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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간지에 소아청소년 정신과 의원 원장이신 의사분이 자신이 치료중인 한 학생의 강박증 치료에 대한 글을 실었습니다.『H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손을 원래 자주 씻는 편이다. 이제는 그 정도가 심해져 손이 트고 피가 날 정도로 씻는다. 특히 언니가 만진 물건을 만지지도 못하고, 혹시 언니 손이 닿았다는 느낌이 들면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을 씻어 댄다. 그리고 이제는 학교서도 싫어하는 친구의 손이 닿았다는 생각이 들기만 해도 손을 씻느라 수업시간에도 늦을 정도이다. (중략). H는 병에 걸릴 것 같은 불안감을 제거하고 통제하려고 피가 나도록 손을 씻었다. 하지만 이게 효용성이 없었던 거고, 또 다시 통제하려는 생각 때문에 손 씻기를 반복한다. 인간은 H처럼 불안한 존재이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언젠가 겪을 죽음이 다가올까 봐’ 등등 각자 나름의 불안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서 너무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때 문제는 깊어진다. 발버둥치고 도망가려 할수록 빠져든다』이것이 신문에 실린 내용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이 H라는 아이처럼 결벽에 대한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오염과 세균에 대한 병적인 공포증을 ‘결벽증’ 혹은 ‘불결공포증’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증세가 있으면 본인도 힘들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지적과 깨끗하지 못하다는 판단할 수도 있어 사람들과 벽이 생기고 사회부적응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질병 때문이 아닌 종교적인 이유로 결벽증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 제자들의 행동을 비난하며 사람들을 판단, 정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5장 2절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고 기록된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기준이 맞다고 생각하며 그 기준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신앙적 기준이 잘못되었고 그로 인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 가르침을 통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생각하였지만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아닌 지 우리를 점검해 보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가치관을 제대로 세우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며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잘못된 신앙 모습, 첫째는 자기 욕심의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15장 5, 6절입니다.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부모님 공경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과 그릇된 삶에 대해 책망하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사실 유대인들이 잘못 시행하고 있는 그들의 신앙제도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된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7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 11절입니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예수님 제자를 책망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은 ‘고르반’이라는 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고르반’이라는 제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좋은 신앙방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고르반’은 히브리말로 ‘제물(a sacrifice)’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드려지는 희생의 제물을 ‘고르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르반’이 어느 순간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고르반’이라고 선포하거나 ‘고르반’을 뜻하는 표식을 붙이면 그 물건이나 사람은 하나님, 혹은 성전에 소유권이 귀속되어 버립니다. 물건은 내가 가지고 있지만 그 물건 소유주는 성전의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말로 포장되면서 이젠 이것을 따로 쓸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의 의도는 하나님께 드려진 물건을 개인적으로 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면서 쓸 수 있는 재산이지만 자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부양의무를 회피하는 용도로 ‘고르반’이라는 제도를 사용했습니다. 심지어는 타인에게 갚아야 할 돈으로 쓸 수 있는 재산을 ‘고르반’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갚을 만한 재력이 없는 것으로 포장했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좋은 뜻으로 시작된 것이 점차 부모 부양이나 채무이행의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결국은 사리사욕을 챙기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회괴망측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너무나 잘 알고 율법의 규칙을 잘 적용하기에 그 율법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존재들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인간 본성이 이렇고 결국 말세 때가 되면 이 세상의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갈 것을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아주 오래 전 이집트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엄청난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노인은 많은 곡식을 창고에 저장해 두었던 터라 아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먹을 것이 궁해지자 노인에게 찾아와서 식량을 팔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마을의 모든 식량이 다 바닥나기 전에는 결코 팔 수 없다”며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나중에 더 많은 돈을 받고 팔 속셈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사람이 기아로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노인은 여전히 곡식을 팔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나 컸고 그것을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을 버틸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엄청나게 비싼 값을 지불하며 이젠 식량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잔인하고 이기적인 그 노인은 비로소 입가에 웃음을 지으면서 창고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 창고 안에는 벌레들이 모든 곡식을 망쳐놓고 쓸모없는 상태, 팔지도 먹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생활은 부메랑이 되어 우리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되어 우리를 찌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을 자기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때 우리는 신앙이 가져다주는 유익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이 되고 결국은 멸망이 찾아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만들어놓은 제도와 관습이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릴 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지고 죄악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예배’라고 말하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만 경배합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예배를 통해 인간의 만족을 충족하려고 한다면, 예배가 인간만족을 위한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천국이 아닌 지옥을 향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느끼려고 드려지는 기도의 내용 속에 내 욕심과 나의 욕망이 가득할 때 그것은 축복의 도구가 아닌 타락과 멸망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헌금도, 찬양도, 전도와 선교도, 구제와 봉사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도구가 아닌 내 욕망을 채우고 내 이익을 위해 사용할 때 이 모든 것이 사단이 날 우리의 잘못된 신앙행위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한 나의 신앙규칙들을 만들어놓고 오히려 나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내가 편하고 내가 이익을 보기 위해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전도와 봉사를 이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신앙생활 잘 하는 척 하지만 결국은 내 이름을 높이고 내 명예를 알리기 위한 것은 없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정말 조심하시며 하나님을 위해 드린 것이라면 제대로 드리고 바르게 드리고 온전히 드리며 나를 위한 삶이 아닌 주님을 위한 삶,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잘못된 신앙 모습, 둘째는 외식하는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15장 7,8절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예수님에게 와서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며 예수님과 제자들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이유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외식적 신앙때문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신앙 모습에 대해 책망하시는 구약성경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이들의 신앙 모습이 ‘외식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성경 본문에서 중요한 핵심 단어는 ‘입술’과 ‘마음’입니다. ‘마음’을 근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입술’은 결과물인 열매입니다. 밖으로 보여지는 현실을 뜻합니다.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입술로는 그럴싸하게 경건한 척 말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삶을 꼬집은 겁니다.
클라인스가 쓴 ‘Imposture phenomenon’(임포스쳐 페노메논)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가면현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임포스쳐’라는 단어는 ‘사기꾼’이라는 뜻입니다. 남의 이름, 남의 지식, 남의 명예를 도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남의 명성을 사칭하고 남의 지식을 자기지식인 양 나타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자신은 그런 존재가 아닌데 마치 대단한 사람인 듯 명성과 지식, 존재를 포장하고 원래 자신의 존재와 진실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생깁니다. 이 책에서는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 대기업의 중역 가운데 70%가 ‘가면현상’이라는 병에 걸려있다고 지적합니다. 아무 것도 못하면서 잘 하는 척,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매우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또 내세울 것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아무 것도 없으면서 많은 것을 가진 것으로 포장합니다. 결국 남의 것, 남의 돈, 남의 지식을 마치 자기의 것인 양 포장합니다. 이게 ‘임포스쳐’ 가면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이런 사람을 Hypocrite, 즉 ‘위선자’, ‘사이비’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어느 마을에 거대한 참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나무가 그 곳에 버티고 있었고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들보다 오랫동안 이 나무가 버티고 있을 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찬 폭풍이 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나무의 썩은 속이 훤히 드러났습니다. 겉으로는 힘과 장수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은 번지르르해도 속은 텅텅 비어있었던 나무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여인들은 지구상에서 화장기술을 가장 먼저 사용했던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화장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얼굴과 외모를 한층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전염병인 천연두로 인해 생긴 질병흔적을 감추기 위한 화장기술이 발달했습니다. 서커스가 인기를 끌던 시대에는 과장된 얼굴모습으로 웃음을 안겨줄 삐에로 분장기술이 발달했습니다. 밀림지역 원주민들은 부족 사이에 전쟁을 하면서 순진하게 생긴 얼굴, 편안한 모습의 얼굴을 감추고 무서운 용사로 분장하는 화장술을 썼습니다. 이렇게 화장하는 이유는 다르지만 화장의 목적은 남을 속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장을 통해 결점을 감추고 의도대로 모습을 바꿔 보이게 합니다. 그렇지 않은 모습이 그럴 듯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내면이야 어떻든, 본 모습이야 어떻든 나를 다른 모습으로 포장해 줍니다. 화장뿐 아니라 우리는 외형적으로 원래 모습과 다른 우리들로 포장하기 위해 온갖 요소들을 사용합니다. 학벌, 가문, 지역, 돈, 명예 등을 이용해 나의 결점을 감추고 세상에서 강한 존재로 우리를 치장합니다. 원래 우리의 모습은 감추고 외형적으로 포장된 우리 모습이 드러납니다. 본질과는 다르게 외형적으로 남 앞에서 멋지고 예쁘고 아름다운 나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 얼굴에서 화장이 지워질 때 추한 모습이 하나, 둘 드러나고 우리 본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외형적인 조건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게 될 때 우리의 본연의 모습은 만 천하에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외식하며 가식하며 사람들에게 다르게 보이려는 신앙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16절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내면이 그렇지 않음에도 외형적으로 대단한 양, 믿음이 좋은 양, 건전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양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보이는 것에만 깨끗한 척, 청렴한 척, 순결한 척 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잘못된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인이 되지 마시고 주님앞에서 솔직히 고백하며 연약하고 아픈 모습까지 인정하며 죄인된 것을 고백하며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잘못된 신앙 모습, 마지막 셋째는 세상 기준의 인간적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15장 9절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제자들의 행위를 책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면서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신앙생활에 대해 이렇게 훈계하셨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관이 중심이 되어 인간적 생각으로 신앙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가치 기준이 항상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제자들의 행위가 선하냐? 악하냐?’를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장로들이 지시한 것, 장로들이 전통으로 만들어 온 것, 장로들의 회의 결과물이 신앙 기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병행을 이루는 마가복음 7장 5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 중의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떡을 먹는 것을 보며 “예수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예수님께 항의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장로들의 전통’이 뭘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구전적 모세 율법이라고 일컫는 ‘미쉬나’를 중요시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 ‘미쉬나’는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토대로 모세오경에 등장한 율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적용을 담은 경전입니다. 농사와 축제, 여성, 손해에 관련된 법, 성물, 정결 등의 큰 항목이 있고 그 속에 몇 개의 소항목으로 구분되면서 너무나 세밀하게 원칙을 세워놓고 그 법칙대로 살아가야 하는 너무나 힘든 신앙의 법칙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미쉬나’의 항목 중 오늘 본문에서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들고 있는 지시사항이 있는데 ‘음식을 먹을 때 먼저 손을 씻어야 한다’는 정결항목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말씀을 지킬 것인지를 심사숙고하고 연구해서 제대로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말씀의 본 뜻을 찾기보다 인간적 사고로 사회현상만 연구하다보니 말씀의 근본취지를 뛰어넘어 인간의 전통이 강조되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말씀에서 벗어나 인간이 중심되는 성경말씀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아가며 그것을 어떻게 하면 지킬 것인지?’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관심을 두었고 그러다보니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보다 생활의 적용과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또한 원전인 성경보다 성경 적용의 참고서인 미쉬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미쉬나의 전통을 만들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이 너무나 소중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하나님 말씀을 흐트려놓고 원래 뜻을 왜곡하게 만들었던 것을 우리들이 깨닫고 우리 또한 혹시나 이런 잘못된 길을 가지 않을까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 8, 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장로의 전통 “손을 씻기 전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라는 것은 십계명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모세오경 어디에서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좀 더 경건하게 살아보고자 좀 더 세밀하게 계명과 율법을 지켜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었습니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유대인들이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이 ‘우리가 이런 신앙생활 해보자’며 ‘이렇게 하면 더 바른 생활이지 않겠냐?’며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만든 것으로 사람들을 편가르고 비난하고 책망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조항이 하나님 주신 계명과 율법인 양 포장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이사야를 인용하여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치며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사람의 전통만 지킨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든 신앙생활 잘 하기 위한 규칙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명처럼 적용되어질 때 우리도 잘못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목사님, 현존하는 유명한 목사님께서 신앙생활 잘 하는 방법으로 ‘이런 것을 한 번 해보라’고 권면하는 신앙생활들이 혹 하나님의 계명처럼 느껴지거나 그것이 더 바른 신앙생활처럼 따르고 있는 것이 있을 때에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에 도움이 될 여러 가지 신앙세미나, 신앙훈련을 우상화하며 그것이 신앙의 정석인 것으로 포장해서 다른 교회, 다른 성도들을 책망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데 적용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최근 각종 신앙훈련들과 세미나를 극대시해서 이런 것을 하지 않으면 마치 제대로 신앙생활하지 않는 것으로 매도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지게 될 때 이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 속 율법의 정신은 ‘배고픈 사람을 도와주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이 참 사랑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방식인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손 안 씻고 음식 먹는 것이 죄악’이다라고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어느 지역을 여행하며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해서 불쌍한 마음에 그에게 음식을 나눠 주면서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먹어 건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서 먹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포크와 나이프로 음식을 먹는 지 지켜본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디서 포크와 나이프를 준비할 수 있는 지 모르고 지금 당장 그 자리에서 어떻게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에 우리들의 도움을 받은 그 사람이 정말 좋아할까요? 먹을 것은 주었지만 먹지도 못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고난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더 안 겨 준 것이 아닐까요? ‘차라리 먹을 것을 주지나 말지’... 우리는 먹을 것을 주면서도 먹지도 못하게 만드는 정말 나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내 생각대로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정해놓은 신앙의 규칙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귀한 신앙생활을 위한 훈련이 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런 인간적 규칙과 제약들이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막는 잘못된 신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혹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척, 내가 믿음이 좋은 척, 신앙의 철칙을 잘 지키는 척 살아가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되지 않도록 정말 말씀 가운데 깨닫고 말씀대로만 믿고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신앙생활 잘 하는 것처럼 자신을 자랑하지만 그들은 결국 아무 것도 없는 깡통신앙인인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내면에 신앙적으로 아무 것도 제대로 가진 것이 없으면서 외형적으로만 신앙좋은 척 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인간적인 지식을 기준으로 세상에서 배워온 가치관대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앙을 통해 영광받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신앙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잘못된 신앙생활로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가식적인 모습을 모두 버리고 솔직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잘못이나 죄악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우리 자신을 인정하며 나약한 그 모습마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세상 가치관, 학교에서 배운 인간적 가치관으로 교회와 개인의 신앙에 적용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더욱 집중하며 말씀대로 신앙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생활과 신앙생활,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내가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내 편안함을 추구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고 주님이 영광받으시도록, 그리고 이웃을 섬기며 우리 자신은 낮아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참 신앙생활을 회복하고 정말 바른 신앙인의 모습으로 우리 주님도 칭찬하시고 우리 가족과 우리 이웃도 우리를 보며 주님의 사랑과 섬김을 볼 수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