불과하다. ‘대표없는 곳에 과세없다’는 패트릭 헨리의 멋진 구호 역시 나중 전기작가가 증언자의 희미한 기억을 참고하여 지어낸 말일 뿐이다.
세금문제나 대표문제, 노예문제, 인디언 문제는 대화와 협상으로 충분히 해결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이 아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의 터키 침공을 배경으로 한 영화 갈리폴리를 참고하기로 하자. 영국군의 갈리폴리 상륙을 위하여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총알받이로 희생되는 장면이 묘사된다.
주인공은 폼 나는 기병으로 입대했으나 말 한 번 못타보고 심지어 총알도 없는 총을 들고 터키군의 기관총을 항한 허무한 돌격을 강요받게 된다. 참호밖으로 1미터도 전진해보지 못하고 쓰러져 간다.
총알받이. 그것은 영국인이 호주인을 보는 눈이다. 19세기초 영국인이 미국인을 보는 눈도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만약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았다면 역시 갈리폴리 해안에서 총알받이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본질이다. 본질은 숨어 있다. 그것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며 뚜렷한 근거도 없다. 그것은 역사의 경험칙이며, 한편으로 모두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본능적인 몸부림이다.
결론적으로 독립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미국의 생산력이 영국의 생산력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다. 비교우위에 도달한 즉 미국이 갑이 되었고 영국이 을이 되었기 때문이다. 복종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말이다.
겉으로는 영국이 병참법을 만들어서 인디언 보호구역을 관리하는데 그 비용 일부를 미국인에게 세금으로 부담시키려 했다는 따위 시시한 것이 되지만 그런 것은 전부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진짜 이유는? 미국인은 그런 문제로 영국과 대화할 의지가 없었던 거다. 멋지게 주먹 한 방으로 해결해도 되는데 왜 귀찮게 시시콜콜 말로 해결한다는 말인가?
영국인들은 ‘오해다. 너희가 반대하면 인디언 보호세는 걷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지만 미국인들은 그런 걸로 영국인과 대화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짜증이 났다.
실제로 영국은 식민지인의 항의를 받아들여 인지세법 등 자질구레한 법률을 철폐하고 요구조건을 여러차례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매사에 오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불평분자들에 의해 끝없이 새로운 오해들이 생산되곤 했다.
한편으로 대다수 식민지인은 본국과의 그런 갈등에 무관심했다. 당시 식민지인의 70프로는 여왕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갈등은 트집잡기 좋아하는 극소수 선동가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요한건 역사의 방향성이다. 한 번 전쟁이 발발하자 6천여명에 불과했던 미국군대는 삽시간에 50만명으로 불어났다. 눈덥힌 계곡에서 영국군에게 포위되어 다 얼어죽은줄 알았던 워싱턴 군대가 눈 녹은 봄에 살아서 돌아오자 하루아침에 모두 독립찬성으로 돌아선 것이다.
얼마전 도무지 대화가 안 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강론게시판-대화의 성공과 실패(4월 30일)] 이명박 정권은 참 지독하게 소통 안 되는 정권이다. ‘오해다. 불만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세.’를 반복하는 영국정부 같다.
촛불의 본질은 무엇일까? 생산력에 있어서의 비교우위다. 도무지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이지? 이것이 본질이다. 혁명이 왜 일어나는가? 대중의 생산력이 귀족의 생산력보다 더 높아진 것이 본질적 원인이다.
여기서 생산력이 산업생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적 생산력도 있다. 문화적 생산력도 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대중이 더 많은 문화와 지식과 가치를 생산하는 수가 있다.
자식이 참고서를 사려고 한다. 학생이 ‘표준전과’를 사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동아전과’를 사라고 한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이지?
아버지의 입장 - ‘그 돈, 누구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지?’
자식의 입장 - ‘그 공부, 누가 하는 공부이죠?’
도무지 대화가 안 되는 것이다. 음식 문제라면 더욱 민감하다. 땅에 떨어진 음식도 주워먹을 사람이 있다. ‘까짓거 흙 묻은건 털어버리면 돼. 영양가만 많어. 맛도 좋아.’ 이런 자와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물론 그 사람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흙은 털어버리면 된다. 위생이 걱정되면 씻으면 된다. 그러나 말이다. 버려진거 주워먹을 사람으로 되어버리면 인생 자체가 버려지고 만다. 땅거지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건 자기파괴 행위다.
625를 체험한 기성세대들은 그런거 모른다. 굶주리고 살았던 세대, 보릿고개를 넘어온 세대는 그런거 모른다. 땅거지면 어때? 도무지 대화가 안 통한다.
광우병 쇠고기 알려진 만큼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위험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왜 우리가 고민해야 하지? 미국의 문제를 두고 왜 영국정부와 대화를 해야 하지? 내가 쓸 참고서를 왜 아버지가 고르지?
과거 공업용 유지 파동으로 삼양라면이 한 방에 맛이 간 예가 있다. 이와 유사한 예는 무수히 많다. 쇳가루 파동으로 녹즙기 시장이 한 방에 붕괴되기도 했다. 이영애 황토팩 사건도 비슷하다.
공업용 유지 알고보니 인체에 무해하더라? 쇳가루 녹즙기 알고보니 쇳가루에서 나온 철분이 건강에 유익하더라? 황토팩 쇳가루 알고보니 원래 황토의 주성분이더라? 공업용 빙초산 식초대용으로 써도 인체에 무해하더라? MSG 인체에 유해하다는 증거 아직 불확실 하더라? 방사능 처리한 곡물 인체에 해롭다는 증거 아직 없더라? 장난하나? 이건 철학의 문제다. 품격의 문제다.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대접하는가의 문제다. 본질로 돌아가자. 이명박은 을이고 한국인은 갑이다. 왜? 한국인이 주권을 가지고 이명박을 대표머슴으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슴이 자기가 주인인양 착각하더라.
머슴이 주인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도장찍고 왔더라.
쇠고기 문제는 결국 이명박 정권이 한국인을 뭣으로 대접한 것이다. 우리는 내나라 내땅에서 이등국민 대접을 받았다. 이게 본질이다.
미국과 영국의 협상에서 영국이 아무리 신사적으로 나온다 해도, 미국측의 요구조건을 전부 다 들어준다 해도, 결국 식민지인은 이등국민이 될 수 밖에 없다. 증거 대라고? 증거 필요없다. 본능적으로 안다.
실제로 미국은 싸워서 독립한 덕분에 호주군, 뉴질랜드군과 달리 25만 영국군이 터키군의 기관총밥이 된 갈리폴리에서 총알받이 신세가 되지는 않았다.
중요한건 현재 한국인 대다수는 미국 쇠고기 먹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값이 비싸서? 영양가가 없어서? 맛이 없어서? 광우병이 무서워서? 아니다. 재수가 없어서다.
재수가 없어서 안 먹는다. 이것이 정답이다.
이는 자존심의 문제, 품격의 문제, 존엄성의 문제다. 한국인은 그것을 선택했다. 품격을 선택했고, 긍지를 선택했고, 자존심을 선택했다. 더 나은 대접을 받기를 원했다. 위정자는 그러한 국민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http://gujor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