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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9월 20일 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몇몇 실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였다.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외국 교회에 견주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은 충효를 중시하던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리스도교와 크게 충돌하였다. 그 결과 조상 제사에 대한 교회의 반대 등으로 박해가 시작되었다. 신해 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명이 순교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 순교자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하여 103명을 시성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9월 26일에 지냈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자랑스러운 신앙 선조들을 기리며, 순교자들의 피로 우리를 복음의 빛 안으로 불러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신앙 선조들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다짐합시다.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는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냐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한국 천주교회는 해마다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정하여 순교로 이 땅에 신앙을 뿌리내린 수많은 신앙 선조를 기억합니다.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던 이들을 기억하며 그 굳건한 신앙을 본받고자 기도합니다.
우리 믿음도 신앙 선조들처럼 늘 그렇게 굳건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박해 시대가 아닌데도 우리는 유혹에 자주 노출되고 신앙도 쉽게 흔들립니다. 그러한 위협들은 밖에서 오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드러내는 일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고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선택을 마주하였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선택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순교 성인의 선택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선택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의미 없는 선택이었다면, 그 신앙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 낸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때로는 불편하고 부담스럽다고 느끼면서도 그 신앙이 얼마나 가치있고 위대한지 알고 있기에 여전히 고민하고 갈등하면서도 이 신앙을 놓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르는 수고와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우리 신앙을 자랑스럽게 지키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왕태언 요셉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마음 속으로 들어가보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프리카 대초원에 큰 무리를 이루어 사는 초식동물이 있는데 누라고 합니다. 생김새는 소 같은데 영양과에 속합니다. 이 친구들이 한 번 씩 더 좋은 초지를 찾아 대이동을 하는 데 정말 장관입니다.
때로 누 무리가 난감한 상황 앞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왕성한 식욕으로 인해 이쪽 지역 풀은 다 뜯어 먹었습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집단으로 죽습니다. 큰 강을 건너면 양질의 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강물 속을 들여다보니 누 무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악어 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입니다. 누 무리들은 다들 강가에서 서성거립니다.
그때 한 친구가 용기를 냅니다. 풍덩! 하고 뛰어듭니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친구들이 잇달아 강물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 앞선 누 한 마리로 인해 수천 수만 마리 누 무리 떼가 안전하게 건너편에 도달합니다.
보십시오. 공동선을 위해서는 선구자가 필요합니다. 누군가의 용기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뛰어든 누였습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하고 있는 한국 순교자들, 특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정하상 바오로 같은 경우 첫 번째 뛰어든 누입니다.
제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마음 속으로 잠시 들어가 봤습니다. 어린 나이에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 가서 그 어려운 외국말로 죽을 고생하며, 겨우 사제 수업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천신만고 끝에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열심히 사목에 전념하던 어느 순간, 사제생활 1년 1개월 되던 때, 순교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 나이에 죽는 것이 너무 아깝고 원통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신앙은 한없이 깊었습니다. 이 땅에서 열심히 사목하는 것도 큰 행복으로 여겼지만, 순교의 영예를 얻어 빨리 하느님 곁으로 가는 것은 더 큰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물론 조선 땅 방방곡곡에 숨어 지내는 수많은 교우들이 눈에 밟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하느님 섭리의 손길을 굳게 믿었습니다. 체포되자마자 예수님처럼 이제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함께 공부한 최양업 신부님, 그리고 후배들이 당신의 뒤를 이어 열심히 사목할 것임을 믿었습니다. 나는 달릴 곳을 다 달렸으니, 이제 천상에서 내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며, 기쁘게 순교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한국 천주교회 안에는 영웅적인 1호 순교 사제가 계십니다.
오랜 교회 역사 안에서 박해 시대가 지나가면서 순교에 대한 재해석 작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순교의 의미, 순교의 개념이 점점 확장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피 흘림 없는 순교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피 흘림 없는 순교를 영적 순교, 백색 순교라고 불렀습니다.
박해가 사라진 시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자 하는 의지만큼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깊은 사막속으로 들어간 수도자들, 고행자들,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증거•증언하는 사람들까지 백색 순교자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더이상 목이 잘리고 피를 흘리는 대박해가 없는 이 시대, 순교 영성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은, 순교자들의 후손인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중차대한 과제입니다. 나와 너무나 다른 그,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그, 해도 해도 너무한 그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인내롭게 견뎌내며 축복해주는 일이야말로 순교 영성을 생활화하는 길입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초라하고 남루한 나란 존재일지라도,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시고, 내 이마에 그분의 인호가 새겨져 있으니, 각별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존중하는 태도 역시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내 인생을 보다 희망적, 낙관적 바라보고, 내 인생에 대한 점수를 30점, 50점, 박한 점수가 아니라, 80점, 90점, 후한 점수를 주는 것도 순교 영성을 사는 길입니다.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열악하고 암담한 현실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꺼이 살아내는 것 역시 순교 영성을 사는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생일 축하합니다.’ 오늘은 본당 설립 49년이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 은총으로 지나온 49년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처음 씨앗을 뿌리고, 오늘까지 아름다운 본당을 이끌어 오신 교우 여러분 감사합니다. 우리 본당은 이제 내년이면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희망의 50년을 잘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최근에 두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아세례였습니다. 첫 아이를 낳은 부부가 제게 유아세례를 청했습니다. 태어난 지 두 달 되었습니다. 아이의 눈망울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성경 필사를 했습니다. 아이를 갖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성서 필사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아이의 세례명을 ‘로사리아’라고 정해주면서 기쁜 마음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엘파소 공동체’ 방문이었습니다. 두 달에 한 번씩 공동체를 방문해서 고백성사와 미사를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70이 훌쩍 넘으셨습니다. 미사 전에 어르신들은 모두 고백성사를 보았고, 미사 후에는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저는 어르신들의 신앙에 감명받았습니다. 어릴 때 시골에 가면 외할머니가 서울 가서 먹으라고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보따리를 주셨습니다. 엘파소 어르신도 제게 달라스가서 먹으라고 늘 보따리를 주십니다. 이번에는 살구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여라.”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아울러 우리 민족의 명절인 ‘한가위’ 추석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1784년에 시작된 한국의 천주교회는 올해 242년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병자를 고쳐주었고, 마귀를 쫓아내었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00년 넘게 박해가 있었고,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지만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우리 본당도 49년 전에 시작되었고, 많은 분의 땀과 눈물로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추석의 진정한 의미는 ‘나눔’입니다. 한해의 첫 수확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이웃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사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신앙은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을 각오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이런 순교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유혹에 넘어갑니다. 세상은 화려하고, 세상은 풍요롭고, 세상은 가지고 싶은 게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환난, 칼, 박해가 없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멀어지곤 합니다. ‘다음에 하지 뭐’라고 하는 영적인 게으름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남들도 그러는데 뭐’라고 하는 자기 합리화가 우리를 죄에 물들게 합니다. ‘나는 할 수 없는데 뭐’라고 하는 자기 비하와 열등감이 우리를 일어서지 못하게 합니다.
일어서지 않으면 걸을 수 없고, 걷지 않는 사람은 엠마오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쳐야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재산과 가족, 부와 명예를 포기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지켜온 신앙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봉사와 나눔, 우리의 사랑과 희생으로 순교자들의 신앙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당의 날 행사에 모두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부르시니 따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길이 되라
길이 부르시니
길이 되려고
걷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빛이 되라
빛이 부르시니
빛이 되려고
빛납니다
어둠을 벗고
함께가 되라
함께가 부르시니
함께가 되려고
함께합니다
스스로를 열고
믿음이 되라
믿음이 부르시니
믿음이 되려고
믿습니다
불신을 꺾고
희망이 되라
희망이 부르시니
희망이 되려고
희망합니다
절망을 딛고
사랑이 되라
사랑이 부르시니
사랑이 되려고
사랑합니다
미움을 허물고
기쁨이 되라
기쁨이 부르시니
기쁨이 되려고
기뻐합니다
체념을 떨치고
빚음이 되라
빚음이 부르시니
빚음이 되려고
빚습니다
허무를 버리고
품음이 되라
품음이 부르시니
품음이 되려고
품습니다
버림을 쫓아내고
섬김이 되라
섬김이 부르시니
섬김이 되려고
섬깁니다
억누름을 누르고
살림이 되라
살림이 부르시니
살림이 되려고
살립니다
죽임을 막고
길이 되라
길이 부르시니
길이 되려고
걷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신학생과 동료 103위 순교자 대축일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Paul)
신분 : 신학생,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795-1839년
같은이름 :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정 바오로, 정바오로, 파울로, 파울루스, 폴
성 정하상 바오로(Paulus)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며, 1801년에 그의 맏아들 정철상 카롤루스와 함께 순교하였고, 어머니 유 체칠리아는 1839년 11월 순교하였다. 아버지가 순교할 때에 그는 겨우 일곱 살로 그의 모친과 누이 정 엘리사벳(Elisabeth)과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가산이 모두 몰수당하자 살길이 막연하여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 있던 그의 숙부인 정약용 요한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그러나 숙부가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 있던 때였으므로 외교인 친척들로부터 천대와 냉대를 받았지만,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웠다. 하지만 외교인들 틈바구니 속에서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조증이 바르바라(Barbara)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다.
그는 함경도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 유스티아누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성세와 견진과 성체 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한 분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그는 유진길, 조신철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다. 마침내 그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다.
앵베르 주교는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론이다. 그는 이 속에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바오로의 집에 달려들어 그와 노모 그리고 누이를 잡아 포도청에 압송하여 바오로와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상재상서를 포장대리에게 주니 사흘 후 문초를 시작하였다.
바오로는 무서운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나갔고 배교하라고 엄명하였으나 거절하자 옥에 가두었다. 며칠 뒤에 다시 끌려나와 톱질 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또한 그는 샤스탕과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고 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또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받았다. 그리하여 1839년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으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103위 순교성인 명단(신분 / 순교일 / 순교지)
박해로 인한 순교자의 수는 10,000명에 이르나 그 중 교회법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영광의 성인 위에 오른 이가 이들 103위인 것이다.
가장 혹심했던 박해는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등을 들 수있다.
103위의 성인 중 기해 및 병오박해 때 순교한 79위는 1925년 7월 5일에, 병인박해 때 순교한 24위는 1968년 10월 6일에 각각 복자품에 올랐는데,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모두 시성의 영광을 입게 되었다.
1.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 1846. 9. 16. / 새남터)
2.정하상 바오로
(회장 / 1839. 9. 2. / 서소문 밖)
3.이호영 베드로
(회장 / 1838. 11. 5. / 형조전옥)
4.정국보 프로타시오
(공인 / 1839. 5. / 포청옥)
5.김아기 아가타
(과부 / 1839. 5. 4. / 서소문 밖)
6.박아기 안나
(부인 / 1839. 5. 4. / 서소문 밖)
7.이소사 아가타
(과부 / 1839. 5. 4. / 서소문 밖)
8.김업이 막달레나
(과부 / 1839. 5. 4. / 서소문 밖)
9.이광헌 아우구스티노
(회장 / 1839. 5. 4. / 서소문 밖)
10.한아기 바르바라
(과부 / 1839. 5. 4. / 서소문 밖)
11.박희순 루치아
(동정궁녀 / 1839. 5. 4. / 서소문 밖)
12.남명혁 다미아노
(회장 / 1839. 5. 4. / 서소문 밖)
13.권득인 베드로
(상인 / 1839. 5. 4. / 서소문 밖)
14.장성집 요셉
(환부 / 1839. 5. 6. / 포청옥)
15.김 바르바라
(과부 / 1839. 5. 7. / 옥사)
16.이 바르바라
(동정녀 / 1839. 5. 7. / 옥사)
17.김 로사
(과부 / 1839. 7. / 서소문 밖)
18.김성임 마르타
(과부 / 1839. 7. / 서소문 밖)
19.이매임 데레사
(부인 / 1839. 7. / 서소문 밖)
20.김장금 안나
(과부 / 1839. 7. / 서소문 밖)
21.이광렬 요한
(공인 / 1839. 7. / 서소문 밖)
22.이영희 막달레나
(동정 / 1839. 7. / 서소문 밖)
23.김 루치아
(동정녀 / 1839. 7. / 서소문 밖)
24.원귀임 마리아
(동정녀 / 1839. 7. / 서소문 밖)
25.박큰아기 마리아
(부인 / 1839. 9. 3. 서소문 밖)
26.권희 바르바라
(부인 / 1839. 9. 3. / 서소문 밖)
27.박후재 요한
(상인 / 1839. 9. 3. / 서소문 밖)
28.이정희 바르바라
(과부 / 1839. 9. 3. / 서소문 밖)
29.이연희 마리아
(부인 / 1839. 9. 3. / 서소문 밖)
30.김효주 아녜스
(동정녀 / 1839. 9. 3. / 서소문 밖)
31.최경환 프란치스코
(회장 / 1839. 9. 2. / 옥사)
32.앵베르 라우렌시오
(제2대 조선교구장 주교 /
1839. 9. 1. / 새남터)
33.모방 베드로
(신부 / 1839. 9. 1. / 새남터)
34.샤스탕 야고보
(신부 / 1839. 9. 1. / 새남터)
35.유진길 아우구스티노
(회장, 역관 / 1839. 9. 2. / 서소문 밖)
36.허계임 막달레나
(부인 / 1839. 9. 6. / 서소문 밖)
37.남이관 세바스티아노
(회장 / 1839. 9. 6. / 서소문 밖)
38.김 율리에타
(궁녀 / 1839. 9. 6. / 서소문 밖)
39.전경협 아가타
(궁녀 / 1839. 9. 6. / 서소문 밖)
40.조신철 가롤로
(역관 / 1839. 9. 6. / 서소문 밖)
41.김제준 이냐시오
(회장 / 1839. 9. 6. / 서소문 밖)
42.박봉손 막달레나
(과부 / 1839. 9. 6. / 서소문 밖)
43.홍금주 페르페투아
(과부 / 1839. 9. 6. / 서소문 밖)
44.김효임 골롬바
(동정녀 / 1839. 9. 6. / 서소문 밖)
45.김 루치아
(과부 / 1839. 9. / 옥사)
46.이 가타리나
(과부 / 1839. 9. / 옥사)
47.조 막달레나
(동정녀 / 1839. 9. / 옥사)
48.유대철 베드로
(소년 / 1839. 10. 1. / 옥사)
49.유소사 체칠리아
(과부 / 1839. 11. 3. / 옥사)
50.최창흡 베드로
(회장 / 1839. 12. 9. / 서소문 밖)
51.조증이 바르바라
(부인 / 1839. 12. 9. / 서소문 밖)
52.한영이 막달레나
(과부 / 1839. 12. 9. / 서소문 밖)
53.현경련 베네딕타
(여회장 / 1839. 12. 9. / 서소문 밖)
54.정정혜 엘리사벳
(동정녀 / 1839. 12. 9. / 서소문 밖)
55.고순이 바르바라
(부인 / 1839. 12. 9. / 서소문 밖)
56.이영덕 막달레나
(동정녀 / 1839. 12. 9. / 서소문 밖)
57.김 데레사
(과부 / 1840. 1. 9. / 옥사)
58.이 아가타
(동정녀 / 1840. 1. 9. / 옥사)
59.민극가 스테파노
(회장 / 1840. 1. / 옥사)
60.정화경 안드레아
(회장 / 1840. 1. 3. / 옥사)
61.허협 바오로
(군인 / 1840. 1. / 옥사)
62.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회장 / 1840. 1. 1. / 당고개)
63.홍병주 베드로
(회장 / 1840. 1. 1. / 당고개)
64.손소벽 막달레나
(부인 / 1840. 1. 1. / 당고개)
65.이경이 아가타
(동정녀 / 1840. 1. 1. / 당고개)
66.이인덕 마리아
(동정녀 / 1840. 1. 1. / 당고개)
67.권진이 아가타
(부인 / 1840. 1. 1. / 당고개)
68.홍영주 바오로
(회장 / 1840. 2. 1. / 당고개)
69.이문우 요한
(복사 / 1840. 2. 1. / 당고개)
70.최영이 바르바라
(부인 / 1840. 2. 1. / 당고개)
71.김성우 안토니오
(회장 / 1841. 4. 9. / 옥사)
72.현석문 가롤로
(회장 / 1846. 9. 9. / 새남터)
73.남경문 베드로
(회장 / 1846. 9. / 포청옥)
74.한이형 라우렌시오
(회장 / 1846. 9. / 포청옥)
75.우술임 수산나
(과부 / 1846. 9. / 포청옥)
76.임치백 요셉
(사공 / 1846. 9. / 옥사)
77.김임이 데레사
(동정녀 / 1846. 9. / 포청옥)
78.이간난 아가타
(과부 / 1846. 9. / 옥사)
79.정철염 가타리나
(부인 / 1846. 9. / 옥사)
80.유정률 베드로
(회장 / 1866. 2. 7. / 평양)
81.베르뇌 시몬
(제4대 조선교구장 주교 / 1866. 3. 7. / 새남터)
82.랑페르 유스토
(신부 / 1866. 3. 7. / 새남터)
83.도리 헨리코
(신부 / 1866. 3. 7. / 새남터)
84.볼리외 루도비코
(신부 / 1866. 3. 7. / 새남터)
85.남종삼 요한
(승지 / 1866. 3. 7. / 새남터)
86.전장운 요한
(상인 / 1866. 3. 9. / 서소문 밖)
87.최형 베드로
(회장 / 1866. 3. 9. / 서소문 밖)
88.정의배 마르코
(회장 / 1866. 3. 1. / 새남터)
89.우세영 알렉시오
(역관 / 1866. 3. 1. / 새남터)
90.다블뤼 안토니오
(제5대 조선교구장 주교 /
1866. 3. / 갈매못)
91.위앵 루가
(신부 / 1866. 3. / 갈매못)
92.오메트르 베드로
(신부 / 1866. 3. / 갈매못)
93.장주기 요셉
(회장 / 1866. 3. / 갈매못)
94.황석두 루카
(회장 / 1866. 3. / 갈매못)
95.손자선 토마스
(농부 / 1866. 3. / 공주)
96.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원님 / 1866. 12. 3. / 숲정이)
97.조화서 베드로
(농부 / 1866. 12. 3. / 숲정이)
98.손선지 베드로
(회장 / 1866. 12. 3. / 숲정이)
99.이명서 베드로
(농부 / 1866. 12. 3. / 숲정이)
100.한재권 요셉
(회장 / 1866. 12. 3. / 숲정이)
101.정원지 베드로
(농부 / 1866. 12. 3. / 숲정이)
102.조윤호 요셉
(농부 / 1866. 12. 3. / 숲정이)
103.이윤일 요한
(회장 / 1867. 1. 1. / 관덕정)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 도: 1814-1866년
같은이름: 시므온, 장경일
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의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그는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망(Mans) 교구의 샤토 뒤 르와르(Chaeau-du-Loir)에서 평범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장간 일을 하던 부친의 신앙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또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본당 신부가 학교에 보내어 공부하던 중, 1831년에 망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1837년 5월 3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어 그는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외국 선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37년 7월 15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이어서 그는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1840년 6월 26일 필리핀의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1841년 1월 16일 ‘통킹’(Ton King, 현 북베트남)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1843년 3월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8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 해 10월경에 그가 만주 주교로 물망에 오르게 되자, 그는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그 후 10여 년간 모든 열성을 다해 전교 임무를 완수하면서 현명하게 교구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1849년에 요동 지역에 박해가 일어나자 상해로 피신했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1854년 8월 5일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그를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조선 입국을 명령하였다.
이에 그는 두 신부와 함께 두 달 동안 숨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중, 다행히 조선의 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은 후 중국을 출발하여 4일 만에 서울에 당도하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상복을 입고 경기도 지방의 60여 개 공소를 돌아보았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 최조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 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의 부주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직자 회의의 결과로 그는 1857년 8월에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 主敎 輪示 諸友書)라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한국 교회의 입장을 과시했다.
또한 배론에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당을 세웠으며, 교회서적이나 출판물을 저술, 정리하여 대량으로 출판하였다.
그래서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고 교우 수도 증가하였다.
1864년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물리치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이 사건이 해결되자, 대원군은 태도를 바꾸어 쇄국정책을 강행하면서 1866년 초에 병인년 대박해를 일으켜 그동안 활약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을 한꺼번에 학살하였다.
1866년 2월 23일 다섯 명의 포졸들이 주교 댁을 급습하여 베르뇌 주교를 체포한 후 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베르뇌 주교를 끌어내어 갖은 신문을 다하면서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매어 놓고서는 큰 곤장대로 매질을 가했다.
이즈음에 도리(Dorie, 金) 신부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도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윽고 1866년 3월 6일 베르뇌 주교 일행은 참수형을 선고받고, 다음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나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장 주교는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흘렀다. 사형장은 한강의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 명의 군졸들이 천막을 쳐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둘씩 무릎을 꿇게 하고 양쪽 귀를 화살로 내리 꿴 다음, 이들 얼굴에 백회를 뿌림으로써 모든 처형 준비를 다 갖추었다.
사형집행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여섯 명의 희광이가 날뛰고 소리를 지르며 돌다가 베르뇌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베르뇌 주교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땅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이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 후 교우들이 와서 그곳 부근인 왜고개에 정성껏 장례를 지내고 모셨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