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영산(八影山) 능가사(稜伽寺)
전남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369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
팔영산 능가사(八影山 楞伽寺)는 신라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삼국시대의 고찰이다. 대웅전 옆 원음료(圓音寮)의 지붕 너머로 팔영산 정상의 여덟 영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보인다. 능가사는 이 여덟 봉우리의 정기를 받아 터를 고른 사찰이다.
저만큼 멀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불끈불끈 여덟 번이나 솟아오른 암봉의 모습이 어딘가 힘차 보인다. 옛날에는 정상이 여덟 개나 된다는 뜻으로 팔전산(八顚山)이라고도 불렀던 산이다. 한문 전(顚)자는 넘어뜨린다는 뜻도 있으나 머리 또는 꼭대기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팔전이 여덟 개의 정상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팔영산은 정상에 서면 발아래 펼쳐지는 다도해의 모습이 물위에 징검다리가 놓인 것처럼 펼쳐지고 봉오리마다 유영(儒影), 성주(聖主)...적취(積翠) 등 이름이 붙여져 있다고 하나 능가사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부처님께 향을 올리고 주민들과 더불어 조용히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일에 천년세월을 바쳤다.
<능가사 가는 길>
능가사는 먼저 고흥 땅을 찾아가야 한다. 유자가 많이 난다는 고흥은 먼저 순천이나 보성을 거쳐 벌교(筏橋)까지 가야 한다. 벌교에서는 주암호 부근에서 합쳐진 15번과 27번 국도가 남쪽으로 내려와 고흥까지 간다.
벌교에서 고흥까지는 32.8km이다. 그러나 능가사는 남행하는 이 국도를 따라 20km를 내려가면 만나는 과역(過驛)에서 찾아야 한다. 버스를 탔을 경우 과역터미널에서 내려 하루 7번 운행하는 성기리(聖基里)행 버스를 갈아타야한다.
승용차의 경우 고흥 방향의 남쪽으로 100m쯤 더 가서 만나는 좁은 길을 따라 좌회전 한 후 사정리(沙亭里)까지 간 다음 점암(占岩=모룡리)으로 가는 길이 있고, 과역에서 같은 길을 2km쯤 내려가서 855번 지방도에서 좌회전, 점암으로 갈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이용하더라도 과역에서 점암까지는 3km가량 되고 점암에서 다시 3.5km를 더 가면 팔영산 등산로 입구이기도 한 능가사를 만나게 된다.
<돌담으로 둘러쳐진 경내>
4월의 고흥은 바다로 빠져나간 반도라고는 하나 푸른 바다 보다는 연두색 신록이 더 아름답다. 능가사 입구의 전답에는 연초록 물결이 넘실대고 고목들도 반짝이는 입새를 무성하게 달고 있다.
능가사의 출입문인 천왕문은 돌담의 가운데에 서 있다. 이 돌담은 정사각형을 이루며 넓은 경내를 모두 두르고 있다. 넓고 평평한 지세로 보아 전에는 일주문 금강문 누각 등도 다 갖춰져 있었을 것만 같으나 지금은 돌담 가운데에 천왕문이 외롭게 서서 입구를 지키고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이 우람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있다. 정면5칸 측면3칸 팔작지붕의 제대로 지어진 건물이다. 지은지 400년에 가까운 값진 문화유산으로 지난 2001년 보물 1307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다른 전각들은 대웅전과 비교하여 퍽 왜소하다. 대웅전 뒤의 요사인 원음료를 비롯해 그 뒤의 응진당 역시 그러하다. 대웅전은 지난날 사세가 클 때 세운 것이고 나머지 전각들은 그 후 힘겹게 재건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아도화상이 창건>
절을 돌아보면 응진당 뒤에 한기의 큰 비석이 보인다. 조선 숙종 16년(AD1690)에 세워진 능가사의 사적비이다. 높이가 5m 너비가 1.37m 두께가 45cm로 사적비로서는 당당한 모습이다.
이 비의 기록에 따르면 능가사는 신라 눌지왕 3년(AD419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 보현사(普賢寺)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기록은 정설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아도화상은 눌지왕 2년에 신라에 들어와 일선군(一善郡-경북선산)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살며 불법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시기적으로는 거의 일치되고 있지만 당시 고흥은 분차군(分嵯郡-지금의 낙안)에 속한 백제 땅으로 신라에 있던 아도화상이 이 곳에 절을 창건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아도화상이 신라의 일선군에서 숨어 지냈듯 이 곳에도 몰래 와서 전법활동을 했다는 가정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아무튼 능가사의 사적은 그 후 분명한 것이 없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타 폐허가 되어버린 것을 조선 인조 22년(AD1644) 정현대사(正玄大師-법호碧川)가 꿈에 신승의 현몽을 받고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때 건축된 건물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웅전뿐이다.
<해체복원한 대웅전>
능가사의 대웅전은 보물로 지정되기에 앞서 지난 1999년부터 해체 복원에 들어가 2001년 3월 복원공사의 완공과 함께 보물로 지정됐다.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기울던 불전이 복원공사 이후 안전과 함께 아름다움까지 되찾았다.
안으로 들어서면 연꽃보좌에 높이 앉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모습이 자비롭다. 무심결에 무릎이 꿇어진다. 63평의 넓은 법당 탓이 아니라 환희심 때문이다. 닫집의 비룡과 권운이 부처님에 대한 외경심을 더해준다. 구경 온 수녀들이 어간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좌우에는 과거 부처님인 연등불과 내세의 부처님인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이 법당 안에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을 초월한 우주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웅전을 이렇게 웅장하게 세웠던 모양이다.
내부의 넓고 높은 공간은 네 개의 높은기둥과 네 개의 대들보가 지탱하고 있다. 외부에도 용머리 장식등이 화려하지만 내부의 장엄 또한 눈부시다. 특히 네 개의 닫집은 구름사이로 나르는 용이 살아 꿈틀대고 있다.
<사적과 함께 사라진 역사>
대웅전을 나와 입구 쪽을 되돌아보면 경내에 빈곳이 많다. 전에 왔을 때 없었던 종각이 새로 들어섰을 뿐 남은 공지 곳곳을 화초를 심어 메우고 있다. 조선 인조와 숙종, 영조 등의 임금 때 이 절이 크게 번창했고 당시의 상황 일부가 사적비에 남아있다고는 하나 능가사의 지난 역사는 상당부분 사라지고 그 빈자리가 법당 앞에 공터로 남은 셈이다.
남은 공간으로 보아 좌우에 요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일부 기록에는 팔상전 등 다른 전각이 많았던 것으로 전한다. 더욱이 대웅전이 경내의 중앙에 자리잡지 못하고 중앙에 나 있는 통로의 옆으로 비켜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경내 구획 또한 옛날에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웅전의 해체복원과 더불어 종각이라도 지어 빈 공간의 일부나마 메워주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종각에 걸린 범종은 그 전에는 마땅하게 둘 곳이 없어서 대웅전 한편에 두고 예불 때 타종하여왔다. 그러나 이 종은 높이가 1.57m에 무게가 1,500관(900kg)에 달하는 큰 종이어서 대웅전에 두기에는 너무 컸다.
<종과 탑에 새겨진 팔괘>
이 범종은 숙종 24년(AD1698)에 주조된 것으로 이 절에서는 대웅전과 사적비에 이어 세 번째로 조성된 값진 유산이다. 그런데 종의 몸통에 보면 비천상을 새겨둘만한 자리에 팔괘를 조각했다. 팔괘란 불교적이기보다는 주역에 나오는 문양이다.
이 팔괘는 범종 뿐 아니라 응진당 뒤에 있는 사적비에도 보인다. 귀부에 거북무늬를 생략하고 역시 팔괘를 양각했다. 왜란후의 호국사상이 이렇게 표현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절을 중창했던 분들께 물어보면 될 일이지만 그들은 지금 사적비 앞에 있는 부도에 잠들어 있다.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는 일이다.
능가사의 역사를 들려주던 비구니스님은 팔괘에 대한 설명대신 옛날 유구(琉球)의 태자가 표류하다 능가사에 오게 됐는데 관음보살님께 간절한 기도를 한 끝에 7일만에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다고 귀띔했다. 바닷가 사찰에서 들을 수 있는 설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