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레니즘 (Hellenism) 고전(古典) 그리스의 뒤를 잇는, 세계 사상 한 시대를 규정짓는 개념이다. 이 같은 의미로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史)》에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말은 그리스문화, 그리스정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리스 문화의 확대 ·발전으로 보는 견해, 반대로 오리엔트문화를 통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대범위】 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해(BC 330)에 두는 설, 대왕의 죽음(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 종말도 극단적인 경우는 마호메트의 출현까지로 보는 설이 있다. 그 밖에 로마 제정기(帝政期)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지역적 범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정복한 마케도니아 ·그리스에서 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인더스 유역 ·박트리아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이집트)까지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
트로이 유적지 |
◦ 다스다넬 해협을 배로 건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트로이 유적지가 있었다. 관광버스에서 내리자 우리 눈에 들어 온 것이 그 유명한 「트로아 목마」, 그걸 본 모두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 엉성해서 우리의 머릿 속 목마와는 거리가 멀어 나온 웃음이었다. 일부는 몸 속 계단을 통해 목마 안으로 들어가 보고 일부는 바깥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 목마 안으로 들어 간 일행들이 목마 안 창 밖으로 빼꼼히 머리를 내밀기에 그 모습을 찍어 드렸다.
.
트로이 목마 |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트로이와 그리스 전쟁으로 유명하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남긴 황금 사과를 두고 헤라와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비너스), 아테나가 서로 다투다가 트로이의 양치기 왕자 파리스가 심판을 내려 아프로디테가 주인이 되었다. 그 대가로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의 사랑을 얻게 해 주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 원정길에 나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스군의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트로이군의 헥토르와 아이네아스 등 숱한 영웅들과 신들이 얽혀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전쟁은 오디세우스의 계책으로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스군은 거대한 목마를 남기고 철수하는 위장 전술을 폈는데, 여기에 속아 넘어간 트로이군은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 놓고 승리의 기쁨에 취하였다. 새벽이 되어 목마 안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 등이 빠져 나와 성문을 열어 주었고 그리스군이 쳐들어와 트로이성은 함락되었다. |
트로이 유적지 |
◦ 트로이 유적은 사실 글로 표현하기가 난감하다. 워낙 훼손이 심하고 또 서로 다른 시기 즉 1기에서 9기에 걸쳐 형성된 문화 유적이라 같은 지역이라도 층마다 서로 다른 期에 형성된 유적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이를 이해 하자면 터키의 고대 역사를 알아야 하고 또 神話까지 통달해야 이해가 갈 수 있어서 듣는 기록자의 머리는 마치 수세미처럼 얽혀 말 그대로 亂麻로소이다.
사람들은 트로이의 이야기가 환상속의 글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독일의 가난한 목사 아들로 태어난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개인 돈으로 트로이 왕국을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발굴을 시작한지 3년 만에 보물이 들어있는 궤짝을 발견하여 아내 소피아에게 목걸이 귀걸이를 하게하고 사진을 찍어 신문에 트로이를 발견했다고 대서특필 하게 하는데 나중에 학자들에 의해서 트로이가 아니라고 판명이 나고 슈레이만은 해변에서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하게 된 후에 학자들에 의해 트로이를 재발견해보니 1기부터 9기에 이르는 어마 어마한 곳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자가 아니었던 슐레이만의 무분별한 발굴로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과거의 역사를 밝히려고 노력해서 이런 유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크게 인정을 받아도 좋을 것 같다. 트로이에 도시가 형성된 것은 기원전 3,000년경 이고 시대에 따라 최하층의 1기에서 최상층의 9기(로마시대) 까지 시대에 따라 9겹의 도시 유적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의 트로이는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노래한 트로이로 알려진 곳으로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슐리만에 의해 파해쳐진 9개 층에 이르는 유적에 의해서 증명된다. 슐리만은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어릴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일리아드 이야기를 믿으며 언젠가 꼭 트로이를 찾겠다는 신념을 다지며 자수성가하여 백만장자가 된다. 1870년에 발굴에 들어가 슐리만은 1871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3년에 걸친 발굴로 인해 슐리만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한다. 그 때 보물상자도 발견하게 되는데, 이 때 발견한 보물상자는 트로이보다 1000년 전의 유물이다. 이 상자에는 16,000여 개의 금붙이로 만든 왕관까지 있었다. 이 유물들은 슐리만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일로 가져와 그의 사후에 박물관에 기증하나 1945년 독일로 진주한 소련이 탈취하여 지금은 러시아의 푸시킨 박물관에 있다. 초기 발굴에서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9개층에 달하는 유적 중 2번째 층이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후에 밝혀지듯이 트로이 유적은 6번째 층이다. 밝혀진 트로이성은 일리아드에 나와 있듯이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트로이 유적들은 발굴해 본 결과 대규모 지진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길 트로이의 10년 전쟁은 지진으로 인한 성벽의 붕괴와 도시의 파괴에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한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것이 말인 연유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
현장 사진을 보면 약간은 이해가 될 터인즉 안사11 카페 {서울 소식 725와 726번}을 보시기 바란다.
◦ 트로이의 유물을 터키, 그리스, 독일, 러시아가 각기 자기 나라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발릭 |
◦ 트로이 관광을 마치고 이제 아이발릭으로 이동한다. 트로이에서 아이발릭까지는 관광버스로 2시간 거리
◦ 아이발릭으로 가는 해안과 비탈진 밭은 모두 올리브 농원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비탈 산을 개간하여 올리브 농원으로 만든 것이 기적 같은 일. 그 넓은 비탈 산의 잡목을 제거하고 잡초를 없애고 올리브를 가꿀 수 있을까?
올리브 나무 밑에는 잡초도 거의 다 제거해 우리나라의 비탈 밭에 복숭아 과수원을 일군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넓이가 우리의 복숭아밭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넓었다.
◦ 이 올리브 열매는 9월부터 11월까지 모두 일일이 사람 손으로 딴단다. 우와!!! 참말로 놀랄 일이다.
◦ 그리스와 터키는 세계 최대의 올리브 생산국
◦ 올리브 나무는 묘목을 심고 난 후 8년-20년 간 수확할 수 있단다.
◦ 터키의 옛 사람들 - 수렵 생활
◦ 수메르족 - 강 유역에서 농사를 지음. 물 끌어올리고 관개시설 해 농사지은 유적 있음
*당시 쇠로 무기를 만들고 농기구를 만들어서 씀
◦ 아이발릭에 도착해 해변에 있는 마레(MARE)호텔에 투숙
◦ 저녁 식사 후 우리는 해변으로 나가 죽기 전까지 머릿속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을 낭만의 시간을 마련했다. 신춘자 회원과 김정여 회원이 인천공항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산 양주 2병과 각자가 가져 온 마른안주를 들고 해변으로 나갔다. 김정태는 현지에서 맥주 10병을 샀으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두고두고 나중에 마셨다.
해변 해수욕 후 쉬는, 누울 벤치들을 모아 테이블을 만들고 의자를 만들어 말 그대로 임시 연회장을 만들었다. 야!!! 정말 근사하다!!! 몇 순배 향기로운 위스키 잔이 돌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기름을 쳤는데 시동이 안 걸리고 배기간?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18세 청춘 남녀가 되고, 20대 청춘 시절로 돌아갔다. 독창도 나오고 스물 한명이 입을 모아 부른 합창도 나왔다. 와이리 좋노? 기분 째지게 좋다!!! 우리는 하나 되었다. 마지막엔 세계적인 명곡(?), ‘한빛 밝은 이 나라 새녘 복판에....’를 목소리를 높혀 휘나레를 장식하였다. 유행가처럼 멀리 가로등이 졸고 있는 으스름 밤, 정말로 분위기 쥑여주는 근사한 밤이었다.
아이발릭의 해변에서 꿈 같은 낭만의 시간을 갖다!!!
☼9월 25일☼
◦ 모닝콜 : 6시, 아침식사 : 7시 출발 : 8시
◦ 오늘의 일정
아이발릭 → 쉬린제 마을 → 에베소 → 파묵깔레
◦ 아이발릭 ↔ 에베소 : 3시간 30분 소요
◦ 에게해 : 성서에서 이름 유래
*에게해의 99%가 그리스 영해
*에게해에는 섬이 많아 다도해
◦ 길을 달리다가 길 가 노점에서 싱싱한 생 무화과를 팔기에 3Kg을 샀다. 오늘 밤 호텔에서 나누어 먹어야지....
권오기 회원 「맷돌체조, 세계화 하다」 우리의 보배 권오기 회원이 터키 각지를 여행하면서 가는 곳 마다 우리 일행과 함께 맷돌체조를 하여 터키 국민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고 돌아 왔다. 보는 사람 몇몇은 우리 일행 속에 들어와 함께 맷돌체조를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매우 신기한 눈으로 미소를 가득 머금고 맷돌 체조를 하는 우리 일행을 보곤 했다. 이번에 완전 터키 국내에 맷돌체조 선풍(?)을 일으키고 왔다. 그리고 우리로선 5-9시간 관광버스를 타기에 휴게소에 내려 몸 풀이 운동 으로 하는 멧돌체조가 아주 안성맞춤이어서 다 함께 체조하는 걸 모두 좋아 했다. 감사,감사, 권오기 회원님, 맷돌체조 전도사님!!!!!!!!!! |
쉬린제 마을 |
포도주 무료 시식을 하며
◦쉬린제 마을은 아이발릭에서 에페소로 가는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 이 마을은 꼬부랑 산길을 한참 올라가 거의 산꼭대기에 있지만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다.
◦ 이 마을은 포도주 생산지이자 과일주를 만드는 곳이다.
◦ 입구의 노천 레스토랑에서 우리에게 포도주를 무료 시식을 시켜 주며 자기 집 포도주를 사란다. 홍보 요원 역을 하는 터키 젊은이의 익살이 가당찮다. 배꼽을 잡게 했다. 거기다가 우리의 월드컵 응원 구호를 선창하며 따라 하란다. “대-한민국 짜짜짜 짠짠”을 되풀이 하란다.
◦ 포도주 시식을 하고 길을 따라 올라가니 길거리 가게에서 여러 가지 관광상품을 팔고 있었다. 과일로는 무화과, 석류, 포도 등등... 그리고 요란한 색깔인 접시들, 그리고 예쁜 공예품들....
◦ 이용걸 회원이 들려 준 어제 아이발릭 지역 신문에 난 기사
오늘 아침 호텔 방 앞에 배달된 아이발릭 일간지, 조간신문을 읽었습니다. 제1면 Top 기사로 실린 내용이 퍽이나 인상적이어서 우리 일행 여러분께 들려 드리겠습니다. - 이용걸
제목 「아름다운 여행」 어제 저녁 8시에서 9시까지 이곳 아이발릭 해변에서 아름답고 멋진 쇼가 벌어졌습니다. 어스프레한 전깃불 조명이 은은한 가운데 선남(8명) 선녀(13명) 21명이 무언가 열심히 움직이더니 금방 타원형으로 된 무대를 만들고 빙 둘러 앉았습니다. 두 여인의 가방에서 큰 술병 1개와 작은 술병 1개를 꺼내고 또 다른 보자기에서 술잔과 안주를 꺼내자 작은 연회장이 꾸려졌습니다. 모두 함께 술잔을 높이 들고 부라보를 외치고 기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왁자지껄 떠들어댔습니다. 노래 소리와 박수가 멋진 화음을 창조했습니다. 조용하고 그윽한 동요에서부터 가곡과 명곡까지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르 렀습니다. 시종일관 웃음이 넘쳐났고, 자연스레 춤판도 벌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다 같이 합창(교가인듯)으로 연회를 마무리하고 연회장을 처음 모습대로 깨끗이 정리했습니다. 이들의 정채가 궁금했습니다. 목소리는 20대 청소년, 술잔을 드는 노련함은 장년층, 춤추는 모습은 70대 어른들, 기자가 가까이 갔습니다. 이들은 금방 한목소리로 ‘대-한민국 짜잔짜 짠짜’를 외쳤습니다. 기자도 휩쓸려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아, 우리의 형제국인 대한민국 관광객들이구나. 이들의 행복한 표정에서 아름다운 인생을 꾸려 감을 볼 수 있었고 우리 터키를 진정 고맙게 생각하고 있음 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멋진 분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남은 여정에 알라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 합니다
이상이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
*실제로 아이발릭 지방지에 난 기사 같기도 한고 ‘왠 그런 기사가?’라고 의아해 할 친구도 있을 텐데 그 답은 그대가 내려 주길 바라며 기록자는 판단은 유보한다.
에페소 유적지 |
◦ 터키 여행에서 추천할 곳을 꼽으라면 아래 세 가지를 꼽겠다.
1. 이스탄불의 소피아 대성당
2. 가파토키아(괴뢰메 골짝기, 베르벤토 계곡, 버섯 모양의 바위가 장관인 파샤바, 비둘기 집으로 유명한 웃추히사르)
3. 에페소 유적지
◦ 에페소 유적지 중 복원 된 곳은 15%에 불과 함. 지금도 계속 발굴 작업 중이므로 100% 복원된 모습을 보기란 우리 세대로서는 불가능....
◦ 기록자는 그리스를 가보지 못했지만 여기 에페소 유적이 그리스 유적보다 못할 게 없다는 선입견이 들었다. 1500년이 지난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이 이 정도라면 당시의 문명은 대단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유적의 규모와 돌을 다루는 솜씨가 현세의 여러 가지 건축물과 석공예품과 비교해도 더 훌륭했으면 했지 뒤처지지 않을 그런 대단한 유물을 보았다. 벌어진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깨진 돌 조각품까지 카메라에 담아왔다.
◦ 당시의 화장실 문화를 보고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목욕탕에서 쓴 더운물을 아래의 화장실로 흘러 내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했고, 추운 겨울에 하인들이 벗은 엉덩이를 화장실 돌에 미리 앉게 하여 차갑지 않게 한 거라든지 응가 볼 일을 보는 귀족의 앞에서는 악단이 음악까지 연주 했다니 당시의 귀족의 위세까지 짐작이 갔다.
◦ 에페소 유적지는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기에는 나 김정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그 자료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 하겠다. 넓은 아량으로 양해를.....
에페소 유적지 로마시대 최고의 시가지를 볼 수 있는 유적지는 어디일까? 유명세를 탄 곳은 이탈리아 '폼페이'이지만, 이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로마 도시는 따로 있다. 터키에 있는 에베소 유적이 바로 그것이다. 로마시대에는 유명한 도시가 아니었던 폼페이가 후세에 와서 유명해진 까닭은 발굴 당시 유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덕택이다. 폼페이는 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잿더미에 파묻혀 몰락한 도시이다. 따라서, 발굴 유적은 다른 도시보다 훼손이 적었고 각광도 받을 수 있었다. 에베소는 로마제국 소아시아 수도로 6대 로마도시 중 하나이며 인구는 폼페이보다 5배가 넘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인구를 어떻게 계산할까? 로마의 대표적인 유적인 원형경기장 수용인원에 10배를 곱하면 당시 인구를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에베소는 폼페이처럼 한순간에 몰락한 도시는 아니다. 항구도시로 번성하던 에베소는 토사 유입으로 서서히 항구가 매몰돼, 도시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또한, 산과 갯벌이 공존한 탓으로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 자주 발병해 인구감소를 촉진했으며 지진도 자주 일어났다. 로마시대에 최고로 번성한 도시인 에베소는 그렇게 서서히 망가졌다. 이로 인해, 에베소 유적은 다른 로마도시에 비해 발굴이 늦었고 아직도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에베소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지중해와 동아시아를 잇는 상업 중심도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기원전 620년경 에베소에 세워진 '세계 불가사의 건축물'인 아르테미스 신전(神殿)에는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에 걸친 수많은 사람들의 참배할 정도로 부흥하던 도시였다. 기원전 6세기 후반 페르시아 지배와 그 후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이 도시는 부흥을 거듭하며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 항구도시로 위용을 떨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로마인들은 에베소를 로마 최고의 계획도시로 만들었다. 도시 구조는 귀족 전용공간과 비귀족 공간으로 뚜렷이 나눴다. 귀족지구는 행정과 입법을 주로 관장하는 귀족 공간이었고 일반인 출입도 철저히 통제한 게 유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트라얀 황제 신전(우물) 크레테스 도로 북쪽 끝에 위치한 12m 높이의 이 우물은 102~114년에 트라이안 황제에게 바쳐졌다. 우물 중앙 받침대 위에는 트라이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 발목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받침대와 오른발 한쪽만 남아있다. 이곳에서 여러 황실가족의 동상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스콜라스티카 공중목욕탕
테라스가 있는 집들은 (부유한 사람들이나 귀족들이 살던 집인 듯함) 거리 왼쪽에 모여 있고 그 반대편에는 하드리안 신전과 스콜라스티카 목욕탕 (로마는 목욕탕을 가는 곳마다 지었고 목욕탕 때문에 멸망을 했다고 한다.)이 있다. 목욕탕에는 온탕, 냉탕, 체육관(체력 단련실)으로 구분되어 있고 사우나 시설도 완비된 목욕탕이었다는 걸 유적을 보고 알 수 있었 으며 코스모스처럼 생긴 기름나무로 목욕탕에 불을 지폈다고 한다. 그 아래쪽에는 수세식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50여명이 동시에 볼일을 볼 수 있게 만들었는지 구멍이 50여개가 뚫려 있다.
셀슈스 도서관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 쥴리우스 셀수스가 소아시아주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 도서관의 정면 입구는 2층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는데 지혜, 행운, 지식 그리고 선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4명의 여성들의 석상이 있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책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에베소 하드리안 황제 신전 하드리안(Hadrian) 신전은 크레테스 도로상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목욕탕 옆의 하드리안 신전은 위대한 건축물의 본보기이다. 138년경에 지어져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고린도 양식의 신전은 정면에 독특한 부조물과 장식이 되어 있다. 건물의 현관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중앙의 2개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 안쪽 정면의 박공 머리 위에는 메두사를 닮은 여성의 모습이 나뭇잎과 함께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 왼쪽부터 아테나신, 셀레나신, 아폴로신, 에베소의 창시자 안드로 클로스, 헤랄데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 도시우스 황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부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치문에는 행운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이 있고 그 뒤 반원형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베소의 「화장실」 공중화장실이 공중목욕탕보다 낮은 지대에 만들었는데 이는 공목욕탕에서 쓰고 난 더운물이 공중 화장실로 흐르게 하여 뒤처리를 수세식으로 하게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수세식 화장실과 비데를 겸용한 화장실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공중목욕탕이나 공중 화장실이 모두 남성 위주로 만들어져 당시 여성들은 어디서 목욕을 하였고 어디서 볼일을 봤는지 알 수가 없다. 화장실의 돌들이 모두 대리석이어서 겨울철이나 추운 날에는 돌들이 차갑기 때문에 미리 노예를 보내어 화장실에 걸터 앉게 한 후 따듯해진 다음 주인이 볼일을 보게 했다고 한다 남자들의 공간. 긴 옷을 입어서 앉으면 긴 옷이 가려 거시기가 보이지 않는다. 볼일 보는 귀족들 앞에서는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ㅎㅎㅎ
에베소 창녀촌으로 가는 광고판 셀수스 도서관 앞에는 '창녀의 집' 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사랑의 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리석 도로 바닥에 새겨진 이 기호는 바로 그 곳으로 안내하는 안내판으로 이 안내판에는 발 모양과 하트, 그리고 조그마한 동그라미와 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장식한 여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로마 여인들에게는 발 모양은 하나의 상징으로 그 시대에는 발이 예뻐야 몸매와 성품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하트는 마음과 사랑을 뜻하는 것이고 동그라미는 돈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인의 가슴에는 이제는 지워져서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없지만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은 발자국이 표시하는 방향으로 오세요. 이곳에 올 때는 약간의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여인들의 사랑과 마음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 발자국 보다 작은 미성년자는 오지 마세요." |
◦ 에페소 유적지를 관광한 후 파묵깔레로 이동했다.
에페소 ↔ 파묵깔레 : 2시간 30분 소요
◦ 폴라트 호텔(POLAT HTL) 투숙
*우리가 전 일정 중 유일하게 묵은 5성급 호텔
*저녁 식사 후 호텔 내 야외 온천욕 하다.
◦ 호텔에서 밖으로 조금 나가면 조그마한 야시장이 열리고 양고기구이에 생맥주 한 잔 할 수 있다는데 모두들 호텔 내 야외 온천을 하겠다고 해서 온천욕 함(기록자는 양고기 구이에 생맥주 한 잔 하고팠는데....)
◦ 오다가 길 노점에서 산 생 무화과를 나누었다. 1인당 3개씩....
◦ 이날 밤에 몇몇이 이평직 회원의 방에 모여 9월 24일 해변에서 밤 정취를 즐기며 파티를 열었을 때 다 못 치운 양주를 비우고 온갖 담화를 나누며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9월 26일☼
◦ 6시 모닝 콜, 7시 식사, 8시 출발
◦ 우리가 묵은 온천은 상당히 컸다. 우리가 잘 방은 로비와는 상당히 떨어져 위로 돌아 올라가야 했다. 일행들의 숙소는 숲속 길을 걸어 올라가 8브럭에 배정 되었다. 우리 방은 831호실
◦ 여기 폴라트 호텔(POLAT HTL)과 오늘 관광할 석회봉까지는 차로 15분 거리
◦ 식당이 매우 컸다. 우리 일행 21명 빼고는 모두 백인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 아침 식사 후 짐 가방을 방문 앞에 내놓고(호텔 포터가 옮기기로) 홀가분한 차림으로 로비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에 내 손가락에 왠 고추장이 묻은 것 같아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입으로 빨아먹었다. 그런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그 부위에 계속 고추장이 묻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여겨 가까운 야외 수영장 물에 손을 씻었는데 아니 또 고추장이? 알고 보니 손가락에서 피기 난 것!!! 이런 둔한 인간아!!! 완전 코메디를 한 기분. 집 사람의 도움으로 1회용 밴드로 손가락을 감았다.
◦ 뒤따라 일행이 내려오기에 야외 온천 풀을 배경으로 사진 몇 컷을 찍고 나서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다.
폴라트호텔 야외 온천 풀 앞에서
파묵깔레 |
◦ “파묵” - 목화 “깔레” - 성(城)
*이 지역에서는 목화 재배가 성했다. 지나가다가 하얀 목화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목화밭을 자주 보며 지나감
◦ 파묵깔레 유적지에서는 우리가 방문 했을 때에도 우리 눈앞에서 발굴이 진행 되고 있었다.
◦ 히에라폴리스를 중심으로 10Km 이내에는 건축 신축 허가 안남
◦ 이곳은 헌병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이곳 치안 상태는 타 지역 보다 좋음
파묵깔레의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지 맞은편에 있는 것이 라오디게아 도시터다. 이 도시는 기원전 250년경 시리아의 안티오커스에 의해 건설 되었다. 그리고 안티오커스는 이도시를 자기 부인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 게아로 명했다. 10km 떨어진 고에 온천으로 유명한 히에라폴리스가 있었다. 부유하게 살았던 라오디게아인들은 바위를 뚫어 송수관을 만들어 뜨거운 물을 사용하였는데, 라오디게아까지 온천수가 오는 동안 식어져 미지근해졌다. 성경에 예수께서 이러한 미지근한 상태가 된 온천수를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신앙의 모습으로 미유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
파묵깔레의 석회봉 |
◦ 하얀 종유석이 흘러내려 계단식 절벽을 이루고 있는 석회붕과 노천온천이 있는 곳이다.
◦ 세상에!!! 신의 조화가 분명한 하얀 계단식 논!!! 그리고 흰 어름이 녹아내리다가 다시 얼어붙은 듯한 울퉁불퉁한 절벽!!! 또 어제 내린 눈이 언덕에 쌓인듯한 곳!!! 이것이 모두 온천수에 녹아내린 흰 석회가 만들어 낸 작품들이다.
◦ 이곳엔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어서 우리 일행은 한곳에다 신발을 벗어두고 그 유명한 파묵깔레의 석회봉엘 들어섰다. 발 아래의 바위가 약간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 눈앞에 펼쳐진 눈(雪) 세상!!! 이 모든 것이 눈이 아니라 흰 석회란다. 계단식 논 모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온천수가 흐르는 도랑에 발을 담그고 일행 모두가 전깃줄에 앉은 참새마냥 일렬로 앉아 흐르는 따뜻한 온천수에 담근 발의 느낌을 즐겼다.
◦ 우리 일행은 신발만 벗었지만 서양 백인들은 모두들 수영복 차림이다. 노천 온천이니 수영복을 입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 노천 온천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을 찍고 또 찍었다. 집에 와 사진을 보니 그것 또한 작품이었다.
◦ 온천수의 수온은 37-38℃. 뜨겁지 않았다.
◦ 신발을 찾아 신고 반대편엘 가니 더 장관이 펼쳐졌다. 계단식 논 모양이 더 크고 더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세상에!!! 분명 신의 작품이었다.
◦ 파묵깔레를 뒤로하고 내려오니 바로 앞에 의복 매장이 있어서 들렀다.
눈 화장을 시꺼멓게 한 이쁜 아가씨가 애교가 철철 넘치게 부리며 일행을 맞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한 가지도 사지 않았다. 미안, 죄송...
◦ 터키의 중요 산업 : 면화 재배와 양 가죽 제품 수출
◦ 우리는 길이가 1,000Km나 되는 「타우르스산맥」을 넘어간다. 터키의 남부를 동서로 뻗은 이 산맥은 우리나라로 치면 백두대간과 같다.
카르리크 동굴 |
◦이 동굴은 안탈리아로 가는 길가에 있는 아주 작은 동굴로 일부러 찾아오기에는 너무나 작은 동굴임
◦ 동굴 안에는 파묵깔레 처럼 계단식 논 같은 석회가 만든 층층이 있었다
◦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깥에서 인공으로 물을 끌어들여 폭포를 인위적으로 만든 인공 동굴이라 참 웃기는 관광지도 있구나 싶었다.
◦ 이 동굴 옆에서 동굴보다 더 신기한 장면을 보았다. 작은 연못이 있는데 사람이 다가가자 난데없이 거북들이 수십 마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 아마 여기를 찾은 관광객들이 거북이에게 먹이기를 준 모양. 우리에게는 거북이에게 줄 아무 것도 없어 미안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 여기 동굴 근방에는 석재공장이 많았는데 거의 다가 대리석 가공 공장이란다.
◦ 자기 소유의 산에서 대리석이 발견 되면 커다란 횡재를 하는 것이란다.
◦ 터키에서는 산모가 출산일이 닥아오면 성인(聖人)의 묘지를 참배하는 풍습이 있음
◦ 남자 아이가 7살이 되면 할례를 함. 성인식에 해당
◦ 초등학교는 8년의 의무교육 실시
◦ 중매결혼이 많음
◦ 혼수로 남자는 집과 가구를 준비하고
여자는 침구와 입을 옷을 준비함
◦ 결혼식 잔치는 3일 간 치름
◦ 집의 굴뚝에 병을 세워 놓음
* 병이 1개이면 시집보낼 처녀가 1사람 있고
* 병이 두 개 세워져 있으면 시집보낼 처녀가 2사람 있다는 표시
* 작은 병이 세워져 있으면 - ‘시집보내기 아깝다.’
* 큰 병이 세워져 있으면 - ‘빨리 시집보내야 되겠다.’
◦ 총각은 돌을 던져 굴뚝의 병을 깨뜨려야 선을 볼 수 있음
◦ 처녀가 직접 만든 음식을 선 보러 온 총각에게 대접하는데
*총각이 맘에 들면 온갖 정성을 다하여 국을 끓여 대접함
*총각이 맘에 들지 않으면 맹물에다 소금만 넣어 총각 대접함
◦ 안탈리아로 가는 도중 어느 호텔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호텔 식당답게 메뉴도 다양하고 보기에는 좋았다. 그러나 음식이 우리들에게는 맞지 않았다. 역시 느끼한 게 흠. 그 식당에서 한국인이 식사를 함으로 환영한다는 표시로 우리 태극기와 터키 국기를 테이블 시작 지점에 꽂아두었는데 우리 지우림 회원이 태극기의 오류를 발견해 식당 관계자에게 왜 오류인지를 인식 시키고 시정을 요구했다. 오류인 점은 깃대를 건곤 쪽에 붙여야 되는데 이감 쪽으로 깃대가 가게 한 것. 오류에 대한 시정 여부는 알 길이 없음
안탈리아 |
◦ 터키의 남쪽 지중해 연안 최고의 휴양도시. 독일인과 러시아인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 ◦ 인구 100만 명
기원전 159년 페르가몬 왕 아탈루스 2세가 세운 도시로 아탈루스 2세의 '땅 위에 천국을 건설하라.' 는 명령을 받고 건설됨. 그러나 후계자 아탈루스 3세가 로마에 바쳤다고 한다. 로마, 비잔틴, 몽골, 베네치아, 제노바, 오스만 트루크, 이딸리아, 이렇게 여러 제국의 지배를 받음으로 다양한 유적이 많은 곳임. 또한 지중해의 해산물과 도시 부근의 농작물이 활발하게 교역되던 곳. |
◦ 상당히 큰 이 도시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경.
◦ 도시 초입에서 커다란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의 동상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터키인들은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를 존경해 거의 모든 도시에서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동상을 볼 수 있단다.
◦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가이드의 뒤를 따라 상당히 먼 거리를 걸었다.
우리가 갈 목적지는 신시가지를 거쳐 구시가지를 관광하고 바닷가에 이르러 「안탈리아 유람선 관광」을 하기 위함이다.
◦ 구시가지의 입구에는 BC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대리석 문인 하드리아누스의 문을 통과하여, AD 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성모 마리아를 위한 교회였다가 7세기 이후 모스크로 사용되었던 이울리 미나렛교회의 탑을 바라보며 계속 바닷가를 향하여 걸었다.
◦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 우리와 함께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커다란 개새끼 한 마리가 우리 일행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상당히 온순해 보이고 마치 주인 따르듯 계속 우리 일행의 다리를 스치듯 걸었다. 어디까지? 바닷가에서 우리가 유람선을 타기까지 따라 왔으니 아마 1.5Km는 따라왔을 거다. 왜, 무슨 개가? 먹이를 얻어먹으려고 주인 없는 떠돌이개가 관광객 뒤를 따라 온 것. 터키에는 이런 개가 많단다. 참 희한한 일도 다 봤지.
◦ 떠돌이 개와 고양이가 많은데 주민들이 이들에게 먹이를 잘 주고 官에서는 예방접종까지 맞춘단다.
◦ 우리나라에서 남의 아이를 “참 예쁘다”라고 하지 않고 “고놈 참 밉게 생겼다”라고 하듯이 터키에서도 자기의 귀여운 자녀를 “우리 못난이”라고 한단다.
◦ 유람선을 타기 전에 우리는 그 유명한 터키 아이스크림을 보았다.
쫄깃쫄깃한 터키의 아이스크림 돈두르마스(Dondurmasi), 양이나 염소의 젖 을 넣고 난초의 뿌리 가루, 과즙을 넣어 떡메 치듯이 계속해서 치대고 누르 며 반죽을 하면 아이스크림은 찰떡 같이 되어 흘러내리지 않는다.
우리 한국 말로 "쫀득쫀득한 아이스크림 사세요"라고 호객을 하는 아이스크 림 장수, 쇠막대 끝에 아이스크림을 달고 아가씨들이 아이스크림을 잡으려고 하면 쇠막대를 뺑글 돌려 잡을 수 없게 장난을 친다.
안탈리아 유람선 관광 |
◦ 유람선 관광은 약 1시간. 아름다운 지중해 유람선 관광이다. 딴 여행사에선 30유로의 선택 관광이지만 우리에겐 포함 관광이다.
◦ 바다를 나서며 오른 편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보이는데 이 절벽이 안탈리아를 지키는 천혜의 요새 노릇을 했다고 한다.
◦ 절벽에는 인공 폭포가 있는데 유람선이 폭포 가까이 접근해 유람선에서 일하는 매우 잘 생긴 젊은이가 수영복 차림으로 폭포에 물맞이 쇼를 보여 주었다. 이 기록자가 그 젊은이에게 손짓으로 바다로 다이빙을 하라고 했는데 그건 예정에 없는 거라 할 수 없다는 몸짓을 보내 왔다. ㅋㅋㅋ......
◦ 바다에 나가 멀리서 보는 안탈리아는 매우 아름다웠다. 해변 가까이 지어진 예쁜 건물들도 유람하는 우리에겐 좋은 볼거리가 되어 주었다.
◦ 승선하여 40여 분이 지나자 매우 빠른 음악을 들려주며 아까 폭포에서 물맞이 하던 잘 생긴 총각이 우리 일행들에게 춤추기를 유도했다. 그 녀석 온몸을 흔들며 추어대는 춤 솜씨가 예사가 아니었다. 우리도 따라 한참을 신나게 흔들었다. 나중에는 키 잡이 청년까지 합세하여 군무를 추었는데 우리의 경리 책임자 신춘자 회원이 팁을 몇 닙 주는 것 같았다.
◦ 링 호텔(RING HOTEL) 체크 인 하다.
☼9월 27일☼
◦ 오늘은 9시간이나 버스를 타는 날이다. 우리 여행 중 가장 긴 시간이다.
◦ 오늘은 안탈리아에서 출발해 오부룩을 보고 콘야를 경유하여 카파도키아까지 가는 것.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다.
◦ 오부룩에 도착하기 전에 메마른 땅 외딴 곳에 있는 실크로드 상인들이 묵었다는 건물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무려 1,000Km나 되는 타우르스산맥을 넘어 온 터키 내외국인들로, 지리상으로 여기서 점심을 먹기에 적당한 지점인듯 많은 사람들로 식당은 꽉 차 있었다. 우리를 빼고 거의 다 서양 사람들이었다. 식단은 스프에 빵에 그저 그런 것. 후식으로 사과를 한 개씩 주어 달게 먹었다.
오부룩 한(OBRUK HAN)과 오부룩 담수호
|
옛날 낙타와 당나귀를 끈 대상 카라반이 왕래한 이 실크로드의 옛길을 걷다보면 오아시스를 따라 카라반이 하룻밤 지낼 수 있는 숙소, 일명 카라반 사라이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오부룩의 카라반 사라이. 예전의 명성이 무색할 만큼 옛터가 무너진 채 뼈만 앙상히 남은 건물들이 무너질 듯 내 눈앞에 위태롭게 서 있지만 그 위태로운 벽돌 기둥의 앙상함마저 이 코발트색 하늘과 잘 어울려 여행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마치 당장이라도 이 폐허에서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코란을 읽는 대상들의 목소리와, 그들이 물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 마굿간에서 풀을 뜯는 낙타와 말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이 폐허의 잔해 말고도 또 하나가 있다. |
오부룩 한은 실크로드의 한 부분으로 대상들이 나타를 이끌고 지나가다가 묵은 곳이다.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내부는 보지 못하고 겉만 보았다.
오부룩 담수호는 호수의 크기는 작지만 깊이가 150m나 되는 민물 호수다. 최대 수심이 150m이나 된다니 놀랄 일. 이 호수가 생긴 것은 땅이 함몰되어 생긴 호수라는 설과 운석이 떨어져 패인 자리라는 설이 있으나 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파란 호수와 파란 하늘이 어울려서 외로운 곳에 있는 호수가 더 외로워 보였다.
◦ 옆에 있는 매장에 들어가 실크로드 상인들처럼 휴식을 취했다. 터키홍차를 한 잔씩 들고.....
◦ 매장 안에 터키 명물인 물담뱃대가 있길래 물담뱃대를 물고 사진도 찍었다.
터키의 명물 물담배 피우기
❊ 오늘 날 터키의 중요 문제꺼리
◦ 쿠르드족, 아르메니아족, 유대인과 터키인이 단합하지 못하고 있다
◦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 13만 명 피살 사건으로 두 나라는 국경까지 폐쇄했다가 작년에 개방
◦ 과거의 역사 관계로 그리스 등 주변 국가와 사이가 안 좋음
◦ 쿠르드족이 4,000년 간 살았으나 성경 속의 「메디아」 이외에는 국가가 없음
‘쿠르드인에게는 친구는 없고 오직 山 만 있다.’ - 터키 동부의 산악지대에 거주하기 때문
◦ 역사적으로 나라간 힘의 균형을 이루는데 쿠르드족이 큰 역할을 함
◦ 터키 안에 사는 최대 부족이지만 방송에서 쿠르드어를 쓰지 못하게 함 - 지금은 허용
◦ 아르메니아인들은 손재주가 좋아 터키석 가공은 주로 아르메니아족이 해냄.
*기능 우수
◦ 터키가 팔레스타인 구호물자를 수송 - 수 개월 전 이 비무장선을 이스라엘 군이 공격, 터키인 9명이 죽음
*터키 내에서 이스라엘 규탄. 이스라엘을 침략자로 단정
◦ 지금 터키에는 에르드와르 총리가 막강한 세력을 갖고 국민의 지지 굳음. 그러나 총리는 이슬람 색채가 강해 EU연합 가입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
◦ 에르드와르 총리의 정부가 작년에 8.5%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 국민들이 신임함
◦ 올해 에르드와르 총리가 이웃 시리아를 방문했을 때 시리아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음
*이스라엘과 다툼이 잦은 시리아 편을 들고 미국에 대해 할 말을 다하는 에르드와르 총리를 아랍계 중동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열렬한 호응을 보내 앞으로 중동 아랍계의 맹주가 되지 않을가 전망함.
콘야 |
◦ 이스라엘과 다툼이 잦은 시리아 편을 들고 미국에 대해 할 말을 다하는 에르드와르 총리를 아랍계 중동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열렬한 호응을 보내 앞으로 중동 아랍계의 맹주가 되지 않을가 전망함.
◦ 콘야에서는 별다른 관광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 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는 터키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이기에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콘야를 소개한다.
콘야는 하루를 머물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도시다. 현대화 속에서도 고대의 풍부한 문화유산과 풍속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까닭에 연간 백 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든다. 콘야는 소아시아 평원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터키 10대 도시 중 하나이다. 이 도시는 사방으로 도로가 뚫린 교통 중심지로 주변의 작은 도시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든지 콘야에 들어서면,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야에 압도당하게 된다. 콘야 평야에서 생산되는 밀은 터키 전체 국민의 1년 양식이 되고도 남는다. 콘야에는 밀농사 뿐만 아니라 자두와 살구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과수원들도 있다. 이토록 풍부한 농산물이 생산되는 지역이기에, 옛 사람들은 이곳을 ‘양의 가슴’이란 뜻의 콘야라고 불렀는지도 모른다. 사막의 오아시스 가운데 있던 옛 도시로서 당시에도 교통의 중심도시로 알려졌다. 이곳은 상업이 발달된 도시였다. 다소 지방에 있는 고지에서 생산되는 섬유와 양모와 염소 털을 가지고 만든 상품들이 상점에 가득했다. 콘야는 과수원에서 얻어지는 것과 농장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와 에베소로 판매를 했다. 콘야는 11세기 셀축 터키의 수도였고, 터키 이슬람 메블라나 교단의 본산지이다. 메블라나 교단은 다소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며, 터키 특유의 이메블라나 교단은 메블라나 루우미가 12세기에 창시한 이슬람 수피 교단 중 하나이다.슬람이라 할 수 있다. 메블라나는 유일신 알라와 만나기 위해서는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하며, 금욕과 고행을 통한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메블라나 교단의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데비쉬(세마)라고 부르는 수도승들의 춤인데, 이것은 일종의 신과의 교통에 이르는 수행방법이다. 지금도 콘야에서는 관광객들을 위하여 이 명상춤을 선보이고 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그리 피곤치 않다면, 터키 전통차를 즐기면서 명상춤을 관람하는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콘야 지역은 이슬람 중에서도 보수적 성향의 중심지이다. 강한 이슬람의 신앙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콘야 시민들은 터키의 선거 때면 더욱더 잘 나타난다. 도시민의 대분분이 이슬람 성향의 정당을 열정적으로 지지한다. 콘야는 기독교의 위대한 인물인 바울과도 관련이 있다. 사도 바울이 오늘날 터키 남서부 지방을 전도여행할 당시 이곳을 두 번 둘렸다고 한다. 기독교 성경에는 콘야를 옛 이름 그대로 ‘이고니온’ 이라고 부른다. 콘야의 메블라나 박물관은 콘야인들의 자랑이다. 이 박물관은 콘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하다. 박물관에는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를 창시한 메블라나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궁전의 장미 정원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왕이 메블라나의 아버지 바하틴 벨레디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이색적으로 인상을 주는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탑은 1396년에 세워진 것이다. 터키 정부가 이곳을 박물관으로 개장한 것은 관은 1927년이다. 이 박물관에는 메블라나의 소지품, 신비스런 악기, 그리고 손으로 만든 양탄자, 비문, 문서,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터키 신비주의 이슬람 문화를 접할 수 있다. 콘야인들의 또 하나의 자랑은 셀축 투르크인들에 의해 지워진 가장 오래된 모스크인 알라딘 모스크이다. 이 모스크는 알라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모스크의 건축은 루크네딘 메수드의 통치기간(1116-1156) 중에 시작하여 1221년 술탄 알라틴 케이쿠바트 통치시대에 완성되었다. 콘야에는 오스만 제국의 건축술의 진수를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모스크가 있다. 메블라나 박물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셀리미예 모스크이다. 모스크는 술탄 셀림 2세가 1558년에 시작하여 1587년까지 29년에 걸쳐서 건축하였다. |
◦ 콘야는 평야지역으로 1시간을 달려도 산이 없음
◦ 밀밭이 끝없이 이어져 콘야를 ‘터키의 젖가슴’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 사탕무도 재배하는데 사탕무로 설탕을 만든다. 옛날에 이곳에서는 설탕을 금과 같이 여긴 적도 있었다.
◦ 호박 농사 : 지금 보이는 들판에는 잎은 없고 누런 호박만 뒹굴고 있음.
*호박을 농기계로 수확하고 분쇄하여 씨앗만 채취하는 장면 봄. 우리 눈엔 호박 농사를 짓는 목적이 호박씨 채취라니 신기함
◦ 그 외 감자 농사, 살구 재배를 많이 한다.
◦ 터키인들은 자국에서 만든 와인을 좋아하는데 터키의 포도는 껍질이 두껍고 지주 없이 땅에 누워 자라는 포도가 많이 생산된다.
◦ 동굴이 많은데 와인을 저장하고 감자를 저장하는데 유용하게 사용
◦ 기원 전 2,000년부터 사람들이 동굴 생활을 했다는 유적 있음
*동굴은 비바람 피하고, 전쟁 피하고, 로마군의 박해 피하는데 효과적임
◦ 터키 안에 자연 호수가 450개, 인공 호수가 350개나 있는데 호수의 물을 끌어 농사에 이용
◦ 콘야의 인구는 100만 명이나 살고 있는데 10년 안에 인구가 배로 늘어 난 도시
◦ 종교(이슬람) 때문에 술 판매가 적음
◦ 선출직 -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가?
- 얼마나 이슬람 신도로 착실한가?
◦ 이들이 잘 말하는 “인샬라” 는 ‘신의 이름으로’라는 의미, ‘최선을 다한다 ’, ‘100% 책임을 다 한다’라는 의미
◦ 이들은 곧장 ‘내일까지’란 약속을 잘 하는데 그 내일을 한 달로 봐야 한다.
‘내일 해 주겠다’ - 그대로 믿으면 안됨
◦ 터키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 : 이스탄불에 1,000명, 앙카라에 500명
◦ 터키에서는 법적으로는 1부 1처제, 시골로 가면 일부 다처제 상존
◦ 옛날 남자들이 전장에 나가 죽는 수가 많아 과부 구제책으로 1부 다처제가 생김. 동생이 형수와 사는 경우 많았다고 함
◦ 지금도 중동 일부 국가에서는 일부 다처제 허용
◦ 터키인들은 육포(肉脯)를 좋아하고 잘 만듬
◦ 중동 국가의 이슬람인들이 돼지고기를 안 먹는 이유
1. 돼지는 느려서 유목민이 기를 수 없음(이동이 안됨)
2. 육포 불가능
3. 습한 곳에서 자라는 돼지는 건조한 기후에서 생육이 어려움
◦ 이슬람 신자 : 지구상에 15억 명
◦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이란 말은 미국인들이 만든 말
◦ 한국에도 7만 명의 이슬람 교도가 있다고 함
◦ 터키인들이 지금의 터키 땅에 정착한 것이 고작 500년 전, 그 전에는 유목 생활함
- 외인(外人) 만나면 반가와 하고 호기심으로 외지 사정 물음
◦ 유목 민족 : 우유, 치즈, 요쿠르트, 양모 생산
농경 민족 : 땅에서 농산물 생산
◦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방어의 역사
◦ 음식물 전파 : 소주는 원나라에서 전함 - 안동과 제주도
: 육포, 요쿠르트, 버터 등
◦ 터키인들 대화 문화가 발달 : 식사 중에 가족(자녀)과 대화 많이 함
카페트 매장에 들르다
◦ 카페트를 직접 짜서 판매하는 매장에 들렀다. 카페트 짜는 일은 여자들이 하는데 그 여공들은 보통 가정 집 부인들로 집안일을 하다가 농한기라던가 여유 시간이 있으면 공장에 나와 카페트를 짠다고 했다.
◦ 여공의 눈앞에 방안지(方眼紙)에 그려진 카페트 도안이 있는데 그걸 직접 보고 실의 색을 바꾸기도 하고 짜기도 했다. 그 재주가 놀라왔다.
◦ 전시 판매를 하는 매장에 안내하여 여러 가지 문양의 제품을 보여 주는데 화장실 문 앞에 두는 발 닦는 것이 20만여 원이나 했다. 거실에 까는 건 다 몇 백만은 되었다. 일행 모두 보기만 하고 홍차만 얻어 마시고 나왔다.
소금 호수 관광 |
면적은 1,500㎢이며 연간 100만 톤의 소금생산으로 터키 소금수요의 65% 를 제공한다. 이 소금호수의 생성 원인은 바다 속에 있었던 터키 영토가 융기하게 되면 서 분지로 이루이진 중부지역으로 바닷물이 모이게 되고 건조기후이기 때문에 유입 수량과 거의 비슷한 양이 증발 되었으며 주변 지표면의 염분 까지 유입되면서 지금의 소금호수가 생성되었다. 겨울철은 비가 오는 우기이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호수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직접 물맛을 봐야 소금호수인 것을 알게 되지만 건기인 여름철은 소금호수의 평균 수심이 2m일정도로 소금들이 호숫가에 넓게 말라 있어서 지나가는 여행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곳이다. |
◦ 이곳이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호수의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호수다. 지금은 건기라서 눈에 보이는 호수 바닥이 전부 하얀 소금으로 뒤덮혀 있었다. 길이 80Km, 폭 20Km.
◦ 우리 일행은 삼삼오오 소금 위를 걸었다. 희희낙락 웃으면서... 짝을 지어 사진도 찍고...
◦ 여기서도 우리 대한민국의 국력을 새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 관광객이 들르는지 호수 입구에 소금을 이용한 가공 제품을 선전하는 간판이 있었는데 맨 위에 한글, 두 번째 일본어로 제품 안내를 하고 있었다. 지구 반대 편 터키에서 한글을 보니 감개무량!!!
◦ 동굴 호텔 「아크욜 AKYOL HOTEL」에 체크 인
◦ 가방을 객실로 옮겨 놓고 벨리댄스를 보러 나섰다.
밸리댄스 공연 관람 |
◦ 공연장 입구는 마치 창고의 입구 같이 허술했으나 공연장 안은 잘 꾸며져 있었다. 중앙이 무대이고 관람석은 방사선형으로 배치하여 어느 자리에서나 잘 보이게 배치되었다.
◦ 우리 자리는 미리 예약이 되어 있어서 자리에 앉았다. 미리 빈 접시와 빈 글라스, 그리고 사과와 밀감과 과자 등이 차려져 있었다. 자리에 앉자 터키 술과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데) 앞앞에 놓인 큰 빈 접시에 음식을 날라다 줬다. 맥주는 무한 리필이라서 기록자가 사람 수대로 21컵을 주문했더니 참 한심하게도 너도 나도 맥주를 안 먹겠단다. 나이가 주량을 말하는가 봐!!!
퇴장할 때 보니까 1/3은 남겨서 좀 부끄러웠다.
◦ 공연은 앞부분은 터키 민속 공연이고 뒷부분에 밸리댄스를 추었다.
앞부분에서 밸리댄스를 추니까 한국과 일본 관광객들이 밸리댄스만 보고 중도에 거의 다 퇴장을 해 공연 분위기를 망치기에 밸리댄스를 뒷부분으로 옮겼단다.
◦ 공연 내용은 전형적인 터키 민속춤으로 빠른 템포로 상반신은 움직이지 않고 발을 빠르게 움직이는 군무(群舞)를 보여 주었고, 정지 동작에서는 치마가 보통이지만 빙글빙글 돌면 제법 두껍고 화려한 치마가 우산처럼 펼쳐지는 춤, 그리고 하렘에서 금방 나온듯한 화려한 옷차림에 머리에 금빛 나는 장식을 한 무희들의 춤도 보여 주었다. 끝부분에 가서야 두 프로 정도를 배꼽춤을 보여 주었다. 빠르게 엉덩이를 돌리는 장면은 TV 등에서 가끔 보아왔기에 그리 신기하게 보이지 않았다. 다만 터키 현지에서 오리지널 밸리댄스를 보았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고나 할까?
☼9월 28일☼
카파토키아 |
◦ ‘좋은 말이 나는 땅’이란 의미
◦ 동굴 호텔 「아크욜 AKYOL HOTEL」에 투숙하다
◦ 이 동굴호텔은 언덕을 깎아 굴을 파고 객실을 넣은 이상한 호텔인데 객실료가 보통 호텔보다 비쌌다. 여행사에서도 이걸 들어 특이한 상품이라 선전을 했다.
◦ 카파토키아는 우리나라 배낭 여행자들이 2박 3일 코스로 호응을 하고 많이 찾는 곳
열기구 타다 |
◦ 터키 여행에서 우리가 이용한 상품에서 유일한 선택 관광 상품인 열기구를 일행 13명이 탔다. 상품 대금은 유로화로 170유로, 한화로 환산하면 27-8만원이나 하는 고가 상품이다. 평소 타기 어려운 열기구로 카파토키아 상공을 날아본다는 것도 매우 뜻 깊은 경험이라 하겠다.
◦ 열기구(벌룬)를 탄 일행
신영호 내외, 천세창 내외, 이평직, 김경자, 김덕자, 김정여, 김정자, 신춘자, 광주 박용희씨 내외
베르벤트 계곡(하멜 계곡) |
◦ 여행사에서 준 일정표에는 「하멜 계곡」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우리의 가이드 김명식씨가 말하기를 「하멜 계곡」은 속칭이고 정식 명칭은 「베르벤트 계곡」이란다. 여행에서 귀국하여 LOTTE JTB에다 오류를 정정하라고 일러 주었다. 아마 낙타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낙타를 의미하는 「하멜」이란 속칭이 붙은 모양이다.
◦ 낙타 모양으로 생긴 바위 등 신기한 바위들이 연속된 계곡이다. 차에서 내려 사진 몇 장 찍고 이동했다.
괴뢰메 마을과 괴뢰메 골짜기 |
◦ 원뿔 모양의 바위가 연이어 있다. 마치 죽순처럼.... 색깔은 갈색. 이런 바위가 있는 마을이 괴뢰메 마을이고 이런 바위들만 가득한 골짜기가 괴뢰메 골짜기다. 원뿔 모양의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사람이 살기도 하고 수도사들의 수도 도장이기도 하단다.
◦ 괴뢰메 골짜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올라 골짜기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터키 홍차도 마시며 쉬었다. 여기서도 그 유명한 터키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는데 안탈리아 해변에서도 못 먹어 보고 여기서도 흥정은 잔뜩 해놓고 비싸다고 홍차로 돌려 맛보지 못해 못내 서운했다. 아이, 터키 아이스크림 먹어 봤으면....
◦ 괴뢰메 마을에는 365개의 교회나 수도처가 있음
◦ 성 바실 : AD369년에 이곳에서 태어난 성인(聖人)
*수행을 하고 자선 사업을 많이 함. 정통 크리스찬
*황제의 박해도 굴복하지 않아 성인으로 추대됨
◦ 배낭 여행자들이 많이 묵고 이들이 오토바이를 대여해 부근 여행을 함
◦ 여기 매점에서 한글로 된 「카파도키아-역사의 요람」이란 책이 10유로라는데 깎아서 8유로에 샀다. 잔돈 2유로 대신 땅콩 1봉지를 받아 일행에게 나눠 줬더니 너도 나도 책을 사 땅콩 풍년이 되었다.
웃츠히사르 UCHISAR |
◦ 웃츠히사르는 ‘비둘기집’이라고도 한다. 괴뢰메 골짜기에서 3Km 떨어진 곳에 웃츠히사르 성채가 있다. 괴뢰메 골짜기와 같이 온통 응회암으로 덮혀있던 곳인데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방어를 목적으로 굴을 파고 살았으나 바위들이 부식되어 오늘과 같은 비둘기집처럼 되었단다.
◦ 이곳이 영화 「스타워즈」를 촬영한 곳이라 한다. 이곳의 사진과 합성해 장면 연출
파샤바 계곡 |
파샤바(버섯마을)계곡
◦ 괴뢰메의 파노라마를 지나서..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가 보니 텔레비젼에서만 보았던 그리고 스머프 마을의 모티브를 여기서 얻었다던 곳! 바로 카파도키아 파샤바 지구(地區)란다! 바위의 모양이 꼭 버섯 같기도 하고 참 신기한 파샤바 지구, 바위 중간중간에 난 구멍에서 수도사들이 피신해서 살았다고 한단다. 참 안쓰러운 일, 버섯 모양의 암석들이 너무 신기했다. 정말 버섯 같았다. 이게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신기했다.
◦ 첫 머리에서 감탄을 했는데 들어가서 오른 쪽 가파르고 미끄러운 언덕을 기다싶이 올라가자 거기에는 더 많은 버섯(?)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 정말 신의 조화로다!!!
◦ 앞에서도 언급 했지만 250만 년-1만 년 사이에 터진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쌓인 위에 용암이 덮혀, 무른 화산재는 더 깎기고 단단한 용암은 덜 깎기어 버섯 모양이 되었단다.
지하 도시 데린구유 |
◦ 이곳에서 실제로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기독교 박해를 피해 250년간 살아단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햇빛을 보지 못해 팔 다리 기형아가 탄생하기도 했단다. 250년!!! 30년을 1대로 보면 8대가 이 지하 도시에서 일생을 보낸 것, 어떤 사람을 평생 해를 보지 못하고 태어나 죽은 이도 있었단다.
우리의 친구 권오기 장로가 내 뱉은 한마디.... "예수가 뭐길래..."
*로마의 '카타콤베'는 지하 묘지이고 이곳은 사람이 기독교 박해를 피해 의도적으로 건설해 실제로 사람이 살있던 지하도시이다.
카파도키아를 더욱 경이롭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최대 3만 명까지도 수용이 가능한 대규모 지하 도시이다. 이곳의 형성시기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히타이트 시대 즈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본격적인 확장기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교육기관과 교회, 와인 저장고 등을 축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작은 규모의 마을부터 거대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총 40여개에 달하는 거주지가 발굴되었으나 오늘날 일반인에게는 소수만이 공개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가 Nevsehir에서 29Km떨어진 곳에 위치한 데린구유 지하도시이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인 데린구유는 1965년에 처음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나 실제로 관람할 수 있는 구역은 총 면적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다란 통로 곳곳은 무너져내린 곳도 많지만 놀랍게도 내부의 환기시설은 아직도 잘 작동하고 있다. 데린구유 지하 도시는 총 깊이가 55m에 달하는 8층으로 이루어졌다. 1층과 2층에는 마구간과 포도주 압착기, 돌로 만든 두개의 긴 탁자가 놓여져 있는 식당 혹은 교실이 위치하고 있고 3, 4층에는 거주지와 교회, 병기고, 터널이 있다. 십자가 모양의 교회, 지하 감옥 및 묘지는 지하층에 위치해 있다. |
터키석 매장에 들르다
◦ 의무적으로 들러야 하는 여러 매장 중 하나인 터키석 매장에 들렀다. 코가 높고 가슴 볼륨이 대단한 아가씨가 우리를 맞았다.
터키석은 보관에 굉장히 유의해 주셔야합니다. 터키석은 땀, 기름, 화장품에 의해서 색상이 변질되기 때문에 손을 씻을 때는 반드시 빼고 씻으셔야합니다. 순수하면서 청색을 띄는 것은 매우 희귀하답니다. 터키석은 지닌 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보석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대에 하늘과 바다를 연결시켜준다고 믿었다고 하네요. 또한 부적으로 사용되어 부정적인 에너지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답니다. |
◦ 터키, 파키스탄, 중국 등지에서 많이 산출되는 보석
◦ 터키에서는 손재주 좋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세공으로 만들어짐
◦ 터키석이 파란색을 띤 보석이란 사실까지 처음 안 기록자는 그리 비싸지 않아서 妻에게 U$100짜리 목걸이를 하나 선물했더니 여자 일행들이 처에게 ‘시집 잘 왔다’고 추겨 세웠다. 무척 쑥스러웠다. 나 말고도 몇몇이 터키석을 산 모양....
◦ 매장에서 나와 매장 마당에서 또 한 번 권오기 회원의 리드에 맞춰 ‘맷돌체조’를 하여 이를 본 터키인들을 놀라게 했다. 고개와 허리를 숙여 심호흡으로 들이 쉰 다음 허리를 꺾으며 내지르는 “합” 소리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따르르르르”를 할 때는 우리도 우습지만 주위의 시선을 모두 모으게 하고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맷돌체조 만세!!!
「맷돌체조」세계화하다
항아리 케밥으로 점심 식사하다
◦ 말로만 들어 온 ‘항아리 케밥’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건장한 종업원 두 사람이 작은 식당용 수레에 항아리를 싣고 와 우리 일해 중 경기도 광주에서 온 분의 부인이 앞으로 나가 우리나라 떡시루 밀봉 하듯 밀가루로 밀봉한 것을 제거하고 항아리에 담긴 음식을 네모난 용기에 부었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고 실제로 맛도 우리 식성에 맞았다.
◦ 타원형의 용기(우리나라 옹기 초벌구이 한 듯 불그스레한 옹기)에 양고기와 여러 가지 야채와 양념을 넣은 후 우리나라 오리구이 하듯 항아리 채 구워낸 음식이다.
◦ 터키의 인기 스포츠 : 축구
*영국의 홀리건이 축구 관람하러 왔다가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초상이 든 화폐로 축구장 의자를 닦자 이를 본 케밥 식당 주인이 칼로 찔러 유럽컵 터키 개최 취소한 일 있음
◦ 터키탕 본래의 모습 : 샤워하고 맛사지하고 차 마심
*이것을 일본이 본 따서 여자가 맛사지, 퇴폐적으로 변질함
*일본의 ‘터키탕’을 한국이 본 따옴 - 터키 정부에서 터키탕 본래의 모습을 변질 시킨 「터키탕」 명칭을 쓰지 말라는 요청으로 한국에서 「터키탕」이 없어짐
앙카라 |
◦ 터키의 수도이자 터키 제3의 도시로 정치, 경제, 행정의 중심지
◦ 남아있는 유적지 없음
◦ 인구는 400만 명
◦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ATATURK)의 묘소가 있음
◦ 앙카라 시내에 「한국공원」이 있는데 우리가 이 앞을 밤에 지나감. 밤에는 공원의 문을 잠가서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버스에서 내려 철책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기만 함. 공원 안에서 커다란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철책에는 태극기와 터키 국기 문양이 선명히 보이게 장식 되어 있었다. 그리고 탑 모양의 조형물이 있었는데 이는 충혼탑이라 했다.
◦ ROYAL CARINE HOTEL에 투숙
☼9월 29일☼
◦ 앙카라 ↔ 이스탄불 : 400Km로 5-6시간 소요
◦ 터키의 학제 : 8년의 의무교육
*초등 5년, 중학교 3년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교하는 학생들 : 시골 초등학생까지 교복을 입음
*국가에서 교복 입도록 통제하지는 않지만 대개 교복 입음
◦ 고등학교 - 실업고등
- 공업고등
- 인문고등
*직업학교가 많음
◦ 대학은 국립이 많음. 학비가 거의 무료이고 장학금 제도 완비, 기숙사가 많음
*100%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가 많음
*1-4학년 : 실무교육을 많이 함.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실무에 임할 수 있음
◦ 의원 내각제이고 대통령은 얼굴 마담 역할이나 하고 실제로는 수상이 통치
◦ 대통령과 총리의 임기는 4년이고 국민 직선 투표로 선출
◦ 군 입대
*고졸 이하는 15개월 간 복무
*대졸 - 15개월 간 사병으로 복무하는 것과
- 3년을 장교로 복무하는 것 중 택일
*1512유로(한화로 7,000만원 정도)를 내면 기초군사훈련만 하고 군 면제
◦ 군대 안 갔다 오면 친구들에게 놀림 당함
◦ 군 복무 지역
*위험지역 - 돈 없고 빽 없는 집 자녀
*안전지역 - 유력 인사 자녀
◦ 시내버스 안에서 노인들에게 자리 양보하는 게 필수
- 안하면 모두 눈길(눈총) 보냄
이스탄불 |
◦ 출발지였던 이스탄불에서 서쪽으로, 그리고 서쪽 해안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중부를 거쳐 다시 이스탄불로 되돌아 왔다.
◦ 보스포러스 해협 위에 걸린 현수교(懸垂橋)인 제1대교를 건너 이스탄불 시가지를 눈으로 구경하며 들어갔다. 전체적인 인상은 ‘복잡하다’였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그리 넓지 않은 길에는 왠 차들이 그리 많은지.... 교통 지옥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도시다. 여기가 터키라는 걸 느끼게 하는 것은 거대한 모스크에 치솟은 첨탑이다. 크고 높아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이슬람 사원이다.
◦ 이스탄불 관광은 걷는 투어가 많단다. 그리고 유적지가 많은 것도 이스탄불 관광의 특징이다.
◦ 로마 문화 → 비잔티움 문화 → 오스만터키 문화
*비잔틴 = 동로마
◦ 토인비가 말하길 이스탄불은 ‘운명이 살아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라 했다.
◦ 1500년 전에 쌓은 성벽이 우리가 묵은 호텔(CITY WALL HOTEL)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있다.
◦ 십자군 전쟁 시 로마를 출발한 십자군이 이스탄불(당시는 콘스탄티노풀)을 지나 출정
*십자군 전쟁은 1095년에 시작하여 1270년까지 175년 간 지속됨
*당시 ‘성지 순례를 하면 죄를 사하노라’라는 로마 교황청의 발표로 성지 순례자가 많았다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투르크족이 성지인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크리스트교 순례자를 박해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자원하여 모인 110만 명에 이르는 십자군이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출정하게 되엇다.
*십자군 전쟁의 결과 - 십자군은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① 교황과 봉건 영주(기사)의 세력은 약화된 반면, 왕권이 강화되었다.
② 도시와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③ 유럽인의 시야가 넓어지게 되었다.
◦ 터키인들의 이상한 행동, 턱을 올리면서 혀를 찬다. 이는
‘안한다’ 또는 ‘안먹는다’ 등 부정을 표현하는 방법
◦ 흑해(黑海) : 흑해는 바람이 많이 불어 늘상 풍랑이 심해 배를 타고 고기잡이 나간 어부의 아내는 ‘남편이 사고를 당할가 봐 가슴이 새까맣게(黑) 탄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 「닥터 피쉬」라는 물고기 : 온천지대의 따듯한 물에서만 서식하고 욕객의 피부 각질을 뜯어 먹는 물고기로 무좀이나 건선, 아토피 피부병 환자의 환부를 쪼아 피부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에서는 이 물고기의 외국 반출을 금지하고 있다.
◦ 1999년 터키 대지진 : 진도 7.6으로 전후 20Cm, 상하 80Cm 진동한 지진
*지진 전에 지은 건물들은 벽돌 강도가 낮았고, 철근도 규격 미달 제품을 썼으므로 화를 키움
*지금은 엄격한 내진 설계를 하여 시공
*지진 후 연 평균 7%의 고속 성장 지속
◦ 터키에 있는 현대자동차 공장 - 연간 10만대 생산
*종업원들 : 세계 유수의 공장에서 근무하는데 대해 자부심 느낌
◦ 난방 - 라지에터를 사용하여 더운 물로 공기 난방. 겨울에는 갈탄을 때서 난방
◦ 가정집에서는 샹들리에 조명을 좋아함
◦ 집안 바닥은 모두 카페트 깔아 놓음
◦ 단독 주택은 거의 없고 6-7층의 다가구 주택이 많음
◦ 집은 구입 하던가 월세로 삼 - 전세 제도가 없음
*월세 : 보증금으로 월세 2개월 치를 내고 월세 100만 원 등
◦ 집은 재산이 아니라 ‘거주’의 개념
◦ 물가가 비싸서 경제면에서 효율적인 대가족제도 선호함
◦ 자동차를 많이 가짐. 이스탄불 시내에는 1000만 대의 자동차가 있음
◦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늘어나자 결혼 연령 높아짐
*자녀가 보통 2-3명이지만 차츰 1명의 자녀 가지는 경향 늘어 남
◦ 매 맞는 남성이 늘어 남
◦ 식당에서 써빙은 남자가 하고 여성은 주방 일 봄.
*우리가 9일 간 여행하는 동안 식당에서 여자를 본 일이 없었다. 아직은 이슬람 전통으로 여자가 바깥일을 하는 것을 경계하는 풍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감
◦ 가정에서도 여자가 음식 만들고 남자는 날라다가 식탁에 차리는 게 보편적임
◦ 담배에 대해 사회가 관대한 편임. 그러나 공공 장소나 공항에서는 금연.
*父子가 한자리에서 담배를 피움
*가끔 중학생이 가이드에게 ‘담배 1가치 달라’고 해 황당해 한 경우 있음
◦ 터키인들의 평균 수명 - 68세
◦ 할례는 여자는 하지 않고 남자만 함
◦ 가정 생활 : 한국과 거의 비슷
◦ 이스탄불의 도시 구조 : 아시아 지역 - 거주 지역
유럽 지역 - 일터
◦ 보스포러스 제1대교 : 길이 1Km, 높이 63m.
*연말에 불꽃놀이를 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임
*건설 당시에는 걸어서 건너도록 허용 했으나 자살자가 너무 많아 지금은 걸어 통행하는 걸 불허
◦ 이스탄불시의 넓이 - 서울의 3배
☼9월 29일☼
◦ 오늘의 모든 일정은 모두 이스탄불 시내에서 이루어진다. 길게 타던 버스 투어가 없어서 좋으나 막힌 이스탄불 시내를 다니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
보스포러스 크루즈 |
◦ 보스포러스 크루즈는 유럽과 아시아의 사이, 지중해에서 흑해로 들어가는 좁은 바다, 해협 유람선 관광이다. 유람선을 타고 1시간여를 달리며 아름다운 이스탄불을 관광 하는 것. 맑은 지중해, 푸른 하늘, 옛 도시와 어울린 그림엽서 속에 빠져들었다.
◦ 일행 남자들은 전망이 좋은 탁 트인 2층에서, 여자들은 모두 1층 선실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가며 유람을 했다. 2층에서도 1층에서 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 와!!! 좋다.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 썩 어울린다. 깨끗한 양안(兩岸)의 건물들.... 완전 그림이다. 바닷가에 정박하고 있는 크고 작은 아름다운 배들도 좋은 그림을 그리는데 한 수 더 보탰다. 그림 같은 집과 수목들도 아름답다.
◦ 흑해 쪽으로 가서 제1대교 밑을 지나 제2대교까지 올라가 되돌아오는 코스다. 긴 현수교를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 보다가 바로 밑을 지나는 기분도 아주 좋았다.
◦ 가는 길 왼편에는 「돌마바르체 궁전」이 보이고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블루모스크」까지 시야를 돋보이게 했다. 들었는데도 이름은 모르는 대학교 건물, 성채 요새...
◦ 우리 곁을 흑해에서 나오는 초대형 화물선이 2척이나 지나갔다. 선체의 길이만도 어림으로 200m는 되는 것 같다. 보스포러스 해협이 물류 이동에 커다란 몫을 함을 체감했다.
소피아 대성당 |
◦ 터키 관광에서 가장 먼저 꼽히는,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꼭 찾는 곳이 소피아 성당이다. 그리스도교 성당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다시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바뀌어 온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이 어제 지은 듯 화강암으로 온갖 치장을 하고 단청으로 완전 새 건물로 만들어 전국 사찰이 다 똑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고 옛스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데 비해 여기 소피아 대성당은 고색창연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 1500년의 역사가 말하듯 중앙에 기둥 하나 없는데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당시에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은 불가사이한 일이다.
◦ 횟칠한 걸 벗기자 예수와 마리아의 벽화가 나온 것이 정말 감탄스러웠다.
성소피아성당(聖sophia)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 걸작인 성당으로 하기아 소피아라고 한다. 이곳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호칭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어졌고, 터키 지배하에서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되어 ‘아야 소프야’라고 불리었으며, 1935년부터 현재까지 미술관이 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가 ‘성스러운 예지(叡智)’(하기아 소피아)에 바친 구당(舊堂)(325) 대신에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새로운 구상으로 재건되었다. 안 길이 81 m, 너비 70 m의 광대한 3랑(廊) 바실리카 플랜과, 지름 약 33 m의 거대한 원개(圓蓋)를 교묘히 조합시킨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본당(nave) 중앙에 4개의 대지주를 세우고 그 위에 대형 아치와 펜덴티브 구법(構法)에 의한 대원개를 덮고 있다. 중앙 돔 주위에는 40여개의 창문이 있다. 동서의 긴 방향으로 가해지는 횡압(橫壓)을 대소의 반원개(半圓蓋)로 받치고, 남북 방향의 횡압은 대지벽(大支壁)(563 증설)으로 받친 매우 독창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설계자는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라고 하는데, 100명의 감독관과 1만명의 공인이 5년 10개월 만에 완성하였다. 그들의 재능이 만들어낸 풍부한 내부 공간과 동산을 방불케 하는 장대한 외관을 보고 537년 12월 헌당식(獻堂式)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감격하여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에게 이겼노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헌당 당시, 당내에 빛나고 있었을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아이코노클래즘(성상 파괴운동) 때에 없어지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 투르크의 점거하에 거의 없어졌으나, 근년의 조사에 의하여 앞방[前室]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석회칠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어,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끌고 있다. 당내에는 대소의 주두(柱頭) 조각으로 대표되는 비잔틴의 세련된 장식 조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
그랜드바자르 |
◦ 소피아 대성당을 보고 15분 정도 걸어서 찾은 곳이 그랜드바자르다. 시장의 중앙에 큰 통로가 있고 양 옆으로 5,000개나 되는 점포들이 온갖 상품들을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주변의 성점을 합하면 1만 개나 된단다.
이스탄불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그랜드 바자르’라고 알려진 곳이 있다. 터키어로
는 ‘카팔르 차르쉬’라고 부른다. ‘카팔르-막히다’, ‘차르쉬-시장’이란 뜻으로 점포
들이 모여 있는시장에 지붕이 덮여 있어서 ‘카팔르 차르쉬(KAPALI CARSI)’라고 부른다. 그랜드 바자르는 원래 비잔틴 제국 시대 때에 마굿간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오스만 터키 제국의 술탄이었던 메흐멧 2세 때 두 개의 큰 시장이 이곳에 섰는데 번창하면서 주위에 여러 개의 Han(한: 큰 상점)들이 지어졌고 이것들을 연결되면서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641년 처음으로 지을 때는 나무로 지어진 시장이었는데, 그 후 잦은 화재와 열두 차례의 지진을 겪으면서 무너졌다. 1894년에 시장은 다시 재건되었으며, 1954년에 마지막 화재를 겪은 후에 지금의 석조 건물로 다시 지었다. 석조로 지어진 시장에 지붕이 있어서 ‘카팔르 차르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시장 면적은 20만㎡에 이르며, 시장 안에는 65개의 거리에 상점, 카페, 식당, 이슬람 사원 등 약 5,000여 개의 상점들이 있으며, 이곳에는 각종 금·은·동 세공품, 장식품, 보석류, 카펫, 공예품, 가죽제품, 도자기, 토산품 등 각종 제품들을 취급하고 있다. |
◦이곳은 쇼핑을 하기 위해 찾는다기보다 하나의 관광지를 찾는다는 생각으로 둘러보라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주어진 시간 안에 골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정말 많은 가게와 함께 많은 종류의 상품을 팔고 있었다. 각종 금·은·동 세공품, 장식품, 보석류, 카펫, 공예품, 가죽제품, 도자기, 토산품 등 각종 제품들을 취급하고 있다.
◦ 기록자는 작은 물담뱃대 1개를 샀다,. 그리 색깔이 요란한 볼펜도 3자루 샀다.
◦ 우리가 ‘TAXY’로 쓰는데 터키에서는 ‘TAKSI’로 표기하더라!!!
◦ 터키 여행 중 단 한번 「고려정」이란 식당에서 한식으로 오늘 저녁 식사를 했다. 한국에서라면 아무 특징 없는 식단이었지만 꿀맛이었다. 우리 입에는 역시 한식이 최고.
◦ 시티 월 호텔(CITY WALL HOTEL)에 체크 인
☼9월 30일☼
◦ 터키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 가방을 호텔 로비에 두고 널찍한 호텔 마당에서 이것도 마지막, 맷돌체조를 했다.
데오도시우스 성벽 |
◦ 우리가 묵은 시티 월 호텔(CITY WALL HOTEL)에서 몇 걸음 안가 모퉁이를 돌아가자 성벽이 나타났다. 우리의 호텔 이름도 이 성벽 이름에서 따온 것.
City Wall이라고 부르는 Theodosius 성벽을 보기 위하여 트램이 가는 방향을 보면 길 양쪽으로 성벽이 보인다.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쌓기 시작한 성벽을 413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완성하였다. 성벽 바깥 쪽에는 넓이 18m의 해자를 만들어 유사시에는 9m의 물을 채울 수 있도록 하였고 해자 뒤에는 총안 銃眼이 설치된 성벽을 쌓았다. 9m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두께 2m, 높이 9m의 외벽을 쌓으면서 사이사이에 96개의 탑을 배치하였으며 다시 넓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두께 5m, 높이 12m의 내벽을 세우는 식으로 여러 겹으로 쌓아서 축성한지 1,000년이 가까워지도록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1452년 우르반이라는 독일 기술자가 거대한 대포를 개발하여 먼저 비잔틴제국에 사용할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든든하게 쌓은 성에 대한 과신때문이었는지 혹은 새로운 대포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지모르겠으나 콘스탄티노플에서 거절을 했다고 한다. 우르반은 오스만 투르크 쪽에 의견을 물었고 호시탐탐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을 노리고 있던 메흐멧 2세가 받아들여서 1453년 대포를 완성하게 된다. 당시의 도로 사정으로는 실전에 배치하기 위해서 운반하기에도 어려울 정도의 거대한 대포였고 한 번 발사한 다음 재발사 하려면 두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고... 8주 동안 쉬지 않고 퍼부운 포탄을 이기지 못하고 난공불락의 성이라던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이 무너지고 1,000여 년을 이어온 비잔틴제국도 1453년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
◦ 호텔을 출발해 한참을 이 성벽을 따라 움직였다. 이 성벽이 이스탄불을 지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단다. 그러나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는 법, 이 성벽이 무너지자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 둘레가 14Km이고 4각형 성탑으로 정면 방어용
◦ 외성벽과 내성벽 사이에 해자(垓字)를 둔 철옹성이어서 외침에 끄떡도 없었음
피에르롯띠 |
예쁜 터키 아가씨 둘을 혼자 차지한 천세창 회원
◦ 이스탄불 전경이 바라보이는 피에르롯티 언덕에서 차 한잔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 산 아래에서 곤도라를 타고 올라갔다.
◦ 이곳의 카페테리아는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롯티가 표현 한대로 유리바다에 구르듯 빠르게 움직이는 크고 작은 배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석양의 황금빛으로 물든 골든 혼의 모습은 가슴 벅차기까지 하다. 왠지 신비스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곳에 앉아 마시는 차 한잔은 독특하기만 하다.
◦ 이곳은 이스탄불의 공원묘지다. 그런데 터키 사람들은 우리처럼 묘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둑어둑한 저녁에 아기엄마 혼자서 유모차를 끌고서 공동묘지인 피에르롯띠 언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가롭게 산책을 한다. 이들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을 안에 무덤과 주택을 마련하고 함께 그 공간을 이용한다.
◦찻값이 여행 경비에 포함되었기에 우리는 느긋이 홍차를 앞에 두고 아름다운 보스포러스 해협을 내려다보았다. 해협을 통과하는 배들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원경으로 보스포러스를 넣어 사진도 찍고 근경으로 찻집 탁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귀국해서 사진을 보니 낭만적인 분위기가 그저 그만....
돌마바흐체 궁전 |
◦ 방이 243개난 되고 건축비가 5,000억 원이나 들어간 대단한 궁전이다.
◦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따 지었다니 지은 목적이 호화로운 궁전을 짓고자 함이다.
◦ 이 궁전을 짓기 위해 과도하게 국력을 낭비해 오스만터키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니 아이러니....
◦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ATATURK)가 살았던 궁전으로 아타투르크가 이곳에서 9:05에 서거해서 지금도 09:05를 가리키며 멎어 있는 시계가 궁전 안에 걸려 있다.
◦ 여름에만 사용하도록 만든 「여름궁전」으로 난방 시설이 없다.
◦ 바닷가를 매립하여 지었기에 석재를 사용하면 침하하여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기둥은 속은 나무로 하고 나무의 겉만 대리석으로 입혀 장식함
◦ 세계에서 5번째로 크고 호화로운 무게가 4.5톤이나 나가는 샹데리아가 있고 값진 도자기와 호화로운 집기들로 가득하다.
◦ 커다란 홀은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 내부의 어떤 유물도 만지지 말 것. 전시물은 모두 실제로 사용하던 것
돌마바흐체 宮殿 Dolmabahce Palace 돌마는 '꽉 찼다'라는 뜻이고 바흐체는 정원이라는 뜻. 보스포러스 해협의 조그마한 땅을 메우고 정원(바흐체)을 조성하였다 하여 돌마 바흐체라고 한다. 이 궁전은 오스만 트루크 제국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1843년부터 1856년 까지 13년간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하여보다 더 화려 하게 건축 하였다. 내부의 장식을 위해 순금 14톤, 은 40톤을 사용하였다 고 하며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이 궁전의 건설로 인해 빚더미에 올라 않고 그 여파로 침몰을 시작 했다. 이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궁의 하나로서 대칭구조의 3층 건축물 로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이 있다. 외부는 보스포러스 해협 가에 양 날개를 편 대칭형 건물로 600m로 중앙 홀의 남쪽이 공적인 일을 하였던 셀람륵이고 북쪽이 사적인 여성의 영역 이었던 하렘이 있다. 들어서자 마자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무게 4.5톤 짜리 샹들리에가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방마다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 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유명한 헤레케 카페트가 깔려 있으며, 유난히 화려한 크리스탈 샹드리에가 눈에 많이 띄었다. 화려한 석조 건축물로 세워진 이 궁전은 원래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1814년의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31대 술탄인 압둘마지드에 의해서 1856년에 재건되었다. 잘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유럽 스타일을 본따 지어졌는데 특히 유럽에서 보내온 수많은 헌상품(獻上品)과 호화롭게 꾸며진 사방의 벽들을 보면 당시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 시대 후기 6명의 술탄이 일부 사용했다. 19세기 초에는 마흐멧 2세의 여름 별장 이었고, 1856년 압둘메짓은 톱카프 궁전을 떠나서 이곳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터키공화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초대 대통령 아타튜르크도 이스탄불 방문 시 이 궁전에서 체류하였으며, 1938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
◦ 궁전 앞에서 마침 임무교대를 한 병사들이 지나가는 장면과 맞닥뜨렸다.
병사 한 명이 부동자세로 근무하고 있는 장면은 마치 마네킹 같았다. 특히 단도(短刀)를 허리 뒤에서 잡고 있는 자세가 특이했다.
◦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야 하고 관람을 마치고 나간 인원만큼만 들여보내 긴 줄을 오래 동안 섰다.
◦ 정원도 매우 아름답게 꾸며 놓아 사진을 여러 컷 찍었으나 궁전 내부는 사진 촬영을 못하게 해 벗님들께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도네르 케밥으로 점심식사하다
◦ 구운 닭고기를 곁드린 도네르 케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접시에 구운 닭고기와 야채 썬 것, 그리고 밥을 담아낸 케밥 식사를 햇다. 터키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양고기와 쇠고기, 닭고기 요리가 많이 나왔는데 우리는 닭고기 요리를 여러 번 먹었다. 느끼한 것이 많았는데 여기 것은 괞찮았다.
*어제는 쇠고기를 구어서 만든 「아데나 케밥」을 먹었다.
라이브 인 리더(LIVE IN LEATHER)에 들르다
◦ 한국인이 경영하는 선물 용품 매장 「LIVE IN LEATHER」에 들렀다.
장미기름, 올리브유, 가방, 혁대 등등 선물 용품을 파는 매장에 들렀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매장이라 많이들 구입했다.
◦ 시식용으로 터키 떡이라고 주는데 여러 개 집어 먹었다. 떡이라기 보다 과자에 가까웠다. 크기와 모양은 밀크캬라멜 비슷.
◦ 여기서 산 물건은 이 가게에 맡겨 놓고 걸어서 「톱카프 궁전」을 관광 하고 찾아가기로 하고 가게를 나섰다.
톱카프 궁전 |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궁전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톱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 관심을 두고 볼 것이 많고, 특히 자기, 무기, 직물, 보석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이곳의 전체 규모는 원래 크기보다 상당히 축소된 상태이다. 본래의 규모는 오늘날의 시르케지 철도역과 귈하네 공원을 포함하면서 마르마라 해 방향의 아래쪽까지 분포했다. 비록 구조적으로는 메흐메트 2세 때의 기본 설계를 간직하고 있지만, 불규칙적으로 넓게 퍼져 있는 건축물의 집합한 형태라서 특별한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새롭게 술탄이 될 때마다 모두 필요에 의해서 궁전에 공을 들였고, 대화재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나면서 당시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건축적인 조화를 거의 보존하지 못했다. 톱카프 궁전 단지는 비룬(외정)과 엔데룬(내정) 그리고 하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제각각 안마당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는데, 이 안마당을 연결하여 많은 문을 만들어 복잡하게 조성된 미로가 갖춰져 있다. |
◦ 여기서도 수비하는 군인이 총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긴하나 돌마바흐체 처럼 엄격하지 않은듯 했다.
◦ 마침 보석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서 관람했는데 보석들의 가치가 엄청나 보였다.
◦ 내부에 있는 역사적 전시물들을 보긴 했는데 기억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
◦ 관람을 하고 궁전의 뒤로 가니 보스포러스 해협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바람도 쏘이고 사진도 찍고 쉬기도 하고...
◦ 일행이 다 오지 않아서 한참을 기다렸다. "○○○만 오면 다 온 거야!”라고 할 정도로 늘상 뒤처지는 친구가 있어서....
히포드럼 광장 |
◦ 술탄아흐메트 사원(블루 모스크) 바로 앞에 있는 광장으로 로마시대 대경기장 유적이다. 서기 203년 이곳에서 전차경주가 최초로 열렸다고 하며 당시에는 세계의 각 지역에서 가져온 기둥, 조각상, 오벨리스크 등이 이곳에서 전시되었다고 전해진다.
◦ 지금은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에서 만들었다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479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들여온 뱀 머리의 오벨리스크, 940년 콘스탄티누스 7세가 만든 콘스탄티누플 오벨리크가 남아 있다.
◦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에서 만들었다는 그 거대한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를 당시 어떻게 여기까지 옮겼으며 또 그 거대한 석조물을 어떻게 일으켜 세웠는지 불가사이한 일이다.
블루 모스크 |
◦ 이 사원에 입장해 기도를 하기 위해선 먼저 발을 씻어야 하는데, 마침 우리가 방문할 때가 곧 기도 시간이 닦아 오기에 사원 밖에서 수도에서 발을 씻는 장면을 목격했다. 발 씻는 청년의 양해를 구하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수도와 앉을 자리가 20여 개나 되었다.
◦ 천정 돔 내부를 푸른 색 타일로 꾸며서 블루 모스크라고 하나 정식 명칭 은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란다. 밖에서 본 전체 모습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돔이 어울려서 하나의 건물을 이루고 있어서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 블루 모스크의 정면에서 우리 일행들 전체 사진을 찍었는데 어디서 갑자 기 또 개새끼 한 마리가 사진 화면 중앙에 떠억 들어와 찍혔다. 참 기가 막 히고 코가 막힌다!!! ㅋ ㅋ ㅋ .....
터키를 대표하는 사원이며, 사원의 내부가 파란색과 녹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본디 명칭은 술탄아흐메드 모스크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했다. 우뚝 서 있는 첨탑 6개는 술탄의 권력을 상징하며, 이슬람교도가 지키는 1일 5회의 기도를 뜻하기도 한다. 사원 앞의 정원에는 언제나 화사한 꽃이 피어 있어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한다.이스탄불에 있는 모스크. 〈블루 모스크〉는 영어 통칭으로, 정확하게는 〈아흐메트 1세의 모스크〉. 모스크 내벽을 장식하는 장식 타일의 기조가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시난 다음 가는 훌륭한 건축가로서 알려진 궁정건축가 세데흐칼 메흐메트 아가에 의해서 건조되었다. 1609년 착공해서 17년에 완성. 오스만 투르크의 고전기 건축을 대표한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고대 경기장의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먼 곳에서도 그 장대한 돔과 미너렛을 바라볼 수가 있다. 모스크는 아흐메트 1세의 묘, 마드라사, 무료급식소, 구호소와 함께 오스만 투르크시대의 독특한 왕립시설 퀄리에(kulliye)를 구성하며 규모도 전체의 구성도 시난에 의해서 세워진 세흐자데 쟈미(이스탄불, 1543~48)를 기준으로 하고, 균형을 이룬 구성을 취하는 규모가 장대한 중앙회당식의 예배당과 넓은 중정으로 되어 있다. 직경 23.5m에 이른 큰 돔은 4개의 거대한 대리석제의 원주로 지지되어서 광대한 공간을 창출하고, 다수 회중의 수용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대 돔의 사방에는 반돔을 두었다. 내벽은 2만1000장을 넘는 청, 록, 흑, 홍 등의 화려한 이즈니크산 타일로 장식되어 있으며, 특히 꽃나무나 과일을 표현한 갤러리의 타일이 가장 아름답다. 예배당의 네 구석과 중정 양 구석에 설치된 오스만 제국 건축의 독특한 가늘고 앞이 뾰족한 6기의 미너렛은 메카의 성 모스크의 7기의 미너렛 다음가는 훌륭한 것이다. 넓은 중정에는 소규모이지만 목욕용 우물이 갖추어져 있다. |
◦ 여자들이 쓴 히잡 : 그 질이 천차만별
*부자집 여자들은 고급 실크 제품을 쓰고
*가난한 집 여자들은 면제품을 씀
◦ 동방정교의 대주교가 이스탄불에 있는데 이 분이 이슬람의 수장(首長)
◦ 러시아 정교와 아르메니아 정교의 뿌리는 동방정교
◦ 이슬람 사원의 창에는 모두 굵은 철망 씌움
- 도둑 예방
- 집시들이 밤에 몰래 들어가 자는 것 방지
모든 여행 일정 마치고 공항으로...
◦ 21:20에 KE956편으로 이스탄불 출발하여 인천으로
☼10월 1일☼
◦ 10:40 예정보다 20분 빨리 인천공항 도착 그리고 해산(解散)
◦ 작은 사고 하나도, 아픈 사람도 하나 없이 여행을 마치게 됨을 큰 손뼉으로 축하드립니다.
유익하고 보람 있고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BYBY!!!
첫댓글 역시 구천아재는 다재다능하고 부지런하고 초능력 을 가진 멋진 친구여! 정이많아, 오랫동안 안사11회를 위해 고군분투하여주면 더없이 고맙고...
회곡선생, 그건 나를 피상적을 아는 것이지.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르고 하는소릴세. 그런 소릴 말게나!
좋은 곳 다녀오셨네 덕택에 구경 잘 하였네.
터키여행은 참 좋았는데 엊그제 지진뉴스는 하늘이 무심한듯 씁쓸하기도 하고, 터키민족은 우리민족과 가장 가까운 혈족이란데?
동감! 우리가 갔다가 온 곳에서 그런 대지진이.... 남다른 관심이 가긴 하나 그저 안타까울 뿐..... 우리의 형제국 터키여서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