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의 생전 비화(秘話) 토로: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육영수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위로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문을 열자 박 대통령이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았어요.
바깥이 굉장히 넓었는데 나무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어요."
1987년 5월8일 무교동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전두환(全斗煥) 정권에 의하여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5월1일 통일민주당 창당 기념식에서 金총재가
한 취임연설이 서울올림픽을 나치 치하(治下)의 베를린 올림픽과 비교했다 해서, 또 정강정책에 나타난 통일관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해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될 참이었다. 이날 대화는 정치인과 용기의 문제로 흘렀다.
―전에 야당지도자들 인품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한 분을 빠뜨렸습니다. 장면(張勉) 총리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장면(張勉)씨에 대해서… 나는 장면씨를 잘 알지요. 참 부통령으로서 그때 그 양반이 최고위원이니까 우리 당(민주당)을 같이 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오라고 연락이 와요. 그때 부통령이면 출입도 잘 못하고 집에 있는 것 아닙니까? 매시간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게 자기
일이거든요.
참 그 양반이 집요합니다. 아침에 차를 한 잔 먹자 오후에 차를 한 번 먹자 혹은 저녁을 먹자 점심을 먹자 이런 식으로 자기가 스케줄을
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루도 빈틈없이 그렇게 해요. 그때 그것 보면 좀, 야당 안에서 대부분 분위기가 어떤 것이 있었느냐 하면 자유당
안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승만 박사가 임기를 못 채울 거다 하는 국민들이 많았어요.
걸음도 잘 못 걷고 말이 점점 시원찮아지고 그런 기우도 있었지만 우리 당내에 자연히 조병옥 박사 장면 박사 둘이 놓고 생각할 때 이번
4년 동안에는 이승만 박사가 죽을 거다, 그러면 장면씨가 계승을 할 거다 하는 그런 뭔가 모르는 흐름이 있었어요. 그래서 민주당 안에서 집권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리 모이는 것입니다. 장면씨를 볼 때 뭔가 지도자로서 그렇게 당당한 것 같지 못해요. 조병옥 박사는 당당한 데가 있습니다. 또
너무, 장면씨는 섬세하다고 할까요.'
―소심합니까.
'그렇지요. 소심하다고 하는 말이 정확한 말일 거에요. 정치인으로서 소심해요. 그러니까 5·16 때 수녀원에 들어가서 안 나왔지요.
그게 어디 지도자로서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 같으면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그런 거지. 그래서 역사를 바꾸어 놓았잖아요.'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을 10·26 뒤에 세 시간 동안 만났을 때 그 분한테서는 이상한 걸 안 느꼈습니까.
'전혀 정치인으로서 존경심이라든가 그런 것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정치인이 아니예요.'
―이 시국을 자기가 책임지고 민주화해 보겠다는 그런 것도 없었어요?
'그런 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말로서는 아주 정직하게 심판 노릇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지만 두 번째 만나니까 심판 노릇 하겠다고
안합디다. 그러니까 또 다르지 뭐에요. 자기가 뭘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거지.'
―우리나라에서 결정적인 시국에서 우리가 민간인 지도자로서 장면 박사하고 최규하, 그리고 윤보선 이 세 사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종교인으로 유명한 목사 중의 한 사람인데 그런 말을 해요. 우리나라에 하나님이 너무 오래 벌을 주셨다고 이러면서 역사의 큰 길목에서
꼭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가지고 우리 길을 가로막아 버렸다. 윤보선이 그랬고 장면이 그랬고 최규하가 그랬고, 그 사람 얘기는 정○○이
이○○까지를 얘기했는데 지금 여기서 이○○ 얘기 정○○ 얘기는 안하는 게 좋겠어요. 윤보선까지는 넣어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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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세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 목숨을 걸었으면 역사가 바뀌었겠지요.
'바뀌었지. 나는 지도자로서 중요한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면 박사가 선량한 면은 있지요.
'예. 선량해요. 그런데 선량하면서도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욕심이 너무 많으면 일을 그르쳐요. 자기가 집권하겠다는 욕심, 그것은
굉장한 거지요. 마지막에 큰 일을 그르쳐 버렸어. 그때 장도영이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 안했어야지요. 자기 고향사람이라고 임명했다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됐어요. 군대 안에서 제일 지지 못 받고 비판을 제일 많이 받던 장군인데 지명을 했단 말이에요. 이승만이, 이기붕이한테 최고 충성하던
사람을…'
김영삼 총재의 오기는 용수철 같아서 세게 누를수록 더 튄다. 1987년 5월9일 대화에서도 그런 성질을 느낄 수가 있다.
―(검찰) 소환에 안 응하시면 저쪽에서 구인장을 발부할 가능성이 있는데요.
'힘으로 하면 내가 끌려가겠지요. 구속이 된다든가 끌려간다든가 하면 그것은 영광이지요. 이 시대에서 어떤 의미에서 이 정권으로부터
핍박받는다는 것은 복 받은 것입니다. 지금도 받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해 준다면야 최고의 영광이지요. 기자들이 물어서 한 마디만
했는데 이 시대에 제일 보람있는 게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내가 순교자가 될 수 있다고 그러면 그것은 참 행복한 거지요.'
―만일 소환하면 일단 불응하시고 그러면 구인장 발부….
'구인장 가지고 오더라도 강제로 나를 잡아가기 전에는 안 갈 거에요. 구인장 가지고 왔으니까 갑시다 하는 정도 가지고는 안돼요.
강제로 나를 싣고 가면 나야 폭력에 못 이기지요.'
―그리고 그쪽에서 조사를 받으시면 침묵하실 겁니까.
'거짓말하는 인간들하고 내가 대화할 필요가 없어요.'
―이번 국회를 열 때는 잠시 조용해서 의외라고 생각했는데요.
'본색이 드러난 거지요. 독재자의 말기가 되면 이성을 잃고 앞뒤를 가리지 못합니다. 아까 (기사에 보니) 무솔리니가 재미있는 얘기
했대요. 앞뒤를 못 가린다. 이것이 옳은 건지 그른 건지 가리지 못하게 된다. 잘못 됐다고 판단될 때는 늦었고.'
―그쪽(정권측)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실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내 생각은 그래요. 절대 나를 구속 못한다고 봐요. 이것은 나한테 하나의 협박용으로 하는데 야당사람들에게 총재도 이렇게 한다는
협박용인데 내가 협박이 통하는 사람 같으면 괜찮아요. 그 의미를 알아 듣겠지요. [아이구, 내가 그런 것 있으면 되겠나, 자제도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 같으면… 그런데 나는 솔직히 말해서 더 뛰어버리는 사람이거든요. 죽음이 두렵다든가 해서 이것을 피할 방법이 뭐야 이렇게
생각하는 차원은 벌써 지나버렸으니까.
요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단식 후에 내가 시국을 보는 생각도 그렇고 내 자신에 가해지는 박해 정도 이런 것 가지고요, 이 시대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 내가 감옥에 못 가서 그런데 20일밖에 감옥에 안 가 있었단 말이에요. 5·16 후에 집회를 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계엄령 그때
무더기로 잡혀갔단 말이에요. 군법회의 재판 도중 갑자기 재판 도중인데 나가라고 해서 나왔는데 이 시대에 감옥에 간다는 것은 참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나는 내가 감옥에 간다고 그러면 한국 민주화가 빨리 된다… 그 계기가 된다고 봐요.'
(기자 注 : 이때 검찰이 문제삼은 것 중 하나는 통일민주당의 정강정책 중 기본정책 항목이었다. [민족통일이 정치적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는 민족사적 제1과제임을 인식하고 이를 국정의 제1목표로 삼는다]라는 기본정책이 자유민주주의 아닌 다른 체제로의 통일도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한 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에 착수했던 것이다.
통일민주당은 기본정책보다 상위 개념인 강령에선 [의회민주주의·시장경제를 수호한다]고 못박아 종합적으로 해석하면 용공으로는 볼 수 없다는
통일민주당측의 해명이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여기서 하나 유의해 볼 점은 [체제와 이념보다 민족 통일이 더 중요하다]는 이 정신이 1993년
2월 金泳三대통령의 취임사에 그대로 반영됨으로써 초기 대북(對北)정책의 기조가 혼란에 빠지는 한 요인이 됐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민족통일]이란 개념은 비(非)과학적인 용어선택일 뿐 아니라 북한의 통일정책과 맥을 같이 한다. 한민족은 한반도
이외의 세계도처에 흩어져 있다. 이들까지 통합한다는 의미의 [민족통일]은 전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해외에 사는 한민족(韓民族)은 각 해당 국가의
구성원이 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은 국가통일, 즉 이념과 체제의 통일이다. 같은 정치 원리로의 통일이다.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듯이 자유민주주의체제로의 통일이다. 즉, 북한이 자유민주화돼 남한과 이념 및 체제가 같아지는 [체제 통일]인
것이다. 남북통일의 시작과 끝은 [북한의 민주화]일 뿐이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인데도 [민족]이란 단어에 취해서 [이념·체제를 초월한
민족통일]을 부르짖다가 북한 노동당에 이용되고 남한의 국론을 분열시킨 것이 김영삼 정부였고, 그런 실책의 씨앗이 87년에 이미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김영삼 총재에게 있어서 운명적 라이벌이었던 이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었다. 朴正熙와 얽힌 이야기를 할 때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기억도 생생했다. 金 총재는, 1979년 5·30 전당대회 직전에 정보부가 자신을 탄압한 일에서부터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김재규가 한 건 아니지만 국장, 차장보 이런 사람들이 내 측근 사람들을 전부 다 만나서 총재 절대 출마하지 말게 하라, 절대 안되게
한다고 말했다더군요. 정보정치에 (야당인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얼마 안 남았는데도 우리측 사람들이 총재 자신 있으니까 나보고 나가라고 얘기할
때입니다.
(1979년 봄) 김재규가 롯데에서 한 번 만나자고 해서 저녁에 만났어요. 그때 얘기 다 기억은 못하겠지만, 이건 일반에게 안한
얘기입니다. 정보부장과 만난 거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무 말도 안하고 그대로 있는 것은 좋은 방법 아니다, 직접 만나는 게 좋겠다 하는 생각에서
만났어요. 얘기가 상당히 길었어요. 이런 얘기였죠.
[박정희 대통령이 김 총재를 기어이 총재 안 시키려 한다. 정부의 최종 방침이다. 우리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고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일만은 김 총재가 들어주면 좋겠다. 그 외에는 총재가 원하는 무엇이든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시대에 박정희라는 사람이
강력한 체제를 갖추고 있는데 김 총재가 이렇게 하려고 하면 희생된다]고 얘기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절대로 총재가 탐이 나서 입후보하려는 것
아니다]라고 얘기했죠. 신민당 총재로 나오려고 할 때죠."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 훨씬 전입니까.
'그렇죠. 공작을 시작하려고 할 때니까. 천하를 다 준다 해도 타협은 안합니다. 그따위 얘기를 할 수 있습니까.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정보부 국장 차장보가 만나서 나에게 출마 포기를 권유하도록 했다는 걸 그때 다 들었습니다. 3국장이 설치고 다닐 때인데 3국장이면
정치국장입니다. 3국장에게 내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누가 누구 만나고 누가 누구 만나는 거 다 들었는데 계속 이런 짓을 하면 신문에 제대로 안 나가지만 다 폭로하겠다]
지금 살아 있어서 이름을 대지 않겠지만 (김재규가) 누구를 도와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제의하더군요. 그러면서 마치 나를 위하는 것
같은 말투로 [박정희가 당신을 죽이려 하니 예봉을 잠시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고 얘기하더군요. 기억나는 건 이 정도입니다.'
*김재규(金載圭) : '일가(一家)로서
충고한다'
―김재규가 세 시간쯤 얘기하고 朴대통령께 보고했다 하더군요.
'맞을 겁니다. 시간은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장시간이었습니다.'
―朴대통령 반응은, '김총재 만날 필요 없다. 정보를 보니까 떨어지게 되어 있는데 왜 만났느냐'면서 오히려 역정을
냈다고 하더군요.
'아, 그래요. 그때는 총재 안되도록 하는 일에 정보부만 개입한 게 아니고 청와대에서도 했습니다. 정권 전체가 개입했죠. 나도 그때
보면 강단 있었습니다. 그 정권과 싸울 생각했으니.'
-10·26 사건 후 김재규의 진술에 따르면 차지철은 신도환씨와 이철승씨를 밀었다고 하더군요.
공화당에서 이철승만 밀면 되지, 왜 신도환까지 밀어 표를 분산되게 하느냐고 했다더군요. 나중에 김총재님이 당선되고 나자 김재규가 자기
스태프들에게 차지철을 욕하면서 '왜 신도환 조종해서 신세 망치게 했느냐'고 했다더군요.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인간 김재규에 대해.
'김재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런 얘기 사람들에게 안하는데…) 그 사람 김녕 김씨입니다. 그때 연락한 사람도 김녕 김씨 간부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인데 꼭 만나주라 해서 만나게 된 겁니다. 김재규가 만나서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나는 어찌 됐든 박정희 대통령하고 있지만 김총재가 불행하게 되는 것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일가가 아니었으면
나도 안 만났을 겁니다.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 정권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보통 결심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일가라는 것을 내세워 나를 회유하더군요.'
―김재규가 속이는 것 같진 않았습니까.
'모르겠어요. 정보부장이 좋은 일 하는 것도 아닌데 칭찬하기는 이상하지만 그런 얘기할 때는 언뜻 듣기에 나를 걱정해서 하는 걸로
들리기는 하더군요. 그런 얘기를 나에게 했지만 너무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때 굴복했으면 우리나라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박정희(朴正熙) 죽은 뒤 용서하는 심정으로 문상
―朴대통령이 저격 당한 건 몇 시쯤에 알았나요.
'저녁 9시에 죽었죠 아마. 다음날 새벽에 미국에 있는 교포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텔레비전에 죽었다고 나온다면서 알려주었습니다.
저녁에는 몰랐다가 새벽 4∼5시경에 알았습니다.'
―그때 심정은 어땠습니까.
'솔직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올 때가 왔다고 생각했죠. 그 다음날 아침에 윤반웅 목사가 찾아왔더군요. [박정희 역적은
죽었지만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과격하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죽은 사람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얘기했죠. 나는 죽은 박정희를 용서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문상을 가겠다고 하니까 자기는 못 가겠다고 하더군요.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문상 가지 밀라고 말렸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는 원수도 용서하라고 했는데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죠. 빈소가 마련됐다는 얘기 듣고 28일 청와대에 갔습니다. 장례식도 참석하고
입관하는 데도 참석했습니다.'
―인간 박정희에 대해 측은하게 생각했나요.
'결국 자기가 선택한 길이다, 처절한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죠.'
―라이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던가요. 朴대통령의 좋은 점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박정희가 좋다는 생각은 안합니다. 육영수 여사는 점잖은 사람입니다. 어디서 만나면 나에게 [총재님 건강하십니까]라고 말하곤
했죠. 그렇다고 무슨 말을 나눈 건 아니고 그저 인사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1975년 5월에 만난 건(박정희 대통령―김영삼 신민당 총재
단독회담) 그 내용을 내가 공개를 안했어요.
(朴대통령이) 그런 건 다 공개되면 통치하는 데 지장 있다고 해서 말을 안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말을 안했습니다. 인간이란
한 번 만나면 정이 드는 법인데 박정희 대통령은 나하고 만나고 나서 나한테 더 가혹하게 했습니다. 그때 만나서 나는 절대 민주주의 안하면 안된다
얘기했고 박대통령은 자기 입으로 안한다는 얘기 안했어요.'
―두 분 만날 때 청와대 비서관들도 참석했나요.
'참석 안했어요. 그쪽이 참석하면 내 비서도 참석해야죠. 참석하게 안했죠. 당시 육영수 여사가 죽고 얼마 안되었을 때에요. 처음
만나고 위로의 말을 했어요.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위로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문을 열자 박 대통령이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았어요.
바깥이 굉장히 넓었는데 나무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어요. 박 대통령이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김총재가 정확히 봤다. 이렇게 외롭게 되었다. 내가 욕심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욕심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그런 류의 말이 문제에요. 외롭게 산다고 하니까 동정이 가더군요. 평소 육영수 여사를 좋게 봐서인지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그후에 보니 잔인한 사람 같더군요. 굉장히 잔인해요. 인간사회에서 한 번 만났다는 건 정이 생기는 건데.'
―金총재님이 오해도 받았죠. 朴대통령과 밀약이 있지 않았나 해서 말입니다.
'그렇지요. 나를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탄압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국민들에게 배신을 많이 했습니다. 군인으로 돌아간다고
선서도 하고 울고, 그 사람 잘 울어요. 이러다가 다시 나중에 보면 또 배신하고 나중에 또 울면서 또 참여해야 한다,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 하면서 또 울고 말이야, 그 사람 묘한 사람 같애.'
―눈물이 참 헤픈 사람 같나요.
'그랬죠. 손수건으로 눈물 닦더라고, 참 마음이 안됐더라. 민주주의하겠다. 하는데 언제 하겠느냐 이렇게 안 물었어요. 그때 내
마음같이 생각한 거지. 그때 임기가 얼마 안 남았어요. 2년 남았으니 그때까지 하고 그만두겠지. 이때까지 참았는데 그거 못 참나 2년만 참자.
그렇게 생각하고 안 물어보고 나 혼자 판단한 것이 잘못이지. 시한을 두고 언제 할 거냐고 해야 하는데 얘기가 꼭 그렇게 안되더군요. 그런 아쉬운
마음 있었지만 내가 따지러 간 것도 아니고, 그런데 마음이 잘 변한다 말이에요. 연극을 했는지 속임수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 속을 모르니까
근본을 아는 건 아니니까.'
* '박정희를 놔두면 우리 국민 다
죽이겠다.'
'자기 입으로 그랬거든. 정권 놓는다는 걸 얘기하면 정권 유지하는 데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그것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내가
정권을 잡아본 것도 아닌데 오죽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겠나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점점 짙어가더군요. 결정적으로 그렇게 되는 게 내
비서실장 잡아갈 때, 그때부터 정권 놓을 사람 아니다, 죽을 때까지 놓을 사람 아니라는 생각이 차차 강해지더군요.'
―인간적인 배신감을 많이 느꼈습니까.
'느꼈어요. 박정희를 용납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79년도에 총재 안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가처분하고 제명까지 하고…
그래서 나는 박정희를 타도해야겠다,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나라 국민 다 죽이겠다, 타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뉴욕타임스 스톡스 기자와 문제의 인터뷰를 하실 때 구속될 것 같다는 정보나 느낌이 있었나요.
'정부가 구속하려 한다는 얘기가 많았어요. 나는 원래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자리에서 그 말이 나왔습니다. 박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신경질을 내면서 '신민당 사람들 비행조사서
가지고 있으면서 왜 처리하지 않느냐. 잡아넣어야 하지 않느냐'고 면박을 줬어요.
'김총재를 구속하라고 했는데 유혁인(당시 정무수석)이 말려서 안했다. (유혁인이 말린 이유는) 브라운 국방장관이 한미
국방회담 때문에 오게 되어 있는데 그 전에 구속하면 안된다며 말렸다'.
김총재님 구속관계 건이 그날 화제로 나왔습니다. 구속을 상당히 검토한 것 같습니다.
"'허허 그때 구속을 했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