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선의지는 무척 중요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선의지만으로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한계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선의지는 주관적이어서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선의지는 그 선한 동기만을 고려하지만, 행위의 결과를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구성 및 내용:
우리는 주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예를 들면, 지하철 설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고 자신은 달려오는 열차에 치어 죽은 사람이나, 여름철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자신은 결국 물에서 나오지 못하고 익사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그것이다. 이런 행위들은 선한 동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움을 준다는 것을 쉽게 결단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하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의 선입견을 흔들리게 하는 일들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런 일은 참 고마운 일이며,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을 선한 의지, 동기에 의해서만 그 행위가 판단되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자신을 희생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죽음이란 것 때문에 결코 옳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결과를 배제하고, 선한 동기에 의해 행위가 판단되는 것은 진정 옳은 것일까?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어떠한 기준에 의해 평가 받는 것일까? 칸트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에 있어서 그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그 행위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오로지 그 행위 배후의 의도들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고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 완전한 책임을 질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의 결과를 따져서 행위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그 일의 선한 동기를 따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선한 의지에 의한 행동이 옳은 행동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던 중 이런 예화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심장병을 가진 아이를 둔 부모가 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고치기 위해 여러 가지 치료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치료의 방법들이 잘못된 것 이어서 아이가 죽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옳은 의도에 의한 해위였으니 옳은 행위일까? 그 판단에 있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잘잘못의 문제로는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온전히 선한 의도에 의한 행동에 의해서 행동 한다하더라도 그것이 언제나 좋은 결과와 좋은 평가가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얘기 했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 따른다면 칸트의 모든 행위의 판단 기준을 의지에 둔 것은 합리적인 논리 같다. 하지만, 한가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의도는 주관적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객관적인 실정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의지
선의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조건 없이 선한 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동반되는 것들 예를 들면 용기, 권력, 부, 명예 등은 선의지를 통해서 선한 것이라는 보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선의지는 다른 어떤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선한 것이다. 칸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가 선한 의도만 가진다면, 설령 ‘계모같이 인색한 천성’을 가진 사람이 우리가 하려는 일을 방해한다 해도, 도덕적 관점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의 선한 의도들이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사건들에 의해 모두 좌절 된다 해도 선의지는 여전히 보석처럼 빛난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인간 행위의 과정을 중요시하는 이 견해는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의 결과론적 입장과 대비된다. 결과주의적 도덕론들은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행위의 현실적 또는 가능적 결과에 의해 판단된다. 칸트의 입장에 다르면,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결과는 도덕적 가치 평가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는 그의 주장과 대비되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의 이러한 주장처럼 세상의 모든 일들을 과정만을 가지고 판단 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시장원리에 부적합한 것이고, 어떤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모호한 기준을 적용하게 되어 가치 판단을 어렵게 것이다.
의무
인간이 도덕적인 행위를 하기 위한 유일한 동기는 의무이다. 칸트는 “의무란 법칙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내면에는 자기 이익에 따라서 행위 하는 것에 익숙해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그런 사람이 객관적으로 옳은 행위를 했을 때도 자신에게 유리한 이해관계나 이익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도덕행위는 어떤 도덕적 법칙에 대한 존경심에 따르는 행위에서 비롯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법칙에 대한 존경심에 따르는 행위라는 것은 그 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해악을 생각해서 행동하는 것뿐이다. 진정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우리의 도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이란 자신에게 돌아올 어떠한 이익이나 보답을 생각하지 않는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칸트가 도덕적 의무에 대한 지휘를 너무 넓게 적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본 의무에 대한 입장과 다르게 칸트는 의무를 단순히 인간의 경향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의무의 동기는 아주 중요하다. 동정이나 인정에 이끌리는 자연적 경향성은 전혀 없이 오직 의무 의식에 따라 타인을 돕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도덕적으로 찬양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순전히 경향성에만 행위 하는 사람들은 전혀 도덕적으로 행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경향성이 아무리 칭찬할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칸트의 입장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인간이 어떠한 도덕적 의무를 따라 행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의 행위를 찬양하기에 타당한 것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칸트가 생각하는 ‘오직 의무 의식에 의한 도덕적 행동’이야말로 결과론적 입장은 아닐까?
인간의 행위란 언제나 특정한 경향성을 띄기 마련이다. 선하고, 옳은 것을 행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가진 행위의 경향성과 악하고, 그르게 행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의 행위의 경향성의 차이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도덕적 의무에 따르는 도덕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가진 생각과 경향성이 다른 상황에서 짜여진 틀을 강요하게 되면 반발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옳은 행위의 가치 판단은 흔들리게 될 것이다.
정언 명법과 가언 명법
정언 명법이란 우리에게 부여된 절대적 명령을 말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 있어서의 십계명과 같은 것이다. 가언 명법이란 조건적 진술, 이를테면,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경 받기 원한다면, 당신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와 같은 조건적 명령을 이야기 한다. 칸트의 정언 명법의 입장은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절대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명령법이 있다는 주장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언 명법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어떤 목적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는 명령인 것이다. 상황이나 이해관계에 관계없이 언제나 정당하게 여겨질 수 있는 무조건적인 행위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명령들 중에서 조건적 내용을 피할 수 있는 절대법이란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절대’라는 단어는 우리의 인식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법칙도 결국에는 깨지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의 십계명의 법칙들도 조건을 붙인다면 얼마든지 가언명령으로 둔갑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칸트가 정의하는 정언 명법이란 것도 어느 시대나 상황 속에서 적용되는 가언 명법으로 이야기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