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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나토(NATO) 위성과 우크라이나 드론을 속이기 위해 사라토프에 있는 엥겔스 공군기지에 전략 폭격기의 실루엣을 그리고 있다.(미 군사전문 매거진 'WarZ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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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자욱한 한 작업장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은 포탄이 발사되지 않는 대포,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는 레이더 시스템, 폭약이 장착되지 않는 미사일 등을 제작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
'가짜와의 전쟁'이다.
1년 8개월째를 맞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특징은 한마디로 '드론(무인 발사체) 전쟁'이다. 무인 정찰기로 적의 동향을 탐지한 뒤, 무인 항공기(드론), 무인 보트(수상 드론), 무인 탱크 등을 내세워 적 주요 목표물을 파괴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머리를 짜낸 게 무인 카메라의 눈을 속이는 가짜 미사일과 대포, 전차, 항공기 등을 만들어 세우거나, 그리는 것이다.
러시아군이 파괴한 '가짜 무기'를 살펴보는 우크라이나 군인/영상 캡처
가짜 목표물을 전선에 먼저 배치한 것은 전력상 열세인 우크라이나군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쏟아지는 미사일 드론 포탄에 노출된 모든 전력이 완전히 파괴될 판. 그래서 적(러시아)을 속이는 '짝퉁 무기'를 만들었고, 지난 여름부터 전선 곳곳에서 확인됐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지난 겨울, 우크라이나 '타브리 전선'의 방위군 합동 프레스 센터 예브게니 예린 센터장(начальник объединенного пресс-центра Сил обороны Таврического направления Евгений Ерин)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오인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전선에 풍선으로 만든 탱크를 설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실 여부가 분명히 가려지지 않았다.
가짜 표적의 실물은 지난 8월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비로소 확인됐다. 우크라이나의 최대 제철및 철강회사였던 '멧인베스트'가 미국산 M777 곡사포와 이동용 방공 레이더 등을 나무 등으로 진짜처럼 만든 '짝퉁 무기' 250개를 납품했다는 것. 미 CNN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짝퉁 표적'들을 파괴하느라, 아까운 미사일과 공격용 드론을 사용했다고 한다.
미국의 M777 곡사포/사진출처: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 가짜 미 로켓 시스템을 미끼로 러시아 미사일을 꾄다는 WP지 보도/캡처
멧인베스트 관계자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목표는 러시아군을 속여 매우 값비싼 포탄과 미사일을 낭비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러시아의 열추적 레이더와 드론을 속일 수 있는 그럴듯한 무기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미국산 M777 155㎜ 곡사포의 경우, 실제 가격은 400만 달러(약 53억원)에 달하지만, 오래된 하수관 등으로 만들면 1,000달러(약 130만원)도 채 들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 8월 30일 러시아군이 미국의 다연장로켓시스템 '하이마스'(HIMARS)와 똑같이 만든 목조 모형물 공격에 최소 12발의 칼리브르 순항 미사일을 사용했다는 미 워싱턴 포스트(WP) 보도가 나왔다. 이후 친러시아 텔레그램 채널에는 러시아군이 자포로제(자포리자)의 루카셰보 마을 인근의 P-18 방공 레이더 기지를 파괴했다며 영상이 올라왔는데, 알고 보니 가짜였다는 주장도 있다.
P-18 방공 레이더/사진출처: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군 드론에 포착된 러시아 T-72 가짜 탱크/사진출처:스트라나.ua 영상캡처
러시아군의 '짝퉁 무기'가 실제로 전선에서 확인된 것은 한 달 뒤쯤인 지난 9월 25일이다.
스트라나.ua는 이날 "오늘 자포로제 전선에서 러시아 T-72B 탱크의 3대가 우크라이나군의 드론에 포착됐다"며 "항공 촬영된 T-72 탱크가 겉보기에는 진짜와 구분하기 힘들 만큼 똑같은 가짜였다"고 전했다. 이 사진을 본 군사 블로거들은 "'가짜 탱크 3대중 2대는 덩굴과 관목에 덮여 있어 판별하기 더욱 어려웠다"고 밝혔다.
눈길을 끄는 것은 '가짜 무기' 모형을 만드는 우크라이나 비밀 공장 르포 기사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9월 4일 '짝퉁 공장' 방문기를 올렸다. 그 곳에는 플라스틱과 버려진 목재, 오래된 드럼통, 발포고무, 금속 등 각종 재료로 모조품 무기들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실제 군사 목표물로 착각할 만큼 정교하다. 대부분의 작업자들은 지난해 개전 초 최대격전지였던 남부 드네츠크주(州) 마리우폴의 아조프스탈을 운영하는 '멧인베스트' 소속이다.
한 고위 관계자는 "러시아군이 많은 (가짜) 무기를 발견하면, 전진하거나 해당 지역에 포격하는 것을 꺼릴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이것은 바로 심리전 무기"라고 주장했다.
그것보다 한 수 위는 분명히 공군기지의 바닥에 폭격기의 실루엣을 그려 적을 속이는 방법이다.
스트라나.ua(10월 1일자)에 따르면 미 군사 전문지 'WarZone'은 러시아 엥겔스 공군기지에 대한 위성 사진들을 분석한 뒤, 러시아는 서방 위성과 드론을 속이기 위해 바닥에 전략 폭격기 Tu-95MS의 실루엣을 그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WarZone는 "위성에서 얻은 이미지는 2차원적(평면적)"이라며 "입체감이 없어 모형이 아니라 페인트로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러시아 엥겔스 공군기지의 전략 폭격기 위성사진. 3대 중 2대는 그림처럼 보인다/사진출처:스트라나.ua
'짝퉁 무기'의 역할은 적의 미사일과 탄약, 드론 등 화력을 쓸데없는 곳에 소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사실 적군을 속이기 위해 값싼 가짜 무기를 만들어 비싼 무기를 낭비하게 하는 것은 오랜 전쟁 전술이다.
'짝퉁 무기'가 방어용으로만 쓰이는 건 아니다. '가짜 공격 드론'도 곧 등장할 모양이다.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은 지난 9월 18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방공망을 속이기 위해 가짜 드론 '로디르'(Лодырь)을 개발했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통합무인솔루션특별센터'의 드미트리 쿠쟈킨 사무총장은 '로디르'가 'FPV'(First Person View·드론에 장착된 카메라 영상을 보면서 조작하는 드론) 드론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적의 전자 정찰 시스템을 교란할 수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로디르'는 러시아어로 '게으름뱅이'를 의미한다.
적을 속이는 드론-미사일 입체 공격 작전도 있다. 먼저 드론을 발사해 대공 방어망을 뒤흔든 뒤 강력한 미사일(녭튠)로 목표물을 직접 타격하는 식이다. 우크라이나군은 지난 9월 21일 크림반도 사키 비행장 공격 시, 이 전략으로 상당한 손실을 안긴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키 비행장에는 최소 12대의 수호이(Su)-24와 Su-30, 판치르 방공시스템 등이 배치돼 있었고, 인근에는 이란산 드론의 조종을 위한 훈련 시스템도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측이 폭격기 위에 타이어들로 덮은 모습의 위성 사진/사진출처:스트라나.ua
한가지 더 눈에 띄는 것은, 상대의 눈을 속이지는 못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엄폐·은폐 전략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엥겔스 공군 기지에 배치된 전략 폭격기 Tu-95MS를 자동차 타이어로 덮은 위성 사진이 지난달 초 공개됐다. 타이어가 진짜 폭격기를 보호할 수 있겠느냐는 의혹이 즉각 제기됐지만, 미 공군 유럽주둔 제임스 헤커 사령관은 "드론이 비행기에 부딪힐 때 타이어가 그 충격을 완화시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타이어로 폭격기를 덮는 것은 임시 처방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크라이나 공격에 나서는 전투기들을 최전선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공군기지들로 분산 배치했다.
같은 논리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수상 드론' 공격을 막기 위해 특별한 해상 방어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 침몰한 바지선 5척으로는 크림대교 근처에 '장벽'을 쌓은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군이 흑해에 설치하는 수상 드론 해상 방어 장벽/사진출처:newizv.ru
지상 작전에서도 상대를 기만하는 기발한 방안들이 개발됐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초 "우크라이나의 지상 반격이 수백 개의 8~10명 공격팀에 의해 주도된다"며 이들의 공격 작전을 자세히 소개했다. 먼저 최대한 공격 거리를 확보한 뒤 적진을 검사하는 드론을 띄우고, 사격팀이 위협 사격을 가하는 사이, 공격팀은 적 진지로 돌격한다는 것. 그렇게 진지 하나를 점령하면, 그 진지는 다음 공격을 위한 베이스 캠프가 된다.
러시아군의 대응은 더 공격적이다. 철수하면서 진지에 가연성 물질을 부은 뒤, 우크라이나군이 도착할 때 즈음, 드론으로 폭탄을 투하해 진지를 불바다로 만든다. '위장 철수' 작전이라고 할까?
지뢰 제거에 나선 우크라이나군을 향해 아예 지뢰밭에 불을 지르는 것도 비슷한 전략이다. 러시아가 부설한 지뢰밭의 규모가 무려 25만㎢로 추정되고 있다. 한반도 전체 영토보다 크고, 서독의 면적과 맞먹는 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