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이나 외웁시다
('기도: 영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수의 기도'를 읽고)
1.
기도에 열심이었던 때가 있었다. 동기는 다분히 세속적이었다. 첫째는 도피처가 필요했고, 둘째는 새로운 커리어가 필요했다. 지성이 부족했던 나에게 영의 문을 여는 것은 새로운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남보다 열심히, 많이 기도하다 보면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하고, 그 자체로 기독교 안에서 사용하기 좋은 힘과 무기가 된다. 그러나 힘과 무기를 가진 리더십은 쉽게 교만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나는 이 실수를 좀 일찍 경험했다. 덕분에 ‘기도’라는 숙제를 언제나 지고 살아간다.
2.
<기도: 영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수의 기도>는 “러시아 영성의 고전”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문학의 3대 걸작”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책을 번역한 오강남 교수는 “기독교에도 불교의 ‘염불’과 같은 종교적 수행이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고, 이 책을 통해 종교라는 것은 결국 “교리나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체험과 깨달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나누고자 한다.
책의 저자는 미상이다. 그러나 이 책의 나타나는 구체적인 경험의 묘사는 주인공을 저자라 생각하게 한다. 그는 1880년대 후반, 러시아 어느 시골 살던 청년이다. 교회에 갔다가 사도 바울이 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데살로니가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깨닫기 위해 20살의 나이로 순례의 길에 오른다. 다행히 큰 스승님을 만나 ‘쉬지 말고 기도하라’가 ‘예수의 기도’를 실천하는 것임을 깨닫고, 14년을 떠돌아다니며 ‘예수의 기도’ 통해 경험한 은혜를 서술하고 있다.
3.
‘예수의 기도’는 동방정교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짧은 기도문이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을 쉬지 않고 되풀이하는 것으로 그 연원은 기원후 3세기경 이집트나 시리아에 있던 ‘사막의 교부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명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들어가는 황홀의 경지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1054년, 동, 서 교회의 대분열 이후 이러한 훈련은 신비주의적이던 동방 정교회의 전통이 되었고, 서방 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 되었다. 이것은 헨리 나우엔의 <영적 발돋움>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소수의 영성가들 사에서 아름아름 실천되고 있다.
‘예수의 기도’는 끊임없는 기도이다. 예수님의 성호를 반복함으로 인간의 정념을 배제하고 단순하고, 깨끗한 정신의 상태로 들어가게 해주는 방법이다. 저자는 3천 번, 6천 번, 1만2천 번씩 순차적으로 기도의 반복을 늘려가며, 결국 언제나, 어디서나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채득한다.
“쉬지 말고 드리는 내면적 기도, ‘예수의 기도’는 입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호(거룩한 이름)를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동시에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어느 장소에서나 어느 시간이나, 심지어 자면서까지도 그렇게 하면서 계속 마음에 그가 임재하시기를 빌고 그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31)
‘예수의 기도’는 명상 기도이다. 기도문을 반복하며 예수님께 집중한 정신은 자기중심적 사고, 갈등과 불안, 초조 등을 넘어서게 한다. 여기서 해방감, 평화, 기쁨이 찾아온다. 이것은 명상의 원리와 같다. 저자는 명상 기도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평안과 행복 속에 살아간다. 사실 그는 왼팔을 사용할 수 없는 장애를 가졌다. 부모가 없는 고아에, 형에게 가진 것을 다 빼앗긴 빈털터리였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집도 절도 없이, 마른 빵과 소금으로 14년을 산 순례자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기쁨과 감사, 평안으로 가득 찬 천국 그 자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걱정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하루 종일 기뻤습니다. 제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모두 저를 사랑하는 사람인 것처럼 저에게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48)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는 태도이다. 일반적인 우리의 기도는 ‘탄원’을 가진다.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것을 얻으려 발버둥이다. 그러나 ‘예수의 기도’는 “쉬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하려는 열망이며 태도이다. 하나님이 목적이 된다. 심지어 철저하게 황홀경을 물리치고, 환상과 영적 체험에 한계를 둔다. 오히려 그것이 장애물이며, 장애물을 넘어서야 진정한 기도의 맛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깊어지는 하나님과 교제에서 ’내적 충만함’을 경험하게 한다.
“모든 육체적 감각은 그것이 아무리 신기하다 하더라도 마음 속에 움직이는 이 황홀한 은혜의 체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셈입니다”(214)
4.
기도는 다양한 모양을 가진다. 탄원기도, 관상기도, 중보기도, 감사기도, 회개기도, 침묵기도, 통성기도, 시편기도, 아베스의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 주님 가르치신 기도, 거기에 '예수의 기도"까지. 그 형태도, 방법도, 정의도 여러 가지다. 이 다양함 속에서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 교제에 있다. 어떤 기도도 일방통행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도는 다양해야 한다. 인간 사이에서 만남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과 만남이야 어떻겠는가. 기도는 '수리수리 마수리'와 같은 주문이나 하나님을 만나는 특정한 마법적 행위가 아니다.
때문에 '예수의 기도'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 행위가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 하고자 하는 저자의 열정이다. 러시아 시골 청년에게는 이것이 ‘예수의 기도’이었고, 로렌스 형제에게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었으며, 또 어떤 이에게는 책과 글이 될 수도 있다. 저자도 고백하듯이 각자의 달란트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기도에 어려움이 있다면, 묵주 하나 사서 열심히 ‘예수의 기도’를 외워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염불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지 모를 일이다.