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 변호사가 《월간천관》에 '이청준문학관 건립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故 이청준 작가의 인물과 문학세계를 심층적 소개 중이다.
2022년 8월호를 시작으로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2023년 1월호, 2월호, 3월, 4월호, 5월호, 6월호, 7월호, (8월호 쉼),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이번이 열여섯 번째 연재기고이다. (편집자 주)
동백분재, 동백실 흉상, 진목리 풍경, 카페 '눈길' -이청준문학관을 위하여(16)
1. 벌써 20년이 넘었다.
장흥 귀족호두박물관 동백실에 이청준 선생님의 흉상을 모시게 되었다. 완도에서 서울로 유배를 온 처지인 '동백분재'의 수세(樹勢)가 점차 시들게 되자, 이에 이청준 선생님이 2003년경에 그 치유를 위하여 고향의 호두박물관 분재실로 귀향한 인연을 계기로 '이청준 동백실'이 마련 되었다. 그간에 호두박물관을 다녀간 방문객으로 '김대중, 김용옥, 반기문' 등 여러 저명인사가 있었다지만, 동백분재에 얽힌 이청준 선생님의 사연은 각별하다 할 것. 동백나무는 북쪽에서는 살 수 없기에 그 북방한계선이 그어지는, 남쪽 해변지방의 나무이다.
1521년 장흥유배객 '신잠', 1801년 강진유배객 '정약용'은 남쪽지방의 동백을 처음 보고서 '산다화' 시를 따로 남겼다. 장흥출신 이청준 소설에서도 동백나무는 그 상징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남쪽 고향을 지칭하는 표징이 되고 있다. 진목리 마을에 동백나무 숲은 없었다지만, 소설 <귀향연습>에는 '(내가 귀향해야 할), 내 고향 동백골'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본디 동백나무숲이 있었다"는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윽고 그 주변이 벚나무, 아카시아, 플라타너스로 변하고 말았다"고 탄식하셨다.
<새와 나무>에서는 '떠돌이 유랑객 빗새'를 위하여 안식처를 제공하는 '고향의 나무', 도시로 나간 '아들 새'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나무'로 동백나무가 등장한다. 막내 누님에 얽힌,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동백꽃 누님>이라는 동화도 따로 남겼다. '진목리 참나무골'이 행정적 지명 이라면, '동백골 동백나무골'은 문학적 상징공간이 될 것이다. (진목리 마장골 고개로 넘어가는 북쪽에 '동백나무께'라는 동백숲이 있었다고도 한다)
2. 동백실 흉상
이번에 모시게 된 선생님 흉상을 계기로 고향땅에서 치유와 대화의 공간이 확장되기를 기대해 본다. 경주산 화강암석질의 석조흉상은
장흥출신에 전남대 미술학과 조소 전공의 '강태회' 작가가 그 정성을 다하였다. 동백실 중앙 쪽에 선생님 흉상과 동백분재를 두고 그 주변으로 의자 대용이 가능한 석조 둘레석을 배치하였다. 비록 비닐하우스이지만, 동백나무 문학회 모임이라도 만들어 이청준 문학을 회고하면서 선생님을 추념하는 자리로 삼을 수 있겠다.
3. 진목리 마을풍경과 생가
'진목리'는 선생님이 태어난 고향마을이면서 동시에 소설공간의 원체험 공간에 해당할 수 있다. 선생님의 소설은 '서울, 대처, 잔인한 도시'와 '남쪽 고향, 남쪽 사람'이 서로 대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북쪽과 남쪽을 오가던 이청준문학의 감상과 이해를 위하여 진목리 마을공간을 -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 '진목리 마을 해설사라도 배치할 법하다. 진목리는 <눈길>과 <늪길>의 출발지이면서 <인문주의자 무소작씨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1906년에 들어선 100년 교회 '진목교회'는 1970년경에 이르러 자리를 옮겨 석조건물로 신축하였다. 어린 이청준에게도 야학 공간이 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약180호에 이르렀던, 큰마을 진목리에는 여러 공동우물과 팽나무들이 있었다. 소년은 마을 팽나무에 오르면 안식과 평온, 상승감을 얻으면서도 추락의 불안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청준 소설에 반복되는 '출세와 상승에 따른 추락과 좌절의 공포감의 시발지일 수 있다. 여러 팽나무 중에 웃마을 쪽의 더 큰 팽나무는 결국에 밑둥이 잘려지고 말았다 한다. 마을에 상수도가 들어오면서 한 곳 샘물 만 남았다. 그 시절 마을 뒤편에 위치한 '서당'에 다녔던 이청준은 그 서당 사람들도 언급하였다. 이제는 '서당터'와 <소설 심지연/이상한 선물> 기억으로 남았는데, 그 서당 선생들을 기리는 비석은 마을길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목리 마을 사람들 각자의 사연은 어떠한가?
죽산안씨와 경주이씨 등 여러 성씨가 함께 어울려 산 곳이고, 딱히 특정 성씨의 집성촌은 아니었다. '6.25 백정시대'에는 '지하 밀실'을 몰래 두고 있던 집들이 있었다. 이청준은 그 소설공간에서 아마 진목리 사람들을 포함한 고향사람들에 대하여 '거인들 / 키 작은 자유인들' 이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예전에 살던 집은 어떻게 변했을까? 또한 '이야기꾼들'과 '섭섭이 할머 니(약산댁)'는 어디에 살았을까? 마을사람들은 물론 <바닷가 사람들>이지만, 논농사 사람들과 밭농사 사람들 삶은 어떻게 구별되었을까? 그 시절 좌우익은 화해를 하였을까? 진목리 마을주변에는 묘지터가 꽤 많다고 한다. 이청준은 그 사연들을 귀담아 챙겼던 것일까? 그 동네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에서 <아기장수의 꿈/ 신화>의 좌절을 눈치 했던 것일까? 예전 진목리 농악대의 명성이 대단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소멸되고 말았다 한다. 이청준이 <흰옷>의 말미에서 말했던 '장흥버꾸놀이 농악의 위로의 가락은 영영 살아지고 만 것일까? 이청준의 큰형이 목포에서 가져온 '축음기 음반의 노래 소리는 <해변아리랑/ 서편제>의 가락으로 합쳐 남은 것일까? 이청준은 진목리를 두고 이른바 소쩍새 우는 마을로 부르지는 아니하였다. 그 고향집 생가로 가는 골목에 피던 배꽃, 그 사립께 진섭이네 배꽃나무는 지금도 남아있을까? 배는 제대로 열리고 있을까?
4. 진목리 카페 '눈길'
진목리에 카페 '눈길'이 들어섰다. 마을회관 건물에 해당하며, 진목리 마을이 그 운영주체라고 한다. 드디어 카페 '눈길'의 등장으로 이청준과 이청준문학을 회상하는 회상의 공간을 하나 얻게 된 셈이다. 늘 시간에 쫓긴 나머지 이청준 생가만을 휘익 둘러보고서 바로 떠나고 말았는데 이제는 커피 또는 청태전 한 잔을 마시면서 이청준을 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이청준, 눈길'과 더불어 '이청준, 서편제/ 이청준, 이어도/이청준, 잔인한도시/ 이청준, 석화촌/ 이청준, 살아있는 늪/이청준, 목포행/ 이청준, 침몰선' 등등을 함께 말하면서 '진목리 마을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봄직도 하겠다. 이청준문학은 상당 작품이 '도중(途中)의 미학 또는 고향에 닿는 길'을 그리고 있다. '고향, 사향, 귀향, 탈향 의식이 그 성장시절과 도시생활을 그린 소설에 온통 뒤섞여 있다. 이제 드디어 카페 '눈길'이 등장했으니, 선생님 사진도 걸어놓고, 이청준 소설들과 작품집을 비치해놓고, 그 생가 방문의 소감을 남기는 쪽지판이라도 만들어두자.
<덧붙이는 말>
1) 진도출신 한국화가 '옥산 김옥진(1927~2017)' 이 2001년 봄에 그 동백분재 원목을 그림으로 그렸다. 사모님이 인사동으로 그 분재를 가지고 나가셨다고 한다. 그 동백분재 그림을 찍은 사진이 진목리 생가 안방에 걸려있다.
2) 동백실 분재는 그 수세(樹勢)를 위하여 원목분재와 접목분재로 나뉘어 관리되고 있다. 원목분재는 채광(採光)과 지기(地氣)를 얻기 위하여 분재실 옆쪽 노지(露地)에 바로 옮겨 두고 있다.
박형상 변호사 (前 중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