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가을호 반경환 명시감상 {사상의 꽃들}에서
은행나무 길목
박 성 우
초저녁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
두 정거장 더 가서 하차해야 하지만
나는 은행나무 사거리에서 내려 걷는다
이 길을 걷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은행나무정육점에 들러 삼겹살 한 근 산다
결혼을 하면서부터 17년을 살아온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길목,
서른 중반에 신혼살림을 차려
딸애 하나 낳아 그냥저냥 잘 살다가
쉰 살을 넘겨 떠나려 하니 생각이 많아진다
아빠, 해가 꼭 사과 같아!
뜨겁고 달콤한 것들만 품고 이곳을 떠나야지
쉬는 날 오후면 세 식구가 함께 다녀오던
은행나무시장을 뒤돌아보니, 불빛 환하다
은행나무떡집도, 은행나무반찬집도 안녕
17년을 오갔으니 정이 안 들면 이상한 일,
한결같이 다니던 미용실로도 자꾸 눈길이 간다
지금은 사라진 가게들이 왜 자꾸 떠오르지?
주말부부를 하던 신혼 때 들르던 빵집이며
겨울엔 붕어빵을 팔기도 하던 분식집이며
언제 찾아가든 문이 열려있던 집 앞 세탁소까지
저녁 식탁 위에 도란도란 꺼내놓고
이사 가기 전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굽는다
은행나무는 고생대부터 존재해온 ‘살아 있는 화석’과도 같은 나무이며, 암수가 다른 나무로서 병충해에 강하고, 보기 드물게 정자精子를 생산해낸다고 한다. 은행나무 목재는 결이 곱고 광택이 있어 고급가구의 목재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 열매는 식용으로 쓰이고, 가을단풍과 그 모습이 아름다워 가로수와 녹음수로도 많이 심는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산책길 중에서 은행나무 단풍길은 가장 아름답고 좋은 길이 되고, 그야말로 천국으로 올라가는 길과도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 사는 것도 그렇지만, 샛노란 은행나무잎은 돈과 명예와 권력 등, 그 모든 것을 다 초월한 황금의 색과도 같다. 사랑도, 미움도, 질투와 시기도 다 사라지고, 모든 더럽고 추악한 죄와 음모도 다 씻어지고, 순수함이 순수함 자체로 살아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은행나무 단풍길은 천국으로 올라가는 길이며, 너와 내가 자아를 잃어버리고 ‘우리 모두’로서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그 어디에다가 둥지를 틀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의 꿈과 희망이 다 이루어지고, 무한한 행복이 자라는 곳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박성우 시인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고,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0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바가 있다. 시집으로는 『거미』와 『가뜬한 잠』과 『웃는 연습』 등이 있고, 윤동주문학상 젊은신인상, 신동엽창작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박성우 시인의 「은행나무 길목」은 그의 신혼의 꿈과 시인의 꿈이 자라나던 둥지이며, 그는 그곳에서 “딸애 하나”를 낳고, 중견시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다 이룬 곳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길목, 전라도 출신의 시골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고 힘들었겠지만, 이제는 지난 17년이 너무나도 크나큰 축복과도 같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은행나무 길목」의 주제라고 할 수가 있다. “쉬는 날 오후면 세 식구가 함께 다녀오던” “은행나무떡집도, 은행나무반찬집도 안녕”이고, “겨울엔 붕어빵을 팔기도 하던 분식집”도 그렇고, 언제, 어느 때나 찾았던 “미용실”과 “집 앞 세탁소”도 안녕이다. “17년을 오갔으니 정이 안 들면 이상한 일/ 한결같이 다니던 미용실로도 자꾸 눈길이 간다”라는 시구와 “쉬는 날 오후면 세 식구가 함께 다녀오던/ 은행나무시장을 뒤돌아보니, 불빛 환하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또한, “지금은 사라진 가게들이 왜 자꾸 떠오르지?”라는 시구와 “이 길을 걷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시구들과 시구들은 작별의 시간에 마주하는 회상의 무늬와 그 색깔들이며, 이때에 ‘안녕’이란 슬픔의 그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정겹고 그리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안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삶이 상승곡선을 타고 있을 때는 그가 살고 있는 장소와 시기와 그의 삶이 일치하고, 삶이 하강곡선을 그릴 때에는 그 모든 것이 어긋나고 일그러지며 불협화음을 내게 된다. 추억은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소위 상승곡선을 타고 있는 시인에게는 그 추억은 샛노란 황금빛 정원과도 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울울창창한 은행나무 길목에서 샛노란 황금빛 주단綢緞이 떨어지고, 마치
‘최고의 선과 신들의 경지’와도 같은 황홀함으로 그 대관식의 길(시인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박성우 시인의 「은행나무 길목」은 그의 신혼생활부터 제일급의 시인이 되기까지의 역사가 담겨 있는 장소이며, 박성우가 박성우 시인으로서 우뚝서기까지의 수많은 명시들이 탄생했던 곳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라는 말이 있듯이, 장소와 기후와 무대배경은 한 인간의 성장신화의 문제이며, 따라서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길목―. 추억은 사과같은 아침 해를 떠오르게 하고, 이별은 아름답고 달콤한 추억을 안고 떠나가게 만든다. 과거는 추억 속에 보존되고, 현재는 그 추억의 힘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해 내고, 미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은행나무가 박성우 시인을 보호해 줄 것이다. 은행나무는 우리 인간들의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보호해 주는 세계수이자 영원불멸의 삶을 보장해 준다. “이 길을 걷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라고 안녕을 고하지만, 그러나 그 ‘안녕’은 이별과 망각의 안녕이 아니라, 영원한
‘은행나무 길목의 행복’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어디에다가 그 둥지를 틀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전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은행나무 길목」이다.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자라나고, 삼천리 금수강산이 전 인류의 지상낙원이 될 수 있는 곳―, 바로 그런 곳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과 천재가 손을 잡고, 천재와 시인이 손을 잡으며, 우리 한국어의 영광과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이 무한히 울려 퍼지고 자라날 수 있는 그런 천하제일의 명당이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