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뿌리 / 문정희 |
뿌리와 가지 / 오규원 잡목림은 뒤를 숨긴다 그러나 새들은 뒤에서도 솟아오른다 잡목림을 돌아가면 전씨의 밭에 팥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맑은 날에는 팥배나무의 허리까지 먼 하늘이 내려와 걸리고 흐린 날에는 물론 흐린 날이 엉긴다 팥배나무는 밭의 둑 밑에 엄청난 뿌리를 숨겨두고 있다 그 주변을 열매가 가득 달린 들찔레와 망개의 넝쿨이 덮고 있다 새들도 자주 즐겁게 들찔레와 망개의 가지 사이에 몸을 밀어넣고 스스로 넝쿨이 된다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출생 2007년 별세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 ,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1 ·2 등이 있으며 시선집 『한 잎의 여자』,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 |
뿌리 / 천수호 뒤집혀 바둥거리는 꽃게를 쉬이 만지진 못했다 턱턱 갈라진 배마디가 섬뜩했던 까닭은 아니다 금방이라도 아기가 나올 것 같던 만삭인 내 뱃집 기슭 갈기갈기 뻗친 뿌리가 생각났던 거다 부풀은 배에 처음 뿌리가 뻗었을 때 내 몸 옥죄는 넝쿨인 줄 알았다 아이가 자랄수록 터진 실금에서 찐득찐득한 어미냄새 흘러나왔다 뼛속까지 파고든 실뿌리가 아이를 집요하게 움켜쥐었던 것 동굴의 석순으로 굳어져 연애도 못할 어미로 만든 것 내가 쉬이 엎드리지 못 함은 이미 내 몸 어디쯤 가지가 뻗었기 때문일 게다 접고 꺾는 무르팍이 없는 가지의 마음이 하늘 쪽으로 뻗어가 열매를 위해 두 손 다 들어주는 것이다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명지대 박사과정 수료. 2003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
집들의 뿌리 / 길상호 어디로 이어졌는지 아직 다 걸어보지 못한 골목들은 거기 감자처럼 달려 있는 집의 뿌리였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골목은 기쁨과 슬픔을 실어 나르던 체관과 물관이었다 다 허물어져 알아볼 수도 없는 이 집에 들어 대문을 열고 드나들었을 사람들 떠올려보면 지금은 떨어져 버린 기쁨과 슬픔의 열매가 보인다 막 화단에 싹틔운 앵두나무에는 나무를 심으며 앵두꽃보다 먼저 환하게 피었을 그 얼굴이 있다 마루에 앉아 부채질로 하루를 식히다가 발견한 그 붉은 첫 열매는 첫입맞춤의 맛이었을까 그러나 저기 마루 밑에 버려진 세금고지서 뭉치, 대문에 꽂힌 저 종잇장을 들고 앉아 있는 그의 얼굴에는 누렇게 변색된 나뭇잎 하나 걸려 있다 체납액이 커질수록 가뭄처럼 말라가던 가슴은 지금도 금 간 흔적을 지우지 못하리라 어쩌자고 골목은 나를 빨아들여 사람도 없는 이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오래도록 먼지와 함께 마루에 앉아 있으면 내가 드나들던 집에 나는 기쁨이었는지 슬픔이었는지 물기 잃은 잎처럼 시들해진다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재학. 청림문학 동인.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오동나무안에 잠들다 』『 모르는척』 |
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 / 강미정 봄비를 받아내고 있는 작은 제비꽃의 흔들림은 꽃을 들여다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던 당신의 등처럼 외롭고 넓다는 것, 그러므로 꽃피어 흔들리는 세상 모든 꽃은 흔들리지 않으려고 땅을 움켜쥔 고단한 뿌리의 일그러진 얼굴이라는 것, 그러나 흔들림이여, 제 필생이 가진 파란만장의 중심을 꿰뚫고 흔들어야 흔들림이라 이름 붙일 수 있지 않겠는가 작은 제비꽃 한 포기가 필생을 흔들어 세상의 침묵 위에 얹어놓는 저 파열하는 자주빛 몸부림도 고단한 뿌리가 가졌던 일그러진 얼굴이었음을 뿌리가 더듬고 나간 그 처음의 길에서 모든 흔들림은 오직 제가 가진 경계의 폭으로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제 필생을 흔들어 깨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흔들리는 모든 꽃은 뿌리에게로 간다 맨 처음에게로 간다 경남 김해 출생 94년 《시문학 》으로 등단 시집으로 『타오르는 생 』『물 속 마을 』 『'그 사이에 대해서 생각할 때 』『 상처가 스민다는 것』등 민족문학작가회 회원 부산시인협회 회원 시문학시인회 회원 현재 <월요시> 동인으로 활동 |
뜨거운 뿌리 / 이성목 식당주인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국수를 풀어 넣는다. 솥바닥의 푸른 김이 천장까지 확 끼친다. 양파는 가늘고 긴 뿌리를 뽑아 내린다. 유리잔에 양파의 입김이 뿌옇게 서려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국수가닥을 건져 올리던 한 노년이 희뿌연 안경을 벗어놓고 잠시 자신의 가늘고 긴 숨을 끊어 뜨거운 국물 속에 내려놓는다. 나이 어린 손자는 후루룩 후루룩 그 뜨거운 소리를 먹는다. 땀을 닦고, 눈물을 훔친다. 세상의 모든, 푸른 것을 밀어 올리는 뿌리는 이렇듯 뜨거운 바닥에 맨발로 서는 것이다. 그렇지. 이제 필생의 뿌리를 나도 내려야겠다. 당신과 함께 칼국수를 먹는 속이 훅 달아오른다. 뜨거움이 온 몸에 퍼진다. 경북 선산 출생 1996년 《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남자를 주겠다 』등 |
별의 뿌리들 / 박현솔 지하철 4호선 동대문 역에서 충무로 역 사이, 전철이 오랫동안 정차하고 있다 신호에 문제가 생겼다는 안내방송이 흐르고 어둠 속에 덩그러니 앉아 나는 이런 상상을 한다 내가 지금 소멸된다면, 다시 지상에 돌아갈 수 없다면 누구에게 안부를 물을 것인가, 순간 뇌리를 스치는 별똥별 같은 얼굴들 그들에게서 나는 너무 멀리 빗겨온 운석이었다 캄캄한 우주에 흩어지는 별들보다 내 영혼이 불안하다 한때 내가 세상에 뜨겁게 존재했었다는 흔적 세상의 건너편으로 가져갈 수 없는 안부를 묻기 위해 오랫동안 소통되지 않는 그리움에게 전화를 건다 내 게으름으로 말라죽은 베고니아 화분에게, 오랜 욕창을 앓아 힘들어하는 침대에게, 늘 나를 주시하는 절망의 총구에게 전화를 건다 나는 한 번도 맵찬 바람에 펄럭여본 적 없다고 누군가 벗어버린 허물 속에 들어가 나른하게 살았다고 자꾸만 망설여지는 전화를 건다 전화 속으로 행성들이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고 세상에서의 내 마지막 안부를 소인도 없이 지상으로, 지상으로 올려보낸다 지하의 음습한 어둠 속에 빽빽이 앉은 사람들 누군가 오래 참은 기지개를 켠다 어둠 속에서 부풀어오르던 내 상상의 뿌리들, 지그시 한쪽 귀를 세운다 덜컹, 멈춰 있던 전철이 다시 가뿐 숨을 고른다 아무 일도 없었던 시간 속으로 내가 빨려든다 제주 출생 본명 박미경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2001년 《 현대시》신인상 수상 2005년 한국문예진흥기금 수혜 시집 『달의 영토 』 |
뿌리의 안부 / 김나영
시들시들한 오줌줄기 같은 연락이 왔다
죙일 집에만 틀니처럼 박혀 계시다는 아버지
하루 한 번 텃밭에 물 뿌리러 갈 때만 외출 하신다는데
요즘 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데
몇 번 독한 약 뿌렸는데 통 약발이 받질 않는단다
지난 번 통화 땐 열무씨 배추씨
실한 놈으로 사서 부치라고 하셨는데
팔십 평생 한 밭에서 수확한 소출들
씨앗 팡팡 멀리 퍼트리는 힘으로
제 뿌리 죽죽 내리고들 살고 있으니
니들은 네 아버지가 일궈놓은 다모작 아니냐,
울궈 먹어도 몇 번이나 울궈 먹은 게냐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인제 그 뿌리 부실해질 떄도 되았지
인제 갈 시간 되았지
내 염려에 무게를 보태 얹는 어머니
기저귀 갈 시간이라고 그만 전화를 끊자신다
링거 선을 타고 전해온 뿌리의 안부에
잊고 있었던 요의가 탱탱하게 쳐들어온다
1961년 경북 영천출생. 1998년《예술세계》로 등단.
2005년,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받음.
시집 『왼손의 쓸모』, 『수작』.
〈다층〉동인,
뿌리에게 /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태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먼우물:먹을 수 있는 우물물.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시론집『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반통의 물』 등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 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1962년 대전 출생
고려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등단
시집 『비단길』『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있다』등
1995년 제1회 현대시동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