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원_ 자두
바람의 노래(외 9편)
황연진
나는 늙지 않는 바람이에요
마흔 아홉 번째 지구를 통과하고 있죠
온몸에 먼지들이 풀썩거려요
땅 속 오래된 오줌보에 갇혔다가
공중으로 치솟은
삭은 오줌처럼 푸시식 푸시식
웃는 소리 들으셨나요?
더 이상 나를 조일 근육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수많은 균사들이 세상에
퍼뜨려지죠
나는 절대 감염되지 않고 균을 퍼뜨려요
왜냐하면 나는 이미 죽었고 치유되었고
마지막으로 죽었으니까요
아름답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이 세상 첨탑들을 쓰다듬으며 걸어가는 일이
얼마나 한없는 일인지
멈춘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나 때로 부풀어 오르는
이, 이, 이스트 먹은
내 볼따구니, 찬란하지요?
사랑은 길길이 얽혀 휘몰아치다가
한 터럭도 가지지 않고 풀어지는 것
아직 서로 부딪쳐 번개 칠 시간
남아있나요
지우개
내게서 숫자가 넘쳐
산을 이루려 할 때
조금씩 지우기 시작했어요
삐죽삐죽한 수(數)들이
입으로 코로 귓구멍으로
기어 나오는 것은
조금 불쾌하고 조금 부끄러운
그런 일이었지요
수채화의 밑그림을 지울 때와는
색다른 느낌이에요
세상엔 애써 심지 않아도
생식하는 그런 무리들이 있어요
언젠가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낯짝을 들이대며 숨을
훅 내끼치는 거죠
그래요, 그들과 그들이 아닌 것의
경계도 흐릿하고
나는 지워야 할 것과 지우지 않아야 할 것들 사이
군데군데 고민한 흔적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요
숫자들이 어느 한 순간
요철을 다 떼버리고 미끌한 뱀 혀를
놀릴지 알 수 없어요
조심해서 문질러야 해요 스윽
독이 번질지도 모르니까요
풀밭에서 어두워지다
동에서 서로 햇빛이 곧장 넘어가던가요
아니면 흔들흔들 좌우로 출렁이던가요
제 말은, 허리께로 자라 있던 그 풀들 말이에요
햇빛이 풀을 감싸 안고 함께 흐르던가,
풀을 바라보며 혼자 가던가 그 말이에요
당신이 풀밭에 들어 아아아아, 숲이 흔들린다!
그랬거든요. 망초꽃들이 향기도 뿌리지 않고
저들 마음대로 멋대로 춤추고 있던가요
당신은 우쭐대는 햇빛과 풀들 속에서
어찌할지 망설이고 있더란 말이에요
아무래도 빛과 풀들 사이엔 어떤 신호라도 있었나 보죠
무더기무더기 빙빙 돌아 나가기로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밀어가 있었나 보죠
그래서 수풀 속에 당신의 몸은 한꺼번에 빛나기도 하고
금세 어두워지기도 하면서 흘러가지 못해
발이 묶였던 거죠, 돌아올 수 없는 망부석처럼
기울어가는 햇빛을 바라보고만 있더라니까요
나이 들어가는 딸에게
열차 타고 벚꽃 구경 가자는 말이냐
아서라, 이제 나이 드니 먼 길이 싫다
그러께 겨울 대구 네 이모 집 갈 때
끝도 없이 내리는 흰 눈을 보지 않았더냐
저 눈밭이 언제 끝날꼬,
밤새 속이 시려 혼났느니라
지난 가을 설악산에 다녀올 때도
웬 색색의 낙엽들이 그리 천지에 피었다 깔리는지
불그락 푸르락 세상 울음이 언제 다 그칠꼬,
나는 맘이 섧더라
너희들하고 제주도 여행 갔을 땐
돌아가도 돌아가도 시퍼런 바닷물이 밀려오지 않더냐?
어예 건너지도 못할 이승의 물이 저리 많은고 싶어
나는 눈물 났었다
네 말대로 진해 벚꽃은 속으로 밖으로
제 하얀 살송이를 벌려 얼마나 자지러지게 웃고 있겠느냐?
그 환한 낯 보고 일일이 미소 지어 주기 버거워
가슴은 또 얼마나 애잔해지겠느냐,
너는 아직도 젊은가 보다
피고 지고 끝 간 데 없이 흐르는 것들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힘에 겨운지
저 아파트 현관 앞에 꽃피는 복숭아나무를
에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본다
터지는 꽃망울들 새록새록 흐린 눈으로 익히기에는
한 그루 뜰의 꽃나무도 벅차기만 하구나
당단풍
작년 봄 당단풍 한 그루를 샀다
연녹색 잎들이 허공에 울리고 있었지만
가을 겨울이 지나도록 뿌리는
엉거주춤 화분 흙 위에 구부러져 있었다
베란다를 열면 까칠한 눈썹이 떨리곤 했다
나는 짐을 여러 번 쌌다 풀었다
저녁으로 밤으로 나가서 낙엽과도 자고
빗줄기를 끌어안고 흰 눈과 긴 입 맞추기도 했다
가방에 옷을 넣고 세면도구와 문서와 화장품들을
넣었다가 뺐다가 도로 간추리면서
날이 풀리면
날이 풀리면 하며 창밖을 보았다
다시 봄이 다가온 저녁
감기약에 취해 멍하니 바라 본 베란다에
시퍼런 당단풍 한 그루 날 쏘아보고 있다
아주 팔짱을 끼고 앉아 싱싱한 잎들을 펼쳐놓고 있다
내가 창으로 새어 나갈 때마다
그는 잎을 하나씩 가슴에 매달았었나 보다
싸다 만 짐을 추리며
나는 당장 어디로 빠져나갈지 두리번거린다
사람의 수
세 사람 누워 자던 여행지 숙소
멍하니 새벽에 깨어 앉는다
사람 수가 줄었나? 하나, 둘, 세다 창밖을 보니
하늘에 달이 넘어간 자리 비었다
발소리
포장된 산책로가 걸음을 흡수한다
강물도 숨소리를 죽이고 있다
반짝이는 강물소리 듣고 싶어
길 밖으로 벗어나본다, 금세
발밑이 버적거린다
발 높이 쳐들고
보폭 좁혀 거칠게 모래 밟는다
걸음이 더디어지고 무릎에 하중이 간다
어딘가에서
내 몸 후련하게 땅으로 쏟아지는 소리 들린다
강물이 빛을 깨물며 숨 터트린다
흙 입자들이 제 식으로 날 해석한 소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날 채웠다가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난다
강물도 흙 위를 떠 흐르고 싶진 않을 것이다
숨차도록 흙바닥 꼭꼭 밟아
스스로 냇바닥이 되었다가 골짝이 되고
돌부리가 되었다 무수한 소리로
부서져 내리는 것 아닐까
모래흙이 나를 디디고
강의 발자국들 끝없이 빛나고 있다
어느 새의 장례
한 그루 나무 아래가 적요하여
다가가보니, 까치 한 마리
또 다른 까치의 몸을 쪼아 먹다 날아오른다
둥지로 돌아가지 못한 어린 까치가
밤사이에 얼어 죽었던 걸까
작은 깃과 날개 사이엔 붉은 속살이 드러나 있다
사랑하던 사람이 죽으면 더러 원시인들은
슬퍼하며 그 몸을 먹기도 하였다는데,
동료에게 파 먹히는 것이 어쩌면
가장 깨끗하게 스러지는 방법 아닐까 싶게
죽은 까치의 몸은 부스러진 살점 하나 없이 정갈하다
가능하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뜯어 먹혀서
이 세상에 흔적 없어지는 일이 가장
완전한 죽음일지도 모르겠다
― 죽음과 사랑은 다 같은 야만이므로
까악 깍, 깍, 까치 한 마리 공중을 맴돌며
우짖어대고, 혹 방해가 되었을까봐
서둘러서 나는 그 자리 벗어나온다
씨앗과 새
어디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는 굳은 씨 하나
귀로 입고
코로 입고
혀로 입고
눈으로 입은
겹겹의 살을
어디에 다 벗어버린 걸까
콕콕콕 쪼아보니
부리 끝이 시큰해진다
모르겠다, 꽃들은 그 구멍 어디로부터 발화하는지
달콤한 지구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건물들 사이로 차량이 질주하고
도시가 앓는 소리를 낸다
아프지 않은 과육은 더디게 숙성한다고
농익은 불빛들이 말한다
달리면서 상처를 내지 않는 건 없다
종잡을 수 없는 발자국들이
보도블록에 찍힌다
줄지어 다가오는 가로등과 신호등
불빛에서 불빛으로 이어지는
뜨거운 순례,
숨 막히는 통증이 불을 켠다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다고
벌레 먹은 사과 속이 물크러지듯
골밑을 덮어 흐르다 시득시득
웃음을 베어 무는 강,
사람이 만들어내는 상처가 너무 향기로워서
지구는 빛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숨이 차올라
불빛들은 소리 지른다
벌레들이 어두운 살 속을 통과하고 있다
- 시집 『달콤한 지구』(지혜, 2012)
* 황연진 : 1960년 서울 출생. 덕성여대 영문과 졸업. 2008년 『우리詩』로 등단.
첫댓글 선생님, 한 알의 자두가 그 투명하고 달콤한 액즙을 얻으려면, 얼마나 오랜 땀과 빛과 비와 슬픔을 숙성시켜야 할까요? 아직 미숙한 시편들을 등 두들기며 격려해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뜨겁게 달구어진 쇠 난로 투명 속을 통과하고 싶은 詩......겠지요. 죽음 이후에도 써야 할.......잘 읽었습니다. 거듭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구요, 좋은 작품 많이 빚으시기 바랍니다.
자두와 달콤한 지구~~~ 참 잘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소박한 정원시인님~~~ 자주 들러주세요!
숲 시인 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시편이 모두 울림이 깊네요. 아직도 가슴 한 편이 찡합니다. 잘 읽었어요. 그리고 시집을 냈나본데,..축하해요. ^^
선생님,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 곳으로 다시 보내드렸습니다. 늦게 전해드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