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공급의 역전현상 속에서도 시는 끊임없이 생산, 유통된다. 소비자-독자의 취향과 기대가 나날이 높아지고 넓어지는 이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여전히 표피적인 낭만감성에 기댄 작품은 넘쳐나는데 대체로 과도한 조미료와 향신료에 의존한 가운데 메시지와 제재의 본질과 풍미는 희석되고 있다.
현대세의 이런 상황에서 최병석 시인의 작품은 변별성과 경쟁력을 확보한다. 별다른 수사학이나 상징, 이미지 차용 없이도 오래 정제된 내면의 정감이며 독특한 호흡이 진솔한 리듬을 타고 소통과 공감의 물꼬로 연결된다. 도시와 농촌을 아우르는 소박한 언어, 적절한 탄력의 서정 노출, 삶의 저변과 정수를 따뜻하게 노래하는 웅숭깊은 목소리는 특히 개성적인 향토의식에 힘입어 증폭된다. 미세한 일상에서 광활한 우주까지 자유롭게 왕래하는 시인의 스펙트럼이 이제 적정항로에 진입하였음을 이 시집은 보여준다. ― 이규식(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수문 열면… / 물소리 바람소리 / 우우 씨눈 터지는 소리 // 보아라 / 저 탱탱한 물줄기를 // 거룩한 / 이 땅과 씻나락들을…” 물도 문이 있다. 나가는 문, 수문이라 함은 물도 집이 있다는 증좌이다, 그 물의 집을 관리하고 그 물의 문인 수문을 여는 사내가 있다. 너른 평야와 대지를 먹여 기르는 원천인 물, 이 물을 돌보는 사내는 하필 시인이다. 시인은 생명 넘어 생명을 관조하는 자의 다른 이름이다. 사실 여인네의 탱탱한 젖가슴보다 아름다운 생명, 그 원시림의 설렘보다 더 큰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그처럼 “탱탱한 물줄기”를 받아들이는 대지는 필연적으로 ‘거룩한’ 성지일 수밖에 없으리라. ‘씨눈’이 터지고 ‘씻나락’들이 성장하는 생명을 노래하는 시인이 최병석 시인이다. 물을 사랑하며 생명을 찬양하는 생명의 시인이다. 물을 돌보는 물의 시인이기에 특히 물과 연상되어지는 생명 노래의 울림은 더욱 별스러웠을 거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최병석 시인의 이번 시집은 이 땅과 이 땅의 생명들에게 낡은 관습과 식상한 관념을 부수고 새로워지라는 메시지들로 가득하다. ― 신익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