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회] 여성들과 ‘염문’ 프란체스카와 재혼
독재자 이승만 평전/[6장] 태평양전쟁기 이승만의 활동과 과오 2012/03/21 08:00 김삼웅이승만은 미국 망명시절에 벽안의 여성과 만나 재혼을 하고, 공사간에 몇 여성과 ‘염문’도 뿌렸다.
한국을 두번째 떠날 때 이미 부인 박승선과는 결별한 상태여서 재혼을 하는 데는 달리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박승선과는 여전히 호적상의 부부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승만이 1934년 프란체스카 도너와 재혼할 때까지 20여 년간 하와이에서 홀아비를 은근히 ‘사모’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사진결혼을 하여 하와이에 건너와 나이 많은 남편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던 똘똘한 여성들로서 하와이 여러 섬에 세워진 한인교회 및 ‘대한부인구제회’ 등 단체를 통해 이승만의 정치자금을 거두는 일 등에 앞장섰다. (주석 22)
이와 같은 관계가 ‘일반적’이었다면 ‘특수’한 관계의 여성도 없지 않았다.
첫 번째는 노디 김, 한국명 김혜숙이다. 1905년 8세 때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이민 온 그녀는 1915년 호놀룰루 카아후마누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국 본토로 건너가 오하이오주의 우스터 고등학교를 졸업, 이어서 이 지역 명문 오벌린 대학에 진학하여 역사ㆍ정치학을 전공하고 1922년 졸업하였다. 노디 김은 졸업 뒤 하와이로 돌아와 워싱턴에 가 있던 이승만을 대신하여 한인기독학원 원장을 맡아 일하면서 한인기독교학원, 동지회, 대한인부인구제회, 한미친선회, 한미상담회 등 이승만 계열 단체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그녀는 이승만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고, 지극 정성으로 이승만을 보필하였다.
이런 관계로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는 두 사람 사이를 둘러싸고 온갖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 사이에 사생아가 출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노디 김이 결혼한 남자의 아이로 밝혀졌다. 노디 김은 해방 뒤 이승만 정부에서 외자구매처장과 대한부인회 이사, 그리고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와 인하대학 이사 등 요직을 역임하다가 1958년 하와이로 돌아갔다.
이승만은 미국 망명시절 임영신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임영신은 3ㆍ1운동 때 만세 시위로 6개월간 복역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충남공주의 영명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3년 미국에 유학하여 이승만과 만나게 되었다.
남가주대학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친 임영신은 1931년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에 이승만으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젊은 20대 미혼 임영신이 50대 재혼남 이승만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임영신은 이승만의 이름에서 승(承)자를 따서 승당(承堂)이라는 아호를 지을만큼 이승만을 흠모하였다. 해방 뒤 프란체스카가 1946년 3월 한국에 올 때까지 일찍 귀국하여 돈암장 등에서 이승만의 비서 역할을 하고, 정부수립 뒤에는 이승만 내각의 초대 상공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이승만의 후처로서 대한민국 초대 퍼스트 레이디가 된 프란체스카 도너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1900년 6월 1일 소다수(水) 공장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가톨릭 집안이었다. 도너는 상업학교 졸업 뒤 스코틀랜드로 유학하여 영어통역관 자격증을 따고, 영어ㆍ독어ㆍ불어에 능통했으며 속기와 타자에도 재능을 보였다.
도너는 20대 초에 자동차 경기 선수와 결혼하여 실패한 상태에서 1933년 2월 제네바의 국제연맹본부에서 열린 국제회의 개막식 호텔 식당에서 이승만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간의 아픈 상처를 이해하면서 사귀게 되고, 1934년 10월 8일 뉴욕 뭉클래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승만은 만 57세, 프란체스카는 34세였다. 결혼예식은 한국인 목사 윤병구와 미국인 목사 홈스가 공동으로 집전하였다.
이승만이 서양여성과 결혼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하와이동지회 간부들은 심하게 반대했으나 막상 이들이 호놀룰루에 도착했을 때는 따뜻하게 환영하였다.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열심히 돕다가 해방 뒤 1946년 한국에 들어왔다. (주석 23)
주석
22> 유영익, 앞의 책, 166쪽.
23> 이 부분, 유영익, 앞의 책, 인용ㆍ발췌.
한국을 두번째 떠날 때 이미 부인 박승선과는 결별한 상태여서 재혼을 하는 데는 달리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박승선과는 여전히 호적상의 부부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승만이 1934년 프란체스카 도너와 재혼할 때까지 20여 년간 하와이에서 홀아비를 은근히 ‘사모’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사진결혼을 하여 하와이에 건너와 나이 많은 남편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던 똘똘한 여성들로서 하와이 여러 섬에 세워진 한인교회 및 ‘대한부인구제회’ 등 단체를 통해 이승만의 정치자금을 거두는 일 등에 앞장섰다. (주석 22)
이와 같은 관계가 ‘일반적’이었다면 ‘특수’한 관계의 여성도 없지 않았다.
첫 번째는 노디 김, 한국명 김혜숙이다. 1905년 8세 때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이민 온 그녀는 1915년 호놀룰루 카아후마누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국 본토로 건너가 오하이오주의 우스터 고등학교를 졸업, 이어서 이 지역 명문 오벌린 대학에 진학하여 역사ㆍ정치학을 전공하고 1922년 졸업하였다. 노디 김은 졸업 뒤 하와이로 돌아와 워싱턴에 가 있던 이승만을 대신하여 한인기독학원 원장을 맡아 일하면서 한인기독교학원, 동지회, 대한인부인구제회, 한미친선회, 한미상담회 등 이승만 계열 단체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그녀는 이승만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고, 지극 정성으로 이승만을 보필하였다.
이런 관계로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는 두 사람 사이를 둘러싸고 온갖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 사이에 사생아가 출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노디 김이 결혼한 남자의 아이로 밝혀졌다. 노디 김은 해방 뒤 이승만 정부에서 외자구매처장과 대한부인회 이사, 그리고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와 인하대학 이사 등 요직을 역임하다가 1958년 하와이로 돌아갔다.
이승만은 미국 망명시절 임영신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임영신은 3ㆍ1운동 때 만세 시위로 6개월간 복역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충남공주의 영명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3년 미국에 유학하여 이승만과 만나게 되었다.
남가주대학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친 임영신은 1931년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에 이승만으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젊은 20대 미혼 임영신이 50대 재혼남 이승만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임영신은 이승만의 이름에서 승(承)자를 따서 승당(承堂)이라는 아호를 지을만큼 이승만을 흠모하였다. 해방 뒤 프란체스카가 1946년 3월 한국에 올 때까지 일찍 귀국하여 돈암장 등에서 이승만의 비서 역할을 하고, 정부수립 뒤에는 이승만 내각의 초대 상공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이승만의 후처로서 대한민국 초대 퍼스트 레이디가 된 프란체스카 도너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1900년 6월 1일 소다수(水) 공장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가톨릭 집안이었다. 도너는 상업학교 졸업 뒤 스코틀랜드로 유학하여 영어통역관 자격증을 따고, 영어ㆍ독어ㆍ불어에 능통했으며 속기와 타자에도 재능을 보였다.
도너는 20대 초에 자동차 경기 선수와 결혼하여 실패한 상태에서 1933년 2월 제네바의 국제연맹본부에서 열린 국제회의 개막식 호텔 식당에서 이승만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간의 아픈 상처를 이해하면서 사귀게 되고, 1934년 10월 8일 뉴욕 뭉클래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승만은 만 57세, 프란체스카는 34세였다. 결혼예식은 한국인 목사 윤병구와 미국인 목사 홈스가 공동으로 집전하였다.
이승만이 서양여성과 결혼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하와이동지회 간부들은 심하게 반대했으나 막상 이들이 호놀룰루에 도착했을 때는 따뜻하게 환영하였다.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열심히 돕다가 해방 뒤 1946년 한국에 들어왔다. (주석 23)
주석
22> 유영익, 앞의 책, 166쪽.
23> 이 부분, 유영익, 앞의 책, 인용ㆍ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