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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 여 행
전주는 삼한시절에는 마한 땅이었다가 삼국시대엔 백제 땅이 되어 완산이라 불리었고 통일신라 때인 경덕왕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신라에 대항해서 싸울 적에는 후백제의 도읍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 때에는 전주부가 되어서 제주도를 포함한 호남지방을 다스리는 전라도 감영의 소재지가 되었습니다. 1913년에 전주면, 1930년에 전주읍이 되었다가 1935년에 다시 전주부가 되어 완주군과 완전히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49년에 전주시가 되었습니다.
전주시는 흔히 조선 왕조를 일으킨 전주 이씨의 관향이며 많은 유적과 함께 아직도 옛 풍습을 존중할뿐더러 전통 문화의 아름다움을 잘 지켜 온 깨끗하고 조용한 문화예술의 도시로 표현됩니다. 그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전주의 웬만한 여염집치고 서화가 한두 폭씩 걸려 있지 않은 집이 없습니다.
전주 한지와 합죽선, 태극선과 같은 부채의 명산지인 것을 보거나, 비빔밥이나 콩나물국밥이니 오무가리탕이니 하는 갖가지 맛있는 음식의 본고장인 것을 보거나, 판소리의 중심지인 것을 보거나 이곳이 다른 도시들에 견주어서 전통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짙게 풍기는 도시임에는 틀림없습니다.(참고자료: 뿌리 깊은 나무· ‘한국의 발견’)
전주 한옥마을
전주 완산구 교동(校洞) · 풍남동(豊南洞) 일대 25만2000여㎡에 700여 채의 전통 한옥으로 이뤄져 있는 특별한 곳입니다. 을사조약 이후 전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부성의 서쪽 외곽을 주거지로 택했다고 합니다.
본래 상인이나 천민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차지한 일본인들은 현대적인 기술을 도입해 신식 건물을 짓고 도로를 정비하였습니다. 침입자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주 사람들이 풍남문 동쪽에 형성한 것이 바로 한옥마을입니다.
그러므로 일대에 한옥들이 들어선 건 100년 전. 따라서 수백 년이 넘은 고택은 거의 드물고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지어진 근현대 한옥이 대부분입니다. 해방 당시 한옥마을은 재력가들이 사는 동네였지만, 점차 퇴락해 슬럼화가 진행됐습니다.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정해지면서 개발이 어려워진 탓입니다. 당시 이 한옥보존지구에 들어 있는 한옥들은 모두 824채에 이르렀습니다.
오목대라는 곳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보면 그 언저리에 무리를 지어 들어선 팔백 채가 넘는 한옥들의 까만 기와지붕들이 고풍스런 아름다움의 장관을 이루어 전주의 고전 도시다움을 한눈으로 고스란히 읽게 해줍니다. 1999년 전주시가 이 일대를 전통문화특구로 지정하고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 새로운 명소로 부활했습니다.
팔작지붕의 한옥들이 조선시대 건축물과 함께 독특한 풍광을 빚어내고 있는 사이로 빛바랜 간판을 매단 이발소나 세탁소, 벽촌에서나 봄직한 허름한 구멍가게 등이 뒤섞여 시간을 40-50년 되돌려 놓은 것 같습니다. 손때 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한옥마을의 척추라고 할 수 있는 태조로를 따라 한옥마을 관광안내소와 전통 공예품 판매장, 공예품 전시관 등이 좌우로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전북지역 최초로 국제 슬로시티로 지정되었으며 미국 뉴욕타임즈에 국내·외 식도락가들이 꼭 한 번쯤은 들러야 하는 문화명소로 소개되며 전 세계 관광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풍남문(豐南門)
전주를 상징하는 전주 풍남문은 원래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습니다. ‘풍남’이란 ‘豊沛(풍패 ・ 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곳)’의 남쪽을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풍패’에 비유한 것입니다. ‘명견루’라는 별호도 있습니다.
원래 도성이나 읍성, 산성 등은 으레 성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 형식이자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조 43년(1767)에 당시 성내를 휩쓴 대화재로 불타버려 영조 44년(1768) 전라관찰사 홍낙인이 중건했지만 종전처럼 3층루가 아닌 현 모습으로 수축하여 이때부터 풍남문이라 불렀습니다.
1905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전주부성 4대문 중 풍남문만 제외한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지금의 풍남문은 1978년부터 3년에 걸친 보수공사로 복원한 것으로 성문 위에 세운 누각 위층의 기둥이 아래층의 기둥과 하나로 연결된 점이 특이합니다. 풍남문은 갑오농민전쟁의 현장이기도 합니다.(보물 제308호)
경기전(慶基殿)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은 신라 때 사람으로 이성계의 20대 조상입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후 역대 임금들이 건지산 기슭에 있다는 시조의 무덤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이 지나도 발견되지 않으니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조가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경기전 안에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이한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태종은 즉위 11년 되는 해(1410)에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이라 하였는데, 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주에 세운 ‘慶基殿’은 세종 때 붙인 이름입니다. 태조 어진은 난리 때마다 피란 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이 결과 전국에 있던 26점의 태조 어진이 모두 사라지고 전주 경기전 어진만이 조선시대에 그려진 진본으로 남았습니다.
1899년 광무2년에 이한의 무덤자리를 알리는 비석을 한 나무꾼이 발견하여 거의 천년 만에 그의 무덤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새로 찾은 무덤자리에다 봉분을 모으고 무덤 앞에는 제단을 쌓고 그 제단 옆에는 비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肇慶壇’(조경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철따라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시조묘인 조경단은 전북대학교 뒤편에 있습니다.
경기전이 특별한 이유는 조선 왕들의 어진과 함께 족보인 선원록, 고려사절요 등의 사서를 보관한 전주 사고가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주사고는 조선시대 4대 사고(史庫)의 하나로 1439년(세종 21) 사헌부의 건의로 지금의 전주시에 있던 경기전 안에 설치되었습니다.
처음에 실록들을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다가, 1445년 12월 서울 춘추관, 충주·전주·성주 사고에 각 1부씩 봉안하게 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모두 병화로 불타고 4대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았는데, 훗날 전주사고의 실록 원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습니다.
현존 건물은 1991년에 새로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주사고의 역사에 관한 전시물과 조선왕조실록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주 사고는 드라마 <궁>에서 궁 내의 비밀스러운 공간인 서고로 나온 곳이기도 합니다. 본전에서 전주 사고로 가는 길 우측으로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잡아끄는 아름다운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이 장소 또한 드라마 <궁>의 촬영지였습니다. 봄, 가을에 특히 아름다운 경기전은 드라마 <용의 눈물>, <왕과 비>, <명성황후> 등 많은 사극의 배경지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경기전의 경역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보물 931)을 봉안한 정전(正殿)과 조경묘(肇慶廟)로 나뉩니다.
전동성당(殿洞聖堂)
전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곳에 천주교 성당을 짓게 된 이유는 1791년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여기에서 효수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후 19세기 말에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면서 전주시에도 선교사가 들어왔습니다.
1891년에는 전주성당(현재의 전동성당) 주임인 보두네 신부가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민가를 사들여 임시 본당으로 삼았습니다. 본당이 처음 생겼을 때에 전주읍성 주변에 신자는 거의 없었고, 주로 산골지역에 신자가 밀집해 있었으나, 1894년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는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나면서 신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성당보다 더 큰 성당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후 1908년 명동성당의 내부를 건축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성당이 착공되었습니다. 성당은 1914년에 비로소 외관 공사가 끝났으며, 이후로도 계속 공사가 진행되어 1931년에 완공되었습니다.
호남 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 바로 전동성당입니다. 중앙의 종탑과 양쪽 계단에는 비잔틴 양식의 뾰족 돔을 올렸으며, 성당 내부의 석조 기둥에도 비잔틴 양식이 녹아 있습니다. 곡선미를 최대로 살린 로마네스크 및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동양에서 제일가는 성당 건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전동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하여 붉은 벽돌로 지어졌습니다. 주춧돌인 화강암은 착공 당시인 1908년에 대한제국을 간접 통치하고 있던 일본 제국 통감부가 헐은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 돌을 이용하였고 성당을 구성하는 벽돌의 일부도 헐린 성벽에서 나온 흙을 구워 만들었습니다.
전동성당은 아름답습니다. 얼핏 서울의 명동성당이 떠오르지만 조금 작아 보입니다. 명동성당은 고딕 양식, 전동성당은 비잔틴 풍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라는 차이도 있습니다. 명동성당은 아버지 성당, 전동성당은 어머니 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올해로 100년 역사의 전동성당을 한국 멜로영화의 걸작이라는 <약속>에서 주인공의 성당 결혼식 장소로 기억하고 있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오늘도 전동성당은 어머니의 따뜻한 눈길로 웨딩 촬영을 하는 예비부부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최명희문학관
생명의 피를 토해내어 그 피를 찍어 한 자 한 자 새겨 나간 목숨의 불, 혼불 그 자체인 <혼불>의 작가 최명희를 기리는 곳으로, ‘인간 최명희’ ‘작가 최명희’ ‘영원한 최명희’의 세 가지 테마로 최명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 나가는 것이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 있다면”
오목대(梧木臺)
오목대와 이목대는 마주하고 있는데, 옛날 오동나무와 배나무가 가득해 ‘오목대' ‘이목대’라고 했습니다. 오목요대(梧木瑤臺)라 부르기도 하는데 요대(瑤臺)는 아름다울 요(瑤), 물건을 얹는 대(臺)로 ‘옥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누대’를 말하며 오목대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 이름입니다.
고려가 한참 기울어져 가던 14세기 후반, 왜구는 고려와 명나라를 번갈아 침범하며 마구잡이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로 임명해 남쪽으로 파견합니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기 12년 전인 고려 우왕 6년(1380년)의 일입니다.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의 이지란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가, 운봉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의 왜구를 완전 소탕했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황산대첩(荒山大捷)입니다. 이성계는 대승을 거두고 귀경하던 중, 선조들의 땅인 전주에 이르러 전주이씨 종친들을 불러 모아 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성계는 흥에 겨운 나머지 한나라 고조의 ‘대풍가(大風歌)’를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유방은 숙적 항우를 타도하고, 통일국가를 실현시킨 뒤 고향인 패(沛)로 개선해 연회를 개최했습니다. 연회가 무르익자 유방은 스스로 악기를 들고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읊었습니다.
‘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위풍을 해내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쏘냐(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1900년, 고종은 태조를 기리기 위해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우고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고 친필로 썼습니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입니다. 그리고 ‘주필(駐畢)’이란 임금이 머무른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목대(梨木臺)
전주이씨의 시조는 이한(李翰)으로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인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맞아 한국 최대의 성씨 연원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18세손이 이태조의 5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입니다. 그의 아들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내외가 낙산 관음굴에 가 빌어 낳았다는 도조(度祖)는 3남3녀를 두었는데, 그 둘째아들이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이며, 이자춘의 셋째아들이 태조 이성계입니다.
오목대에서 육교를 건너면 70m 위쪽의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있는데, 건물이 있는 80m 아래쪽에 비석과 비각을 세웠습니다. 이목대 비각에는 고종의 친필로 새겨진 ‘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비석이 있는데 1900년(광조4년)에 세워진 것입니다. 바로 이 부근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고조부) 목조 이안사의 유허입니다.
시조 이한(李翰) 때부터 목조에 이르기까지 누대를 이어오는 동안 전주의 토호로서 살았던 곳인데, 이안사는 그가 아끼던 관기(官妓)의 일로 지주(知州)와 산성별감(山城別監)과 문제가 생겨 전주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어 강원도 삼척으로 옮겨 두타산성에 의지해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이때 그를 따라 삼척으로 옮긴 민호가 1백70여 호였다고 합니다.
한벽당(寒碧堂)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 발산머리의 절벽을 깎은 자리에 세운 누각으로 전주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烟: 한벽루와 전주천을 휘감고 피어오르는 푸른 안개)의 현장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앞으로 흐르는 전주천과 정면의 남고산을 바라보는 풍광은 운치 있는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조선 초기의 문신 최담이 태조 8년(1404) 그의 별장으로 지은 건물로, 월당선생 유허비에는 ‘월당루’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시간이 지나면서 ‘한벽당’이라고 명칭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寒碧’이란 이름은 이곳에 항상 옥처럼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쳐 흰 옥처럼 부서지는 광경이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같다 하여 붙여졌습니다. 한벽당 옆에는 조그맣게 자리한 요월대(邀月臺)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전주8경 ‘기린토월’(麒麟兎月)의 현장인 기린봉에서 떠오르는 달이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한벽당 앞으로 흐르는 물에 비친다 하여 ‘비칠 邀 달 月’ 요월대라 합니다.
조선시대 많은 시인묵객들이 풍경이 수려한 이곳을 찾았으며 그들이 한벽당을 노래한 시가 많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호남읍지에는 이경전 등 19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한벽당에서 지었다는 시문이 실려 있어 그 시절의 풍류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오늘이 머물지 않아 내일이 오고/ 내일이 떠가야 꽃 피어 땅에 가득하리라/ 인생이 몇 년이야 백년도 아닐 텐데/ 한벽당 안에서 매일 취하여 사노라
전주향교(全州鄕校)
고려 공민왕 3년(1354) 경기전 북편에 건립되었다가 조선 태종 때 경기전(慶基殿) 건립으로 부(府) 서쪽 화산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약 139년 후 성내에서 거리가 멀고 전주천을 넘나들기가 불편하고 객사에서 남면하여 좌측에 문묘, 우측에 사직단이 자리하여야 한다는 고제에 의하여 선조 36년(1603) 현재의 위치로 재이건하였습니다.
성균관과 같이 공자의 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유학자 7인과 우리나라 18현 등 총 51인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공자, 맹자, 증자, 안자의 아버지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으며, 영화 ‘YMCA 야구단’에서 YMCA 건물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학인당
조선 말기에 건립돼 한옥마을에서 가장 오래 된 만석꾼의 집으로, 한옥마을을 대표하는 고택입니다. 당시 백미 4,000석과 일류 도편수와 목공 등 연인원 4300명을 동원, 압록강과 오대산의 목재로 2년6개월에 걸쳐 99칸으로 지었습니다. 이제 45칸으로 줄었으나 정통 한옥과 정원의 아취를 즐길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가 붕괴되면서 궁중건축양식이 상류층에 도입된 한옥으로, 수원 백씨 종택인 학인당은 한옥 마을에서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는 8개의 한옥 중 하나로 명상, 다도 체험이 가능하며, 백범 김구 선생이 묵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숙박을 하지 않아도 고택 관람이 가능하며 복원한 사랑채에서 전통차나 선(禪)체험 등을 할 수 있습니다.
전주 객사(客舍 )
조선 초 전주부성을 창건할 때 같이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객사는 빈객을 접대하고 숙박시키는 곳이지만 전패를 모시고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던 곳이며 조정의 칙사가 오면 이곳에 유숙하면서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고, 지방 고관이 부임하면 먼저 이곳에 들러 배례를 올렸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에 경영된 객사라 해서 고사에서 따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편액했습니다. 풍패란 중국 한고조의 고향으로, 왕조의 본향을 지칭하는 것이니 풍패지관이란 이름은 전주가 바로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보물 제583호)
<한옥마을의 전통문화 체험>
아름다운 공예품을 전시하고 있는 공예공방촌 지담, 전주의 공예 명인들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으며 체험과 구매가 가능한 전주 공예 명인관, 전주부채 등 명품을 감상하고 쇼핑하는 전주명품관, 천년 정신이 담긴 순수 한지를 생산하는 전주 전통한지원 그리고 전주 이강주와 모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제작 과정에 대한 시연을 볼 수 있는 전통술박물관에 가면 숙성실과 발효실에서 스피커를 통해 술 익는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국내 유일의 모자박물관인 루이엘모자박물관에 가면 삼국시대 금관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전통 모자와 세계 각국의 모자를 한꺼번에 볼 수 있고, 사상 체질검사를 받은 후 한방약족탕으로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어 버리는 한방체험을 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한의학박물관인 전주한방문화센터는 워낙 인기가 있어 지나는 길에 시간 예약을 해 두고 한옥 마을을 다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이 체험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국내 유일의 서예 전문 전시관인 강암서예관에는 강암 송성용 선생의 유작과 추사 김정희의 작품 등 1,000여 점의 서예작품이 전시돼 있고, 백양표 메리야스공장을 리모델링해 한지공예의 창조 공간으로 변신한 교동 아트센터는 1층 전시관(아트 숍)과 2층 다목적 홀로 구성돼 있는데, 1,000원만 내면 커피와 티를 마시고 양질의 서적들을 읽으며 쉴 수 있는 곳입니다.
<한옥마을의 맛>
전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 비빔밥입니다. 궁중요리인 전주비빔밥은 평양냉면, 개성탕반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음식의 하나입니다. 사골국물로 짓는 전통 전주비빔밥은 30가지가 넘는 식재료가 사용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날계란의 노른자는 조금 비릿한 맛 때문에 음식점에 따라 얹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밥값이 만만치 않지만 반찬만 10가지가 넘습니다.
비빔밥과 더불어 전주의 대표음식으로 꼽히는 것이 한정식입니다. 전주8미를 포함해 계절 음식 30가지 이상이 따라 나옵니다. 말 그대로 상다리가 휠 정도로 풍성합니다. 4인 기준에 8만-12만원 정도.
뚝배기에 밥과 콩나물을 넣고 양념을 곁들여 펄펄 끓여 먹는 콩나물국밥도 빼놓을 수 없는 전주의 맛입니다. 국물에 계란을 푼 것과 풀지 않은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전주 콩나물국밥은 1년 이상 묵은 김치만을 사용하는 게 맛의 비결입니다. 막걸리에 각종 약재로 끓여 만든 모주(母酒)를 곁들이면 찰떡궁합입니다.
오모가리탕도 전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입니다. 오모가리는 뚝배기를 뜻하는 전주 사투리입니다. 메기, 쏘가리 등 섬진강에서 잡아올린 민물고기를 끓여 들깨를 갈아 부어 만듭니다. 국물 맛이 일품입니다. 전통문화센터 옆 전주천을 끼고 있는 곳에 ‘방송 출연했다’는 오모가리탕집이 있습니다.
전주막걸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 주전자에 1만2천원 수준. 안주는 따로 시킬 필요 없이 테이블 가득 무료 안주가 깔립니다. 이 때문에 전주 시민들은 막걸리집에 갈 때는 식전에 가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전주천을 가로지른 남천교 부근에 막걸리 집이 있습니다. 한옥마을에서 차로 5분 거리에 막걸리집이 밀집한 삼천동 막걸리타운도 들러볼만합니다.
입가심으론 ‘가맥’이 딱입니다. 가맥은 가게맥주를 줄여 부르는 말. 전주의 슈퍼는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 놓고 맥주와 안주를 팝니다. 전주의 가맥집은 안주의 차원이 다릅니다. 황태포, 계란말이, 튀김닭발, 수제비를 띄운 명탯국, 말린 것을 실컷 두들겨 패 부드럽게 만든 갑오징어 등 집집마다 다양합니다.
<전주 맛집 안내>
*한국집(063-284-2224, 0086 경기전 뒤 풍남동 주민센터 부근): 원조 전주비빔밥집이다. 2011년 미슐랭가이드에 소개되었다. 육회비빔밥 13,000원 놋그릇비빔밥, 돌솥비빔밥 11,000원 콩나물국밥 5,000원
*종로회관(063-288-4578 경기전 옆 골목): 전주비빔밥집이다. 단아한 놋그릇에 콩나물로 지은 밥 위로 30여 가지가 넘는 신선한 재료와 육회와 황포묵을 올려, 볶음고추장에 비벼 먹는다. 육회비빔밥 12,000원
*신뱅이(063-282-3030 오목대길 효문여중 앞): 소고기비빔밥 9,000원 알비빔밥 8,000원 야채비빔밥 6,000원
*삼백집고사동점(063-284-2227전주객사부근)교동점(063-232-0307 성심여고 부근): 1940년 후반 이봉순 할머니가 창업한 이래로 주당들에게 ‘전설’로 통했던 국밥집이다. 콩나물국밥 6,000원 비빔밥 7,000원 고추군만두 4,000원 고추닭튀김 8,000원(4인분) 모주 1잔 2,000원 1.2리터 7,000원
*현대옥(063-282-7214): 풍남문 근처의 남문시장에 있는 콩나물국밥집이다. 콩나물 국밥 6,000원
*왱이콩나물국밥(063-231-1783 동문예술거리): 삼백집, 현대옥과 더불어 전주의 3대 콩나물국밥집이다. 6,000원
*풍전콩나물국밥(063-231-0730 동문예술거리): 콩나물국, 시래국, 선지국 5,000원
*옛날 손칼국수(063-231-3641): 성심여고에서 전주천 방면에 있다.바지락칼국수, 팥칼국수 4,000원 족발 8,000원 수육 10,000원
*해동국수집(063-286-0001 경기전 서문 앞): 비빔국수와 함께 나오는 멸치육수 맛이 일품,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국수를 먹는 집이다.
*베테랑 분식점(063-285-9898 전동성당 부근): 전국에서 가장 큰 분식점이다. 칼국수 5,000원 쫄면 5,000원 찐만두 4,000원
*교동떡갈비(063-288-2232 최명희문학관 부근): 떡갈비 10,000원 떡갈비+비빔밥 17,000원 떡갈비+연잎밥 14,000원 런치타임(떡갈비+된장국+공기밥+냉면 or 소면) 13,000원
*에루화떡갈비(063-232-8203 전동성당 부근): 떡갈비 8,500원 부메뉴로 동치미냉면, 비빔밥, 김치찌개
*전주향(063-284-2588): 깔끔한 밑반찬과 참게장의 달콤 짭조름한 맛이 일품이다. 참게장 정식 10,000원
*풍년제과(PNB) 한옥마을1호점(063-288-7300): 국내 최초(1951년)의 센베(전병)점. 수제 초코파이로 유명한 제과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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