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도 그랬다.
등신, 빙신, 머저리, 어리배기, 못난이, 촌뜨기 들이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123층 월드롯데 고층 건물.
아내와 내가 잠실 석촌호수에서 천천히 산보할 때다. 큰딸내외(외국인)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저녁밥 먹으러 가자며 강요하다시피 했다.
나는 가기 싫어서 자꾸만 해찰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따라서 123층 롯데 쪽으로 나갔다.
일반인한테 무료로 개방하여 30여 층을 올라갈 수 있다며 나를 재촉했다.
나는 싫다며 고집 피웠고, 자꾸만 뒤로 쳐지면서 눈치를 보다가 혼자서 뿔뿔이 달아나서 4층 서점으로 올라갔다.
반디앤루니스 서점.
글쓰기 책이 진열된 곳에서 책을 뽑아서 살짝씩 들여다보고는 어떤 책을 살까 망설이었다.
내가 글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쓰기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안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직접적인 경험이 없어서 그럴 게다라고 나를 평가한다.
큰딸내외가 구경시켜 준다고 강요하다시피 이끌기에 롯데건물로 가서는 구경하고, 맛있는 저녁밥도 얻어먹으면 글감이 엄청나게 생길 터다. 나는 하도 못나서, 지지리도 못생겨서 그냥 혼자 도망치듯 빠져나와서 서점으로 나갔으니 내가 롯데건물에 대해서무엇을 알며, 무엇을 이야기하며, 무엇을 대상으로 글 쓸까? 전혀 없다.
'글은 발로 써야 한다'는 논리를 가진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대형서점에는 글쓰기 책들이 엄청나게 다양하며 많다.
다 소중한 책이지만 퇴직한 지가 10년째인 나로서는 지갑 두께가 하도 얊아져서 그냥 빈 손으로 귀가했다.
오늘도 허리뼈가 약한 나로서는 장기간 서 있는 게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나중에 한 권이라도 사서 내 책꽃이에 보태야겠다며 빈 손으로 서점을 벗어났다.
에스컬레이트로 한 층 또 한층 내리면서 지하층까지 내려왔다.
도대체 어디가 어디인지를 또 분간할 재주가 없었다. 아내판을 올려다보아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조건 잠실역이 있는 잠실롯데몰 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천천히 걸으면서 숱한 사람들을 보았다. 엄청나게 많은 옷가게들. 신세대, 외국인도 득실벅실했으나 나같은 늙은이와 촌티나는 것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지하층 쉼터에서는 실버합창단이 특별공연하고 있었다. 늙어빠진 할매들이 퍼런색깔의 흐느적거리는 옷을 위아래로 입었다. 반소매가 들어난 의상, 괴상한 안경을 쓰고, 머리 위에는 무슨 왕관처럼 생긴 것을 올려놓았다. 할배들은 서양 연회복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맸다.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나는 공연히 눈맛버리고, 귀맛버려서 얼른 자리를 떴다. 늙은이들이 그렇게 해서라도 합창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도 나한테는 영 아니올씨였다. 실버세대인 내가 실버세대를 싫어하는 것이 무척이나 그랬다. 모순이다.
나는 대도시생활 부적응자일까? 이방인일까?
내가 1978년 1월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결혼한 뒤에 잠실지역으로 이사와서 살기 시작했다. 1978년 5월 초순부터이다. 올해가 2017년 1월 말이니 벌써 39년도 더 넘게 한곳에서만 살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최근에 지은 잠실 롯데몰 건물 안에 들어오면 병적일 만큼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오늘도 그랬다.
1층 바깥으로 나온 뒤 한참이나 멍청히 서서 주위를 뚤레뚤레 확인했다. 분명히 숱하게, 오랫동안 보던 건물인데도 오늘은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다. 길 건너편에 한적한 숲이 보였고 '석촌호수'를 가리키는 안내판을 보고서야석촌호수로 들어섰다. 석촌호수에 가면 방향감각이 되살아 나오기에.
춥다. 털모자를 깊게 눌러 쓴 뒤에 길 건너서 석촌호수로 들어선 뒤에서야 문뜩 정신이 났다. 방향감각이 정상으으로 되살아 났다. 석촌호수는 한적한 장소이다. 수면이 잔잔한 호수와 호수변에 선 나무와 산책로가 제대로 눈에 보이기 시작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촌늙은인가 보다.
번잡스럽고 복잡하고, 숱한 사람들이 오고가는 집합사회에는 부적응자. 촌사람으로 쇠락 중이라는 것을 또 깨달았다.
한적한 석촌호수 서호 북편을 확인하고서야 산책로를 천천히 걸어서 레이크팰리스 아파트단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레이크팰리스. 영어 번역으로는 호수궁전인가? 나한테는 그냥 잠실4단지인데 왜 이렇게 요상한 외국어로 아파트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잠실1단지에서 2년간 살았고, 4단지에서는 무려 37년째 살고 있데도 재건축한 새 아파트 지명, 영어 지명은 머리에 각인되지 않았다. 1단지와 2단지는 무엇으로 부르는지를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3단지는 최근에서야 기억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4단지 아파트에서 바로 코앞, 길 건너편에 있고, 전철을 이용하려고 3단지 안을 건너야 하기에 3단지의 이름은 기억한다. 트리지움.
하여튼 오늘도 방향감각을 잃어서 또 등신, 머저리, 빙신(병신이 표준어)이 되었다.
겨우 아파트로 되돌아왔다. 그래도 집은 용케 찿아왔다. 안식구한테 말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귀가 뒤에 곧바로 아내가 들어왔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나한테 마구 지청구하며 비난했다. 함께 바깥에 나갔으면 새로 지은 123층 롯데몰로 구경 갈 일이지 왜 혼자서만 도망쳐서 다른 데로 내뺐느냐는 항의였다.
할 말이 없다.
나는 무의미한 롯데건물 30여 층 구경보다는 건너편 건물 4층에 있는 대형서점이 훨씬 가치 있으니까.
책벌레는 어쩔 수 없이 종이냄새가 나는 곳으로 더듬이를 내밀어서 어기적거려야 하니까...
황금연휴기간은 사흘.
?
크리스머스 공휴일을 낀 기간, 토일월요일 삼일간이 쉬는 때라서 그럴까? 젊은이들이 무척이나 많이 서점 안에 들어찼다. 그들 더러는 쉼터 마루 위에 걸터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젊은 그들 틈에 끼기가 싫었다. 그냥 꼿꼿하게 서서 책을 살짝 뽑아서 한두 쪽만 슬쩍 보는 체, 책 고르는 체만 했다. 내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책 고르고, 책 읽는 사람이 많다.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였다.
2.
서가 가운데 '비소설'이란 명패가 있는 곳을 기웃거렸다.
수필, 산문, 시집이 잔뜩 있다.
'비소설'이란 단어가 무척이나 어색하게 보였다.
시는 소설이 아니다. 그래서 '비소설은 시다'라는 논리가 성립되나?
어쩌면 성립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를 더 확장해서
'수필은 소설이 아니다. 그래서 비소설은 수필이다'라는 논리도 성립되나?
'평론은 소설이 아니다. 그래서 비소설은 평론이다'라는 논리도 또 성립되나?
'시는 비소설이고...,
'수필은 비소설이고...,
'평론은 비소설이고....
'고로 '시 = 수필 = 평론이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나?
즉 시는 수필도 되며, 평론도 되고, 수필도 시이며, 평론도 되나?
즉 이들 세 영역 모두가 다 같다는 뜻일까? 각자의 개념이 모두 합치하는가?
아니다.
정말로 무엇인가 헷갈린다 . 논리가 아닌 궤변이다.
'비소설을 최광의로 해석하면 소설 이외의 모든 문자로 된 글은 다 비소설이다.'
이런 논리라면 '비소설'이란 서가는 소설 이외의 모든 분야의 책들이 다 진열해도 될 것이다.
내가 즐겨 찿는 농업 관련 책도 비소설이고, 오늘 관심있게 본 한국사 교재 서적도 비소설이고, 철학책 등도 다 비소설이다.
3.
중학생? 고등학생일까?
아직은 앳된 젊은 여학생이 한국사 참고서를 고르고 있었다.
한국사를 설명하고 또 기출제 시험문제가 있는 참고서용 책들이 즐비했다. 나로서는 기가 죽을 만큼이나 크고 두꺼웠다.
우리나라 역사를 한때 좋아했던 나로서는 한국사 참고서적을 보고는 놀랐다.
뭐 그리 도표가 많고, 문제항이 복잡하고 길은지를 모르겠다.
예전, 우리나라 연대표를 달달 외워서 국사가 정말로 쉬웠던 나로서는 두께운 참고서에 고개를 흔들었다.
공부하라고 부추끼는 게 아니고, 공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책들로 여겼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것도 재미로. 쉽게 시작해서 점차 자꾸만 더 깊게 세밀하게 더 넓게 파고 들어야 한다. 공부는 재미로 하는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한국사 참고서적들이다.
정말로 재미없게 가르치는 책들이다.
나는 미리서부터 기가 죽고 질린다.
내가 한국사를 다시 공부한다면 부피가 정말로 작은 책으로 시작하겠다.
전체적인 윤곽을 머릿속에 넣고는 연대표를 기억하고 싶다. 연대표를 사건마다 대조하면서 공부하면서 영역을 넓히겠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했으면 싶다. 하도 두꺼워서 처음부터 질리는 참고서가 아니라 손에 쏘옥 들어오는 교과서 위주로 시작했으면 싶다. 역사공부란 재미가 곁들여야 하고, 연대표를 충분히 암기 이해해서 6하원칙으로 스스로 질문하고 해답을 찿았으면 싶다.
두껍다고 해서 곧 좋은 책이라는 근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