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4년 가해 3월28일 (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수원] 나와 하느님 나라까지의 거리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호세 14, 2 - 10
† 복음 : 마르 12, 28ㄴ - 34
★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한다. 그들이
주님께 용서를 청할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분노를 푸신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피어나게 해 주실 것이다(제1독서).
★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으뜸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둘째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명확히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회개와 새로운 변화를 소망하는 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오늘과 내일의 제1독서에서 호세아서는 명확하게 전합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어느 예언자보다도 더 분명하고 절실하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시는 분이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려는 죄인에게 분노를 거두시고 알뜰히 사랑해 주시며, 그의
생명이 다시 향기를 내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옳은 길로 가도록 잡아 찢으시고 치시기도 하지만 결국은 다시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싸매 주시는 분이십니다(내일의 제1독서 참조).
사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으로 스스로 하느님께 다가서는 길을
막아서는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이시자 구세주로 대하는
긍정적 체험보다 우리 무의식 속에는 오히려 벌하시는 심판관과 감시자라는
부정적이고 피하고 싶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두려움 일색의 하느님 모습이 지배할 때 우리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무거운 마음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가장 큰 계명, 곧 '사랑의 이중
계명'을 다시금 무거운 짐으로만 느끼게 만듭니다. 이러한 죄의식과 달아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찬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이 바로 회개하는 삶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영국의 작가 체스터튼은 이러한 시를 노래하였습니다.
"새는 날렵하다. 부드러우므로/ 돌은 굼뜨다. 굳어 있으므로/ 천사는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므로 날 수 있다/ 무겁기는 쉽다. 가볍기는 어렵다/ 사탄은 그의
무게 때문에 추락하였다."
우리가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분께 다가가기를
바란다면, 진지하고 깊은 묵상이나 재계의 실천 이전에 먼저 어린아이와도
같은 무조건적 신뢰와 순수한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 매일 미사 -
◈ [청주] 행함으로 열매를 맺는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28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마르12,28-34)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 12,28ㄴ-34
행함으로 열매를 맺는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이 되는 것은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계명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 계명에 근거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 하면
십계명을 떠올립니다. 좀 더 요약하면, 사랑의 계명으로 말합니다. 과연
나에게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인가요? 내가 무엇을 행하거나 판단할 때
하느님의 계명이 기준이 되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적대자들에게 지혜롭게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주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 는 이중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시험하였던 여러 부류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악의가 전혀 없이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고 그 계명에 대하여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 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12,32-33). 하며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 중에는 이렇게 마음이 열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축구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번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며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충실하여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이중계명의
사랑은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에게 주어진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여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그리하여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에로 인도되어 구원을 선물로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열매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많이 사랑하십시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 하십시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그러므로
실행함으로써 열매 맺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그 ‘앎’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사랑은 모두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28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호세14,2-10 마르12,28ㄴ-34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 12,28ㄴ-34
사랑은 모두다.
이런저런 묵상으로 자유롭게 강론을 시작합니다.
여백, 여유, 여가, 여운, 여흥 등 '여'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유의 사랑, 여백의 아름다움입니다. 모처럼 여유롭게 사랑의 도반이 빌려
준 '차마고도'라는 kbs에서 방영됐던 다큐멘타리를 봤습니다. 중국 서남부
운남, 사천에서 시작되어 티벳을 거쳐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 인도까지
이어지는 장장 5000여 km의 장대한 길을 따라 촬영한 대작입니다.
참 아름다운 자연에 사람들이었습니다.
뇌리에 각인된 다섯 요소인 종교, 자연, 공동체, 가축, 일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이 다섯 요소가 한데 조화롭게 어울려 공존할 때
비로소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오늘날의 문명비판에 해당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종교는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고, 공동체는 붕괴되어 가고 있으며, 일자리를 사라져가고 있고,
계속 착취되어가는 자연이요 가축들인 오늘의 현실입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공존의 사랑이요 회개의 사랑입니다.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는 게 회개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회개요 회개할 때 하느님 사랑의 체험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회개의 촉구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중심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참 나의 실현에 조화와 질서의 삶입니다.
회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사랑의 이중계명의 실천으로 들어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모든 답은 사랑의 이중계명 하나뿐이요 회개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것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살기위해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자존감 높은 삶이요 선명하고 확고해지는 정체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안 제자리로 돌아갈 때 비로소 발견되는 자유의
여백이요 여유입니다. 현실에, 욕심에 눈이 멀어 잃어버리고 있는 여백도
여유도 참 많을 것입니다. 발견해내야 하는 때로는 만들어내야 하는 여백이요
여유요, 바로 회개가 이를 가능케 합니다.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사랑이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최고의 시인입니다.
바야흐로 봄꽃들 피어나기 시작한 얼마 전 자연 풍경을 보며 써놓은
글입니다. '시 쓰기를, 그림 그리기를 잊었다. 하느님의 시와 그림, 봄 풍경
자연 감상에!‘
사랑은 아름다움입니다. 호세아뿐 아니라 호세아를 통해 계신된 하느님
역시 타고 난 최고의 아름다운 시인입니다.
"이제 내가 그들의 마음을 고쳐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그대로 회개의 은총을,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봄철을 맞아
온누리 역시 이슬처럼 내리는 하늘 사랑 은총에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마땅한 사랑의 응답이 회개입니다. 이런
사랑의 응답으로 회개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멀리 있지 않습니다.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나은 사랑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사람,
사랑의 사람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 분별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 온 우리 모두를
당신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기도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4년 가해 3월28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12,29-31)
---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오늘은 좀 엉뚱한 질문으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첫째니 둘째니 하는 순서를 두셨을까요?
그냥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사랑에도 순서가 있다는 말일까요?
여기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랑에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빗나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힘든 처지의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라고
말하며, 자신은 미사에 참례할 필요가 없고 기도할 시간도 없으며, 그럴
시간이 있으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럴 듯 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잊고 있습니다.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불완전성과 오류의 가능성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선한
목적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더라도 거기에는 틀린 사랑이 있을 수 있고,
엇나간 과정과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결국 자신의 성을 쌓기에 바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들이 쌓는 성은 모래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어떤 사랑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들과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거짓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적극적으로 이웃의 고통에 함께
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집착이던지, 자기과시던지 자기만족이던지 간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대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며, 한계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우선적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조금이라도 완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선 순위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과 오류의 가능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사랑은 그분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와 하느님 나라까지의 거리
2014년 가해 3월28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복음 : 마르코 12,28ㄴ-34
< 나와 하느님 나라까지의 거리 >
김창옥 교수는 강의를 매우 재미있게 잘 하는 유명한 강사입니다. 그런데
그도 두려워하는 대상이 있다고 합니다. 가장 두려운 대상은 고위
공무원들이나 교장 선생님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어떤
말에도 반응이 없고 웃긴 이야기에도 전혀 웃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웃기면 대놓고 웃지는 못하고 자신보다 더 높은 직급의 상사가 웃으면 자신도
마지못해 따라 웃는다고 합니다. 아마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또 그가 강의하다가 상처받은 대상은 바로 중학생 남자아이들이라고 합니다.
한 번은 수학여행 온 수백 명의 남자 중학생 아이들에게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그냥 사춘기 반항아의 모습을 하고 일제히 삐딱하게 앉아서
교수를 맞이했습니다. 그 싸늘함을 깨뜨리기 위해 웃기는 이야기를 했더니
웃지는 않고 강사가 다 들리도록 이렇게 이야기 하더랍니다.
“아주 웃기려고 애를 쓰는구먼. 나이 먹고 고생한다!”
그 이후로 웬만하면 이런 대상들에게는 강의를 하러 나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요즘 강의를 다양한 분들에게 하다 보니 그 반응도 상당히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강의하기가 가장 힘든 분들은 강의
내용에 대해 이미 자신들의 생각이 깊이 뿌리박힌 사람들이 듣고 있을
때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도 자신들의
생각을 무너뜨리기를 원치 않으며 있는 자리에서 반박을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답답하고 강의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서 받는 상처가 힐링 되게 해 주는 청자들도 있습니다.
교리신학원 분들도 매우 잘 들어주시지만, 특별히 저에게는 첫 서원을 하기
전의 애기 수녀님들입니다. 이 수녀님들은 저의 표정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열정을 보입니다. 아주 잘 웃어주고 또 필요하면 성실히 적고
다양한 표정으로 응답해 줍니다. 아주 그들에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보좌 신부를 할 때부터 저는 힘이 들어도 이들에게 강의하러 매 주
서울로 올라갑니다. 강의를 하고나면 강의를 한 제가 힘이 더 생기는 것
같습니다. 강의가 휴식이 되게 해 주는 이들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
내어도 그것이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한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더 큰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늘 예수님을 만난
율법학자는 그들과는 매우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을
알려주셨을 때, 이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대답 하나하나를 모두 인정하며
받아들입니다. 뭐 특별히 다른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분의 말씀이 모두
옳다며 예수님의 말씀을 되풀이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너는 내 생각에 매우 가까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르치는 것에 모두 동의를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모두 마음으로 동의합니까?
예전에 한 분이 저에게 와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주일미사를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이어들과 골프를 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저는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저는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까지 내밀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쳐다보기만 해도 간음하고, 화만 내도 살인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
이런 분들에게 “너는 하느님나라에서 멀리 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와 하느님 나라와의 거리는 바로 내가 그분의 가르침에 얼마만큼 동의하고
실천하고 있는가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의하고 싶은 것만 동의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금 더 그리스도의 가르침, 진리에
동의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더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그분의 가르침 중에
내가 동의하지 못했던 것 하나만 더 동의해 보려고 결심해 봅시다. 사실
실천하지 않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순 제3주간 금요일
2014년 가해 3월28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 12,28ㄴ-34
교황님 방한을 앞두고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서울, 대전, 청주 행사
분과가 있습니다. 이들 분과는 ‘시복식,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아시아 청년대회, 장애인들과의 만남, 수도자, 젊은이, 평신도와의 만남’
등을 준비합니다. ‘홍보, 대외협력, 의전, 재정, 기획, 시설, 영성 신심’분과가
있습니다. 모든 분과가 다 중요합니다. 교황님 방한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 분과는 위원회를 구성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교님들도 그렇고,
평화신문과 가톨릭 신문에서도 ‘영성 신심’분과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맡고 있는 분과이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 무겁고, 좀 더 충실하게
준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아시리아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부, 권력, 명예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양다리를 걸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나의 희생과 나의 봉사는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해지기 보다는 행복해지기를 먼저 원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택하여야 하는 것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밤새 울어도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엘 가야 할 때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먼 길
바래다주면서 기분나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몇 시간씩 공항 대합실에서 출장 갔다 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비행기가 연착되었다고 해서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다림은
설렘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이 가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중요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 우리는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 놓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기러기 엄마, 아빠가 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기도 합니다. 좋은 일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도, 건강도, 사랑스러운
자녀들도 온전히 나를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나를 온전히 채우는 것은 나를
만드신 분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나를 만드신 분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힘입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온 마음과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전해 주는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사랑,느낌,동사/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순 제3주간 금요일(2014년 3월28일) : 사랑, 느낌, 동사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 12,28ㄴ-34
사랑하는 방법이 있는지요? 그 기술을 아는 분 있으신가요?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느끼는 것’ 이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려운 것이지요. 느끼고 행하는 것은 배울 수 없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動詞)라고 합니다.
우리 신체 기관 가운데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데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심장입니다. 심장이 동사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심장은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심장에는 느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다는 뚜렷한 의식이 심장에 새겨져 있는 느낌입니다.
왜냐구요? 우리 마음(심장)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못나고 못되고 별나고 투덜되고 나만 생각하는 우리 각자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주님을 느끼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지금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주 예수님, 사랑으로 제 마음에 현존하소서.”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