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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묵상글 들 (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 원하는 것이 원하지 않는 것보다 크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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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원하는 것이 원하지 않는 것보다 크면
저는 오늘 성 바오로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성 바오로가 이렇게 된 것을 나는 은총이라고 생각하는지,
성 바오로처럼 되는 은총을 나도 받기 원하는지 자문하고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결같이 바라는 것은 바오로 사도처럼 눈이 번쩍 뜨이는 체험,
바오로 사도처럼 극적이고도 강력한 주님 체험,
그래서 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체험을 한번쯤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의 저의 삶이 충분하다거나 문제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완전히 또는 얼마간 문제가 있다거나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저를 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것 같고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 절실하거나 진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그럴 마음이 그리 강하지도 않고 많지도 않으며,
꼭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으면서, 그리되면 좋지 않을까
어쩌다 한번씩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아닌지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일까 오늘은 독서의 다음 구절이 눈에 특별히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바닥에 엎어졌다는 말,
이것은 물리적으로 곧 몸이 엎어져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것만이 아닌
영적으로 또는 존재 전체가 완전히 무너지고
삶이 완전히 뒤집히는 것을 말함일 것입니다.
내가 무너지는 것,
삶이 뒤집히는 것,
저는 이것을 아직 원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으며,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사는 것일 겁니다.
그렇지만 바오로 사도처럼 뜨거운 신앙과 삶을 살기 원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원하는 것이 원치 않는 것보다 강하면 주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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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소명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비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유대 군중에게 자신의 소명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열성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골수분자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음을 말합니다. 곧 다마스쿠스로 인도되어 하나니아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귀 기울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니아스가 바오로에게 했던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사도 22,14-15)
이 말 속에는 신앙생활의 원리가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곧 바오로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한 바람에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는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삶을 신앙생활의 원리로 삼아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려주시는 분이 없으면 들을 수가 없고, 아무리 보고자 해도 보여주시는 분이 없이는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먼저’ 그분이 들려주시기에 들을 수 있고, 보여주시기에 볼 수 있고, 깨우쳐주시기에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듣고 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전파가 우리의 사명이요, 파견한 분에 속한 이가 우리의 신원이요, 파견한 분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걸으며,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기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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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심은 삶의 방향전환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를 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난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향을 가려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바쁘게 서두르다가 그만 목적지와는 다른 방향의 차를 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차를 갈아탈 생각은 하지 않고 기차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고, 노약자를 도와주고,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사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그의 선행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종착역은 그가 목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기차 안에서 선행을 베풀 것이 아니라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습니다.
회심은 바로 방향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교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방법으로 더 분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얼마 전 여호와의 증인 신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분들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특별교육을 반복해서 한다고 들려주었습니다. 각성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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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유다교 당국의 앞잡이가 된 사울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사도적 열성을 지닌 선교사로 인생을 전환한 일은 유다인들 안에서나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당시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향후 지금까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이 일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박해자 사울에게 벼락을 쳐서 돌려세우신 데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사울은 동안 고향 집에서나 아라비아 사막에서나 안티오키아 등지에서 이 사건의 의미를 캐느라고 14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구약성경을 되짚어 읽어가며 바리사이로서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던 성경 지식을 총점검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만났던 증인들을 만나 그분의 가르침을 되새겨보기도 하는 가운데, 마침내 그분은 하느님이시오 메시아이시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서는 바오로라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바꾸어 선교사 인생을 출발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진리에 눈을 뜬 것입니다.
이 기나긴 회심의 세월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대목이 오늘 독서의 한 장면입니다. 천둥치는 벼락 소리는 번개가 칠때 수반되는 현상이지요. 그래서 그는 천둥소리에도 놀랐지만 번개 빛에 눈이 멀어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의 눈을 다시 뜨게 해 준 그리스도의 증인들 중 한 사람은 하나니아스였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기도 중에 그를 사울에게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니아스가 사울에게,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사도 22,13) 하고 말하는 순간에 그는 눈을 뜨게 되었고 모든 진리를 확연하게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부터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리신 선교 명령을 함께 받은 양 그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러 다녔습니다. 그를 감싸고 있던 온갖 미신적 인습과 우상숭배적 열성의 비늘들이 벗겨지고 본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밝혀주시려던 원천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율법의 비늘을 벗겨내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신앙의 씨앗을 찾아냈으며 유다이즘을 극복하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유다교를 고집하는 데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언제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께로 회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겨레 사랑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9,3에,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라고 썼습니다.
또한 바오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아 사도로 양성된 열두 제자와 달리 평신도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못지않은 자부심으로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오늘날 모든 평신도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어찌나 그의 선교 활동에서 우러나오는 권위가 컸든지 에페소 교회에는 티모테오를, 크레타 교회에는 티토를 임명했는데, 이 두 사람은 바오로를 수행하던 제자들이었고, 오늘날 주교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뼈속까지 히브리 사람이었지만 고향 타르수스에서 그리스와 로마식의 국제교육을 받은 덕분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그리스 문화에 젖어 있던 로마 제국의 이방인들에게 토착화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고 그리스식 사유에 숙달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런 문명의 가교를 통해서 아시아의 서쪽에서 시작된 복음을 서진시켜 당시 제국의 심장인 로마로 향하게 만들었고 이후 게르만화 과정을 거쳐 온 유럽을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 변화시킨 단초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열두 제자처럼 예수님께로부터 사도 양성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선교의 본 모델을 개척하였습니다. 찾아가는 선교를 통해서 선교의 현장성을 보여주었고, 노동하는 선교를 통해서는 선교의 자립성을 담보하였으며, 공동체를 건설하는 선교를 통해서는 개인주의화될 수도 있었던 신앙의 공동체성을 확보하였고, 그리고 수많은 편지를 통해 유대하는 선교를 통해서는 선교사가 현지를 떠나면 단절될 수도 있었던 흔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속적 유대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지난 2008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성 바오로 탄생 2000주년을 기념해 특별 성년 '바오로 해'를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바오로 사도의 신앙과 영성을 본받고, 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노력할 것을 권고했던 이유도, 그가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교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성공회 등 어느 그리스도 교파에 속해 있든지 바오로 사도의 신앙과 영성을 본받고자 노력하는 만큼 교회 일치는 촉진될 수 있으리라는 교파 간 합의 때문에 그의 회심을 기준으로 교회 일치 주간을 보낸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니아스가 사울에게 건넸던 그 결정적인 말씀을 다시 상기시켜 드립니다: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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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버지께서 하늘 나라에 가신 뒤, 읍사무소에 가서 ‘가족관계서’ 1통을 발급받았습니다. 부모님 재산을 정리하는 데 필요하다고 해서 발급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서류를 보는 순간 눈물이 저절로 나옵니다. 제가 결혼하지 않았으니, 증명서에는 저와 부모님만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 이름 옆에 ‘사망’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것입니다.
분명 두 분의 장례를 치렀고, 자주 산소에 가서 미사와 연도를 바칩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제 산소에 가도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부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나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만 힘든 것일까요? 어떤 이별이든 우리에게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가져다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별을 힘들어하면서도 이별의 삶을 계속 선택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과 진정으로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당연히 이별해야 하는 것처럼 관계를 끊으려고만 합니다. 이 이별은 괜찮을까요? 우리는 주님과 절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에 삶 자체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끈끈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극복하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전달하십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는 여러 표징이 따른다는 약속도 하시지요. 믿음의 힘이 그렇게 크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서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며 복음 선포의 사명을 충실하게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했던 철저한 유다인이었습니다. 율법만을 준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생각을 따르게 되었고,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주님과 이별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회심해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회심을 통해 얻게 된 믿음, 이 믿음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전달해주었습니다. 믿음으로 각종 표징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했던 바오로의 삶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이별의 관계인가요? 아니면 사랑의 관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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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자기희생이다. 이것은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다(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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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현재 논란 중인 식당 가격’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작성자는 흑미밥, 따뜻한 된장국과 3가지 반찬이 있는 사진을 올리며 다음과 같이 글을 적었습니다.
“11년 동안 이렇게 차려주고 1,000원을 받습니다. 장사도 잘돼서 하루 100명이나 먹고 갑니다. 더 어이없는 건 식당이 적자라 사장이 투잡까지 뜁니다.”
이 식당은 광주광역시 동구 대인시장에 있는 ‘해 뜨는 식당’입니다. 고(故) 김선자 씨가 사업 실패로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웠던 시절 주위로부터 받은 도움을 갚기 위해 문을 연 식당은 현재 김 씨의 딸인 김윤경 씨가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반 식당은 공깃밥 한 그릇에 천 원을 받는데 이곳만큼은 고(故) 김선자 씨가 2010년 문을 연 뒤로 줄곧 밥값 천 원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공짜로 줄 수 있었지만, 돈을 내고 당당히 식사하시라는 따뜻한 배려였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500원 받는 밥집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후원 없이는 불가능했는데, 30년이 넘은 지금 1,000원을 받고서 밥집을 운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운영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밥집을 운영하는 분의 사랑과 이를 도와주려는 분들의 사랑이 모여서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든 것입니다. 사랑만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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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에서 샌디애고로 장례미사를 다녀왔습니다. 장례미사를 다녀오면서 하느님께서는 많은 천사를 보내주셨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샌디애고 한인 본당의 신부님께서 장례미사를 집전해 주셨고, 공동 집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신자분들이 고인이 되신 신부님을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8년 전에 달라스에서 살던 부부가 연락이 되어서 공항에서 숙소까지, 숙소에서 성당까지 차량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40년 전에 신부님을 위해서 주방봉사를 하던 자매님도 한국에서 와서 신부님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첫 본당의 보좌신부였을 때, 대학교 1학년 학생으로 활동하던 자매님이 먼 타국에서 선종하신 신부님의 장례절차를 모두 맡아 주었습니다. 제가 신부님 영정사진을 들고 장례미사에 갔지만 하느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 주셔서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마무리 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아니었으면 한국에서 주교님께서 오셔서 장례미사를 집전하셨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교구장님을 대신해서 고마우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서울교구에서는 미국에 있는 제가 어쩌면 천사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초대교회에도 예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리사이파 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중함과 해박한 지식으로 초대교회의 신학과 조직을 탄탄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의 선교열정을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서 신약성서를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삶과 영성을 묵상하면서 우리들 또한 십자가와 수난의 영성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의 영성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 있습니다.’(1,17)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율법과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음을 이야기합니다.(3,21)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영성을 깨닫는다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십자가를 바라보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항상 즐겁고 기쁨에 찬 마음으로 일상을 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극악무도한 죄인이 못 박혀 죽는 곳인 십자가, 그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서 수난 받고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요, 우리가 믿는 신앙입니다. 이 십자가의 신앙은 성령의 힘으로만 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2,20)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전서 1장에서 복음 선포자의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복음 선포를 우리의 머리로가 아니고 성령의 힘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평화를 빌어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남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부활할 몸이요, 하느님의 살아계신 성전인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인 몸이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속량된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도 주님의 몸이요, 성체도 주님의 몸이요, 하나로 일치를 이루는 몸입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2022년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들에게 천사처럼 보이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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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 만남, 회심, 변화, 선포 -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34년째 수도원에서 정주하다 보니 흐르는 세월이 보이는 듯 합니다. 주변 친지들의 변한 모습을 보면 또 지난 사진을 보면 세월의 흐름을 실감합니다. 살아온 세월보다는 남은 세월은 점점 짧아집니다. 2014년 안식년중 산티아고 순례후 참 많이 강론 주제에 오른 말마디가 ‘삶의 여정’입니다.
무한한 여정이 아니라 유한한 여정입니다. 목적지 없는 여정이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집이라는 너무 분명한 목적지 뚜렷한 여정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주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자 하느님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무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입니다.
하루하루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날짜도 가까워집니다. 과연 하루하루 예수님을 닮아가는 귀가의 여정인지요? 제가 늘 살펴보는 바 삶의 여정중 현재의 위치입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할 때,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차례 밝혔습니다만 제 경우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4시,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초겨울쯤 되는 것 같습니다. 저절로 삶의 환상이나 거품은 사라지고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 주님의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요즘 산책중 여전히 즐겨 부르는 노래는 ‘바다’와 ‘늙은 군인의 노래’입니다. 바다를 노래하면서는 ‘희망과 행복의 삶’을 선택하며, 늙은 군인의 노래를 노래하면서는 영원한 현역으로서 주님의 전사로서의 전의를 새로이 합니다. 참으로 죽는 그날까지 영적 전투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주십사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자 1월18일부터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주간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의 중심에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을 가장 닮은 예수님과 일치의 절정을 살았던 성 바오로 사도가 계십니다. 참으로 불가사의의 하느님 섭리의 인물이 성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주님과의 만남-회심-내적변화’의 일련의 과정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회심 역시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주도하시는 은총이요, 이에 앞서 진리를 찾는 우리의 갈망이, 열정이 전제됨을 봅니다.
참으로 내면 깊이에서 당신을 찾는 바오로의 갈망을 알아채신 주님은 오랫동안 기다려 오다 마침내 때가 되자 결정적 순간에 개입하십니다. 늘 읽어도 새롭고 감동적인 박진감 넘치는 장면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친히 고백한 내용으로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일러 줄 것이다.”
주님과 사울과의 대화가 너무 진지합니다. 박해받는 신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주님입니다. 주님과 형제들은 하나입니다.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자 지체입니다. 형제들에 대한 박해나 무시는 바로 주님께 대한 박해와 무시라는 사실이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그러니 형제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과 신뢰는 그대로 주님께 대한 존중과 사랑, 신뢰라는 것입니다.
사울과 함께 있던 이들을 빛은 보았지만 주님과 대화하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주님과 사울의 내밀한 만남의 체험입니다. 아마 주님과의 특별한 은총의 만남의 기억은 바오로 사도의 평생 삶에 샘솟은 활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남과 동시에 발생한 회심입니다. 누구나 바오로와 같은 비상한 회심 체험을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회심은 은총이기에 사람마다 회심의 양상은 다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평생 주님과의 만남은 끊임없이 계속되며, 만남과 더불어 회심 역시 알게 모르게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명심할 바, 우리 삶의 여정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자 동시에 ‘회심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회심도 은총이자 일종의 훈련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은 하루하루 날마다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회심을 체험합니다. 주님의 주도적인 은총 안에서 만남과 회심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영성훈련이 바로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기도와 공부와 일이 조화된 수도원의 일과표를 만남의 시스템, 회개의 시스템이라 즐겨 부르곤 합니다.
사울에 대한 예수님의 배려가 참 치밀하고 섬세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던 당신 섭리의 사람, 하나니아스를 준비시킨 것입니다.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주님과의 극적인 만남으로 눈을 뜬 사울입니다. 마침내 눈먼 열심의 무지한 사울이 주님을 만남으로 눈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이제는 완전히 내적으로 변화된 사울입니다. 만남과 회심에 이은 내적변화입니다.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음으로 완전히 새로 태어난 사울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았고 죄를 용서받았지만 회심 이후의 사울처럼 만남과 회심, 내적 변화의 여정은 죽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과의 만남, 회심, 내적변화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두가 지향하는바 바로 복음 선포 사명의 실천입니다. 복음 선포의 실천과 더불어 주님과의 만남과 회심, 내적변화도 활발해 집니다. 이기적 자기도취의 관상이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린 복음 선포 활동으로 전개되어야 비로소 회심의 완성이라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복음 선포자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주님과의 만남과 회심, 내적변화가 전제되어야 함을 봅니다. 예외 없이 회심한 모든 이들에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장엄한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마다 복음 선포의 양상은 다양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요 복음 선포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구원과 단죄 역시 우리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믿고 세례를 결행할 때 구원이고 믿지 않을 때 단죄이니 말입니다. 주님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단죄의 심판입니다.
타고난 바꿀수 없는 것도 많지만 새삼 하루하루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 끝이 없습니다. 선택의 은총이요 선택의 자유입니다. 주님을, 만남을, 회심을, 변화를, 복음 선포를, 구원을, 행복을, 감사를, 생명을, 기쁨을, 평화를, 자유를,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진리를, 선을, 아름다움을 선택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삶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좋은 모든 긍정적인 덕목들은 생명과 빛이요, 신망애의 주님만을 선택하여 살 때 저절로 따라오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할 때 모든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 좋아하는 미사중 감사기도 다음 경문이 이를 입증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풀어 주시나이다.”(감사기도 3양식)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참 좋은 주님을 선택하여 삶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1.2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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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내가 먼저 회개하자!'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모든 성인들 중에서 회심 축일을 지내는 성인은 바오로 사도가 유일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회개)이 인류 구원 역사 안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은 유다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사도22,7.8.9.10)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하나니아스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의 박해자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대변신' 합니다. 이름도 사울에서 바오로로 바뀝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복음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절대사명'입니다.
복음 선포의 첫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는,
'내가 먼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단순한 진리이지만, 내가 먼저 복음이 되지 않으면 너를 주님께로 인도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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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 선포는 의무이며, 그 대상에 경계와 구별이 없다는 이 말씀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에 자신의 삶을 바친 바오로가 떠오릅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유다 사람”으로 태어나,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은 바오로는
그리스도 신자들을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오늘 독서가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 체험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번쩍이는 커다란 빛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특별한 체험으로 바오로는
‘그리스도 박해자’에서 ‘그리스도 선포자’로 바뀝니다.
작은 습관 하나도 바꾸기 쉽지 않은 우리이기에,
사울에서 바오로로 바뀐 이름처럼 변화된 그의 삶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강렬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며,
회개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회개는 자신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이 만나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회개의 결과는 ‘변화’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나는 회개하였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변화하였는가?’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과 그의 열정적인 복음 선포를 기억하며,
우리도 ‘회개’하는 신앙인, ‘선포’하는 신앙인,
‘변화’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와 함께 고백합시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필리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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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철저한 유다인이었고 율법학자였다. 처음에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교회와 한 몸이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개종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그의 개종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축일은 8세기부터 프랑스 지방에서 먼저 지내오다가 10세기 말에 교회력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의 개종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또 다른 공현이며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모습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다. 사도의 개종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 중의 하나이며, 박해자였던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켜준 사건이었다. 그의 개종은 또한 하느님 앞에 크나큰 겸손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개종”은 그의 가르침의 많고도 중요한 요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특히 거룩한 은총과 교회의 잔인한 박해자 사울을 “사도”로 변화시킨 능력에 대한 권능의 주제에 대한 그의 학설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개종 축일을 지낸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방인의 사도로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분이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까지 주시면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그러기에 또 다른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다. 부활을 체험하였다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였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게 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선교의 사명 역시 이 부활하신 예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주님께서는 이 복음선포를 항상 협력해 주시고 계시다. 이 도우심을 믿고 우리는 용감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주님을 알게 된 것은 특권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무요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알고, 신앙 안에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함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 중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듯이, 즉 어렵고 힘들어도 해내야 하듯이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우리가 받은 우리의 세례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며, 말씀을 우리도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나 자신과 모두가 주님 안에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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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참된
방향이다.
방향을 틀어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다시금 처절하게
깨닫게 하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다.
가장 아픈 삶이
가장 기쁜 삶이
되게 하는
회심(回心)이다.
하느님의 방식은
참된 회심의
방식이다.
회심은 참된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참된
길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보게 되는
회심이다.
회심으로
하느님께로
가는 복음을
믿게 된다.
하느님과
우리의
새로운 관계가
회심의 탄생이다.
다마스쿠스의
회심으로
성 바오로
사도가
탄생한다.
회심이
참된
사랑이다.
삶을
되돌려주고
되돌아가게
하는 빛은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성 바오로 사도는
회심의 여행을
떠난다.
되돌려주어야 할
복음의 사랑이다.
회심으로
자라나는
교회의
삶이다.
우리의 회심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랑의 빛임을
믿는다.
다마스쿠스와
수도원 사이를
이어주는
회심의 빛이다.
한 사람의
참된 회심이
필요한 때이다.
하느님 사랑을
향하는 기쁜
회심 축일이다.
가장 좋은
회심의 때를
선물로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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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에 대한 확신으로>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 22,3).”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일’이라고,
또는 ‘하느님께 봉사하는(충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그의 ‘열성’과 ‘섬김’은 ‘진짜’였지만,
그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또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방향이 잘못된’ 열성이었고, 섬김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나타나신 일은,
그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 직접 개입하신 일입니다.
“... 그렇게 길을 가다가 한낮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하늘에서 번쩍이며
나와 내 일행 둘레를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히브리말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뾰족한 막대기를
차면 너만 아프다.’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자, 일어나 바로 서라. 내가 너에게 나타난 것은 너를 종으로, 그리고 네가 나를
본 것과 또 내가 앞으로 너에게 나타내 보일 것의 증인으로 선택하기 위해서다.
나는 너를 이 백성과 다른 민족들에게서 구해 주겠다. 이제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낸다.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와 죄를 용서받고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이들과 함께
상속 재산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사도 26,13-18)”
바오로 사도의 증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를 증인으로(사도로) 뽑으셨습니다(갈라 1,15).
왜 바오로 사도일까?
그가 여러 가지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위대한 점이 많지만,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점은 ‘충성심’과 ‘열정’입니다.
왜 하필 그때 나타나셨을까?
교회를 박해하기 전에, 또는 스테파노가 순교하기 전에
그를 사도로 뽑으셨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왜 그때일까?’ 라는 질문의 답을 우리는 모릅니다.
어떻든 스테파노 순교자는
박해자 사울이 사도로 뽑힌 일에 대해서 억울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억울해하기는커녕 크게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테파노는 죽기 전에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는데(사도 7,60),
그것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일이었습니다.
스테파노는 박해자 사울의 ‘극적인 회심’을 보면서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음을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나타나신 일은,
아무도, 바오로 사도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응답도 그렇게 갑자기 이루어졌을까?
갈라티아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나서 삼 년이 지난 뒤에 베드로 사도를 만났습니다(갈라 1,17-18).
그 삼 년 동안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혼자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고행하는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부르심’이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응답하기 전에 그 정도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회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갈라 1,12-13).”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예수님을 모르고 살다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원래 가지고 있었던 하느님에 대한 충성심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결합하면서 이루어진 변화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소심한 성격이었고(1코린 2,3),
볼품없는 외모에, 몸도 약했고, 말도 잘하지 못했고(2코린 10,10),
어떤 고질적인 만성 질병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2코린 12,7).
그런데도 그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들을 참고 견디면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기 위해서 상상하기도 힘든 강행군을 했고(2코린 11장),
그리고 순교로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열정과 용기와 초인적인 인내심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냥 ‘은총’이라고 말하면, 그 자신의 노력을 무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 원래 태어날 때부터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다른 사도들도 다 그렇지만, 바오로 사도의 위대함은 ‘믿음의 위대함’입니다.
믿음에서 응답이 나오고, 믿음에서 변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믿음에서 인내심이 생기고, 믿음에서 열정이 생깁니다.
반대로 말하면, 믿음이 부족하면 그 모든 것이 다 부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첫 번째로 본받아야 할 것은 그의 ‘믿음’입니다.
두 번째로 본받아야 할 것은 그의 ‘뜨거움’입니다.
그는 박해자 시절에도 ‘뜨거운’ 사람이었지만,
사도가 된 후에는 ‘더욱더 뜨거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뜨거움’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에서 생긴 것입니다.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확신과 신념에서 비롯된 뜨거움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뜨거운가?”
“그냥 미지근한 상태에서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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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마음을 고쳐먹고 복음을 선포함 ♣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 22,16)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소아시아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사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고,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유다인이었습니다(사도 22,3). 그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신자가 날로 증가할 무렵 고향에서 예루살렘으로 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섭니다(22,4).
사울은 예루살렘 최고의회의 공문을 갖고 다마스쿠스의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나섭니다. 그는 다마스쿠스 가까이 이르렀을 때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부활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강한 빛 때문에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하나니아스의 도움으로 다시 보게 됩니다.
하나니아스가 그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22,16) 그렇게 사울은 바오로로 다시 태어납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나 놀라운 체험을 한 그는 인생을 완전히 바꿔 살게 됩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부터 예루살렘, 타르수스, 안티오키아, 로마,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회심 후 바오로는 멀고도 험난한 길을 가야했습니다. 오죽 힘들었으면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편이 훨씬 낫다."(필리 1,23)고 했을까요. 그는 선교여행 중에 4년간이나 옥고를 치르고 죽을 위험도 당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39도의 매를 다섯 번 맞고, 로마인들에게 태형을 세 번 당하며, 세 번 파선 당하여 바다에서 일주일간 표류하기도 합니다. 그는 네로 황제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바오로는 믿음의 대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스스로 작정하여 회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사로잡아 마음을 변화시켜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그분 앞에 자신을 두어야겠습니다.
회심은 삶의 방향을 온전히 주님께로 돌려 새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회심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온 세상에서’ ‘모든 사람과 피조물’을 위해 남김없이 되돌립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처럼 유다인과 이방인 가릴 것 없이 모두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배우고 익히고 지녔던 모든 것은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게 됩니다.
회심한 사람은 주님께 얼굴을 돌리고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며, 주님 사랑의 연장으로 내놓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겪는 온갖 시련과 고통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견뎌냅니다. 나아가 인간과 생태환경, 세상과 피조물 사이를 가르는 온갖 요소를 극복하여 화해와 일치의 길로 이끌도록 힘씁니다.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주님께로 향하여 새롭게 함으로써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력 넘치는 주님의 사랑을 선포할 소명이 주어졌습니다(마르 16,15). 오늘도 우리가 모든 피조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지구생명체의 하나요 동반자임을 의식하며, 하느님의 기쁜소식을 선포하였으면 합니다. 복음선포는 소명이자 주님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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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은총의 바닥 체험을 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하느님의 은총이 뒤따릅니다!
정통 유다인이자, 바리사이 가운데 바리사이였으며, 유다교 수호에 목숨을 건 돌격대원이었던 청년 사울의 회심 여정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말씀은 언제 읽어도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입니다.
사울은 그리스도교 섬멸이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사제에게 갑니다. 그리고 특별권한을 발부해줄 것을 청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는 일종의 체포영장을 신청한 것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체포하기 위해 살기를 내뿜으며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드디어 주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엄청난 밝기의 빛과 함께 사울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이어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질책하는 듯, 타이르는 듯한 예수님의 음성과 함께 사울의 인생은 급격한 수직 낙하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좋던 시력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언제나 당당하게 활보하던 사울이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겨우 걸음을 떼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었던지 그는 사흘 동안이나 음식을 입에 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울은 사람들의 손에 의지해서 겨우 다마스쿠스까지 당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충격에 그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 사흘은 사울의 일생에서 가장 춥고 배고픈 사흘, 가장 끔찍하고 혹독한 사흘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그 사흘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은혜로운 사흘, 자신의 삶을 180도 전환시키는 은총의 사흘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사울은 식음을 전폐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총체적 재점검을 했을 것입니다. 사흘간의 대 피정을 통해 그간 자신이 얼마나 그릇되게 살아왔는지,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완전한 새사람, 온전한 예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비워낸 사울, 완전한 바닥까지 내려간 그의 마음 안에 드디어 주님의 성령께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십니다. 드디어 은총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그 순간은 바오로 사울이 주님 이외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든든하게 받쳐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은 주님 외에 더 이상 길이 없고, 그분만이 자신의 원천이자, 마침, 전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 옛날 청년 사울이 겪었던 은총의 바닥 체험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체험을 통해 온전한 당신의 자녀로 거듭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인생의 전망,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행복한 새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은총의 바닥 체험을 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하느님의 은총이 뒤따르는데, 그것은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비어있는 데서 충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사라져가는 석양에서도 아침노을의 서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죽음에서도 생명을 바라보게 합니다. 복종에서 자유를 느끼게 합니다. 바닥에도 희망을 잃지 않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가끔씩 사울에게 행하셨던 방식으로 접근해오십니다. 때로 기고만장한 우리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내려치시고 심연의 밑바닥으로 내려보내십니다. 우리의 완고함, 우리의 똥고집을 완전히 꺾어놓으십니다. 일종의 충격 요법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네 인생길 안에서 가끔 겪게 되는 추락, 실패, 바닥 체험, 미끄러짐의 순간들이 반드시 나쁜 것 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조금도 원치 않았던 충격적인 사건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하시고, 당신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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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열정이 없는 자는 회개시킬 수 없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만남을 통하여 회심하고 또 그 이후 교회의 최고의 사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바오로 사도를 교회에 보내셨고, 교회의 대표로 하나니아스가 그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사도단에게 파견받습니다.
결국, 회개는 교회 공동체에 머물며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교회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직 온전히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바오로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나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바오로 사도에게는 나타나실까요?
회개는 방향을 틀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제가 ‘세속-육신-마귀’를 행복으로 추구하던 방향에서 방향을 틀어 반대로 거스르게 만든 과정이 회개였습니다.
그러니 회개는 ‘행복’과 직결됩니다.
행복이라고 믿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무엇이 특별해서 하느님께서 회개를 시켜주신 것일까요?
바로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직진했다는 데 있습니다.
저도 제가 믿는 행복을 위해 직진했습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 위의 나룻배 위에 탄 사람과 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나룻배는 바다로 향합니다.
하지만 노를 젓지 않는다면 방향을 틀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밑으로 내려갑니다.
하느님은 노를 젓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보다 당신께 무관심한 사람을 더 어려워하십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2001)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미지근함의 지옥이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피렌체에서 유화 복원사 과정을 수련 중인 쥰세이는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고 연인 메미와 공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래전 헤어진 연인 아오이를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쥰세이는 자신을 초대한 복원의 대가 조반나 선생의 추천으로 모두의 관심과 부러움 속에 치골리의 작품 복원을 맡게 됩니다.
그런데 쥰세이는 이전 애인인 아오이가 밀라노에 왔음을 알게 되고 그를 만나기 위해 떠납니다.
그러나 그녀 곁엔 이미 새로운 연인이 있었고, 냉정하게 변해버린 그녀의 마음만을 확인한 채 쥰세이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작업 중이던 치골리의 작품이 처참하게 훼손된 채 발견됩니다.
그렇게 스튜디오가 문을 닫아 쥰세이는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를 밴 아오이에게 돈을 주며 자신을 떠나게 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도 아오이가 지운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유산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몰랐던 아오이에 대한 비밀과 오해를 풀게 된 쥰세이는 그녀의 행복을 비는 마지막 편지를 아오이에게 보냅니다.
조반나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자살 소식에 쥰세이는 피렌체로 다시 오게 됩니다.
이때 동료로부터 미술품을 훼손한 건 쥰세이를 질투했던 조반나였다는 사실을 듣습니다.
아오이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없던 쥰세이는 여자친구인 메미와 헤어지고 아오이 역사 마빈과 헤어집니다.
쥰세이는 오래전 두 사람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바로 그녀가 서른 살 생일이 되는 날에 연인들의 성지로 불리는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입니다.
아오이도 쥰세이가 그리워 남자친구를 혼자 미국으로 떠나게 하고 두오모 돔 위에서 둘은 만나 사랑을 확인합니다.
두 사람은 잠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다음날 아오이는 다시 떠납니다.
쥰세이가 잡아줄 것을 기대했겠지만, 쥰세이는 미안해서인지 그녀를 잡지 않습니다.
그러나 쥰세이가 자신이 좋아서 자신을 보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밀라노로 떠난 아오이를 따라가서 만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왜 우리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헤매며 뜨거워지지 못할까요? 실패할 것 같은 자존심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상대의 눈치를 봅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나도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둘이 관계가 좋아져도 또 그런 패턴이 반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둘의 문제는 상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계 자체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생긴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상대가 확실히 싫다는 표현을 할 때까지 굳건히 나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이 맺어주셨다는 확신이 둘의 믿음보다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냥 움직이려 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서는 누구도 둘의 관계를 열정이 지속하고 유지해줄 수 없습니다.
왜 움직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강 위에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사람과 젓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요?
아래든, 위든 노를 젓는 사람은 ‘소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소명이 있기에 무엇이라도 할 필요성이 있어서 그렇게 노를 젓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시간이 ‘죽음’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나를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게 만듭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면 누구나 노를 젓게 됩니다.
남기는 게 하나도 없고 후회만 남긴 죽음이 되는 것을 사람은 견디지 못합니다.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절체절명의 시간이 초조히 지나고 있었습니다.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 이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 사형수는 순간 상념에 젖었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하는 사이 벌써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이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세월을 금쪽같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습니다.
‘아~!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 명령이 내려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는 그때부터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날마다 시간을 5분 단위로 계산하여 살았고, 마지막 삶의 5분처럼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의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름은 도스토옙스키입니다.
죽음은 커다란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죽을 때에 삶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오늘은 충실히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은 분명 ‘소명’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존재 이유를 떠올리고 오늘 죽는다면 보지는 못했지만, 심판자 앞에 설 것이 두려워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죽음을 생각하고 행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생각하고 노를 저었습니다.
방향이 틀렸더라도 노를 저으니 주님께서 회개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움직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방향을 바로 틀어주십니다.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그래서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은 회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바오로는 그렇게 소명으로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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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성 바오로 회심 축일-묵상과 기도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부터 예루살렘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배우고 엄격히 준수하는 유다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심하게 박해하였습니다. 그가 다마스쿠스 성읍 도착 얼마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으로 회심한 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는 것은, 예수님의 발현으로 통해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부터 시작하여 일리리쿰까지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이방인의 믿음에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습니다.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사도 22,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마르 16,15-18
실천
예루살렘 가말리엘 스승 아래에서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은 사울(희망), 후에 바오로(작은자)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열성으로 섬기고 다른 법을 따른다고 생각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남자나 여자나 포박하여 감옥에 넣는 것에 앞장을 섰습니다. 뿐 만아니라 대사제에게 가서 포박이 권한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붙잡아 와 감옥에 넣으려는 열정으로 다마스쿠스로 떠난 율법의 열성자였습니다.
다마스쿠스 도성 앞에서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음성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고, 다마스쿠스로 들어가 누군가를 만나라.는 말씀을 듣고 그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제자 하나니아스를 만나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유다인들을 위한 사도였다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 소아시아, 유럽 곧 유럽 서쪽 스페인 일리리쿰까지 전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한 바오로 그분께 복음의 사도로서 헌신하였습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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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제1독서(사도22,3~16 )
사도행전의 이방인 선교를 다룬 후반부(사도11,19-28,29)는 선교 무대의 주인공이 베드로가 아니라 바오로이다.
후반부의 첫째 부분(11,19-21,16)은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 안티오키아 선교와 세 차례에 걸친 바오로의 선교 여행을 다룬다.
1차 선교 여행(13,3-14,28)과 2차 선교 여행(15,36-18,22)사이에 열렸던 예루살렘 회의(15,1-35)는 서로 다른 관습과 문화를 지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때, 공동체 구성원들이 겪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을 제시한다.
2차 선교 여행 때에 아테네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 바오로가 한 설교(17,16-34)는 그리스도교 복음을 다른 문화권 안에 심을 때 필요한 전략을 가르쳐 주고,
3차 선교 여행(18,23-21,16)을 끝내면서 밀레포스 해안가에서 에페소 원로들에게 한 고별 설교(20,17-38)는 이상적 선교사의 삶을 묘사한다.
후반부 둘째 부분(21,17-28,29)은 유다인들과 로마인들의 박해 앞에서 교회를 변호하고 보호하는 호교론이다.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뜻하지 않게 유다교 율법과 관습을 무시했다는 오해를 받고 성전에서 체포된 바오로는, 유다 최고 의회 앞에서 그리고 로마의 고관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21-24장)
오늘 독서 사도행전 22장 3-16절은 히브리말로 유다 최고 의회 앞에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때문에 성전에서 체포된 자신을 해명하는 이야기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회심을 했는지 밝히는 사도행전 9장 1-22절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갈라디아서 1장 11-24절도 참조바란다.
"사울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길은, 오직 그를 말에서 거꾸러트리는 길밖에 없었다."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er)라는 사람이 사울의 회심 사건을 보면서 한 말이다.
사울은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의 현장에 있었고 그의 죽임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사도7,58)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사도8,1)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사도8,3)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사도9,1-2)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를 뿌리째 흔드는 박해로 이어졌지만, 그 박해는 도리어 교회를 견고하고 굳건하게 세우는 역할을 하였고, 예루살렘에만 머물렀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퍼지게 하면서, 복음이 온 세계로 뻗어나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런데 스테파노의 순교의 현장에 있던 사울이 스테파노의 피의 순교의 댓가 때문인지 몰라도,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방인들을 위한 위대한 복음 선교사로 탄생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다마스쿠스에서 18km 떨어진 곳(현재 지명 코갑)에서 사울은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된다. 사울이 말을 타고 가는데, 하늘에서 비추는 강렬하고 큰 빛에 의해 낙마한다. 요새로 말하면 교통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시리아 정교회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2001년도에 교회를 건축했는데, "바오로 낙마 교회" 혹은 "바오로 회심 교회" 라고 부른다.
사울은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는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사도22,7-11참조)
사울은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고(사도22,11 : 9,8), 사흘동안 앞을 보지 못한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사도9,9) 사울은 눈을 떴지만 앞을 볼 수가 없는 상태가 사흘 동안 계속 되었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사울의 영적인 상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가 율법과 예언서에 정통했으나,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메시아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도리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사울은 사흘간의 영적 암야인 "어둔 밤"을 통해, 자신이 가진 메시아에 관한 성경의 지식과 말씀을, 자신이 박해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께로 포커스를 맞추고 정향하는 단식 피정을 한 것이다.
그 사흘 간의 단식 피정 중에, 진리의 성령께서는 사울의 이성에 은총의 빛을 비추어 주어, 모든 혼돈을 깔끔히 정리하게 해 주셨을 것이다. 이제 사울은 사흘 후에, 하나니아즈라는 예언과 치유의 은사를 받은 봉사자를 만나 안수받고,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된다.
하나니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사도9,17)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죄사함의 세례를 받게된다. 사울의 회심은 복음 전파의 흐름과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 된다. 그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은 복음을 소아시아로, 그리고 로마까지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먹으시면 못하실 일이 없으시다. 불가능이 없으시다.
그러니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내롭게 지켜 볼 필요가 있다. 그들안에서 그리고 그들 뒤에서 어떤 영들이 역사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특히 어둡고 부정적으로 보이는 일들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게속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
시간들 두고 일이 되어가는 과정들과 열매들을 보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가 읽혀진다. 악은 결코 선을, 거짓은 결코 진리를, 사탄과 그 졸개들은 결코 하느님을 이기지 못한다.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사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면 사울처럼 그분을 박해하는 헛된 신앙이 된다.
(마르16,15-18)
15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피조물인 사람이 복음을 모르면, 믿지 않으면 흙의 티끌일 뿐인데, 그들에게 복음을 주라는 말씀이다.
(창세1,25-27) 25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집짐승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같은 날, 같은 재료로 짐승들도 창조하셨다.
(창세2,7) 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하느님의 생명의 숨으로 흙의 먼지가 생명체가 되었다. 생명의 숨(니스마 하이), 하늘의 생명을 찾아 살 수 있는 곧 생명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히브1,3) 3 아드님(예수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 모습(제렘-형상, 모상) 흙의 먼지인 우리를 예수님의 모상이 되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기심으로 예수化- 그 예수님의 모상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福音이다.
(1요한2,2)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에페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한1,4.9.12)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 내 죄를 대속하신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형상, 모상이 되는 것이며 복음을 믿는 것이다.
(1코린15,2-5)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대속의 죽음과 부활,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이다.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 대부분 우리는 그 복음을 믿기 전에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그 종교 행위에만 열심 하다가 죽으면 어찌 되겠는가. 믿음은 성령께 의지하여 성경을 묵상할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곧 성령께서 말씀을 믿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께서 믿음을 주신다.
말씀을 모르던 시절- 성경 말씀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생각은 하지 않고 철야기도, 피정을 찾아다니며 믿음 달라고 ‘소리, 소리 질렀던’ 그 때를 생각하니, 참으로 無知한 탓이었다.
그렇게 주님의 대속,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용서가 이뤄지겠는가? 그러니 斷罪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 하느님의 말씀을 뱀(마귀)의 유혹으로 善惡의 말로 먹은 아담, 그의 그 잘못(죄)으로 모든 이가 죄(죽음)의 심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죄의 심판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뱀의 선악의 말, 그 심판의 말을 하던 마귀가 쫓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심판의 말이 아닌 惡을 대속하신 善의 죽음, 그 眞理의 말씀, 그 새로운 언어를 말하게 된 것이다.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의 말로 따먹은 아담(하와)의 손이다. 그 손이 선악의 열매인 법, 심판의 말, 그 독으로 받아도~ 예수님의 대속, 그 진리의 말씀, 그 새로운 언어, 말을 할 줄 아는 이에게는 죄의 심판, 그 독이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그 진리의 새로운 말로 심판이 주었던 罪, 그로 인한 죄의식의 火病, 질병이 낫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듣고 傳할 때 말이다.
(로마6,4)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믿음으로 흙의 먼지, 그 피조물이 아닌 새로운 피조물, 하늘의 존재가 된 것이다.
*오늘 독서의 사울을 보면, 제사와 윤리로 흠 없이 살았던 그는, 예수님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열성으로 박해하는 그것이 좋은 일, 봉사, 참 신앙인줄 알았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 찾아 가셨다.
(사도22,5-7) 5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 그 후- 그 하늘의 큰 빛이 사울의 율법의 눈, 육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가 박해하고 죽이려했던 이(성령)를 통해 열어 주신다(믿음의 성령께서 그를 통해 하신일) 새로운 길, 새로운 삶,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잘못된 열성, 무서운 헛된 신앙의 사울을 건져내시어 참 신앙, 진리의 새로운 길을 가는 새로운 바오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은 참된 구원자를 만났고, 믿는다. 확신 한다’고 하는 것이다.
(2티모1,12) 12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입당송)
☨천주의 성령님! 하늘의 대속, 그 진리를 못보게 하는 눈을 열어주소서,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 하늘의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저희 모두가 의탁합니다.~아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복음 (마르16,15-18)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5)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 16장 15절보다 앞선 부분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불신앙적 모습으로 보여 주면서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6장 15절 이후부터는 이렇게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복음 전파의 명령을 받고, 능력있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부활의 종교이고,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서 그 부활을 증거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의무가 믿는 이들에게 수행하기 힘든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기만 한다면,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6장 15절에서의 강조점은 복음 전파의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에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은 제자들을 중심한 유대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자들은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무지와 불신앙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이방인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현존은 제자들의 무지와 불신앙을 깨뜨리기에 충분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는 순간에 기존의 무지와 불신앙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부터 깊이 구세주로 영접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의 대상에서 이방인들도 제한되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반증하고, 이방인들도 부활의 복음 앞에서 무지와 불신앙의 틀을 깨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서 '온 세상'으로 번역된 '톤 코스몬 하판타'(ton kosmon hapanta; all the world)는 '세상'(세계)을 뜻하는 '코스모스'(kosmos; world)와 '온', '모든 것'을 뜻하는 '하파스'(hapas)를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당대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상(세계) 뿐만 아니라 오고 가는 세대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곳을 가리킨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로 번역된 '파세 테 크티세이'(pase te ktisei; to every creature)는 보통 만민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복음이 어느 특정 지역과 민족에게 제한되지 않고,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함을 이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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